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21번 국도(17:30) ~ 천안IC(18:00) ~ 경부고속도로 ~ 수원(20:00)
④ 탈출로 : 우물목고개, 웃량리고개
[4-2] 산행의 실제
5. 산 행 기
[1] 산 행 전
지난 1월 20일 강원도 강릉에 있는 『제왕산』 산행 후 반달 만에 가는 산행인데도 산행 한지가 꾀 로래된 것 같다. 방학 중이라 다소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인근 산이라도 자주 오르내릴 법 한데도 평소 직장에 다닐 때보다 더 게으름을 피워 광교산 헬기장 한 번 가지 않고 금북정맥 3 구간에 참여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엽돈재에서 출발하여 위례산, 성거산, 태조산, 취암산을 끝으로 산행 거리 총 21.2km를 걸어야 하는데 준비도 부족하고 오래만에 해 보는 장거리 산행이라 은근히 걱정이 된다.
산행 전날까지 다음 까페에 참가 신청을 한 회원들의 動靜을 살펴보니 최종적으로 7명 참여다.
♣ 산타 : 언니야 빨리와. 나 돈계산 못하는데 대행하느라 무지 힘들어. 07.02.02 21:39
♣ 산그리고 준 : 오클랜드에 총각이 많은가봐??????07.01.30 11:42
♣ 산타 : 참석... 대장님 뉴질랜드에서는 마오리족 원주민이 코비비면서 인사해줘요. 난 그 총각 인사 피하느라 도망쳤는데 아무래도 숭애언니 코 비비다 눈 맞은거 같아요. 언니 마오리족 총각이랑 오는 거지? 혼자 나머지 공부 하려면 힘들텐데 걱정없겠다. 회장님이랑 윤사장님 골드미스 많이 기다리시는데07.01.31 23:36
박넝쿨에 박을 조롱조롱 달고 다니듯 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했던 박사장, 발목을 접질려 가지못해서인지 대원들의 참여율이 저조하다(산행중 산타님이 한 말).
산행 전날, 일기예보는 봄날 같이 화창한 날씨라고 한다. 다행이다. 전날(2월 4일) 밤 9시를 넘겨 간식을 준비하고 배낭을 챙겼다.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면서도 잠이 오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체널을 여기저기 눌리며 시간을 보내다 12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었으나 자다 깨기를 여러 번 반복을 했다. 다시 눈을 떠 보니 03시 30분, 더 눈을 붙일 수 없는 시간이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배낭 짐을 다시 간추리는데 윤사장님 전화다. 04시 45분까지 아파트 정문에 도착 하겠단다.
윤사장님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고, 연무동 월드컵경기장 경기도 여권 민원실앞 도착해 보니 정해진 시간(05 : 00시)에 모두 도착이다. 오늘은 산악대장과 윤사장님이 차를 운행한다. 3, 4명으로 분승하고 바로 출발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영동,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금년에는 경부고속 도로를 달려 충청남도의 땅을 일년 내 밟아야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는데 많은 걸음 걸이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2] 엽돈재 가는 길
05 : 35분, 안성 TG를 빠져 나와 2, 3분 진행하다 앞서가던 대장의 차가 방향을 틀어 불이 환하게 켜진 음식점 앞에 차를 멈춘다. 「용인 토종 순대국」집이다. 순대국밥에 김치와 깍두기 찬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엽돈재로 이동을 했다. 07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임에도 날이 채 밝지 않아 랜튼을 켜고 산행을 해야할 것 같다.
청룡저수지를 지나 굽이굽이를 돌아 『엽돈재』에 도착(06 : 57분경)했다.
[3] 산행 출발 정경
이른 아침이고 고개 마루인데도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이 立春이기 때문인가? 立春은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음력(陰曆) 정월(正月) 절기로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 된다. 입춘 기간에는 동풍(東風)이 불어 언 땅이 녹고, 동면(冬眠)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어류(魚類)가 얼음 밑을 다닌다고 한다.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등산복 내피도 잘 접어 배낭에 집어넣고 스틱도 적당한 길이로 맞춰 산행 채비를 했다.
[4] 부수문이 고개
07 : 00시 엽돈재 출발하여 가파른 절개지 능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忠淸北道 生居鎭川과 京畿道 安城市 금광면을 뒤로하고 忠淸南道 天安市 立場面에 진입을 한 것이다. 이제부터 「차령, 봉수산, 백월산, 수덕산, 가야산, 오서산, 팔봉산, 태안반도의 끝 안흥진」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忠淸南道의 秀麗한 京觀을 接하게 된 것이다.
※ “마루금”이란?
「마루」는 「산마루」를, 「금」은 「선」을 뜻하는 말로 「마루금」은 산마루(산능선)끼리 연결한 선
마루금이 절개지 능선에서 숲 속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걸음이 빨라진다 싶더니 점점 속도를 더하며 단숨에 峰 하나를 오른다. 459.1봉인가. 삼각점이 있다고 하는데 가는데 급급하여 확인도 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급하게 오른 峰이라 숨도 가쁘고 다리도 뻐근하다. 모처럼 장거리 산행을 하기 때문인가? 초반부터 급히 서두르는 것이 심상치 않다. 걸음은 뒤로 쳐지는데 마음은 선두를 따르느라 급하기 이를 데 없다. 더하여 응달진 곳에는 殘雪이 덮여 있고 길은 얼어 오름 길, 내림 길 모두 만만치 않다. 스틱으로 버티느라 팔까지 아프다.
동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낙엽 쌓인 길도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해가 금방이라도 능선으로 솟아오를 것 같다. 적당한 장소에서 日出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 산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아나가도 視野가 툭 터진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묘 1기(07 : 35분)를 지나고 또 하나의 묘(07 : 40분)를 지나다 보니 동녘 하늘의 이미 붉은 기운은 사라지고 환한 빛이 나무 사이로 비친다. 결국 해돋이를 볼 수 있는 福은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07 : 45분, 절개지를 내려서니 「배티성지 ← ○ → 성거산 성지」방향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포장 도로가 그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가 놓여져 있고 태극기와 새마을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도로 건너편에는에서 먼저 도착한 대원들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부수문이 고개』에 도착한 모양이다.
『부수문이고개(부소문이고개, 부소문령(扶蘇門領)』를 『부소문』이라고도 하는데 운용리(천안시 북면)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백제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 하였을 때 이곳에 부소문(扶蘇門)을 세웠다 하여 『부수문이고개』라고 하며 『소나무 산 고개』라는 뜻도 된다고 한다.<출처 : 천안시 북면 운용리 지명유래>
[5] 위례산
후미로 더디 도착한 때문인가? 땀을 닦고 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르는데 먼저 도착한 팀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부수문이고개 절개지 좌측 넓은 길로 들어서니 「위례산 方向 標識木」이 세워져 있다. 완만한 넓은 오름 길로 이어진다. 길 아래로 묘 5기가 나란히 있는 곳을 지나 峰에 오른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좀더 오르니 길은 山峰으로 이어지다 右側 산 중턱으로 꺾여 나간다(08 : 20분). 산행 시작 때 뛰는 걸음에 지쳐서인가? 山峰을 오르지 않고 비켜 나가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평소 산행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다. 아니면 自慢心이 가져다준 産物이거나 ---.
08 : 30분,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4거리에 도착했다. 「위례산 0.3km, ↔ 입장(양대리) 2.1km, 부수문이고개 1.9km,↑↑」. 진행 방향에서 左側으로 빠져 6분 여를 진행하니 작은 돌탑이 있고 삼각점도 설치되 있어 위레산 정상인가 했는데 정상은 4분 여를 더 올라서야 했다.
