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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노인 길들이기
이것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21세기 현대사회의 단면이자 통증이다. 노인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에 팔구십 넘은 노인이 있는 집은 어느 집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노인이 되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현명해질 것 같고, 타인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훨씬 폭 넓어지리라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을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상노인이다. 상노인이란 80살 이상으로 치자. 상노인이 되면 체면과 유아적 아집만 남는다. 남이나 자식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나 자식으로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속에는 물질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밥 묵고 일찍 내리 온나. 너거 어매가 입원한단다.”
강노인은 새벽 댓바람에 이웃에 사는 시골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며느리의 대답이 시큰둥하다. 아내는 입원준비를 해 놓고 며느리를 기다리며 오전을 다 보냈다. 점심때 일당벌이 다니는 아들이 왔다. 일 안 갔냐고 물었더니 ‘일하다 왔지요. 어매가 입원 한다 캤다면서요?’ 한다. 불퉁스럽다.
“에미는 머하고?”
“바뿌답니더.”
저녁 답이 되어도 며느리는 코빼기도 안 비쳤다. 시아비 저녁상 봐 줄 생각도 없는지. 혼자 저녁을 챙겨먹자니 노인 체면에 할 짓이 아니지만 아내도 없으니 별 수 없다. 보온밥통에서 남은 밥을 퍼고, 국을 데워 대충 저녁을 때웠다. 다음 날도 며느리는 결석을 했다.
“아버님, 저 왔어요.”
사흘만에야 모습을 드러낸 며느리다. 시아비를 우습게 알다니. 강노인은 며느리가 마당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며느리는 또 한 번 강노인을 불렀다. 강노인은 못 들은 척 했다. 괘심한 것. 시어미가 없으면 시아비를 챙기는 것이 며느리의 도린데. 전화 한 통도 없다가 이웃집 마실 오듯 맨송맨송한 얼굴로 마당을 질러오다니. 강노인은 기척도 안 냈다. 검은 봉지를 들고 현관 미닫이를 쓱 밀고 들어서던 며느리는 샐쭉한다.
“방에 계시면서 왜 기척도 안 하세요? 아침 드셨어요?”
며느리는 마루에 올라서며 종알댄다. 강노인은 무심한 척 신문만 뒤척인다. 며느리의 표정이 싹 변한다. 강노인은 힐끗 며느리를 봤다. 고얀 지고, 강노인은 어른 체면에 마음을 누그러뜨렸지만 뱉어내는 말이 고울 리 없다.
“있는 밥도 못 무까. 내 걱정 하지마라.”
며느리라고 그 속을 모를까. 며느리는 강노인의 말이 살갑지 않자 애써 누그러뜨렸던 불만이 목울대를 넘어온다. 아흔의 상노인인데 젊은 내가 참아야지. 그냥 웃고 말자. 노인 상대로 결기 세워봤자 내 속만 멍든다. 평생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수저만 놀린 어른인데 어쩌겠어. 반찬 몇 가지 조물조물 만들어 새 밥 지어 드려야지. 속이 썩어도 할 수 없다. 노인 상대로 속 끓여봤자 내 속만 숯검정 되지. 툭 털어버려야 내가 사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노인의 표정에 노기가 묻어 있으니 고까운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며느리를 하녀 부리듯 하는지 봅시다. 나는 뭐 배알도 없는 여잔 줄 아시나. 그래요.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보시오. 오기가 불끈 솟는다.
“잘 하셨어요. 끼니는 아버님이 챙겨 드세요. 반찬 두 가지 만들어 왔는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갈게요. 내일은 제가 볼일이 있어 못 와요.”
“안 와도 된다.”
강노인의 목소리는 차갑다. 며느리는 들은 척 만 척하며 들고 왔던 검은 봉지에서 반찬 두 통을 꺼내 냉장고에 넣어놓고 현관을 나간다. 강노인은 잰걸음으로 삽짝을 나서는 며느리의 뒤통수를 째려봤다. 감히 어른 앞에서. 예전 성질 같았으면 목침이 현관에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어디서 배워먹은 행동거지냐고 불벼락을 내렸을 것이다. 강노인은 목침을 베고 누웠다.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저녁에는 밥솥에 밥이 없다. 강노인은 쌀을 씻어 놓고 병원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며느리가 안 왔냐고 묻는다. 안 왔다고 했더니 병원에도 코빼기도 안 보인단다. 며느리가 변하긴 변했다. 밥을 지으려면 쌀에 물을 얼마나 잡아야 하는지 물었다.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담아놓고 손을 넣어 손등 위에까지 물을 잡으면 된단다. 쌀을 밥솥에 안쳤다. 취사를 눌러놓고 냉장고 속을 뒤졌지만 반찬도 바닥났다. 김치만 식탁에 꺼내 놓고 밥이 뜸 들기를 기다렸다. 밥이 고두밥이다. 누룩과 섞어 막걸리 담가도 되겠다. 아내가 한 밥이라면 당장 새로 밥 지어 대령하라고 불호령을 내렸을 텐데. 강노인은 밥을 물에 말아 김치랑 먹었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해서 혼을 내려고 벼르다가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이라 그냥 둔다. 설마 내일은 오겠지. 여태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며느리가 강노인의 수발을 들었다. 때마다 와서 끼니를 챙겨주고 빨래며 집안일을 해 놓고 갔다. 때 되면 오겠지.
