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평화운동 가톨릭일꾼운동의 평화주의는 중립노선을 달리지 않았다. 유태인를 탄압하는 히틀러에 반대하여 뉴욕의 가톨릭일꾼들은 1935년 부둣가로 달려가 독일의 정기여객선인 브레멘호 앞에 모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자 한 명이 돛대를 타고 올라가 나치의 깃발을 떼어내려다가 배 위에 있던 경찰의 총에 다리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호소문을 통하여 “미국의 환대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앗고,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만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태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이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14)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프란치스꼬가 길을 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도로시는 전쟁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다. “우리의 생활의 법칙은 자비의 일을 하는 것이다.”(15)
마침내 종전이 되었으나 도로시는 기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군국주의는 살아 있었고, 파시즘도 숨어서 존재할 것이다. 전쟁 때문에 원자탄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섬광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는 파괴되었다. 도로시는 이번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자는 전쟁과 죽음이며, 이제 죽음은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는 무기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원폭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트르만 대통령이 기쁨에 가득찼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썼다. 대통령 이름은 ‘진정한 인간’(true man)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느님이며 진정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트르만은 이 시대의 진정한 인간이다. 파괴를 보고 기뻐하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기뻐하였다니 그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현제도 아니고, 일본 사람들의 형제도 아니다.” 그리고 이 핵무기를 시험하기 전에 과학자들이 인근 성당에 기도를 했다는 기사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조롱할 수는 없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명으로 늘어났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다.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들을 ‘모스크바 메리!’라고 야유하며 “징집 등록증을 태우지 말고 너희들이나 분신하라!”고 외쳤는데, 몇 주뒤에 이 자리에 참여했던 가톨릭일꾼 봉사자였던 로저 르포트가 미국공관 앞에서 정말 분신하였다. 로저는 자신의 몸을 벽 삼아 미국 전체에 들릴 수 있게 ‘아니오’라는 메시지를 외쳤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도로시 데이는 말했다. “로저 르포트를 보라. 그는 스스로 가난을 얼싸 안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신나서 말하는 잘 되어 가는 경제에서 이익을 얻지 않기 위해서 ‘가톨릭일꾼’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난한 이와 비참한 이들에게 내주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그런데 지금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고 모든 사람은 말할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가 조그만 나라와 국민들에게 가하는 고통을 스스로 맛보려 했다” 그는 절망 때문이나 인생을 혐오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이에 있는 베트남의 마을에서 불타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16)
그러나 미국 주교들은 초기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예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은 베트남전쟁을 문명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의 평화협상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면승리를 요청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은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도로시 데이의 생각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응수하였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 그분께 직접 해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17)
공산주의와 가톨릭일꾼운동 1949년 소련이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켜 미국 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미국적인 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회원인 리처드 닉슨 하원의원은, 소련의 성취가 미국 내의 ‘간첩’때문이라고 처음 말했고, 1950년 2월 상원의원 요셉 매카티가 국무성 직원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고 그 명단도 갖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서 이른바 매카티 선풍이 불었다. 이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에드거 후버는 “미국의 비밀을 크레믈린에 넘겨준” 간첩을 잡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해 여름 뉴욕에 살던 공산주의자 줄리어스와 에텔 로젠버그가 체포되고 소련에 원자탄의 비밀을 넘겨주었다고 고소되었다. 3년 후 두 사람은 무죄를 주장하며 전기 의자에서 죽었다.
당시 미국 정치권은 ‘내부의 적’이 주요한 관심사였다.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평화나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인종차별에 항의하거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은 색깔논쟁에 휘말렸다. 교사와 공무원은 ‘충성의 맹세’라는 데 서명을 해야 했고, 공산당에 동조하거나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은 생계가 곤란했다. “괜찮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뿐이다”라는 표어가 전국을 휩쓸었다. 도로시 데이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을 보석으로 석방해야 한다고 도로시가 주장하자, 칼럼을 통해 도로시는 자신이 공산주의에 입은 빚을 강조하였다.(18)
도로시 데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빌려간 것이라며 양자의 공통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들처럼 국가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폭력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의 말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정치적 방법이 실패하였다고 폭력과 전쟁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 또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에 반대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열정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고백하였다.