08 : 36분, 『위례산』정상 도착.
비스듬하게 세운 화강암 사각기둥에『위례산 해발 523m』라 새긴 정상석과 태극기 그리고『위례산성 정상 해발 529.5m 위례산악회』표지판(노란색 바탕)이 세워져 있고 『천안 성거산 위례성』안내판과 이정표도 세워 놓았다. 이정표에는「부수문이고개 2.4km / 우물목고개 2.4km / 기로리 3.3km」라 표시 되 있다.
그리고 성거산 위례성 안내문에는『 천안 성거산 위례성 / 天安 聖居山 慰禮城 / 충청남도 기념물148호 / 소재지 : 천안시 북면 운용리 소재.
천안시 북면의 위례초등학교에서 '군단이' 부락을 지나 '장생이'라고 하는 지역의 뒷산에 위치하는 표고 524m의 산성에 축조된 山頂式의 산성임. 축조방법은 자연지세가 급한 지역은 그대로 성의 내부를 削土하여 성의 외벽을 補築하였고, 산세가 완만한 지역에는 석축으로 함. 성의 主向은 西向으로 직산에 위치한 사산성과 가시거리에 있다. 門趾는 東과 西에 남아 있고, 또 2.2×3m 규모의 우물이 1개소 남아 있다. 이 성은 출토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되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자료에는 위례성은「백성들을 전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산성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가 만주지방의 고구려를 떠나 이곳 직산까지 와서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곳으로 현재의 직산면과 성환읍, 입장면, 성거읍 지방이었고 위례산성은 난시소용의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또 온조왕 13년(BC 5)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城 안에는 『우물(위래성 우물)』이 하나 있는데「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이 우물로 나와서 왕 노릇하다가 처남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하며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구유처럼 생긴 『구수바위』는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 할 적에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비 받침이라고도 한다. 현재 반쪽밖에 없는데 반쪽은 굴러 내려 고랑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믿거나 말거나)
위례산 정상석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도 하고 천안 들판과 첩첩이 이어진 산들(만뢰산)을 조망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이다. 『유성농장』 방향 표지판이 있는 삼거리(장생이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 08 : 48분)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멀리 『성거산』 정상의 통신 시설물도 눈에 들어온다.
09 : 00시, 이정표(위례산 0.9km, 우물목고개 1.5km, 유성농장입구 2.9km)가 세워져 있는 삼거리(490봉)에 도착했다. 위례산 정상에서 보다 천안 시가지의 모습이며 곧게 뻗어 나간 고속도로가 더 뚜렷하게 보인다.
[6] 우물목 고개
眺望도 잠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꿔 10여 분을 진행하니 묘 2기가 나오고(09 : 10분) 계속해서 내림 길로 이어진다. 09 : 15분, 안부에 도착했다. 두 그루 나무를 중심으로 돌무더기를 쌓고 큰 나무에 오색 천을 묶어 사방으로 길게 늘여 매 놓았다. 서낭당인 모양이다. 돌무더기 앞 祭壇에는 귤, 과자 등이 놓여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산꾼들이 지나가며 잠시 정성을 드린 듯 싶다.
서낭당 안부를 지나 봉에 오르니 거대한 송전 철탑이 버티고 있다(09 : 24분). 철탑을 지나 3분 여 진행, 또 하나의 철탑을 지나(09 : 27분) 넓은 길로 내려서서 3분을 더 진행하니 포장도로가 나타난다(09 : 30분). 길은 세 갈래로 나 있는데 도로변에 세워진 방향 표지판에는 좌측으로 『북면 납안리』, 직진은 우『성거산성지』로 방향이 표시 되 있고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시멘트 포장길이 연결 되 있는데 시멘트 포장 길 쪽으로 『길손식당』간판을 세워 놓았다.
『우물목고개』에 도착한 것이다. 우물목고개를 一名『정항령』이라고도 하는데 호당리(입장면)에서 북면 납안리 도촌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납안리의『道村』은 성거산 성지와 아주 밀접한 관게가 있는 마을이다.
납안리의 『도촌(道村)』을 소학동(巢鶴洞)이라고도 하는데 『納安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리목과 가깝고 옛날에는 상북에서 제일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대원군 섭정시 병인교란 때 경상도 내포방면 천주교 교우들이 많이 살았고 불란서 페롱권신부, 리델이신부, 칼레강신부 등이 이근천에서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천주교인 중 5인이 체포되어 공주 영문에서 사형되었다 한다. 사형자는 최베드루천여, 최라자로종여, 배문호, 고요셉, 체서방며느리로 목천군 북면 소학동에 살다가 본읍 포교에서 잡혀 공주로 옮겨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2시간 30분 급한 산행으로 배도 출출하고 다리도 뻐근하여 도로변에 앉아 간식을 하며 땀을 훔치고 고단한 다리품을 풀며 휴식을 가졌다.
[7] 성거산 성지와 성거산
휴식도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성거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포장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숲 속으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산악대장, 이 길을 따라 가도 성거산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산길을 버리고 포장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올랐다.
09 : 55분, 성거산 성지 200m 전 지점 고개 마루 헬기장과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을 지나 1분 여를 더 진행하니 「천주교 대전 교구 성거산 성지」표지판과 3m 크기의 立石이 있고 좀 떨어진 곳에 「제1 줄무덤, 성거산 순교 성지」立石과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 중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등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라고 쓴 성지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는『聖居山 聖地』에 도착한 것이 09 : 56분. 도로 아래에 있는 순교자 묘를 살펴보았으나 눈이 덮여 있어 그 형태를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제 1 줄 무덤을 뒤로하고 4분 여를 더 올라가니 『제2 줄무덤』표지석을 또 세워 놓았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 10, 1998. 5. 10)」란 성경 구절을 적어 놓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그들의 정신이 오늘 날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면면이 이어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성거산 성지』를 찾는 것을 보면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줄 무덤을 살펴보는 동안 대원들은 100여 m나 앞서가고 있다. 사진 촬영으로 뒤쳐진 장부장과 대화를 나누며 힘겹게 오른 곳이 공군 제 0000부대 정문 앞(10 : 26분). 넓은 포장길은 굳게 닫힌 부대 정문으로 사라지고 정맥 길은 좌측 울타리로 빠져 나간다. 잡목과 풀이 덮인 철망을 10여분 걸어 부대 후문에 도착(10 : 35분)했다. 성지부터 쉼 없이 산행을 한 탓으로 다리가 뻐근하여 잠시 휴식을 가졌다.
5분 여의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을 했다. 안부, 묘 1기를 지나 山峰에 올랐다.(10 : 47분) 『聖居山』정상(579m)이다. 앞서 온 대원들도 휴식을 취하고 있고 우리 외에도 10여명의 산꾼들이 모여 왁자하게 떠들고 있다.
「聖居山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분주할 때 직산면 산헐원을 지나다 동쪽의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聖居山"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출처 : 천안시 관광문화>
[7] 만일고개와 만일사
11 : 06분, 만일사와 송전리를 이어주는 『만일고개』사거리에 도착했다. 작은 돌무더기가 3개 있고 이정표도 세워 놓았다. 「송전리1.3km, 좌불상←○→만일사1.1km / ↑태조산3.4km 취암산9.2km /↓성거산1.7km」라 표시되 있다.
이곳에서 1.1km 거리에 있는 「만일사(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63번지)는 그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탑, 마애불, 금동석불입상의 조각기법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목종5년)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되며 현재의 대웅전은 1876년(조선 고종13년)에 지었던 법당을 1970년에 철거하고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초익공의 건물로 지어 졌으며,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된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뛰어난 문화재를 지척에 두고 지나치는 아쉬움이 남는다.