그러나 다음날에도 며느리는 오지 않았다. 또 사흘 째 되는 날, 강노인은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밥은 할 줄 안다면서 국 끓이는 법 좀 알려달라고. ‘안 가도 된다면서요.’ 며느리의 대꾸가 야멸쳤다. 강노인은 바쁘면 그만 두라며 전화를 끊었다. 점심때 며느리가 왔다. 반찬거리가 든 소쿠리를 들고 왔다. 강노인은 은근히 며느리가 반가웠다. 며느리는 선걸음에 부엌에 들어가 똑딱똑딱 반찬을 만드는 것 같았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입맛을 돋우었다. 고두밥도 퍼내고 새 밥을 짓는 것 같다. 밥 냄새가 구수하니 좋았다. 지글지글 불고기 냄새도 났다.
강노인은 넌지시 며느리에게 말을 걸었다. 은근히 살가웠다.
“어매한테는 댕기 왔나?”
“애비가 퇴근하면서 들리는데 저까지 갈 필요 없잖아요.”
“니를 보내라 쿠던데. 머리도 감고 목욕도 좀 해야 것다고.”
“걸어 다니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씻으라고 하세요.”
“아푼 사람이 혼자 씩것나?”
“아프긴요.”
“그럼 너거 어매가 꾀병이란 말이가?”
누그러졌던 강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쨍쨍해졌다.
“누가 꾀병이라 했어요. 어머님은 그게 병이라는 거지요. 아버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동네서 어머님과 아버님처럼 노후 복이 많은 노인이 없다는 걸. 아쉬울 게 하나도 없어서 병이 나신 거죠. 동네 할머니들이 호강에 받혀 요강에 똥 싼다고 해요. 겉보기에 멀쩡하신 분이. 며느리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툭 하면 와서 죽 끓이라 밥해라 하니 말이 돼요. 멀쩡하게 회관에 나가 노시고, 온종일 화투 칠 힘은 있어도 집에 와서 밥 차려 먹을 힘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모자라 툭 하면 입원시켜 달라니. 어머님은 요양원에 들어가셔야 해요. 아버님도 생각해 보세요. 이게 벌써 몇 년 짼지 아시잖아요. 노인이 되면 몸에 기운 빠지는 거야 당연한데 기운 없다는 분이 저보다 더 날렵해요.”
“흠, 흠”
강노인은 헛기침을 했다. 며느리가 쏟아내는 말의 폭포에 떠밀러 입도 벙긋 못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동네에서 강노인 만큼 팔자 좋은 사람도 없다. 매달 일정금액의 연금이 나오니 돈에 쪼들릴 일도 없지. 매사에 수족처럼 부리는 아내와 아들 부부가 있지. 구십 노구라지만 아직 짱짱하지. 강노인은 구십 년을 살면서 평생 아내와 자식에게 호령하는 재미로 살아왔다. 젊어서부터 기갈 드세고 영리했던 강노인은 어딜 가나 남에게 꿀리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집안에서도 강노인 한 마디가 바로 법이었지만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대쪽 같은 어른으로 통한다. 강노인 집은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 들어가기보다 두렵다는 말이 우스개로 떠돌 만큼 동네 사람들조차 어려워하는 노인이다. 동네 노인들이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강노인 귀에는 들어갈 일도 없으니 성격이 바뀔 방법은 애초에 없는 사람이다. 다만 남에게 경우 틀린 짓 하는 법 없고, 깐깐하고 강직한 성품이라 알려져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따끈한 햇살이 마루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며느리가 점심상을 차린다. 밥상이 마루에 놓인다. 밥상의 중앙에 놓인 뚝배기에서 된장이 자작하게 끓고, 불고기 몇 점과 버섯볶음 등 정갈한 밥상이다. 강노인은 침을 꿀꺽 삼킨다. 며칠 만에 밥상다운 밥상을 받았는가 싶으니 괜히 눈시울이 따끔거린다.
강노인은 며느리와 겸상을 해서 밥을 먹으며 문설주 위의 벽을 바라본다.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른 노인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본다. 강노인과 닮았다. 수염만 떼어버리면 영락없이 판박이다. 며느리는 묵묵히 수저만 놀린다. 기골이 굵고 성격이 대쪽 같았던 할아버지다. 동네에서 ‘호랭이 할배가 잡으로 온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는 어른이다. 강노인은 또 조부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에 너거 시어매는 조부님 시집살이를 많이 했니라. 성질이 강직하고 무서웠제.”
