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의술
바이올린을 만나다
중학교 3학년 때 다니게 된 부산 ‘사도의 신앙 교회’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어요. 그 교회는 규모가 작았지만 관현악단이 있어서, 바이올린 뿐 아니라, 각종 현악기와 관악기들을 갖추고 있었죠. 저희 가족은 규모가 큰 교회에 다니다가 가족 같은 분위기의 이 교회가 마음에 들어서 아주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지요. 교회 행사에도 모두 참석하였어요. 저와 동생 둘 모두 관현악단에 참여했습니다. 관현악 신입생들은 모두 선배에게서 레슨을 받았는데, 저의 선생님은 바이올린 전공을 꿈꾸는 고등학교 1학년 누나로, 그 교회 목사님의 따님이었어요. 저는 처음에는 교회에 있던 헌 바이올린을 사용했는데, 실력이 붙자, 당시 가격이 3만원인 국산 바이올린을 구입했어요. 바이올린을 떨어뜨려 뒤판이 깨어지거나 활이 부러지면, 목사님이 철사와 아교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고쳐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손재주였어요. 그런 바이올린과, 철사로 만들어진 바이올린 줄로써 열심히 연습했는데, 집에서 연습하면, 가족들이 시끄럽다고 해서 곤란한 적이 많았어요. 형편없는 실력에 값싼 악기로 연주를 하니, 깽깽이 소리가 나서였겠죠. 대학에 들어가서는 관현악단 동아리인 ‘메디컬 쳄버 오케스트라(MCO)’에 가입했었는데, 처음부터 한 건 아니었어요. 값싼 악기로 연주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1984년 당시 동아리 월회비 5천 원이 부담되었기 때문이었어요, 더욱이 그 동아리에 부자 자녀들이 많다는 소문이어서 제가 씀씀이를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였죠. 그런데 그 동아리의 가을 연주회를 보고 너무 멋있어서 가입하려는 의사를 슬쩍 비쳤는데, 한 해 선배인 그 동아리 회장이 계속 찾아와서 가입을 재촉하는 거였습니다. 당시에는 바이올린을 할 줄 아는 학생이 귀했기 때문이었죠. 연주회는 1년에 2번 하였고, 가끔 스승님 퇴임식이나 선배님 결혼식에도 연주를 갔고, 여름방학 때는 폐교나 연수원에서 3박4일로 합숙 연습을 하였지요. 저는 열심히 연습을 하였고, 본과 1학년 때에는 근로장학금을 타서 30만 원짜리 일제 바이올린을 구입하였어요. 실력도 약간 늘어서, 본과 2학년 때에는 악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역대 악장 중에 가장 실력이 없는 악장이었을 겁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어요. 연주가 클라이맥스로 갔을 때, 솔로나 퍼스트 바이올린의 줄이 띵, 하고 끊어진 적이 2년 연속 있었어요. 연주하다가 바이올린의 턱받침이 바닥에 떨어진 적도 있고, 선배는 악보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져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지요. 친구는 연주회 전날 첼로가 자신의 발에 걸려 땅에 떨어져서 깨지는 바람에, 연주에 참가를 못한 적도 있었습니요. 이렇게 시작한 바이올린이 지금은 제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연주하는 의사, 봉사하는 의사
저는 교회에서 선배에게 돈 들이지 않고 바이올린을 배웠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무주에서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할 때 군수님과의 모임이나 행사 때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구에서 개원을 한 후에 ‘어르신 마을’이라는 요양원에서 요청이 와서, 한 달에 한 번씩 그곳을 방문하여 어르신들이 건강을 체크하게 하게 되었는데, 바이올린 연주도 들려드리면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고 시작한 것이, 점차 인원이 늘어서 전 직원이 참가하게 되었어요. 2013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음악 진료’라고 부릅니다. 주로 뽕짝 곡을 연주하는데,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곡이 <대지의 항구> 이므로, 이 곡을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다가 연주가 끝나고 앵콜 신청이 들어오면 <대지의 항구>를 연주하죠. 이 곡을 연주한 지가 30년이 넘어서 눈 감고도 연주하는데, 어르신마을에 방문하기 전날에 연습을 하지 않으면 꼭 한 두 군데 실수를 하더라고요. 이것이 바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고뇌가 아닐까 하고 짐작이 되더군요. 언제이던가, 어르신마을에 음악진료를 다닌 지 거의 1년이 지난 날, 그곳의 직원 한 분이, 1년 동안 저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하셨어요. 제가 30여년 바이올린을 연주했어도, 그 후에 더 실력이 좋아질 여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희 연주를 따라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어르신들을 보면 신이 납니다. 앞으로 저의 희망은, 의원 앞에 있는 반월당 지하상가 분수대 무대에서 직원들 모두가 연주하는 것입니다. 곧, ‘두 밸런스 센터’ 개소식을 저의 1층 의원 앞거리에서 할 예정인데, 이때에도 직원 모두 연주를 할 예정입니다.
