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꿈 / 최영미
어떤 꿈은 나이를 먹지 않고
봄이 오는 창가에 엉겨붙는다
창 위에서든 바다에서든
그의 옆에서 달리고픈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꿈은 멍청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
어떤 꿈은 은밀해서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어떤 꿈은 달콤해서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대자마자 사르르 녹았지
어떤 꿈은 우리보다 빨리 늙어서,
가을바람이 불기도 전에
무엇을 포기했는지 나는 잊었다
어떤 꿈은 나약해서
담배연기처럼 타올랐다 금방 꺼졌지
겨울나무에 제 이름을 새기지도 못하고
이루지 못할 소원은 붙잡지도 않아
잠들기도 두렵고
깨어나기도 두렵지만,
계절이 바뀌면 아직도 꽃잎이 떨어진다우
봄날의 꿈을 가을에 고치지 못할지라도
*최영미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중에서
일전에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김예슬씨의 대자보 글이
내내 마음속에서 맴돈다.
25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이라고 했다.
학생이기를 거부한지라 학생이라는 호칭도 낮간지럽고
예슬양 이라는 호칭도 어색해서 예슬씨라고 부르기로한다.
처음에 인터넷뉴스에 머릿글만 보고는 그냥 치기어린 행동이겠거니
지나쳤다가 대자보에 대한 반응이 커지는걸 보면서
예슬씨의 대자보를 가슴에 새겼다.눈으로 읽었지만
글자 한자 한자가 심장에 새겨지면서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끼게도 하고
한편으로는 흐릿하지만 희망을 떠올리게도 했다.
깊은 성찰끝에 나오는 말이나 행동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생명력을 갖는법이다.25살이란 나이가 통찰력을 갖기에는
아직 어릴수도 있지만 깊은 성찰끝에 내린 행동을 가볍게 생각할 수도 없다.
예슬씨의 선언후에 그에게 동조하는 20대와, 그들에게 절망감을
물려줬다는 자책감에 빠진 기성세대들은 예슬씨와 20대들이 가리키는
지점에서 희망의 단초라도 얻을 고민을 시작하지만,대자보를 철거하고
댓글들을 차단하는 대학당국의 예에서 보듯이 예슬씨의 선언이 불편한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은 여전히 예슬씨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근래에 무기력감에 빠져 헤매고있는 중인데,내 개인적 환경의
어려움도 있지만,내 20대의 고민들과 실천이 아무 의미가 없는게 아니었을까?하는
회의감에서 빠져나올수가 없기때문이었다.
그러다 예슬씨의 대자보를 읽고는 다시한번 심장을 찌르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우리 사회는 7,80년대의 구조적 한계에서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예슬씨의 대자보가 확인시켜주고 있는것이다.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리고 그렇게 많은 아우성 이후에도 흠집하나 내지못한
이 괴물같은 실체 앞에서 회의감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했지만 사람이 정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지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예슬씨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있다.
그의 대자보는 괴물같은 시대의 모순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대척점에서 인간다움을 잃지않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기성세대들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다짐이 희미해져 갈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의 고민과 결단은 동시대를 살아갈 또래들에게
촛불같은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꿈을 꾸고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다독이며 사는게
사람의 삶이라고 믿는다.
예슬씨의 고민은 그래서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회의감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주제에 힘이 있을리 없지만
예슬씨의 삶이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사람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따뜻함이 묻어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