할아버지는 세 가지 일화를 남겼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가서 옥살이를 한 전적도 있고, 둘은 증조부님이 아파 사경을 헤맬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소생케 했다하여 효자비를 받았고, 셋은 동이 술을 마셔도 취한 것을 본 적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막걸리를 마셨다. 밥상 위에 반주 한 잔이 빠지면 밥상은 마당으로 날아갔다. 할아버지는 아흔 살에 마당에 쓰러져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또 그 이야기 하시려고요?”
강노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일은 한창 타작을 해다 우케를 널어 말리던 가을이었다. 마당을 볼볼 기어 다니던 손녀딸이 우케가 널린 멍석에 들어가 앉아 놀았다. 긴 장죽을 물고 동네 한 바퀴를 하고 오던 할아버지는 선걸음에 손녀가 앉아 노는 멍석을 우케와 함께 둘둘 말아버렸다.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놀라 부엌에서 튀어나오던 아내도 방에서 길쌈을 하던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망부석이 되어 달달 떨었다. 그때 강노인은 스물 두 살이었고 아내는 스무 살이었다. 우케에 들어가 놀던 아이는 강노인의 둘째 딸이었다.
“씰데 없는 가시나나 내질러 놓고.”
할아버지는 장죽을 물고 힁허케 다시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아내는 멍석을 펴고 온 몸에 나락 티끌을 뒤집어쓰고 눈물콧물 범벅이 된 딸을 안았다. 어머니는 아이를 혼자 우케에 들어가게 했다고 아내를 닦달하고 젊었던 강노인 역시 아내를 모질게 내몰았다. 아내는 입도 뻥긋 못하고 딸을 가슴에 안고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아내는 순하고 착했다. 입이 굼떠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워낙 할아버지가 엄했던 탓이기도 했다.
“증조부님의 성격이나 기질을 쏙 빼 닮은 분이 아버님 같아요.”
하면서 며느리가 웃는다. 며느리는 강노인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 순사 끄나풀 했다는 집은 삼시 세끼 쌀밥에 고기 국 먹어도 독립운동 했다는 집은 하루 한 끼 풀데 죽도 못 끓여 먹었다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슬쩍 강노인의 기를 눌러버리고 초를 치기 일쑤다. 농주 한 잔 이야기가 나오면 ‘어른이 어른답지 않았네요. 그 시절 접시 하나 장만하려면 비쌌을 텐데. 생각 없는 노인이 폭력만 휘둘렀잖아요. 울 어머니도 참 착하셨네.’ 라고 대꾸를 하거나 우케 이야기에서는 ‘아버님, 그런 분이 요즘 세상에 안 태어나기 천만다행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노인이 있다면 그건 일찌감치 고려장 당하고도 남지요. 어떤 며느리가 그 꼴을 봐요. 부모보다 자식이 귀한 법인데. 더구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그런 대접을 했다면 마땅히 의절하고도 남을 겁니다. 형님은 증조할아버지라면 아주 싫어하던 걸요.’ 강노인은 며느리를 당할 재간이 없다.
“아버님, 요즘은 노인이 변해야 산대요. 어머님처럼 시부모 모실 며느리는 없어요.”
강노인은 멀뚱히 며느리를 쳐다봤다. 저것이 언제부터 저리 되바라졌나. 싶은 것이 기가 막혔다. 근래 들어 며느리는 직설적이다. 며느리의 그런 점을 귀엽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요즘 들어 자꾸 강노인 속을 긁는다. 자칫하다가는 강 씨 가문이란 배를 이끌고 가던 선장이 선장 자리를 내 놔야 할 불행한 사태가 도래할 것 같아 새삼스럽게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현대는 여성상위 시대라지 않는가. 평생 쥐 앞의 고양이처럼 살던 아내조차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덤비려고 벼르질 않나. 며느리는 아예 노인은 뒷방 차지나 하고 얌전히 있어야 그나마 어른 대우 받는다지 않나. 노인이라고 젊은 애들 가르치려고 들었다간 험한 꼴 보는 세상이라지 않나. 말세다.
대략 칠팔년 전부터 강노인이 부리던 배에 복병이 숨어들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복병이란 바로 아내의 병이었다. 아내는 자꾸 아프다고 누웠다. 젊어서부터 불면증을 호소하던 아내는 팔십 살을 고비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만큼 싫어했다. 강노인이 고함을 지르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지만 등 돌리고 눕거나 강노인 눈에서 벗어나면 넋두리가 한정 없이 늘어났다.
“와 안 죽고 이리 오래 살아 애를 멕이꼬. 딱 죽었시모 원도 한도 없것다.”
“시방 머라 캤노?”