[8] 유량동 고개
11 : 18분, 태조산 등산 제 26지점. 이곳에서 좀더 진행하니(11 : 22분) 삼거리 이정표(←만일사, ↑KB 연수원, 좌불상 →)가 있고 매직으로「영인지맥 분기점」라 써 놓았다. 우측 아래로 저수지(남창저수지)와 원형 건물(연수원?)도 보인다.
11 : 30분, 국민은행 연수원 가는 4거리에 도착했다. 이정표(유량동 / 삼뱅이(메일골) / 연수원)와 계성군의 묘 / 숙의하씨 묘로 가는 작은 표지판, 태조산 주능선 24지점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갈뫼고개』를 지난다.
갈뫼고개를 지나면서부터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산행 날씨로는 그저 그만인 날씨다.
11 : 50분, 「성거산 / 상명대학교 / 태조산」가는 삼거리를 지나 3분 여를 더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의자 등이 설치되 있는 넓은 안부가 나오는데 이곳이『유왕골 고개』인가?
유량동은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 여명 분의 軍糧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留量洞』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유량동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유량동은 본래 천안군의 상리(上里)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교촌리, 당후리, 분곡리, 상평리, 하평리, 평리, 신리, 상촌리 등을 합하여 영성면에 편입되었는데 1931년 천안읍에 편입되었다.
<출처 : 천안시 원성1동, 留量洞 지명유래>
12 : 00시,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것으로 계획이 되 있어 많은 사람들의 출입으로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의자에 싸 온 도시락을 끄내 놓는다. 윤사장님은 햄버거로 안교감은 덮여 먹을 수 있는 햇반으로 김미환 사장은 깨를 묻힌 주먹밥으로, 나머지는 보온 밥통에 두 세 가지 찬으로 점심을 준비했다. 산행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밥상을 넘겨다보며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신다.
[9] 태조산 가는 길
좀 느긋하게 점심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는데(점심 시간 약 20분)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배낭을 챙겨 일어선다. 참 급하다. 아직도 갈 길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12 : 30분, 『덕전 야영장』삼거리 이정표(성불사 / 야영장 / 좌불상 1km)를 지난다. 직진을 하면 성불사 가는 길이고 정맥길은 왼편 덕전야영장 방향으로 나 있다.
성불사(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98-83번지) 고려 목종 때 혜선국사가 법당을 세우고 암자를 지어 태조산 성불암이라 칭했다고 한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태조산(太祖山) 자락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가 된다.
이 사찰이 창건될 무렵 하늘에서 백학 한 쌍이 날아와대웅전 뒤의 암벽에 흰 학이 부리로 쪼아 불상을 만들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려 불상을 다 이루지 못한 절이라는 뜻의 '成不寺'라 불렀다가 후에 도선국사가 절을 짓고 '成佛寺'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12 : 36분, 태조산 수련장 가는 삼거리를 지난다. 소나무 숲으로 길이 잘 나 있고 많은 사람들의 왕래도 잦다. 정맥 산행 중 보기 드문 인파다. 천안 시내가 가깝고 휴일에 봄날 같은 좋은 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산행 겸 산책을 나온 것 같다.
삼거리에는 이정표(左/태조산 수련장 2.5Km, 右/성불사)와 정자가 설치되 있는데 정자에는 비닐 포장을 쳐 놓았고 그 옆으로 가판대를 설치해 막걸리를 팔고 있다. 생업을 위한 것이겠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해야할 정자를 혼자 차지하고 더하여 막걸리를 파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으로 와 닿지 않는다.
정자에서 80여 m를 더 가니 「태조산 수련장 2.2Km, (태조산)정상 1.4Km」라 표시된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12 : 45분, 「태조산 정상 0.8km, 태조산 야영장」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 도착했다. 봉분이 없는 묘가 하나 있는데 묘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가지로 둘레를 쳐 놓았다. 산행 전 조사해온 자료를 확인 해 보니 이쯤이 『도라지고개』인 듯 하다.
“『도라지고개』를 일명 『조라지고개』라고도 하는데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꼬불꼬불 굽어진 고개 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부르며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목천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고하며 목천읍 덕전리 지명 유래에는 “태조 왕건이 군사를 양성할 때 졸라 즉 졸병들이 이곳에서 훈련하였다”고 전한다.<출처 : 천안시 원성1동>
[10] 태조산
안부에서 3분여를 더 가니 삼거리가 나오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성거산 4.5km /태조산 0.6km / 태조산 수련장 1.1km」라 표시되 있다. 오후 산행의 첫 고비 태조산을 600m 앞에 두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이다. 응달진 곳이라 눈이 그대로 남아 있고 땅까지 얼어 아이젠이라도 차야할 처지다. 가장자리로 비켜 9분 여를 숨을 몰아 쉬며 오르니 산 능선을 따라 긴 철책을 처 놓았다. 쪽문으로 들어섰다. 능선 아래로 연수원 건물이 보이고 연수원 내려가는 길에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 철망르로 막아 놓았다. 쪽문을 통과해서 좌측 능선으로 방향을 틀어 鐵柵을 따라 올랐다. 12 : 48분에 『태조산, 421.5m』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는 위례산, 성거산 정상석과 같이 비스듬하게 세워진 정상석과 천안․태조산 유래판, 그리고 위치도와 웰빙 스트레칭 설명판이 있고 통나무로 쉴 수 있는 의자도 설치해 놓았다.
천안․태조산(天安․太祖山, 위치 : 천안시 유량동 산50, 목천읍 덕전리 산 47번지, 높이 421.5m)은 「줄기차게 내려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용트림해 속리산에서 분기, 서진(分岐西進)하여 금북정맥(錦北正脈)을 만들고 돌연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힘을 모아 일으킨 산이 태조산이다.
고려 건국 이전에는 동.서도솔(東西兜率)로 불리었는데 서기 930년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의 진산인 이곳 태조산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지세(五龍爭珠地勢)로 군사적 요충지임을 판단하고 천안에 천안도독부(天安都督府)를 두고 민호(民戶)와 군사를 상주케 함으로써 천안과 태조산의 지명이 유래 되었다.
남쪽으로는 취암산, 북으로는 국사봉이 청룡과 백호가 되어 저멀리 경배(敬拜)하고 있는 일봉산(日峯山)과 월봉산(月峯山)은 해와 달로써 한복판에 여의주를 놓고(남산) 다섯용의 지형이 보이는 곳이 태조산이다.」라고 유래판에 소개해 놓고 있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해 보니 421. 5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천안 시가와 그 인근의 地勢가 한 눈에 파악된다. 태조 왕건이 왜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는지 산 정상에 올라보니 그 까닭이 짐작이 간다.
[11] 아홉사리 고개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조망하고 다시 출발이다. 이어지는 철책 따라 내려 오니 삼각점과 정보통신 공무원 연수원에서 세운 3번 이정표(태조산 600m / 제3포스트 1230m)가 있는 철책 쪽문을 통과(13 : 20분)하여 10여 분을 더 진행하니 「전망 좋은 곳」이라는 표지판과 「제2포스트 380m / 제3포스트 850m」라 표시한 이정표가 또 세워져 있다. 아마도 연수원에서 연수생들을 훈련용으로 세워 놓은 이정표인 모양이다.
