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송영배 옮김, 이학사, 2001.
1. 간단한 소개
찰스 테일러는 우리에겐 조금은 그 이름이 낯선 철학자이다. 데리나나 푸코, 들뢰즈와 같은 탈현대철학자들의 이름과 저작명에 익숙한 현재의 상황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박찬국 옮김, 서광사, 1988)라는 제목으로 이미 출간된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선 "우리가 아직도 자유와 자연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낭만주의 시대를 재고하게 만든다"고 말하면서 낭만주의
시대야말로 근대의 진정한 출발임을 알려준다. 그의 이름은 푸코의 저술과 토론들이 포함된 <자유를 향한 열망>이라는 책에서 푸코의 토론자로도
한두번 이름이 언급되며, <나르시시즘의 문화>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쉬와 함께 "나르시시즘"이라는 문제를 자본주의적 민주제를 살아가는 구성원 개개인의 소외, 단자화 경향의 산물로 진단하고, 그 위기책을 타결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자로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히 인간으로서만 확인할 수 없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보다 직접적으로 그들의 부분적인 공동체 즉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공동체 등에 의해서 규정한다. 이에 근대의 민주제는 곤경에 빠져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앞에 인용한 책의 제목에서 보듯 유명한 헤겔 연구가이지만, 탈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탈현대철학과 더불어
대화하며 거기에 대해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는 일정한 문제점과 함께 흥미를 가져다 준다.
2. 원자주의/표현주의
그가 근대적 주체를 규정하는 방식은 일견 간단해 보이는 듯 하다. <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현대민주제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사회적 원자주의atomism"(79), 즉, 자신의 자아실현을 오직 자아
그 자체의 것으로만 간주하고, 자신의 자아 바깥에 있는 보다 큰 지평들,
가령 역사, 사회, 전통들이 요구해오는 가치나 규범들을 전혀 무시하거나
아예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독존주의의 성향에 빠져있다고 말한다. 흥미있는 것은 테일러가 도구적 이성의 지배가 팽배하고 분업화, 수단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자주의와 탈현대철학자들의 문화적 파괴/허무주의를 연관 짓는다는 것이다. 찰스 테일러는 [특히] 니체 이후로 현대인들의 삶이 미리 주어진 역사적, 전통적, 사회적 지평 내에서 "선악을 넘어선" 가치의 완전한 파괴를 주장하는 문화적 속성에 너무 친숙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일정한 다분히 미적인 자아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테일러는 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자아의 윤리학>을 대단히 미적인 자기창조라고 보며, 이러한 자아에 대한 앞의 원자적 성향과 변별되는 의미에서
그들 탈현대철학자들의 자아의 관념의 원천을 18세기의 독일 낭만주의자
헤르더의 저작을 고찰하면서 "표현주의expressivism"(83)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낸다. 표현주의란 원래 계몽주의적 인간관 즉, 인간을 "이성과 감성, 혹은 정신과 육체로 합성된 것으로 보는"(<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견해에 반대하여 "인간적 삶 자체가 표현적 통일체"이며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함으로써 "그 자신을 최고로 실현하는 것"으로 보는 자아관이다.(같은 책) 예술은 그런 의미에서 자아의 자기표현과 완성을 최고도로
실현할 수 있는 매체인 것이다. 근대의 인간이 현대의 기술관료적, 도구적 이성과 그 사회적 산물속에서 "자기들 안에서, 자기들 사이에서, 그리고 자연 세계로부터 분열되어 있다"(121)면, 낭만주의 시대의 표현주의의
자기 실현과 자아 창조의 관념은 [푸코와 같은] 탈현대적 사상가들의 미적 자아의 실현이나 윤리적 라이프스타일의 창조와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3. 자기 진실성
그러나 여기서 다시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authenticity)"(27)이라는 개념을 통해 탈현대적 표현주의(원자주의와 뒤섞여서 원자주의라는 사회적
존재양식을 전제해야 비로소 가능한 심미적 삶을 창조하는 표현주의)의
모순점을 정정한다. 자기 진실성은 테일러의 간략한 정의를 빌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이상"(27)인데, 이의 원천은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직감, 즉 도덕 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 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의 사유"(41)에 있다고 본다.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설명으로 시작되는 자기 진실성이라는 관념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성선설과도
비슷하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저 오랜 도덕적인 "다이몬"과도 같이 내면에서 울리는 "마음속의 목소리"(같음)이다. 하지만 자기 진실성은 비단
자기자신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A.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가운데,
누구나 나와 비슷한 [자기 진실성의] 관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동체를 더불어 만들어 문화와 보다 이성적인 사회를 만들어내고, B. 설혹 나와 다른 관념을 지닌 사람이나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설득 및 동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하며, C.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공동체 내부에서 질적인 차이를 가진 개개인들의 변별성을 존중(내가 너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이성적인 너그러움과 아량을 발휘하는 것)하는 역할도 잃지 않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자기자신에게 충실[해야/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충실[할 수 있다/해야 한다]고 보는 오래된 이성의 능력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라는 자기 진실성의 이상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게 다가오는 관념은 아니며(최근 국내의 한 문학평론가도 자신의
책에서 테일러와 테일러가 인용하는 라이오넬 트릴링의 <성실성과 자기
진실성Sincerity and Authenticity>을 참조하여 "진정성(자기 진실성)"이란 관념을 통해 문학작품에 나타난 문제적 개인의 삶에 대한 진실함과 그것을 부정하는 사회 속에서의 그런 개인들의 연대, 그리고 주인공과 그
밖의 인물들이 소망하지만 희미하게 어른거릴 수 밖에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소망을 서술해 나간다.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01.)또한 가치의 무정부주의와 자아의 해체, 그리고 타인을 오로지 나와의 "차이"라는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상대하려는 너무나 지배적이고 익숙한 탈현대적 사회를 살아나가는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 하다.