강노인이 한 마디 하면 아내는 입을 다물었다. 강노인은 수시로 아내를 닦달했다. 방에 누워만 있으면 다리에 힘 빠진다고 유모차 밀고 동네 회관에 나가서 놀든가. 골목이라도 한 바퀴 돌다 오라고 하면 못 이겨서 나가긴 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아내의 병명은 화려해졌다. 요통, 골다공증, 속병, 고혈압, 대상포진, 불면증, 등등 온갖 검사를 다 했다. 큰 병은 없고 장기도 멀쩡했다. 멀쩡한 양쪽 무릎에 번갈아가며 연골주사를 맞을 지경이 되었다. 위 내시경을 해도 위는 깨끗한데 줄장 속이 아프다고 죽을 먹었다. 밥 맛 없다. 기운 없다. 속이 쓰리다.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잠을 한 숨도 못 잔다. 결국은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일단락되곤 한다. 병원에 입원하면 보통 2주에서 한 달을 죽쳤다. 죽어나는 것은 옆에 사는 며느리와 아들이었다. 한창 농사철에도 들에서 일하다가 달려와 시부, 시모를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강노인 조차 잔병치레를 하니 빠끔한 날이 없었다. 한 마디로 강노인과 아내가 타고 시소게임을 하는데 중간에 앉아 양쪽의 중심을 잡아주던 며느리가 등 터지게 생겼다. 결국 며느리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그게 벌써 육칠 년 되었나.
“아버님, 어머님이 아무래도 치맨 것 같아요.”
“아이가, 치매는 아무나 걸린다 카드나? 너거 어메 정신은 말짱하다.”
“그럼 아버님은 어머님이 정상으로 보이세요? 겉보기에 멀쩡한 분이 저러는 것이?”
“아푼께 아푸다는 기제.”
“아버님, 이젠 저도 힘들어요. 어머님이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한두 끼는 아버님이 챙겨 드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밥을 챙기무야 된다꼬? 시애비한테 거기 할 소리가?”
처음 강노인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며느리 탓만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입원하면 당장 의식衣食이 문제다. 강노인에게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간다는 것을 언감생심이다. 강노인의 의식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더구나 아내가 치매라니. 아무리 말하라고 생긴 입이라지만 어른 앞에서 할 말이 따로 있는 법인데 며느리의 태도가 갈수록 불손해진다. 며느리만 아니다. 아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아내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 더 못 견딜 일이다. 제 어미가 아프다는데 갈수록 콧방귀만 뀌니 환장할 일이다. 아프다고 누웠던 아내가 입원을 원하자 며느리가 냉정하게 말했다.
“어머님은 지금 돌아가셔도 아무도 아깝단 말 하지 않아요. 돌아가실 때도 됐잖아요.”
“니가 지금 무슨 말을 그리 하노? 당장 내 집에서 나가거라.”
강노인은 며느리를 내쳤다. 그날 서울에 사는 두 딸과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너거 어메가 아무래도 큰 병이 들었는 갑다. 자꾸 저리 아푸다쿠이 병이 이싱께 아푸다 쿠는 기다. 모시고 큰 병원 가 봐라. 여거 병원에서는 병이 없다는데도 자꾸 아푸다 쿠이 암만 캐도 큰 병원에 가 봐야 알것다. 너거 동상은 마음병이라 카는데 너거 어매가 마음병 들기 머가 있것노. 분명 몸에 탈이 생긴 기다.”
그때는 두 딸과 서울아들이 당장 달려왔다. 아내와 강노인을 서울로 모셨다. 서울대학병원에서 검사를 하고, 유명하다는 한방병원에 가서도 검사를 했지만 아내의 몸에는 걱정할 만큼 큰 병은 없었다. 서울의 세 자식은 번갈아가며 유명 음식점이랑 관광지를 데리고 다니며 생전 처음 맛보는 귀한 음식도 사주고, 백화점에 가서 비싼 옷도 사 주며 호강을 시켜주었다. 세 집 순례기는 보통 일주일이면 끝났다. 세 자식 집을 한 순배 돌고나면 어느 집이나 두 노인이 시골집에 내려가길 노골적으로 바라고, 아내 역시 더 이상 서울에서는 못 살겠다고 시골집에 가자는 것이다. 자식들 눈치가 보이는 거다. 강노인은 서울이 좋기만 한데. 서울아들에게 의탁하면 만사가 좋을 것 같았다. 병원 가깝지. 구경할 것 많지. 호기심 많은 강노인에게 서울은 볼 것 천지다. 아파트라는 곳도 시골집보다 좋았다. 며느리가 끼니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려주니 호강은 따 논 당상이었다.
“우리가 고마 서울 큰 아한테 와서 살자.”
“당신만 서울에 사소. 나는 촌에 갈라요.”
아내는 질색 팔삭을 했지만 강노인은 서울아들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아들은 며느리에게 물어보겠다더니 그날 밤, 아들부부는 대판 싸움을 했다. 강노인과 아내는 옆방에서 죽은 듯이 있었다. 아니, 한숨만 쉬었다. 딸들은 출가외인이니 자기들은 친정 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했다. 다음 날 강노인은 아내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왔다. 시골며느리가 시외버스 터미널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두 노인 모시러 오는 며느리가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것이 벌써 육칠 년은 더 됐지 싶다.