잠시 메모를 하는 동안 오전 산행에 무리를 했는지 무릎 통증이 온다던 김미환 사장, 힘들다는 김인기 사장 모두 선두를 따라 앞서가 보이지 않는다. 13 : 45분, 사거리 갈림길에 도착했다. 「유량동 1.1km / 흑성산 2.1km / 취암산 4.1km / 태조산 1.7km, 성거산 6.5km」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연수원에서 설치한 포스터 5표지목도 세워져 있다. 전 산꾼들의 산행기 내용으로 보면 이 곳이『아홉사리고개』같다.
이 고개는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크게 아홉번 굽이져 온다고 하여 『아홉사리고개 /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 / 九曲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출처 : 천안시 원성1동 지명 유래>
[12] 흑성산
이곳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흑성산과 독립기념관을 갈 수 있다. 흑성산 정상의 통신 시설물도 肉眼으로 확연히 식별이 된다.
「흑성산 (黑城山, 519m)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남회리의 뒷산으로 차령산맥 줄기에 있는 구릉성 산이다. 북쪽으로는 태조봉, 남쪽으로 백운산과 취암산 등이 있다. 북쪽은 태조봉에 연속되며 서쪽은 아홉싸리고개․유랑리고개․장고개 등이 있다. 이들 고개와 산 서쪽 기슭의 승척골은 매우 아늑하여 전쟁 때에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승천사터가 남아 있다.
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산정에는 둘레 739보(步)인 흑성산성터가 있으며 성안에는 지지(地址)가 있다. 6.25전쟁 때 6개 면의 주민을 동원하여 목천면 서리에서 산정까지 군용도로를 개설한 이래 산정에는 공군 항로보안단의 지대(地隊)와 美極東空軍의 通信隊를 비롯한 군사시설과 방송시설, 텔레비전 중계소 등이 들어서 있다.
흑성산성은 천안시 안의 古代山城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산성으로서 옛 기록에 의하면 이 산성은 목천현의 서쪽 11리, 험하고 가파른 흑성산 위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북동쪽으로 산맥이 계속 이어져 성거산성.의례산성과 이어지고 남쪽으로 남화리 토성과 세성산성으로 연계된다.
산성 바로 아래 기슭에는 1983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곳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동쪽의 병천면에 3.1운동의 한 본거지였던 유관순기념사당이 있어 독립운동과 관계된 곳이라는 것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지형이 평탄한 넓은 땅이 있다는 입지조건 때문이다.
이 산은 풍수지리상 서울에서 외청룡이 되며 '금계포란형'의 명당 吉地로 독립기념관 정면, 겨레의 집 뒤로 보인다. 산 서쪽 기슭의 보문사에는 50년 전 지리산 승천사에 있던 불상 3위을 옮겨와 모시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고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널리 알려져 최근에는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출처 : 네이브 백과사전>
[13] 유량리 고개 터널과 장고개
아홉사리고개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작은 봉으로 오랐다 내려서니(14 : 05분) 평탄한 길로 이어지고 2차선 포장도로가 안부를 가로질러 나간다. 안부에는 동물들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터널을 만들어 통로를 만들어 놓았고 이정표(취암산 3.3km / 태조산 2.5km / 지산리 1.1km / 유량동 1.5km)도 세워져 있는데 이곳이 『유량리 고개』터널이 된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취암산이 3.3km로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오늘 산행이 끝날 것 같다.
완만한 오름길 삼거리 이정표(취암산 2.9km / 구성약수 1.7km / 태조산 2.9km)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고압선 철탑을 지난다.(14 : 15분) 평탄하게 이어지는 능선 길 아래로 큰 공장 건물(남양유업)도 보인다. 지척에 있는 흑성산은 계속 보조를 맞추며 우리 걸음을 따라 같이 이동을 하는 것 같다.
완만한 오름길 삼거리 이정표(취암산 2.9km / 구성약수 1.7km / 태조산 2.9km)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고압선 철탑도 지난다(14 : 15분) 된다.
철탑을 지나 14,5분을 더 더 진행하니 안부 사거리가 나오는데 지도상에 표기된 『장고개』가 되는 것 같다. 『장고개』는「지산리에서 천안 구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천안 장보러 다녔던 고개라고 한다. <출처 : 목천읍 지산리>
[14] 취암산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작은봉(283봉)에 올랐다(14 : 40분). 산봉에는 누군가 불에 인두를 달구「가스공사 교육원(左) / 취암산(직진)」방향을 새긴 標識木 세워 놓았다.
안부(배넘이 고개)를 지나고 취암산이라 생각되는 直前 峰에서 잠시 휴식(14 : 50분)을 갖고 취암산을 오르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 본다.
15 : 12분, 돌탑 봉에 도착했다. 긴 통나무로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걸쳐 의자를 만들어 두었고 전망도 좋아 흑성산 자락에 있는 독립 기념관의 용마루가 산 능선 너머로 보이고 멀리 산자락까지 이어진 천안 시가지도 한눈에 들어 온다. 이곳이 『취암산』 정상인가?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이라 생각하고 힘을 몰아 올라서인지 숨도 가쁘다. 여러명의 산행인들이 산봉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취암산 정상은 좀더 가야된다고 한다.
이제 하산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이다. 장시간 산행으로 지친 것 같다. 5분 여 휴식을 갖고 바로 앞에 보이는 취암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15 : 30분, 취암산 정상 도착했다. 삼각점(평택 464, 1991년 시설)이 있고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동우아파트1.3km / 삼용동0.9km / 태조산5.8km」라 표시되 있고 이정표 支柱에 붉은 글씨로『취암산』이라 쓴 양철판이 붙어 있다.
「취암산(鷲巖山, 229m)은 천안시 목천면 응원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229m가 되는 낮은 산이다. 금강의 지류인 병천천이 시작되며 곡교천과 분수계를 이룬다. 두 개의 바위봉우리가 마치 수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경암』 또는 『취엄산』이라고도 하며, 두 봉우리가 이 빠진 것처럼 생겼다 하여 『이빠진산』이라고도 부른다.
산 이름과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여서 사기를 가득 실은 배가 넘어가다가 산꼭대기 바위에 부딪쳐 배에 실었던 사기그릇이 깨지는 바람에 지금도 사기조각이 뒹굴고 있다 하여 『배너머산』이라고도 부른다.
바위 중턱에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샘이 있어서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이 샘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산기슭에 있는 천연동굴 용혈 앞에는 조선시대까지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출쳐 : 네이버 백과사전>
취암산 오르기 전 『배넘이 고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이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인 모양이다.
[15] 하산 길
취암산 정상을 뒤로하고 안부로 내려 서니 경관이 수려한 암봉이 있고 암봉 정상에는 운동 기구가 설치되 있다. 삼용동이 0.9km고 동우아파트도 그리 멀지 않는 거리(1.3km)에 있어 주민들이 자주 찾는 모양이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취암산과 흑선산 氣를 받으며 하루를 여는 주민들은 天惠의 福을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암봉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오늘 산행을 종료하는 하산길로 접어 들었다. 계속 되는 내림 길, 동우아파트 뒤 절개지 능선을 따라 아파트 정문에 도착한 것이 16 : 05분. 07 : 00시에 엽돈재를 출발하여 도상거리 21. 2km의 산행을 무사히 끝낸 마음이 한결 가볍다.
[16] 산행 마무리
무릅이 아파 중간 탈출을 시도하다 끝까지 함깨 산행을 한 김미환사장의 의지도 놀랍고 정맥산행을 처음 시도한 김인기세무사님도 끝까지 함께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된다. 발목 부상(박상호)으로, 원거리 출근 때문에(박기양), 가사 일로(강동규, 김창호, 김명자), 국외 연수(노승애)로 함께 산행하지 못한 대원들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 산행 때는 함께 산행을 했으면 좋겠다.