그림을 만나다
그림은 아마 3살 때부터 열심히 그렸던 것 같은데, 집안의 벽에 온통 낙서를 해도 부모님께서 야단을 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께서 대구의 신명여고의 물리과목 교사이셨는데, 학생들이 시험을 치고 난 후에 버리는 시험지를 집에 갖고 오셨기에, 그 뒷면에 그림을 마음껏 그렸어요. 당시에는 신문지로 화장지를 대신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종이가 귀했어요. 어쨌든 저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었고, 아버지께서 그림을 고쳐주시면서 늘 칭찬을 해주셨어요. 아버지의 그 칭찬이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원천이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에도 종이와 물감의 가격이 부담이 되던 때였고, 제가 다니던 교회의 성탄절 연극 준비를 제가 맡게 되어 커다란 종이와 물감으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손재주가 좋으셨는데, 로마병사의 투구를 어떻게 만들까 궁리할 때, 아버지께서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바가지를 엎어놓고, 신문지를 한 장 덮고, 귀얄로 풀을 칠하고, 그 위에 신문지를 한 장 덮고 귀얄로 풀을 칠하는 작업을 반복해서 투구모양이 되면 말려서 가위로 적당히 자르고 그 위에 은박지를 붙이니 멋진 로마 투구가 되는 거예요.
초상화 그리는 의사
중학교에 들어가서 부터는 초상화에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는 초상화가들이 멋있게 초상화를 그린다고 하잖아요. 저도 초상화를 잘 그리면 멋있게 살고 돈도 벌수 있을 거 같았어요. 학교나 집에서 틈만 있으면 친구를 앉혀놓고 연습종이에 얼굴을 그렸어요. 그러다가, 초상화의 원리를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얼굴의 부분 부분을 자로 재서 똑같이 종이에 옮기기로 작정하고, 동생을 하루에 1시간씩 앉혀서, 그런식으로 7일을 그리니까 비슷하게 되더라고요. 그 다음엔 가족들을 하루 1시간씩 그렇게 그렸지요. 부지런하게 측정해서 종이에 옮기면 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입체감이 없잖아요. 입체감은 중학교를 마치고 봄방학 때 딱 한 달 다닌 미술학원에서 배웠어요. 학원비가 부담되었지만, 거기서 익힌 석고상 데생은 평생 재산이 되었습니다.
제가 다닐 때의 의예과 2년 과정은 공부에서 벗어나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기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림에 열중하면서 “아름” 이라는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했어요. 그 때는 유화가 유행이었어요. 저는 합판을 잘라 니스를 칠해서 팔레트를 만들고, 캉통에 철사를 꽂아 기름통을 만들어서 사용했어요. 그리고, 산화아연 가루를 사서 피마자 오일을 섞어서 흰색 물감을 만들어, 캔버스의 밑칠을 하는데 사용했어요. 유화 뿐 아니라 스케치도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모델이 없어 거울을 보고 자화상을 많이 그렸어요.
초상화를 빨리 그리기 위해서 목탄으로 연습을 많이 한 후에, 본과 3학년 봄 축제 때 초상화 장사를 시작 했어요. 경북대 의과대학 캠퍼스는 아주 작은데, 거기 히포크라테스 동산이라고 하는 동산이 아닌 작은 공간이 있는데, 축제기간 동안 여기 한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이젤을 세우고 앉아 초상화를 그렸죠. 한 장에 2천원을 받았는데, 저녁에 장사를 마칠 무렵에는 꽤 돈이 모여서 친구들과 짜장면을 사먹기도 했어요.