며느리는 반찬이랑 국이랑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놨으니 끼니 거르지 말고 챙겨 잡수란다. 강노인은 ‘니가 고생이 많다.’고 말한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며느리 역시 배시시 웃으며 마당을 나간다.
강노인은 자식들에게 서운하다. 보릿고개 넘기면서도 자식들 먹이려고 주린 배를 허리띠로 졸라맨 부몬데.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거추장스러워 하다니. 문제라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인데 강노인은 인정할 수 없다. 노인 백세 시대 아닌가. 오래 살고 싶지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돈 있겠다. 건강만 잘 챙기면 백세까지 무난히 사는 세상이다. 강노인은 여든 대여섯까지도 다리에 기운 빠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팡이를 짚는다는 것도 자존심 문제였다. 팔십이 된 아내가 유모차를 미는 것을 보고 혀를 쯧쯧 찼던 노인이다.
“멍청한 것, 지 몸 관리도 못해서 벌써 그 괴상한 물건을 끌어? 손자 손녀 키울 때도 안 썼던 것을 쓰다니. 넘세스럽다.”
그러면서 아내를 구박하던 강노인도 미수가 되었을 때는 지팡이를 짚기 시작했다. 지팡이 없이는 동네 한 바퀴도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몸에 좋다는 건강식은 수시로 구해 독식을 하고 참붕어. 메기, 사골, 보신탕, 홍삼, 로열젤리, 장수도라지 등등, 한약과 영양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기력은 자꾸 떨어졌다.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몰고 사방천지 돌아다닐 때가 좋았다. 게이트 볼 경기장에 오갈 때만 해도 쌩쌩했다. 시나브로 오토바이 타는 것이 힘에 겨워지자 자전거를 구입해서 타고 다녔다. 이태 전만 해도 자전거는 쌩쌩 잘도 탔는데. 지금은 자전거도 중심이 안 잡혀 못 타겠다. 그래도 강노인은 스스로 늙음을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식들에게 이것 해서 보내라, 저것 해서 보내라 강요가 당연했고, 아내와 옆에 사는 자식에게 툭 하면 곰 하라고 닦달 했다.
“멈스리 난다. 일평생 저 영감탱이 곰 해 바치다 쪼그랑망테이가 됐다. 올매나 오래 살라꼬 저리 사람을 덜덜 볶을꼬. 니가 없시모 아무것도 안 되것다.”
아내는 며느리를 붙들고 하소연이 늘어났다.
강노인은 식성이 까다롭다. 젊어서부터 장이 나빠 고생했다. 자연히 속이 편한 음식, 불편한 음식을 가리게 됐다. 특히 무슨 곰이든 단백질 덩이를 줄장 먹어줘야 기운이 났다. 강노인은 아내가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이삼일을 장작불을 모아가며 뽀얗게 우려낸 곰이야말로 진짜로 쳤다. 며느리는 장작 불 때는 것이 귀찮다고 가스 불에 끓였다. 진하고 구수해도 뭔가 불결한 것 같고 곰 맛이 안 나는 것 같다. ‘곰은 뭐니 뭐니 해도 장작불을 뭉긋이 대서 푹 고아야 제 맛이 나는 거다. 음식은 정성이 반 맛이라 했다.’ 강노인이 알아듣게 말해도 며느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맛이 그 맛이라는 거다. 아내가 곰 하기를 싫어하면서 간혹 며느리가 제 집에서 곰을 해 왔다. 숟가락질하기가 껄끄럽다. 실인즉 평생 아내의 손맛에 익숙한 강노인이니 며느리가 해 주는 반찬이나 곰이 입에 맞을 리 없다. 아내가 해 주는 반찬도 옛날 맛이 안 난다고 타박을 하다 ‘그 맛이 그 맛이 거마.’ 아내가 구시렁거리기라도 했다간 밥상이 마당에 날아갔다. 이삼 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강노인도 며느리의 눈치를 본다. 아내가 자꾸 아프다고 자리보전하면서 의지할 상대가 옆에 사는 자식과 며느리니 도리가 없다. 사실 며느리는 시집 올 때만 해도 곱게 자란 티가 났다. 밥을 해 먹을 줄도 몰랐고, 반찬을 할 줄도 몰랐다. 그런 며느리도 아내의 손맛을 흉내일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고부간에 큰 갈등 없이 지내는 것도 며느리의 성격 덕이다. 잘 보면 대범한 성격이고, 잘 못 보면 칠칠치 못한 며느리지만. 동네에서 친딸이라도 그렇게 못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손자손녀가 대학 들어갈 때 입학금 명목으로 촌지를 준 것도 그동안 시부모에게 잘 한 상이었다. 그런데.