미리 대기시켜 둔 택시 2대에 분승하여 엽돈재로 출발, 엽돈재에서 안성으로 이동하여 삼겹살에 소주잔을 건내며 금북정맥 3구간 무사 산행을 자축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2007. 2. 11
6. 참고자료
<참고자료 1> 입춘(立春) - 봄의 시작
입춘(立春)은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절기로, 음력(陰曆)으로는 정월(正月) 의 절기(節氣; 매달 상순에 드는 절기)에 해당하며, 태양이 황경(黃經; 춘분점에서부터 황도를 따라 잰 천체의 각도 거리) 315도에일 때이다. 양력(陽曆)으로는 2월 4일이나 5일경으로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절기이다.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철의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고 부르고,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마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입춘을 마치 연초(年初)처럼 본다.
특히 입춘날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등의 입춘방(立春榜)을 문에 붙이고, 입춘절식(立春節食)이라 해서 고유의 절기 때 먹는 음식인 절식(節食)으로 입춘날에 먹는 햇나물 무침이 있다.
유래는 경기도 내의 산이 많은 6개의 고을{양평(陽平), 지평(砥平), 포천(抱川), 가평(加平), 삭녕(朔寧), 연천(連川)}에서 움파{동총(冬蔥)}, 멧갓, 승검초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 임금께 진상하고 궁궐에서 겨자와 함께 무쳐 "오신반(五辛盤)"이라 하여 수라(水刺)상에 올렸다.
멧갓은 이른 봄 눈이 녹을 때 산에 자생하는 개자(芥子)로서, 끊는 물에 데쳐내어 초장에 무쳐서 먹는데 몹시 맵고, 고기를 먹은 뒤 입가심으로 좋다. 승검초는 움막에서 기르는 당귀(當歸)의 어린 싹인데, 깨끗하기가 은비녀의 다리같고, 꿀에 찍어서 먹으면 아주 맛이 좋다.
햇나물 무침을 먹는 이유는 겨우내 결핍된 신선한 야채를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민간(民間)에서도 이를 본받아 눈 밑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 무쳐서 입춘절식으로 먹는 풍속이 생겼다.
옛 중국 문헌에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잡절(雜節)은 입춘날을 기준으로 하여 결정된다. 밭에 씨앗뿌리기가 시작되는 88야(夜), 태풍시기인 210일, 220일 등은 각각 입춘날로부터 88일, 210일, 220일째 날이다.
예부터 입춘절기가 되면 농가에서는 농사 준비를 했다. 아낙들은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남정네들은 겨우내 넣어둔 농기구를 꺼내 손질하며 한 해 농사에 대비했다. 소를 보살피고, 재거름을 부지런히 재워두고, 뽕나무밭에는 오줌을 주고 겨우내 묵었던 뒷간을 퍼서 인분으로 두엄을 만들기도 한다. 바야흐로 바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년 농사의 시작이 이제부터이기 때문이다. 또 이날 내리는 비는 만물을 소생시킨다 하여 반겼고, 입춘때 받아둔 물을 부부가 마시고 동침하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입춘한파'니, '입춘 추위 김장독 깬다'고 간혹 매서운 추위가 몰려와 봄을 시샘하기도 한다.
입춘날 농가에서는 대문이나 집안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인다. 여기에는 한 해의 무사태평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더불어 어둡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 농가에서 이 날 보리 뿌리를 뽑아 보고 그 뿌리의 많고 적음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보리뿌리점(麥根占)을 쳤다. 여주인(女主人)이 소복(素服)을 하고 지신(地神)에게 삼배(三拜)를 올리고 보리뿌리를 뽑아 세 가닥이면 풍년, 두 가닥이면 평년, 한 가닥이면 이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또 부녀자들은 오곡을 솥에 넣고 볶을때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온 곡식이 그 해에 풍작을 이룬다고 믿었다지만 이제는 다 옛 얘기가 되고 말았다.
제주도에서는 입춘일에 큰굿을 하는데, '입춘굿'이라고 한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신방(首神房)이 맡아서 하며, 많은 사람들이 굿을 구경하였다. 이때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 옥황상제, 토신, 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 입춘풍속(입춘풍속) ▣
立春은 24절기(節氣) 가운데, 한 해의 시작이요, 계절의 시작인 봄의 문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역시 정월(正月) 풍속과 함께 다양한 한 해의 복(福)을 기원하는 다양한 풍속들이 있었다.
◈ 입춘첩(立春帖) : 춘첩자(春帖子), 입춘방(立春榜)
대궐(大闕)에서는 설날에 문신(文臣)들이 지어 올린 연상시(延祥詩:신년축시) 중에서 잘된 것을 선정하여 대궐의 기둥과 난간에다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였는데, 일반 민가와 상점에서도 모두 입춘첩을 붙이고 새봄을 송축(頌祝)했습니다. [ 帖(첩)문서 ]
≪입춘첩(立春帖) 예시≫
○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白福來)
<短句(단구)에는>
春到門前增富貴(춘도문전증부귀)
春光先到古人家(춘광선도고인가)
一家和氣滿門楯(일가화기만문순)
人情富貴如將得(인정부귀여장득)
玉洞桃花萬樹春(옥동도화만수춘)
立春大吉(입춘대길)
掃地篁金出(소지황금출)
開門萬福來(개문만복래)
壽如山富如海(수여산부여해)
戶納東西南北財(호납동서남북재
<대구(對句)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國泰民安 家給人足(국태민안 가급인족)
雨順風調 時和豊年(우순풍조 시화풍년)
堯之日月 舜之乾坤(요지일월 순지건곤)
壽如山 富如海(수여산 부여해)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천하태평춘 사방무일사)
天上近三陽 人間五福來(천상근삼양 인간오복래)
鳳鳴南山月 麟遊北岳風(봉명남산월 인유북악풍)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 목우(木牛) 놀이
함경도 지방에서 입춘이 되면 나무로 소를 만들어 관아(官衙)로부터 민가(民家)까지 끌고 나와서 돌아다니는 풍속입니다. 이는 옛날 중국에서 흙으로 소를 만들어 내보내던 풍속을 모방한 것이고, 농사를 장려하고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뜻을 지닌 것입니다
◈ 아홉 차리
지방에 따라 입춘(立春)날이나 대보름 전 날에 베푸는 `아홉 차리'라는 민속이 있다. 가난하지만 근면하게 끈기 있게 살라는 교훈적인 세시민속이다. 이날은 각자 소임에 따라 아홉 번씩 부지런하게 일을 되풀이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받을 줄 알았다. 글방에 다니는 아이면 천자문(天字文)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의 나무를 하며 노인이면 아홉 발의 새끼를 꼰다. 계집아이들은 나물 아홉 바구니를, 아낙들은 빨래 아홉 가지를, 길쌈을 해도 아홉 바디를 삼고 실 꾸리를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는다. 심지어는 밥을 먹어도 아홉 번, 매를 맞더라도 아홉 번을 맞았다. 굳이 아홉 번이라 함은 많이 했다는 의미이며 우리 조상들의 숫자 개념상 최고의 陽數(양수)이기 때문이다.
◈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
또 입춘날이나 대보름날 전야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꼭 해야 연중 액(厄)을 면한다는 적선공덕(積善功德)의 복지(福祉)민속도 있었다. 이를테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 건너 다닐 징검다리를 놓는다든지 가파른 고갯길을 깎아 놓는다든지 다리 밑 동냥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는다든지 행려병자가 누워있는 원(院) 문전에 약탕 끓여 몰래 놓고 온다든지...
