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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예술을 읽고
1. 드러냄으로서의 예술
1)예술가들은 작품이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신학자들도 예술가 자신의 작품의 의도에 대해 자유롭고 관대하게 대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에서 완성된 창조적인 예술작품은 끊임없이 예술자체로서 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예술의 형식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산출된 것으로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실들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한다.
회화, 소설, 희곡, 시, 음악, 건축, 무용 등 어떤 것을 생각하든지 이 모든 것은 결국 직접 전달된 것으로서, 또는 성실하게 고안된 것으로서의 예술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드러냄으로서의 예술을 생각한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허구와 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숨겨진 실재가 현시되고 암시되며 환기되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이 깨닫는 진리로서의 상징적인 해결책을 고안하려고 노력한다. 드러냄이란 “명상을 위한 함정”에 빠진 사람들의 편에서 보면 실재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은 기대하지 않은 것과 역설적인 것을 드러내는 형식을 가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이 주는 즐거움은 동의의 즐거움이 아니라 도전과 반응의 즐거움, “드러냄의 상황”에 몰입하는 즐거움이다.
2)예술을 드러냄의 양식과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예술의 목적은 알려주거나 교육하는데 있지 않고 드러내는데 있다. 그것이 교회 예술의 더욱 진정한 뜻이다. 밀턴이나 고야,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서 감동을 주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나찌시대의 작품처럼 국가 이익을 위한 “메시지 예술”이 아닌 예술가들을 고무시키는 사건이나 자극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 때문이다. 예술에 나타난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들에 위해서 만나게 되는 요구는 주의력이다.
드러냄으로서의 예술을 논하는 데는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예술이 그 자체의 세계를 구축하여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려한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위대하다고 불리워지는 예술은 이상한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서 표현된 외양을 넘어 예술 그 자체보다 넓고 깊은 일상적인 주변세계를 빨리 깨닫게 하고 또 재발견하게 해준다. 예술이란 사물들의 단일한 것을 가지고 렘브란트와 윌리암스의 작품에서처럼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만나게 한다.
3)예술은 누구에게 드러내는가?이다. 모든 예술의 의도는 인정하든 하지않든 전달하는 데 있다. “전달”이란 개념을 예술적으로 드러냄의 형식과 추진력을 분명히 하려는 수단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에 비극적인 사실은 전달이란 우리들의 대부분의 경험속에서도 “공적인 관계”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니체처럼 “나는 당위성 때문에 나의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예술가도 있다면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예술관에서 보면 “전달”보다 훨씬 더 정확한 개념일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드러냄의 이런 대화적 과정에는 손실과 이득이 동시에 있다. 코마라스워미는 우리가 예술을 대화를 통한 드러냄의 경험으로서 생각할 때 문제에 직면하는 말을 하였따. “예술가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예술가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신학자 클레에는 드러냄의 독특한 목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진정한 예술은 궁극적인 것들과 알 수 없는 시합을 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을 완성한다.” 장난은 간접적 방법이다 예언자적 헌신에 의해서 예술은 실재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4)예술로서의 삶의 현시와 헌신은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이해되고 평가될 만하다. 서구 기독교에 있어서 얼마전의 지배적인 신학적 경향은 주로 계시를 발견하고 사용하는데 바쳐졌다. 계시는 바르트나 부르너의 주요관심사만이 아니다. 계시를 실제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살아 활동함으로써 인간의 신앙의 자유로운 반응을 끌어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생각한다. 반응으로서의 신앙은 수용적이다. “반응”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특히 그 자신의 우선권과 발의권을 가리킨다. “만남으로서 진리‘를 말한 부르너의 이해가 예술에 대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나 그 모형들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경험과도 관계된다. 그리스도의 ”사건적 말씀’은 지상적인 환경과 세상적인 문화가 얽힌 가운데서 선포되고 발생하였다. 이생과 작품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은 먼저, 현대예술에서 많은 부문에서 표현되었던 것과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허물없이 인정해야한다. 둘째로, 기도교인들은 현대 예술가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으며, 셋째로, 예술작품들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인간의 계시로서의 예술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부서지고 고통을 받으며 공허한 것을 강조할 때 효과 면에서 가장 은혜스럽다. 작품으로 표현되어 역사와 상황을 잘 형상화한 예술은 읽어버렸던 것을 찾는 것, 거기에 없는 불필요한 열쇠, 캄캄한 어둠, 인간이 된다는 비애 등이 잘 짜여지고 상연되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하며, 기독교인에게 날카롭게 감명을 주는 인간의 계시이다.