4. 섹슈얼리티와 하루키-취향과 선택의 문제인가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취향"과 "선택"을 중심으로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일반화하는 현대사회의 개인들의 표준적인 자아 관념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콜라 대신 사이다를 좋아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와 타인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와 더불어 제기되는 자아의 실현과 타인의 자아의 실현, 거기에서 문제되는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와 마구 혼동한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예를 변형하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이야기 할 때, 보통 그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건 그 사람들의 성적 취향이고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해"라는 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말을 들어보자.
일단 각자의 선택 자체가 어떤 행위를 결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근거라고
본다면, 따라서 성적 취향의 선택(필자 강조임)이 이런 [개개인들의] 기호(嗜好)들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면, 성적 취향의 차이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본래의 목표는 부지불식 간에 좌절되고
만다. [다양한 선택들 사이에] 이제 차별이란 아예 없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되었던 차별성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린 셈이다./동성애의 가치는 동성애와 이성애에 대한 성적 체험의 실제적 성격과 삶의 문제를 고려해서
다르게, 좀더 경험적으로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동성과 이성의 체험과
생명에 대한 실제적인 본성이 참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논의는 우리가 선택한 것은 무조건 옳다는 근거로부터 선험적으로 단정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56)
테일러는 그런 의미에서 가치들에 대한 "온건한 상대주의"(제 4장)의 관념이 현대사회에 지배적인 것이라 보며 그것이 또한 개인이 자기 실현에
대한 고립된 가치추구만을 지향하는 유아론적이며 원자적 삶 속에서 그들이 속해 있는(실제로는 기능적 역할로 축소/소외되어 있는) 기존 사회에
비해 더 나은 가치나 윤리를 지향하는 새로운 대안들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을 자신의 소설 소재로 삼거나 천황제나
과거의 일본사에 대해 반성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의 소설 속에서 혹은 공적인 인터뷰 속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경우를 두고 그 문제를 단지 무라카미 자신의 [민주적인?] 취향과 선택의 권리로 돌려버리는 것은, 하루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하며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현실적인 설득력이 없는 발언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말한다면, 그건 가령 작가가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publish) 행위가 공적(public)인 행위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따위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하루키가 한국에 대해 오직 자신의 출판의 문제에 한해서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이미 한국이라는 공적이며 현실적, 역사적인 상황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가 이 문제에 대해 만일 둔감하다면, 그는 그야 말로
비난받아도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이에 대해 거듭 침묵한다면, 최소한 누군가는 이런 문제를 일깨워 줄 의무(그렇다, 의무!)는 충분히 있으며, 그리고 작가 자신은 자신의 책을 출판한 충분한
권리와 함께 독자들이나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작가로서의 최소의 의무는
성립되게 마련이다. 시마다 마시히코나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것처럼 하루키 소설에서 천황제가 형성되는 일본 사회/역사의 내러티브 구조와 유사한 그 무엇이 발견된다면, 이는 자칭 무국적 세계주의자이나 동시에 천황제라는 심층 기호를 작품속에 숨기고 있는(혹은 그렇다고 믿는) 무라카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에서만 추출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한 일본의 <근대의 초극론자들>이
서양적인 근대를 추수하면서 그것을 철저히 비판한 포스트모던한(서양적
근대에 대한 반발이라면 일단 포스트모던한 것이라 보아도 좋다) 세계주의자들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서양적인 것에 대해 맞서 싸우자고 한 동양 담론의 설파자들이며, 그리고 더 들어가 모든 동아시아 문화가 집중된 "아시아의 저수지" 일본을 찬양한 국수주의자들이자, 거기에서 마지막 정점으로 "어머니(일본회귀)"인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천황제
신봉자들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좌우파 할 것 없이 당대의
가장 걸출한 소설가, 비평가, 시인, 철학자들이 거의가 그러했었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그것은 다른 형태로 현재에 와서도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의 작품에서 그런 역사가 반복된다/그렇지 않다고 여기서 결정지을 수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역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내러티브 분석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건 하루키와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일본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