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화과자가 들어오게 된때는 일제강점기시기이다. 1910년대 초에 일본상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장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화과자가 보급되었다. 그때에는 지금과 같은 화과자 보다는 만주(饅頭:만두), 센베(煎餠:전병), 요깡(羊羹:양갱), 요코시(밥풀과자)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일본인들은 각 지역의 특산물로 알맞는 제품(천안 호두과자 등)을 개발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때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일본 또는 국내에서 화과자와 양과자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한국인들이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 한국에 들어온 경로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있기 전까지 만주, 센베, 요깡, 요코시, 이찌몬지등을 만들어 판매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부산지역에서 인기 있는 제품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과자(다과)점들이 생겨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 화과자는 고급상품으로 발전되었으며 화과자의 전성기를 맞게된다. 그리고, 일부 기술인들은 일본에 유학하여 고급 화과자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여 네리끼리, 상생, 무시모노(찜떡), 등 화과자의 품질이나 모양을 향상시켰으나 너무 단맛이 강하고, 양과자가 도입되어 식생활 문화가 바뀌면서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잃고 배고픈 시대에서 먹는 것을 즐기는 시대로 전환되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소강상태에 이른다. 이 후 성인병과 건강을 생각하는 1990년대에 대형제과점과 백화점등에서 화과자의 단맛을 줄이고 화과자 성분의 저 칼로리를 장점으로 내세우고 고급화시켜 인기있는 제품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의 화과자 역사
초기의 화과자(和菓子)는 일본식 과자다. '일본식(풍)의' 라는 뜻을 갖는 접두어 '和'가 붙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과자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화과자는 “나라 헤이안” 시대(710~784년)에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당과자(唐菓子)시대로 볼 수 있다. 이때에 중국 문화가 전파되면서 불교와 함께 당과자가 일본에 들어왔고 이것이 그때까지의 고유한 일본과자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감미료로서 설탕이 아직 보편화되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설탕은 약용으로 쓰였고, 과자의 재료로는 꿀과 엿을 사용하였다. “무로마치 시대”(14세기 초~16세기 중엽)는 점심시대라고도 불리어 진다. 이 시대의 특징은 아침과 저녁밥 사이에 점심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식사 습관은 두끼에서 세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츠 모모야마”시대부터는 다도(茶道)가 성행하면서 차에 곁들이는 생과자가 발달하였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는 규슈지방에서 일부의 설탕을 자체 생산하였으나 설탕량은 풍부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에도”시대까지 유럽과 교류가 한창 이루어지면서 들여온 남만과자가 일본식으로 동화되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화과자의 대표적인 만주(饅頭:만두), 센베(煎餠:전병), 요깡(羊羹:양갱), 요코시(밥풀과자) 등이 그러한 예가 된다. 한자 문화권의 옛 문헌 속에서 과자라는 한자는 菓子와 果子,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옛날에는 과자가 실과(實果)와 조과(造菓)의 총칭이었다. 실과는 한자 뜻 그대로 진짜과일, 천연 나무 열매를 가리키고, 조과는 만든 과일이라는 뜻으로 실과를 이용한 식품(과일을 찌거나 말린 것)을 뜻한다. 바로 이 조과가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과자로 정착하였다. 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과일이 과자의 일부로 취급되었다는 것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옛날 과일이 지금과 같은 과자의 몫을 해낼 수 있었던 까닭은 원초적으로 단맛을 좋아하는 인간의 입맛 때문일 것이다. 설탕이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한 '에도' 시대에 비로소 과일과 과자가 분리되었다. 그러나 과일을 여전히 단맛 나는 기호품으로 취급하여 '和菓子'라 부르게 되었다. 결국 화과자의 기원은 과자의 기원인 셈이다. 화과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설탕이 보급이 늘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과자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루게 해 줄 바탕이 된 설탕이 널리 보급된 시대가 바로 '에도' 시대였던 것이다. 설탕의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단맛의 일본과자가 급속히 발달되었다. 당시 동경에는 막부가 교토에는 황실이 있어서 두 개의 문화가 대립형태로 발달하였다. 그래서 화과자도 ‘교토식’ 과자와 ‘에도식’ 과자로 나누어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의 당과자는 보존력을 높이기 위해 주로 불로 구운 월병과 양(洋)의 기름으로 굳혀 만들어진 양갱 등이 대중화되어 있었으나 일본에서는 양 대신 해초인 우뭇가사리에서 추출한 한천을 이용 점성이 뛰어난 탄수화물로 응고시켜 개발을 하였다. 화과자는 보통 찹쌀떡과는 차이가 있는 과일가루나 앙금배합에 의한 제조물 즉 상생(上生:최고수준)화과자 및 양갱, 만주를 포괄하여 가리킨다. 화과자의 생명은 앙금이다. 즉 앙금의 상태에 따라 화과자의 맛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백앙금과 적앙금에 설탕을 더하고 여기에 다른 여러 재료를 첨가하여 색다른 앙금을 만든다. 일본 역시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피는 꽃이 다르고 계절마다 나는 곡물과 과일이 다르다. 이렇게 사계절의 변화에 젖어 살아온 일본인은 자연을 본 뜬 화과자를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