2.구체화로서의 예술
1)신학자에게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예술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뜻한다. 창조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인간을 유한한 것으로 고정시키고 그의 하나님 사l에 적절한 창조적 거리를 둔다는 교리적 주장이 성서와 배치된다고 할 때 어떤 이는 놀랄 것이다. 인간은 창조되자마자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계속적인 창조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칼 바르트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에 무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너무 많고 위대한 것을 말하거나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그의 문화적 활동에 있어서 실로 훌륭하고 고귀한 인간관을 산출한다. 그래서 루지몽의 예술에 관하여 “창조”라기보다 “구성”이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 예술을 표상화, 구체화로 생각한다는 것은 신적 창조의 비유가 더욱 진지하게 취급되고 수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직접적으로나 잘못된 방법으로나 은밀하게 종교적인 것의 표식인 “궁극적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공허한 무에 구체적 자리와 이름”을 주는 작업은 모든 것이 말해지고 이루어졌을 때 신비한 것으로 남는다.
러시아 평신도 신학자 베르자예프는 예술이란 변화된 세상을 향한 창조적인 돌파라고 한 말은 주의를 끈다. 현대예술은 대부분 진정한 예술의 기준을 범하고 있으며 구체화가 아니라 비구체화, 비구성화, 비형식의 파괴가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예술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 잠재력을 사용해야하며, 인간의 창조성과 하나님의 창조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공통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2)예술에서 성취된 표상화는 환상적인 것에 홀려서 이루어진 순전한 기적이 아니다. 예술에는 전통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창조성이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혼돈해서도 안되며 옛것과 새것, 개인적 충동과 문화적 양식, 자유와 전통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앙드레 말로는 모방이나 반복이 아직 현재에도 많지만 창조적인 요소의 우위성을 주장하는데, 예술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것과 유사한, 우리 안에서 일하는 능력을 통하여 “모르는 것들의 형식”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요구한다. 여기서 인간의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상상한다는 것에는 꾼꾼다. 공상한다, 이상화한다. 실제화한다, 즉흥적으로 한다는 뜻이 있다. 이러한 의미들에서 어떤 관념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매우 늦었다는 것이다. 스펜더는 “상상력 자체가 기억의 훈련이기 때문에 기억을 시의 기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크로너는 “상상력은 재생산적이 아니라 생산적이다.” 다시 현재하도록 만드는 것은 새것과 옛것이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는, 보고 만드는 활동이다. 저자는 예술에 명시된 창조적 상상력이 기독교 신앙에서 삼위일체론적 이해와 매우 유사한 삼중의 측면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말씀의 형상” 혹은 아들의 형상을 실제 작품을 만드는 창조적 에너지나 활동력에서 보여진다. 이것을 구체화나 형체화라고 불러왔다.
상상력 안에서 작품은 착상되고, 상상력에 의하여 구체화되며 반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형상을 만들며 형상을 의식한다. 여기서 기독교는 오래 되고 완고한 상상력에 대한 불신이라는 유산을 극복해야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상징들의 전체적, 숙명적 영역과 그것들에 의해 결정된 삶의 의미... 말씀과 형상의 순화”의 구원, 진실로 상상력의 세례에 불과하다.
