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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광산 김씨의 위상 (3)
文 秀 鎭(문학박사, 한국사)
김집(1574~1656: 28世)은 한양 정동 황하방(구대법원)에서 태어나니 그곳에서는 사계, 신독재, 동춘당(송준길 : 외손)이 한곳에서 태어나 후세사람들이 그곳을 세분의 문묘배향 현인이 탄생한곳이라 하여 삼현당(三賢堂)이라 했다.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8살에 송상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후에는 송익필의 문하에 나가 글을 배웠으니 구봉 송익필은 사계 부자의 스승이 되었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을 지내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76세 때에는 이조판서를,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항상 학문에 뜻을 두었다.
위로 율곡의 학문을 받아 예학을 일으킨 아버지를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1883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반(金槃 1580~1640: 28世)은 사계의 셋째아들로 호는 허주이고 허주공파(虛舟公派)의 파조다. 송익필의 문인으로 세거지는 연산이다. 광해군 때에 초야에 은거하다 인조반정 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다가 공주에서 실시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예조좌랑·사간원 정언·홍문관수찬·부교리를 거쳐 시강원문학·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우부승지·대사성·부제학을 역임하고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한 뒤 대사성·병조참판·대사헌·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益烈·益熙·益兼·益勳·益煦·益炅의 6남을 두었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19세기 광산 김씨 문과급제자 중 3분의 1 이상이 허주공파에서 나온 것만 봐도 그 세를 알 수 있다. 이원명,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연구』
나. 예학의 실천 -폐모론 반대
예학에 있어서는 광산 김씨만큼 공헌한 문중이 없다. 김장생이 예학의 태두로서 예에 관한 저서로 앞서 인용한 『상례비요』 4권을 비롯, 『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 등을 저술하여 이름을 날리고, 그의 아들 집이 이를 이어 발전시켰다. 조선의 예학은 이들 부자에게서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외에 광산 김씨는 예에서 벗어나는 일은 참고 넘기질 않았던 것이다.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한 인물이 광산 김씨 중에 아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김지남(25세)은 사간원의 사간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폐위할 때 불가론을 이론적으로 논책했다.
김위남(金偉男 1563~1618: 25세)은 충정공, 약사의 후손이며 호는 요산(樂山)으로 이이첨 등의 간신들이 백관들을 협박하면서 의견을 말하도록 하는 자리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으나 "이 일은 신하된 자로서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래도 결행을 하니 그 후부터 식음을 전폐하면서 그 때부터 이름을 위남이라 하고 자결하고야 마는 절의를 보였다.
김효성(金孝誠 1585~1651: 27世)은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간신배들을 처형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오랜 외직생활에도 선정을 베풀어 청빈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김대덕은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다.
김태우(金泰宇: 24世)는 간신배들이 폐비의 일로 청류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도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보답하랴” 하고 김효성과 더불어 이이첨·정조·윤인 등 3인의 머리를 베고 이원익을 불러들일 것을 상소했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김영구(金永耈: 28世)는 정조·윤인 등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으로 유폐시켜 폐모론을 주장하니 이때 홍무적과 같이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위의 두 사람을 주살할 것을 주청하였다.
추담 김우급(金友伋: 26世)과 시서 김선(金旋: 26世)도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고 향리로내려와 학문에 매진하였다.
광산 김문은 예학에 이론적으로 밝기만 한 것이 아니고 이를 실제 실천하였음이 입증된다.
다. 충의열사 문중
김덕령(金德齡 1567~1596: 31世)은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였다.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과 연합하여 전라도 경내로 들어오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융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이후 곳곳에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항상 철퇴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무게가 100근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 가장 뛰어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지만 강화가 진행되고 뜻대로 되지 않아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하여 군졸의 불평을 사기도 하였다. 이몽학의 난에 내통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광주 지방에는 김덕령 장군의 용맹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많은 설화와 전설이 전하고 있다. 후에 신원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현재 광주의 충장로는 이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서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까운 인물이다.
이외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인물이 광산 김문 중에는 많다. 이는 전라도가 왜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광산 김씨들이 당시에 지도적인 인물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김상양(金尙養: 27世)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다.