상여 나갈 때 상여머리에서 부르는 향도가(香徒歌)에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 부처님께 공양드려 염불공덕(念佛功德)하였는가' 하는 대목이 있다.
죽어서까지도 염라대왕으로부터 입춘공덕(立春功德)을 심판 받았던 것이다. 오늘날에 되살리고 싶은 아름다운 우리의 입춘(立春)민속이다. (이규태 칼럼에서)
◈ 입춘수
입춘(立春) 전후에 받아 둔 빗물이 입춘수(立春水)다. 이 물로 술을 빚어 마시면 아들 낳고 싶은 서방님의 기운을 왕성하게 해준다고 알았다. 아울러 가을 풀섶에 맺힌 이슬을 털어 모은 물이 추로수(秋露水)다. 이 물로 엿을 고아 먹으면 백병을 예방한다고 알았다.
◈ 선농제
서울 동대문 밖에 제기동(祭基洞 : 전농동<典農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구내)에서 베풀어졌던 선농제(先農祭)의 제사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농사를 다스리는 신(神)인 신농(神農)에게 풍년을 비는 제사는 신라 때부터 있어왔다. 입춘(立春) 후 첫 해일(亥日)에 선농제, 입하(立夏) 후 첫 해일에 중농제(中農祭), 입추(立秋) 후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 도합 세 차례의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이 동대문 밖에 선농단을 짓고 선농제만을 지내왔던 것이다.
<출처 : [블로거 : jangjust] >
<참고자료 2> 운용리(雲龍里) 지명 유래
○ 운용리 : 목천군 북면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삼용리, 군단리, 심곡리, 납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운용리라 하고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됨에 따라 천원군 북면 운용리가되었었다.
○ 깊은골 : 심곡이라고도 하는데 부소문이 고개 동북 깊은골이다. 옛날에는 마을 이 있었으며 골이 깊고 물이 좋아서 전염병과 어린이 복학(複虐)이 없었다하며 온조왕이 처음 이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 부소문이고개 : 부소문령(扶蘇門領) : 부소문이라고도 하는데 운영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때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소나무 산 고개라고 하는 뜻도 된다고 한다.
○ 삼용리(三龍) : 군단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처럼 생겼다 한다.
○ 장생이 : 새절터라고도 하며 군단이 서쪽골 위에 있는데 백제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할 당시 시장이 섰다 한다. 절이 있었고 장승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 마당재 : 깊은골 뒤에 있는 산. 마당처럼 평평하여 군사가 훈련하였다 한다.
○ 군단이(軍丹) : 운용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때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3-1> 위례산 (慰禮山)
@ http://blog.naver.com/hsh560708/60030257620
@ 위치 :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 , 북명 운용리 ( 해발 523 m )
@ 금북정맥 중봉으로 서운산 , 성거산 , 태조산과 이어진 산으로 직산위례성 , 검은산 , 신산이라고도 한다. 차령산맥의 연봉을 이루고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하며 백제초도로 추정되는 위례산성이 위치해 있다.
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 m, 높이 약 3 m 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 과 문 받침대로 여겨지는 큰돌 반쪽이 남아 있다. 이 산성과 마주하여 안성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와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 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산 아래에는 유성관광농원과 물이 맑고 경치가 매우 좋은 북면 계곡 유원지가 위치해 있다.
<참고자료 3-2> 위례산성
@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
@ 내용
위례산성은 해발 480m의 위례산 위에 쌓여진 테뫼식 산성이다.
천안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향하는 693번 국도로 나가다가 효계리에서 진천으로 가는 지방도로에 있는 우물목고개의 전방에 이 산성이 있다.
산성의 주향은 서향으로서 이쪽에는 널따란 성환들판과 경부고속도로 서쪽에 있는 서평택 1번 국도까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이다. 또 직산에 있는 사산성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성벽을 쌓은 상태를 살펴보면 자연지세가 급한 지역은 그대로 성의 내부를 삭토하여 성벽의 바깥쪽을 높고 가파르게 보축하고 산세가 완만한 지역은 이를 석축으로 보강하였다.
석축한 부분은 다듬은 흔적이 없는 막돌로써 공돌쌓기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지금의 높이는 대개 4m이며 전체적인 둘레는 800m에 이른다. 성안에는 당시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자리가 남아 있는데, 크기는 2.2×3m의 규모로 솟아나서 이용되고 있다.
<출처 : 천안시 문화관광>
<참고자료 4-1> 온조왕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ꡒ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ꡓ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ꡒ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ꡓ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정착한 집단이 먼저 큰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부근 또는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沸流)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한편, 동명을 백제의 시조라고도 하였다.
현존 문헌들에 의하면, 북부여(北扶餘), 고구려(卒本扶餘라고도 함), 백제(南扶餘라고도 함) 등 부여족 사회들은 모두 동명을 시조라 하고, 그를 숭배하는 제전(祭典)을 각기 가지고 있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라 하는 것도 그러한 부여족 일반의 상황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온조와 비류가 형제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두 집단의 연맹관계를 형제의 관계로 강조하기 위하여 만든 연맹설화의 구성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등에 온조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 것들의 상당부분은 실제로는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해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온조왕대에 마한지역 전체를 통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한 영토의 개척은 실제로는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일이다.
또한, 백제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왕족으로부터 위례성 왕족에게 넘어간 것이 온조왕대였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연맹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는 것도 온조왕대에서 훨씬 후대인 고이왕대에나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韓國史―古代篇―(李丙燾, 震檀學會, 1959),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盧明鎬, 歷史學硏究 Ⅹ, 1981).
<출처 : 디지털 한국학>
<참고자료 5-1> 사리목 고개
도촌에서 성거읍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길의 모양이 꾸불꾸불 하여 새끼를 사리어 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속설에 사리목과 통한다하여 흔행길은 일체 다니지 아니하며 대원군 섭정시 천주교인들 박해할적에 이곳에서 은신한 사람이 많으면 경상 전라도의 사람도 이곳에서 피난했고 교인들의 연락처로 이용됐으며 불란서 신부도 세명이나 있었 다 한다.
<참고자료5-2> 성서산(소학골), 박해시대 사목 중심지 소학골
충청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성거산에 위치한 성지에는 제1, 제2 묘역에 각각 38기와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 근처의 소학동 교우촌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천안 일대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공주 감영에서 치명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그리고 최천여의 며느리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천안 성거산 일대에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 많다. 천원군의 남쪽과 동쪽지역인 목천면, 북면, 풍세면, 광덕면 일대가 바로 그 곳이다.