“아버님, 이젠 저도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대 놓고 대들 때는 학을 떼겠다. 한때 며느리가 미웠던 적이 있다. 아들 부부와 한 집에 살다 손자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아들은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분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오순도순 손자손녀 재롱 보며 당신 할아버지처럼 살다 이승 떠나려니 했는데 불시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몇 날 며칠 곡기를 끊었지만 아들은 기어코 가솔을 이끌고 남의 빈 집을 빌러 나갔다. 강노인은 현금 한 푼 안 주고 빚만 몽땅 안겨 주었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내쳤지만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막내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강노인은 환갑이 되자 두 아들에게 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당신 대신 문중 대소사를 맡아주고, 노후를 의탁할 생각이었다. 강노인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모를 리 없다. 평생 신문과 책을 읽고 붓글을 써온 어른이다. 핵가족 제도가 보편화 될 때는 세상이 말세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부터 노인 문제가 슬슬 물위로 떠올라오기 시작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들이 시골로 내려왔다. 강노인은 장남이 오길 바랐지만 막내가 왔다. 막내는 칠팔 년을 함께 살았다. 손자손녀 덕에 행복했다. 그 아들이 분가를 하다니 분명 며느리의 소작所作임이 분명했다.
“인자 너거는 딴 살림 났싱께 너거 살림은 너거가 알아서 살아내야 할 끼다.”
못을 박았지만 농사일은 아들과 며느리가 없으면 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아들 부부는 분가만 해서 따로 산다 뿐이지 시댁 농사를 지었다. 농산물 판매 수익도 강노인 통장으로 들어왔다. 강노인은 아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았다. 간혹 손자손녀에게 용돈은 줄망정 생활비 명목으로 주는 돈은 아예 없었다. 아들은 따로 축산을 시작했다. 농협에 저리 농자금을 탔다고 했다. 땅도 샀다고 했다. 집도 새로 짓는다고 했다. 빈손으로 빚만 안고 나간 아들이 자립을 한다 싶으니 대견하기도 했다. 빚으로 공중누각을 짓는 일이란 것을 알 리 없었다. 강노인 수중에 든 돈만 안 나가면 됐다. 강노인은 해마다 잔고가 늘어나는 통장을 보는 재미가 생겼다. 연금은 연금대로 저축하고, 벼 수확이나 마늘, 콩 등, 농토에서 나온 수입으로 생활을 하니 돈이 모일 수밖에. 강노인은 젊어서 못 해 본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양복이나 와이셔츠도 인근 도시의 유명 양복점에 가서 맞추어 입고, 구두도 맞추어 신었다. 오토바이도 낡은 것은 팔아버리고 새 것을 사서 친구들과 전국 유람도 했다. 살맛이 났다. 호주머니가 두둑하자 건강만 잘 챙기면 된다 싶었다. 몸에 좋다는 건강식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지갑에는 항상 빳빳한 새 돈이 한 뭉치 들어 있어야 했다. 아내의 눈이 모로 돌아가도 알 리 없었다.
“와이리 잠이 안 오꼬. 잠 좀 푹 자 봤시모 좋것다.”
아내의 불면증은 수위를 넘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을 못 잤다. 얼굴에 짜증이 자글자글 했다. 특히 밥 때가 되면 ‘딱 죽었시모 좋것다.’ 소리를 달고 살았다. 툭하면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아푸다. 와서 죽 좀 끼리라. 내가 아푸다. 병원 좀 가자. 내가 아푸다. 와서 밥 좀 해라.’ 아내는 며느리가 하루만 출근을 안 해도 안절부절 못했다. 며느리는 시댁에 필요한 생필품에서부터 시부모 모시고 병원 다니기, 목욕탕 다니기, 오일장 봐오기, 외식시켜 드리기 등등, 도맡아 했다. 어쩌다 며느리가 못 온다면 아내는 화를 냈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해서 모진 말을 했다.
“집구석에서 하루 죙일 뭐 하냐? 반찬도 떨어졌는데.”
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더 심하게 며느리를 닦달한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 오면 싸 보내고 먹일 것을 몽땅 시골며느리에게 시켰다. 아내는 도시에 사는 자식들 도착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끝내놔야 직성이 풀렸다. 아내는 평소 말이 없는 대신 어쩌다 말을 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다.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들었거나 뼈가 있었다. 며느리도 자주 피를 흘리는 것 같은데 샐쭉 했다가도 금세 툭 털어버리고 웃었다. 며느리의 성격이 좋아서 고부간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까. 강노인은 며느리의 변화를 조금씩 눈치 채기 시작했다. 작은 불씨가 서서히 번져 걷잡을 수 없이 큰 불이 된다. 며느리도 자꾸 아프다고 했다.
“젊은 아가 와 그리 골골 하노. 내가 니 나이 때는 팽팽 날아 댕깄다.”
아내는 며느리 면상에 대고 퉁을 주었다. 아내는 뼈대 있는 이 초시 댁 둘째 딸로 열여섯 살에 강 씨 문중에 시집을 왔다. 강노인 부부는 칠십 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의좋게 살았다. 의좋게 살았다는 것은 어패가 있는 말이다. 아내는 길 잘 든 소였다. 부리기만 하면 어디든 어떤 일이든 해 냈다. 토를 다는 법도 없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다. 한 마디로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집에 와서 남편 시중을 들었다. 한여름을 온통 모시옷으로 사는 강노인은 풀 먹인 모시 올이 하나라도 빳빳하지 않으면 몸에 걸치지 않았고, 아내가 풀이 잘 됐다며 한 마디라도 구시렁거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모시적삼을 쫙쫙 찢어버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 하랴.