교회권력과 순종의 문제 노동조합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전후 분위기 속에서, 1949년 뉴욕대교구에 반대하여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하자 스펠만 추기경은 인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았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추기경은 인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신학생들을 시켜 파업이 사그라질 때까지 무덤을 파게 했다. 도로시는 항상 주교들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으나, 이번에는 추기경이 파업을 무산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를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표명했다. 도로시는 메디슨가의 세인트 패트릭성당 뒤에 있는 추기경의 호화로운 사무실 앞에서 몇 명 안 되는 인부들의 시위대에 참가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희생자들’이라는 칼럼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결국 파업은 한 달만에 실패하고, 도로시는 공공연히 추기경을 비난한 사실과 주교관 앞에서 역사상 처음일 가톨릭평신도들의 시위에 참여한 일. 또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기를 거부한 사실 때문에 1951년 추기경의 호출을 받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의 발간을 중지하든지 제호를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자신은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공식적인 보호에 의존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순명 차원에서 폐간 대신에 이름을 바꾸려고 생각했지만, 편집에 관련된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신을 보냈다. 또한 독립적인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참전용사’라는 단체가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가톨릭일꾼> 역시 교구의 공식적 견해가 아닌 의견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결국 <가톨릭일꾼> 신문은 추기경의 부당한 명령을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은 셈이다. 한편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을 반대해 달라고 추기경에게 청원했던 도로시는, 결국 이들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인간을 말살하는 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될 쇠조각에 성수를 뿌리고, 폭격기에 ‘죄없는 성인’이나 ‘자비의 성모’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1만 5천명을 죽이는 단추를 누르는 사람을 축복한다.”(19)
도로시는 자선의 형태뿐 아니라 가난과 전쟁의 황폐함을 가져오는 제도 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최선의 정치적 형태로 자기 신앙이 요구하는 의무에 응답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든 감옥에 가든 그는 매일미사와 로사리오 기도, 최소한 하루 2시간의 성서 묵상을 거르지 않은 부단한 기도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그는 자신을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교회의 딸”이라고 부르며, 지금이라도 추기경이 활동금지의 명령을 내리면 즉시 따르겠노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교의와 교회구조를 마음을 다하여 성심껏 받아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지 않았고, 다만 그 가르침을 교회가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을 뿐이다. 그는 자주 순명을 강조했는데, 만일 추기경이 전쟁에 대한 가톨릭일꾼의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로시는 이렇게 순명한다. “아니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추기경이 그렇게 명령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말씀, 성인들의 말씀, 교종들의 회칙에 나온 말들만 인용할 것입니다. 전혀 우리가 한 말이 아니죠.”(20)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누구도 교회의 권위를 경멸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이들이 도로시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신비라고 여겼다. 확실히 도로시 데이는 더 작은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실상 도로시는 가난한 이들과 전쟁에 관한 교회의 입장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 <긴 외로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이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교회는 나에게 스캔들이었습니다. ...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떼어놓아서는 안됩니다.”
도로시 데이는 성아우구스띠노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는 말을 자신의 표어로 삼았다. “이 말씀에는 자유가 숨쉬고 있었고, 자유는 세속적인 불의에 순종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찾아진, 일찍이 우리와 같은 이상을 품고 시작된 일들을 언제나 도중하차시켰던 세속적 불의의 와중에서도 변함없이 추구한 인류의 이상이었다. 성서와 성인들의 작품을 탐구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다른 위대한 지성들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21)
어느날 가톨릭일꾼운동과 친밀한 관게에 있던 캔자스의 오하라 주교가 방문하였다. 그는 피터 모린에게 “피터씨, 우리(주교)를 이끌어주면 우린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갈 테요.” 했다. 피터는 주교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선봉에 서달라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평신도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도로시는 말한다.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다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일치를 도모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등,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려 했음은 물론 모든 이들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러한 선의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단점과 남의 단점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이 할 수 없었던, 도 하지도 않으려 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큰 탈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걸음들을 계속 돌이켜봄으로써 피터를 비롯한 노련한 급진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던,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거듭 반복할 수 있었다.” ----------------------------------------------------------------------------- [각주]
(14)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전쟁을 선포했을 때, <가톨릭일꾼> 신문은 헤드라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를 고수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찍어낼 것이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우리는 아직도 평화주의자다. 우리의 선언서는 산상설교인데, 그 뜻은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양심적인 반대자를 대신하여 말하거니와, 우리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화약을 만드는 데 참가하지도 않을 것이며, 전쟁 수행을 위한 정부의 공채도 사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을 것이다.”(<잣대는 사랑> 117쪽 참조) (15) <잣대는 사랑>, 119-120쪽 참조, 이 시기에 15개의 환대의 집이 문을 닫았다. (16) 이 사건을 두고 도로시 데이는 말했다. “로저 르포트를 보라. 그는 스스로 가난을 얼싸 안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신나서 말하는 잘 되어 가는 경제에서 이익을 얻지 않기 위해서 ‘가톨릭일꾼’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난한 이와 비참한 이들에게 내주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그런데 지금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고 모든 사람은 말할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가 조그만 나라와 국민들에게 가하는 고통을 스스로 맛보려 했다” 그는 절망 때문이나 인생을 혐오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이에 있는 베트남의 마을에서 불타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잣대는 사랑>, 179-180쪽 참조) (17)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37쪽 참조 (18) “나는 같이 일하던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그분의 가난한 자, 그분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나와 함께 일하던 과격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지 않은 사회질서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사람들이다.”(<잣대는 사랑>, 147쪽) (19) <잣대는 사랑> 148-152쪽 참조 (20)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참사람되어, 2004, 84쪽 (21)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255-256쪽 참조. “신앙이란 우리가 순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을 그때에 요구되는 것이다. 곧 우리를 창조하신 한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의 자유와 불순종의 자유를 부여받았다면 우리가 순종을 드려야 할 대상은 오로지 한분 하느님뿐이라는 바로 그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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