김득남(金得男: 28世)은 광해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때는 분실된 어보를 찾아 주정대신에게 밀납하였으며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공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철곶첨사로서 세자 일행이 강화도로 피난갈 때 호송하던 중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같이 가던 선비와 부녀자들이 많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고 부평에 있는 계양산 밑에 까지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포로가 되어 가던 무리들을 찾았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달아나던 적을 계속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강화도의 충렬사와 무안의 묘충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의이다.
김익희(金益熙 1610~1656: 29世)는 김반의 둘째 아들로 호는 창주이며, 아우 김익겸과 함께 청나라의 용골대 등과 귀국한 “이곽·나덕헌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상자에 넣어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 한다.”고 상소를 하였다. 호란 중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싸우면서 척화를 주장하고 양관대제학을 지낸 분이다.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은 어머니인 연산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싸우다가 강화도가 점령당하자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의 남성루에서 자폭 순절하였다. 부인 해평 윤씨는 윤두수의 4대손이며, 윤방의 증손녀이고, 선조의 사위인 문목공 윤신지(尹新之)의 손녀, 전라도 관찰사·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윤지(尹墀)의 딸로서 부덕을 겸비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신사임당과도 비길만하였다. 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시어머니인 연산 서씨와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잉태 중 만삭이었고, 큰아들 만기도 다섯 살이라 죽지 못하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둘째인 만중을 낳았다.
당쟁과 광산 김씨
가. 서인- 노론 문중
당쟁에 있어서 광산 김씨는 전반적으로 서인이며, 노론에 속하였다. 김장생이 율곡의 제자이고, 기호학파의
수장으로 그 아들 김집이 이었으며 송시열과 송준길이 회덕, 오늘날의 대전출신으로 연산의 김장생 부자에게
배웠다. 율곡의 제자들이 서인에 속하였고, 이들 중심으로 학파, 당파를 형성하였다. 사계부자는 정쟁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후손과 제자들은 심한 당쟁에 휘말렸다. 경신대출척[경신환국] 이후 신임사화까지
광산 김씨가 당쟁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이후 당쟁과 광산 김씨로서 관계된 인물들을 알아본다
김익훈(金益勳 1619~1689: 29世)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 의금부 도사부터 시작하여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가 세워졌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는 여러 벼슬을 거쳐 경기총융사 겸 어영대장을 제수받았다.
1674년(현종15) 예송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680년 김석주의 주도로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들을 숙청하는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 2등 광남군(光南君 정2품)을 봉작 받았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특히 김석주 등과 함께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89년 어영대장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로 유배되었으며,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다.
1682년 남인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파의 협력에 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 등의 노장파는
두둔하고, 윤증의 소장파는 대립하여 분당하게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김만기(金萬基 1633~1687: 30世)는 김익겸의 아들로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이다.
다섯 살 때 병자호란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인 김익희에게 수학하다가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수찬․정언․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령부사에 승진되었다.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공을 세워 보사1등공신이 되었다. 노론의 과격파로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삭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사후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이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호가 서포(西浦)이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각종 벼슬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숙종에게 장희빈에 대한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선천과 남해 등지로 유배되었다.
소설 『구운몽』을 썼는데 이는 유복자로 병자호란 중에 배안에서 태어난 자신이 효도를 못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고, 『사씨남정기』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를 빗대어 써서
왕이 후에 이 소설을 보고 감동하여 인현왕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만기의 아들 죽천 김진규(金鎭圭: 31世)와 그 아들 건암 김양택(金陽澤: 32世)은 어느 문중에도 없는 3대
대제학을 배출했다. 경대 김상현(金尙鉉: 36世)과 하정 김영수(金永壽: 37世)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7대제학이
사계선생 후손에서 나왔다.
김진구(金鎭龜 1651~1704)는 만기의 큰아들로 호는 만구와(晩求窩)로서 숙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사환국에 의하여 김석주와 함께 가혹하게 남인을 숙청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풀려나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병․예․형․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어영대장․수어사도 겸직하였다.
광은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헌(景獻)이다.
김진규(1658~1716)는 만기의 아들로 호는 죽천(竹泉)이고 숙종조에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거제도에 유배되었으며 갑술옥사로 복관되어 교리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21년(1695) 소론인 남구만에 의하여 척신으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곧 복관되었다.