들판이 누렇게 익은 가을이었다. 타작을 해다 곳간에 재던 날이었다. 아내는 온종일 아들과 며느리와 논에서 탈곡기로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고 경운기에 잔뜩 싣고 온 나락 포대를 창고에 옮겨 쌓는 일을 할 때다. 경운기에서 며느리가 끌어내린 나락포대를 겁도 없이 덜렁 안은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아이고 오매’하면서 나락포대를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꼼짝을 못했다. 평소 허리가 아프다고 밤이면 끙끙 앓던 아내였다. 허리가 아프다 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법이 없는 아내여서 예사로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대 맞고 오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제 어미를 승용차에 싣고 읍내 종합병원으로 갔다. 뼈 사진을 찍은 의사는 인근 대도시 큰 병원으로 가라했다. 척추 뼈 한 마디가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병원에서 레이저로 하는 척추시술을 받았다. 척추가 삭은 데다 골다공증도 심해서 수술은 안 되고 콘크리트로 땜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아들과 며느리, 큰 딸과 작은 딸과 사위가 놀라서 모두 달려왔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가 금세 죽을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의사는 석 달 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이틀 만에 퇴원한 아내는 평생 처음으로 호강을 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침대를 장만하고, 며느리는 곰을 고고 보약을 짓고, 아내에게 지극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강노인 역시 아내가 입이 심심하다면 과일을 챙겨 대령하고, 물이 먹고 싶다면 컵에 물을 담아 대령했다. 평생 남편의 부름에만 응하던 아내가 거꾸로 남편을 부리는 맛에 눈을 떴다. 물론 아내는 들일에서도 집안일에서도 손을 놨다. 삼시세끼 며느리가 차려주는 따끈한 밥상을 받았다. 딸은 노인이 밀고 다닐 수 있는 멋진 외제 유모차를 선물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네 상노인은 지팡이를 짚었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날씬하고 멋지게 생긴 일제 유모차를 밀고 골목을 다니며 으스댔다. 유모차는 쉴 때 앉을 수 있는 의자도 되고, 푸성귀 같은 것을 거두어 담을 수 있는 가방도 달려 있어 여러모로 편리했다. 처음에는 유모차 미는 것이 남세스럽다던 아내는 동네 할머니들이 부러워하자 기가 살았다. 아내로 인해 지팡이 보다 유모차가 훨씬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동네 할머니들은 너도나도 헌 유모차를 구했다. 우리 동네에 유모차부대가 출현하게 된 내막이다.
강노인은 아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라고 단정한다. 허리 병이 다 나아 다시 들일을 하고 집안일을 맡게 되자 아내의 입에서 자주 한숨이 나오고 넋두리가 이어졌다. ‘세상 헛살았다.’는 거다. 가끔 며느리에게 하소연이 늘어졌다. 아내의 말은 언뜻 들어도 강노인에 대한 불만이었다.
“요새 겉으모 너거 시아베랑 진작 갈라섰을 기다. 내가 만다꼬 그 고생을 함서 살았노 싶은 기 억울하다. 저 영감 뜻 받고 살먼서 오지게 고생만 했제. 일에는 베돌이 묵는 데는 악돌이라 쿠더이. 너거 시아베가 평생 그리 산 사람이다. 곰이나 보약이 떨어지모 불벼락이 났제. 인자 곰하는 것도 징글징글하다. 이래 살다 죽으나 저래 살다 죽으나 한 평생 사는 긴데. 내가 만다꼬 그리 머슴맹키로 살았시꼬 싶은 기 또옥 억울해 죽것다. 지금이라도 갈라설 수 있으모 내 혼자 단 며칠이라도 편케 살아 봤시모 싶다.”
아내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였다. 아내는 툭 하면 병원에 입원 했다. 입원만 했다하면 2주간은 보통이었다. 긴 병에 효자 나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얼마동안은 아내가 입원했다 하면 자식들이 난리였다. ‘어머니가 오래 살아야 하는데. 어머니 오래 사세요.’하면서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 준다. 건강식을 해다 준다. 곰을 해다 준다. 병원이든 집이든 주말이면 삼사일은 머물다 가던 자식들도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또 입원했어요? 제발 자식들 애 좀 그만 먹이세요.’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들도 딸도 병원비 하라며 두둑한 봉투를 내 놓더니 봉투가 자꾸 얇아졌다. 봉투만 얇아진 것이 아니다. 입원했다 해도 ‘알았어요. 몸조리나 잘 하세요.’ 한 마디로 끝이고 바쁘다는 핑계로 문병도 안 왔다. 결근도 없이 출퇴근을 하는 사람은 옆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뿐이었다.
