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텐, 드렌스 그리고 헤이그 - 처음으로 유화 그림을 그리다
1881년 4월 반 고흐는 에텐 외곽지역으로 부모들과 함께 이사하여 그곳에서 그림을 계속 그렸고, 가끔 이웃을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여름 내내 얼마 전 과부가 된 사촌 키 보스 스트릭커(Kee Vos-Stricker)와 걷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다. 그녀는 예술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반 고흐 어머니의 언니 요하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의 딸이었다. 그녀는 반 고흐보다 7살이 많았고, 8살 된 아들이 있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으나 그녀는 “아니, 절대로, 절대로 Nooit, nooit, nimmer”라는 말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쓰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갖다대며 다시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음 해 1월 말, 반 고흐는 5살 된 딸을 가진 임신한 창녀 시엔(Sien)을 만나게 된다. 시엔은 7월에 아들 윌렘을 낳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반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녀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
반 고흐는 약 3주간 성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여름 처음으로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어졌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고 생각했으나, 시엔은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다시 창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엔의 딸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녀의 남동생에게 각각 맡겨졌다. 후에 아들 윌렘이 12살이 되어 어머니 시엔을 방문했을 때, 시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윌렘의 아버지는 20년 전 만났던 화가이며 이름은 반 고흐다.”
누에넨과 안트워프 -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다
누에넨에서 반 고흐는 열심히 드로잉 공부를 했다. 마을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새 둥지를 가져오게 하여 그렸으며, 베 짜는 사람들의 스케치를 많이 했다. 1884년 가을, 반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이웃집 딸인 마고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종종 그가 그림 그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를 사랑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반 고흐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고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1885년 3월에는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해 봄 프랑스 파리에서 그의 작품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첫 주요작으로 생각되는 [감자 먹는 사람들, 1885]이 완성되었고 8월에 전시되었다. 헤이그의 러스(Leurs) 화랑 유리창에 전시된 이 작품은 그림 속의 농부 중 한 명에 의해 고소당했는데, 그 이후 마을의 목사는 교구민들에게 반 고흐 그림의 모델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반 고흐는 그 시기에 몇 가지 정물 시리즈를 그렸다. [밀짚모자와 파이프가 있는 정물], [주전자와 신이 있는 정물]은 테크닉적으로 마스터 된 작품들로 여겨진다. 두 작품 모두 부드럽고 섬세한 붓터치와 세밀한 색으로 채색된 작품들이다. 누에넨에 머문 2년 동안 그는 엄청난 드로잉과 수채화를 완성했고, 거의 200여 점의 유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당시 그의 색조는 너무 어두워 후에 그의 최고작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너무 소홀하다고 불평하였을 때, 테오는 형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현재 유행하는 인상주의 그림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1885년 11월 반 고흐는 안트워프로 옮겨 조그만 방을 빌렸다. 거의 돈이 없어 가난하게 먹었으며, 동생이 보내 준 돈은 그림 그리는 재료와 모델비로 썼다. 빵, 커피, 그리고 담배는 그에게 항상 필요한 것들이었다. 1886년 2월 고흐는 테오에게 편지 쓰기를 “1885년 5월 이후로 따뜻한 식사를 한 것은 오직 6번 뿐이었다.”고 적고 있다. 안트워프에 있는 동안 색채론을 공부하여 그림에 적용했고, 미술관의 작품 특히 루벤스의 작품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카민, 코발트, 에머랄드 그린과 같은 색조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항만에서 일본의 우끼요에 판화 작품을 구입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우끼요에 양식을 응용했다. 안트워프에서 반 고흐는 압생트술을 과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의사 카버낼(Cavenaile)로 부터 매독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아카데미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트워프에 있는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트의 입학 시험에 매우 높은 성적으로 통과되었고, 1886년 1월에 페인팅과 드로잉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
첫댓글 언제부턴가 고흐를 생각하면 그림보다 그 노래 '빈센트'가 먼저 떠오릅니다.
스타리 스탈리 나이트~~ 페인트 유어 팔레트 블루 앤 그레이~~~
내 발음 듣고 웃는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