초상화를 그릴 때는 처음에 눈썹을 그리고, 눈을 그리고, 코를 그리는데, 여기까지 가면 모델을 닮겠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여기서 이런 감이 오지 않으면, 더 그려도 닮지 않는 거예요. 반 정도 그린 후에 초상화를 모델에게 보여주고 곧 끝날 거라는 암시를 줍니다. 모델로 앉아 있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거든요. 완성된 초상화를 모델에게 보여줄 때 모델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흐뭇해 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 가장 황홀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도서관 복사집에 미리 얘기를 해 두어, 모델이 자신의 초상화를 갖고 가면 복사해서 나중에 저에게 달라고 하고, 모델에게는 복사집에 가서 자신의 초상화를 복사하고 가라라고 부탁하였어요. 그래서, 그 때 그린 초상화의 복사본을 많이 보관하였습니다. 축제가 끝날 때 쯤이면 돈도 벌었지만, 초상화 실력이 늘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계속 초상화를 그려왔고, 언제부터인가 색연필로 빨리 그리는 5분 초상화로 발전했습니다.
초상화 외에도 대학생 때에는 행사 포스터나 연극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기도 했어요. 그 때는 인쇄 하는 게 아니라, 두꺼운 도화지나 켄트지에 포스터칼라로 서 너 장 그려서 벽에 붙이는 것이었죠. 그리고, 의과대학 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그리는 건데, 한 달 내내 고민을 해야 했어요. 4 컷 안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었죠. 신문 만화를 그리는 분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소통하는 예술, 소통하는 의술
처음 개원을 했을 때는 환자 분들이 많지 않아서 캐리커처도 그려드렸어요. 환자 분들이 좋아하셨어요. 제가 무주에 살 때 군수님께서 서예 작품을 직접 써주셨는데 저는 그림으로 답을 했지요. 그림을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점에서 참 좋은 예술 활동이죠. 예술은 부자의 마음을 줘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나 행사장에서 악기연주를 듣는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해요. 음악은 식사 전의 ‘애피타이저’처럼 생기를 주지요. 다양한 문화 전시행사도 기획하고 싶어요. 병원 건물이 15층인데, 계단을 걸어내려 오면서 시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계단 시화전도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독자나 관객을 떠난 예술은 의미가 없잖아요. 예술을 생활 가운데서 가깝게 접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죠.
단편영화를 만들다
그림을 좋아하다보니 동영상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1990년 제가 인턴일 때 월급이 90만원이었는데, 90만원짜리 삼성캠코더를 구입했어요. 그것을 1년 카드 할부로 하니 120만원이되었어요. 인턴 때 동영상을 너무 열심히 찍는 바람에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인턴으로 찍히기도 했어요. 인턴을 마치고는 일제 히타치 사에서 만든 비디오 녹화기를 구입했어요. 녹화를 부분적으로 할 때 연결이 매끄러워서 편집기로 사용할 목적이었죠. 그 때는 어떻게 편집을 했는가 하면, 녹화 버튼을 누른 다음에 화면재생 과 음성재생 버튼을 누르고 하는 아날로그 작업이어서, 10분짜리 영상을 만들려면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들었어요. 그 때는 일요일 마다 집에 갈 수 있어서, 교회에 다닐 수 있었어요. 삼덕교회였는데, 청년부 친구들과 촬영을 많이 했어요. 청년부에서 눈 오는 겨울에 등산을 가면서 촬영을 하다가, 촬영에 참가한 일행만 길을 잃은 적이 있어요. 해가 질 무렵에 겨우겨우 일행을 만났지만요. 그리고 동성로에서 청년부 친구들을 촬영하고 있는데, 너무 연기를 잘해서인지, 행인들이 죽 둘러서서 구경을 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몇 가지 단편 동영상들을 만들었는데, ‘개구리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공보의 24시’ 등 스무 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무단 횡단을 하지말자는 메시지가 담긴 홍보 영상도 만들었는데, 그 당시 미국 대사관을 지키는 경비 경찰관이 즉석에서 출연하기도 했어요.(웃음). 진짜 영화를 만드는 일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제가 만들지는 못할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스토리를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의학적 지식이 있고, SF 요소가 있고, 액션과 코미디가 있는, 그리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교훈적인 스토리를 만들고 싶어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SF적이면서 삽화가 있는 시나리오도 써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