이번에도 읍내 병원 의사는 아내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단지 기운이 쇠했을 뿐이라고 했다. 한 일주일 입원해서 영양제 투여하고 몸조리만 하면 나을 것이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꾸 속이 아프다고 했다. 죽 외엔 아무것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은 다시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내시경을 하고 자기공영영상촬영도 했다. 내시경 결과는 위가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속이 아프다고 했다. 자기공영영상 촬영 결과 뇌의 일부가 조금씩 경직되어 가는 중인데. 그것은 노인성이라 누구나 죽어가는 세포를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읍내 종합병원으로 옮겨 입원했다. 일이 터지려면 함께 터진다더니 시골며느리도 아프다고 누웠다. 허리디스크라고 했다. 수술하는 방법 밖에 도리가 없다지만 아내 때문에 수술을 미루고 있단다. 2주면 퇴원할 줄 알았던 아내는 한 달 내내 병원에 있겠다고 했다. 강노인은 시골며느리에게 미안했다. 허리에 복대를 차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면서 가을걷이를 하고, 강노인의 수발을 들었다. 겨우 타작을 해 들인 아들은 논을 남에게 소작으로 내 주고, 비닐하우스 특수재배로 겨울에 고추며 호박을 심던 것도 접었다. 축사도 비웠다. 아들은 일당벌이 노가다를 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강노인은 서울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서울에 올라가 있겠다고 통고했다. 서울 아들이 데리러 왔다. 강노인은 시골며느리에게 아내를 부탁했다.
“내가 니 땜에 서울 간다. 니 몸도 빨리 나사고, 너거 어매도 잘 부탁한다.”
“여기 걱정은 마시고 형님 댁에서 푹 쉬세요.”
그러나 강노인의 서울 살이는 일주일 만에 파장이 났다.
“아버님, 동서가 고생이 많아서 당분간 아버님을 우리 집에 모셨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찬밥도 그런 찬밥신세가 아니었다. 며느리는 둘째치고라도 아들이 더 냉대를 했다. 혹여 늙은 내외가 서울에 올라오겠다고 할까봐 미리 연막을 치는 것이었다. 툭 하면 경제가 어렵니. 어쩌니 하며 돈 때문에 자식 부부가 옥신각신했다.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서울며느리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저축 많이 해 놓으셨죠? 다음부터는 병원비를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애비 하는 일이 잘 안 돼 우리도 많이 쪼들려서요. 연금 많이 나온다던데 생활비 하고도 남는다던데. 우리가 용돈 안 드려도 되겠지요? 큰 애가 곧 결혼을 할 것 같아요. 서울에서 전셋집 얻으려고 해도 몇 억은 들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서울아들은 또 뭐라고 하냐 하면 이렇게 염장을 질렀다.
“어머니 병은 아버지 때문이랍니다. 어머니께 자꾸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잔소리도 하지 마시고요. 어머니가 하는 대로 그냥 두세요. 꼬치꼬치 따지니까 어머니가 자꾸 병원으로 도피할 생각만 하잖습니까. 연세도 있으신데 왜 그리 사사건건 간섭을 하세요. 간섭을. 그냥 두세요. 평생 일만 꿍꿍하시던 어머니 아닙니까. 이젠 좀 몸도 마음도 편하게 사시도록 해 주셔야지요.”
그 날 낮에 강노인은 서울며느리가 출타한 틈을 타 시골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야야, 내가 집에 내려가야겠다. 니가 좀 낫나? 니를 고생시켜서 미안하지만 집에 가모 싶다.”
“아버님, 안 돼요. 그냥 형님 댁에 계세요. 형님이 잘 해 주시잖아요. 어머님이 아버님을 딱 보기 싫어하세요. 어머님 병은 아버님 때문에 생긴 거래요. 속은 괜찮은데 그게 다 마음병이래요.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퇴원 안 하시겠다고 해요. 어머님이 아버님은 그냥 서울에 사시라고 하는데요.”
“씰데 없는 소리, 니까지 그런 말을 해? 너거 어메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조선에 없는 못 된 것들이 한 통속이구나. 니도 시부모 모시기 싫다 이거제. 오냐, 알았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오시라 할 때까지 당분간 계시라는 말입니다. 어머님을 달래 봐야지요. 여태 아버님께 비밀로 했지만 어머님은 노인우울증을 넘어 치매로 접어든지 오래 됐어요. 치매 약 먹은 지 5년이나 됐다고요. 아버님께 쉬쉬했지만 알 거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머님은 아버님 시중들기가 죽기보다 싫대요. 아버님과 같이 앉아 밥 먹는 것도 싫다고 하세요. 이혼시켜 달라고 하세요. 그걸 여태 모르셨어요?”
“그럴 리 없다. 너거 어매가 그럴 리 없다.”
“어머님 병의 원인은 아버님이래요. 그러니까 당분간 내려오실 생각은 마세요.”
강노인은 방바닥에 철버덕 퍼질러 앉았다. 세상이 노랗다 못해 하얗다. <끝>
<2015. 경남작가 27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