성거산 일대의 공소를 설립순으로 보면 서덕골(목천면 송출리)은 1884년에 두세 신부가, 먹방이
(먹뱅이 : 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소학동(쇠악골 : 북면 납안리) 공소 역시 1884년과 1888년에 설립하였다. 사리목(북면 납안리) 공소는 1901년 드비즈 신부가, 매일골(목천면 송출리) 공소는 1895년 귀를리에 신부가 설립하였으며 석천리(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도촌(북면 납안리) 공소는 1913년, 1920년 이후에는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소학동 사리목은 목천 북면 소재지를 거쳐 남안리(도촌)까지 약 23km 정도 들어가는 깊은 산골이며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은신하여 살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지금은 공군 ○○부대가 주둔해 있지만 증언자 최병기씨의 말에 의하면 박해시 교우들이 망을 보다가 포졸들이 나타나면 깃발을 갖고 신호하며 망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워낙 깊고 나무가 울창하여 소학동 계곡에 숨어 있으면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도 능선 계곡을 따라가 보면 증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소학골은 1866년 병인박해시 깔래 강 신부, 페롱 신부, 뮈델 주교, 두세 신부, 베르모렐 신부가 숨?지내며 암암리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1월 초순경 전프란치스코 사베리오(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건학 공소 회장)와 이요한(경북 문경군 문경읍 증평리 여우목 공소 회장, 성 이 윤일의 아들)은 부럭이(충북 제원군 덕산면 월악리)에서 예천 포졸에게 잡혀 예천 현감 경유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공주 감영에서 음력 1865년 12월 10일, 양력 1866년 1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몇 주 후 강 신부는 건학 공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 무렵 2월 23일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가 서울에서 체포된데 이어 불란서 신부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 강 신부는 속속 날아드는 비보를 듣고 3월 초순부터 사목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5월 말에는 이 곳 소학골 교우촌(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피신하여 머물렀다. 강 신부는 자신도 곧 붙잡혀 순교하리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제 6 신 서한(1866년 6월 8일)을 썼고 역시 제 7 신 서한(1866월 6월 10일)도 소학골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올렸다. 이 서한은 조선의 12명 선교사 중 3명만 살아 남아 있다는 소식과 높은 고산 준령의 교우촌으로 피신하며 겪게 되는 고충과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생존한 선교사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를 본국에 알리고자 조선 교우와 함께 출범해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강 신부의 서한을 발송했다.
리델 신부가 탈출한 다음 페롱 신부는 강 신부를 찾아와 함께 소학골에서 칩거하였다. 그들은 10월 11일 조선 배로 출범하여 이틀 동안 조선 연안을 항해하다가 다행히 청국 밀수꾼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탈출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출국한 후 얼마 안되어 목천의 포졸들이 소학동(또는 소학골) 교우촌을 덮쳐 소학골 교우 5명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음력 1868년 11월 8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5명은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고의진(요셉), 채서방 며느리이다. 치명일기 509 - 513호에 나온다.
1.최천여(베드로) :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고 묵상과 염경기도를 하며 늘 치명 원의를 자주 말하더니 병인년 10월 초십일에 포졸에게 잡혀 관청에 들어갔다. 천주학을 배반하도록 권유당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투옥, 옥중에 들어가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고 눈물을 흘렸으며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52세.
2.최종여(라자로) : 최천여(베드로)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생활하더니 병인년 10월 초십일에 목천 포졸에 잡혀 혹독한 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졸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서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에서 형과 함께 11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42세.
3.배문호(베드로)와 고의진(요셉) : 이들은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을 다하였다. 하옥된 후 옥에서 계율을 풀어 읽으니 이것을 누구한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죽어도 천주학은 배반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강 신부가 준 철사띠를 주야로 띠고 고신극기하는 법률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초파일에 목천 포졸에게 고요셉과 함께 잡혔다. 2․3차 물 고문과 형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과 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이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순상 분부에 11월 초파일에 공주로 끌려가며 경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습을 보고 통회하여 스스로 합세 공주 진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두 분은 절친한 친구였으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며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모진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즉시 하옥,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니 배문호는 24세였고 고요셉의 나이는 알지 못하였다.
4.채서방 며느리 : 모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오소서. 또 이르오되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 꽂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보시고 저와 고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 찾아 묻었느니라." 하였다.
현재 이 곳에는 제 1, 제 2의 묘역이 있는데 제 1 묘역에 38기, 제 2 묘역에 30기의 순교자 및 신앙 선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 유해들은 1959년 성거산 정상에 있는 미군 통신기지 건설을 위해 도로를 만들 때 발굴된 유해들로써 그중 인부들이 제 1 묘역에 38기의 유해를 이장했고 제 2 묘역에 30기의 유해를 이장했었다.
그후 1998년 3월 21일 제 2 묘역 뒤쪽에서 이 성지를 총지휘하고 있던 천안 성황동 천주교회 김동억 신부의 지시로 묘분으로 여겨지는 일곱 봉분을 발굴한 결과 다섯 무덤에서 유해가 발견되었고 한 무덤에서 가로 3cm 세로 6cm의 청동 십자고상이 발견되었다.(대전 가톨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이 5구의 유해를 제2묘역에 안치함으로써 총 73기의 유해가 이 곳에 안장되었다. 이 유해들은 공주 감영에서 1866년 11월 8일자로 순교한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와 고요셉 그리고 채서방 며느리 등 5명의 순교자들을 비롯, 무명 순교자들과 이 곳을 중심으로 한 신앙 선조의 유해들이다.
원래 이 곳에는 200여기의 신자들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박해중에 급히 묘지를 만들었고 또 후손들이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미군 기지 군사 도로를 개설할 때 그 도로 구간에 있던 유해들과 5구의 유해, 총 73구만 모시게 되었다.
대전교구장 경 주교님은 1998년 7월 22일자 교구장 공문(제 98-7호)을 통해 천안 성거산 교우촌 유적지 소학동과 순교자 묘소를 교구의 성지로 공식 인준하셨다. 경 주교님께서는 "교구 성지 보존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오니 교구민 모두의 관심과 적극적인 순례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첫째, 성거산 유적지를 성거산 순교자 성지라 칭하고 교구 성지로 승인한다. 둘째, 성거산 순교자 성지 보존과 관리는 천안 성황동 본당에서 계속 책임을 지고, 성지의 지속적인 개발은 천안지역 본당의 도움을 받아 성황동 본당 주임신부 책임 하에 실시한다."라고 하셨다.
현재 제1, 제2 묘역에 십자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십자가의 길 15처상, 제대 두 곳 등을 건립하고 나무와 꽃잔디로 조경을 이루고 있으며 휴식 공간도 마련해 놓고 있다.
이 곳은 해발 500m 고지에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 청정한 공기 등이 있어 야외 수련 장소, 피정 장소로도 아주 빼어난 곳이다. 이 곳 성역화 사업은 천안 성황동 본당에서 많은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일단계 사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다.
<참고자료 5-3> 대건회 성지순례(천안 성거산 순교성지)
성거산 순교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성거산 상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군데의 순교자 묘소와 소학동 교우촌 유적지가 있다. 성거산(聖居山)이란 말뜻 그대로 교우들이 거룩하게 살던 산이다. 순교자 묘소에는 제1묘역 38기, 제2묘역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있는 소학동은 병인박해 전부터 있었던 교우촌이다. 천안 일대 여러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선교사들이 은거하면서 사목했던 곳이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이다. 소학동 출신 유명 선교자는 1866년 음력 11월 8일 교수형으로 공주 감영에서 순교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형제와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최천여의 며느리이다. 이 사실은 치명일기 509~513호에 나와있다.
1998년 7월 22일 교구 성지로 승인된 이곳에는 현재 십자가, 예수성심상, 성모상, 14처상, 제대 등이 건립되어 있다.
천안시 북면 납안리 성거산에 위치한 성지에는 제1, 제2 묘역에 각각 38기와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 근처의 소학동 교우촌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천안 일대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공주 감영에서 치명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그리고 최천여의 며느리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천안 성거산 일대에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 많다. 천원군의 남쪽과 동쪽 지역인 목천면, 북면, 풍세면, 광덕면 일대가 바로 그 곳이다.