우부승지가 되었을 때 윤증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되었다.
숙종 33년 병조참판에 이르렀을 때 소론이 집권하니 덕산으로 유배되고, 4년 뒤에 다시 양관대제학으로
복관되고 2년 뒤 예조판서․좌참찬으로 되었다가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정치적으로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아버지가 만든 광산 김씨의 족보를 증보하여 『죽천보』를 완성한 주인공이다.
진구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정변에 휩쓸려 양극을 경험했다.
큰아들 북헌 김춘택(金春澤 1670~1717: 32世)은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이름이 높았는데 훈신의 적장자로
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인현왕후를 복위하는데 앞장서서 갑술옥사를 일으켜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로 복관되었으나 노소분당으로 무고를 당하여 다섯번이나 영해로 유배되고 세 번이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으나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둘째 김보택(金普澤 1672~1717)은 호는 척재(惕齋)로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언․삼사의 요직을
지냈고, 희빈 장씨 처벌의 경중을 놓고 소론 남구만, 윤증 등의 죄를 논박하였다. 노론의 선봉으로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문장은 물론,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셋째 김운택(金雲! 澤 1673~1722)은 호는 백운헌(白雲軒)으로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참판이 되었다.
신임사화 때 무고로 영변에 유배된 뒤 다시 반역한다는 목호룡의 무고로 장살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부조의 은전을 입었다.
넷째인 김민택(金民澤 1678~1722)은 호는 죽헌(竹軒)이고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로서 신임사화 때
무고로 연루되어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혹형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다.
김제겸․조성복과 함께 신임사화 때 죽은 삼학사로 일컬어진다.
다섯째인 김조택(金祖澤)은 경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나
신임사화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영조 때 신원되었다.
여섯째인 김복택(金福澤 ?~1740)의 호는 묵헌(默軒)이며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조에 사면되어 영휘전 참봉으로 부임하였다가 무고로 옥사하였다. 영조조에 신원되었다.
일곱째 김정택(金廷澤)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위도로 유배되었다.
여덟째 김연택(金延澤)은 신임사화에 무고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즉위로 모두 신원되었다.
진구의 아들 8형제가 이미 죽은 둘을 제하고 모두 신임사화에 죽거나 화를 입었다.
신임사화에서 광산 김씨의 택자, 재자 항렬들이 무수하게 희생되었다.
김양택(金陽澤1712~1777: 32世)은 진규의 아들로 호는 건암이며 영조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헌납․보덕을 거쳐 원손사부․부제학․대사성․대제학․우의정․영의정까지 이르렀다.
영돈령부사로 타계하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진상(金鎭商 1684~1755: 31世)은 호는 퇴어(退漁)이며 익훈의 손자이다. 숙종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수찬․지평을 지내다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무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이조정랑․부제학 등의 관직을 거쳐 대사헌․좌참찬에 이르렀다.
영조 13년(1737)에 평장동에 유허비를 세울 때 동국필언에 올라있는 명필이었기에 그 비문을 쓰고,
부조의 은전을 입었다.
김위재(金偉材: 33世)는 김운택의 아들로 호는 미암이며 신임사화 때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영조 때 사면되어
향리인 서산으로 귀환한 후 한강을 건너지 않고 학행이 뛰어나 감역과 부솔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영조 말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 시대에 광산 김씨 일문은 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노론 측에서 활동하고 영욕을 함께했다.
김상복(金相福 1714~1782: 33世)은 한성판윤 원택의 아들이며 호는 직하(稷下) 또는 자연(自然)이고 인조의
외손의 후손이다. 영조조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사서․랑․보덕․부제학․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1763년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772년에 영의정에 오르는 등 14년간 정승을 지냈다. 홍봉한의 정치적 동기이며,
영조의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1775년 당시의 권신인 홍인한을 비난하는 쪽이었으나 홍인한․정후겸 등이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음으로써
세손을 해치려 한다.”는 서명선의 소에 대한 평가를 영조로부터 지적받고 모호한 답변을 하여 정조가 즉위하자
바로 경상도 평해로 정배되었다가, 곧 공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리자 고향인 결성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평소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순조조에 복관되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