성거산 일대의 공소를 설립순으로 보면 서덕골(목천면 송출리)은 1884년에 두세 신부가, 먹방이(먹뱅이 : 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소학동(쇠악골 : 북면 납안리) 공소 역시 1884년과 1888년에 설립하였다. 사리목(북면 납안리) 공소는 1901년 드비즈 신부가, 매일골(목천면 송출리) 공소는 1895년 귀를리에 신부가 설립하였으며 석천리(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도촌(북면 납안리) 공소는 1913년, 1920년 이후에는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출처> 대건회 성지순례(천안 성거산 순교성지)
<참고자료 6> 만일사
○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63번지
○ 내용 : 성거산(해발579m) 중봉에 위치한 만일사는 세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석탑, 마애불, 금동석불입상의 조각기법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목종5년)에 세워진 사찰로 추정되며 현재의 대웅전은 1876년(조선 고종13년)에 지었던 법당을 1970년에 철거하고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초익공의 건물로 지어 졌으며,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된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
성거산의 빼어난 자연 경관과 청정계곡인 성거산계곡, 천흥저수지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찰이다.
[ 만일사 법당 ]
@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250호 재료 : 목조
@ 지정년월일 : 1984년 5월 17일 시대 : 조선후기
@ 만일사 법당은 1876년(조선 고종13년) 지었던 건물을 1970년 철거하고 길게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고 사각모양의 주춧돌에 기둥을 세워 전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초익공의 건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된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 건물이다.
[ 만일사 5층석탑 ]
@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254호 재료 : 화강암
@ 지정년월일 : 1984년 5월 17일 시대 : 고려시대
@ 높이 : 3m -
@ 석탑의 양식과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는 평지에 있던 것을 법당을 고쳐 지을 때 마애불상 앞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하대중석에 안상이 새겨져 있고, 1층 지붕돌과 몸돌은 별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층급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고 1층에서 4층까지의 탑신의 네 면에는 모두 불상을 조각하고 있다 지붕돌의 낙수면 은 짧고 두터우며 처마는 곡선으로 부드럽게 반전이 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복발이 얹혀있다.
[ 만일사 석불좌상 ]
○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258호 재료 : 화강암
○ 지정년월일 :1984년 5월 17일 시대 : 미상
○ 높이 : 1.64m -
○ 대웅전 뒤편의 자연동굴속에 암벽을 조각하여 만든 석가여래좌불로 서북쪽을 향하여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부처의 머리부분은 육계가 없이 둥글고 이마에는 흰 유리구슬로 백호를 박았으며 얼굴의 모습은 눈은 감은 형태에 귀가 길고 코도 그리 높지 않게 조각하였으며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깊게 음각되어 있다. 석불좌상의 머리부분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머리가 잘라졌다 한다. 조각기법 주변의 유물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만일사 마애불 ]
○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255호 재료 : 화강암
○ 지정년월일 :1984년 5월 17일 시대 : 고려시대
○ 높이 : 4m -
○ 바위에 새긴 불상 중 앉아 있는 불상으로 비교적 큰 편으로 주변의 유물과 석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하며 상당 부분이 풍화되었지만 대체적인 윤곽은 확인할 수 있다. . 전설에 의하면 백학 한 쌍이 하늘에서 내려와 맑고 깨끗한 곳을 찿아 불상을 마련하고자 지상을 살피던 끝에 천안 안서동의 성불사에 내려와 불상을 조성하던 중 사람의 기척으로 중단한 것이 성불사(成佛寺) 마애불이라 한다. 백학이 다시 하늘로 날아가 성거산을 굽어보니 성거산 만일사의 자리가 좋은 곳이라 이곳에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하였으나 날이 어두어지고 앞이 보이지 않아 부처를 완성하지 못하고 백학들이 하늘로 되돌아가 불상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래서 사찰 이름을 ꡐ만일사(晩日寺)ꡑ라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 천안 성거산 천성사명 금동보살입상 ]
○ 지정별 : 문화재자료 제168호 재료 : 동(銅)
○ 지정년월일 : 2002년 8월 10일 시대 : 고려시대
○ 높이 : 161cm -
○ 만일사 대웅전에 모셔진 관음상으로 관음상 뒷부분에 ꡐ통화20년 천성사(統和二十年天聖寺)ꡑ란 글이 새겨져 있어 고려 목종6년(1002년)에 조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불교의 보살이다. 금동보살입상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寶冠)을 쓰고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가늘게 늘어져 있고, 가슴 아래로 늘어진 법의(法衣)는 발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에는 관세음보살의 지물인 감로수(甘露水)병을 들었고 왼손에는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참고자료 7>
○ 왕자산 : 태조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왕자(王字) 모양을 하고 있으며 천안의 主山이다. 옛날에 왕자산성이 축성되어 있다고 地誌에 기록되어 있다.
○ 장태산 : 고려 태조 왕건이 주둔할 때 장대(장군의 지휘대)를 설치하였다하여 붙여 진 지명이다.
○ 유려왕산․유려왕사 : 태조산 북쪽에 있는 산으로 태조 왕건이 묵었던 절이 유려왕사이고 유려왕사사 있던 산이 유려왕산이다.
○ 마점사 : 태조가 말을 매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寺名
○ 유왕골 : 묵천읍 덕전리 자연부락으로 고려 태조가 천하를 살피고 머므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 입구에는 주민들이 세운 “유왕골 유래비”가 있다.
○ 유량골(유량동) : 군사 훈련장 및 군량 창고가 있어 붙여진 지명 임
<참고자료 8> 태조산(太祖山)
○ 요약 : 충청남도 천안시 유량동과 목천읍의 경계에 있는 산.
○ 위치 : 충남 천안 유량동과 목천읍 경계
○ 높이 : 421m
○ 문화재 : 성불사(충남문화재자료 10)
○ 본문 : 높이는 421m이다. 태조봉이라고도 한다. 천안의 진산(鎭山)으로, 산이름은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병했다는 설에서 유래하였다. 미호천(美湖川)의 원류인 유량천, 산방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완만한 산세로 천안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산행 코스는 3~4개가 있는데, 대체로 2시간 이내의 짧은 산행이어서 산책이나 가족산행으로 알맞다. 천안 시민은 주로 원성동 체육공원에서 구름다리를 거쳐 유량동을 지나 성불사 뒤 능선을 따라 태조산을 오르는 5.3㎞ 길이의 코스를 이용한다.
산자락에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대사찰이라는 각원사(覺願寺)가 있는데, 1977년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재일교포 각열거사(覺列居士) 김영조(金永祚)의 시주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성금으로 세웠다. 각원사 일대는 관광단지로 조성되어 천안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그밖에 가족단위 국민관광휴양지인 태조산수련장이 있고 서북쪽 산중턱에 고려시대의 사찰인 성불사(충남문화재자료 10)가 있다. 인근에 독립기념관, 유관순유적지, 현충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자료 9> 각원사(覺願寺)
○ 요약 :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태조산 기슭에 있는 사찰.
○ 창건시기 : 1977년
○ 창건자 : 김영조
○ 소재지 : 충남 천안시 안서동 산 98-83
○ 본문 : 재일교포 각열거사(覺列居士) 김영조(金永祚)의 시주로 1977년 5월에 세워졌으며, 천안의 진산이라는 태조산에 자리잡고 있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찰을 세우려 한 것이 발원의 본뜻이다.
현재 이곳에는 대웅전(大雄殿), 설법전, 관음전(觀音殿)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높이 12m, 둘레 30m, 무게 60t에 이르는 거대한 청동아미타불상과, 엄청난 규모의 태양의 성종이 특히 유명하다. 또한 1996년 10월 15일에 낙성된 대웅전은 목조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이 절의 언덕에는 203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백팔번뇌와 관세음보살의 32화신, 아미타불의 48소원 및 12인연과 3보(寶) 등 불법과 관계있는 숫자를 합해서 정한 것이라 한다. 경주 불국사(佛國寺) 이래 최대의 사찰이며, 현재 각원사 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