3)여전히 우리에게 진정한 종교예술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인 안내를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이 주제뿐이라는 견해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이라는 말과 “세속적”이라는 말이 대조적인 삶의 양식이나 예술에 있어서 양식을 지적하는 것으로 사용될 때, 단순히 “성”과 “속”으로 혼돈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인 것이 거룩한 것의 표시나 증언이 되긴 해도, 거룩한 것이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속된 것이 세속사회에서 활동하긴 해도, 세속적인 것이 속된 것은 아니다. 양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기독교적인 예술작품은 미적인 것이어야 하는가? 에릭 질은 “미란 존재의 광채다. 보이는 존재의 근본적인 요소는 질서다” 틸리히는 “부서진 상징”이라고 말했던 것,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만족하게가 아니라 굴절된 암시성과 번득이는 충격으로 나타내는 것들에 의해서 될 것이다. 기독교 예술의 본질이 복음의 재현이라고 한다면, 그 양식은 재간있는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롭고 다양하 것이 될 수 있다. 앙드레 말로가 지적한대로 예술을 지탱하는 것은 강압적인 독백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도 파기되지 않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술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익명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찾아와 구속하신 하나님이 모든 환경과 조건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4)여기서는 교회 예술에 대한 몇몇 방향을 알아보려고 한다. 모든 기독교 예술의 문제, 어떤 작품을 완전하게 기독교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교회의 예술을 회복할 때 확대된다. 교회는 그 예배, 건축, 회화나 조각이 신앙적이어야 한다는 “주어진 규정과 변함없는 영역과 잊어버릴 수 없는 기념물과 살아있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교회예술의 진정성은 단순한 인식력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고딕이나 로마네스크나 식민지풍을 모방한 건물들은 오랫동안 조직된 기독교와 동일화되어 왔다. 교회양식은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만큼 많을 수 있다. 이제 서로 전통을 많이 배우고 서로 주고받는 에큐메니칼적인 상활에 들어섰다.
교회음악 또한 건축에서만큼은 구체화되지는 못했지만, 역시 현대 작곡가나 연주가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교회예술에 있어서 양식과 기호의 진정한 적은 기독교적인 상상력의 빈곤을 이용하여 그것을 실수 없이 계시하려는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좋다. 실제적 기능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회 예술은 무엇보다도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건전한 원칙이다. “예술은 하나님의 손자”라는 단체의 함축적인 말은 교회에서 기억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을 만드신 분을 반영하고 형체화한다. 누가 이것을 그의 추억과 희망이 지고한 하나님의 참 인간성의 깨어진 상징에 집중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더 잘 알겠는가?
3.소명으로서의 예술
1)예술가의 내적 동기에 대한 그의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솔직한 기독교적 해석은 “소명”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다른 용어로는 “헌신”이다. 모든 예술가는 어느 정도 참여와 헌신의 마음이 있다. 모든 예술가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소명의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로뎅은 “예술가란 가장 종교적인 인간이다.”고 주장한다. 프란츠 리스트는 예술에 있어서 인생은 어느 분양에서나 진정한 소명을 가지기에는 짧다고 한다. 소명이란 어떤 특별한 일에 “부름받는”것을 의미한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소명의 요지이다. 일반적인 이해로 예술가라는 소명을 가진 자로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것인가? 첫째, 예술가의 창조적인 작품을 이루기 위한 보편적인 동기부여이다. 둘째, 개인의 욕구, 문화적 소속감과 미적인 충실함에서 형성된 ”내재적 필연성“이다. 셋째, 자신의 예술에서 영속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과 일치시키는 예술가의 욕구로서 일정의 운명의 길이다. 진정한 소명이란 행위와 존재가 예술가와 그의 작품의 관계 안에서 일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예술가의 성실이란 무엇인가? 프로스트는 “예술가와 신앙인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예술가의 ‘세속성’이기 때문에 ‘예술가는 세상을 사랑한다. 사랑에 있어서 이런 직접성으로부터 예술가는 자신을 풀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예술가의 성실, 즉 명백한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는 성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계시적이다. 흄은 말하기를 “예술은 반드시 개인적이어야 하며, 평범한 인식과 언어로 일반화된 표현들에 만족하지 않고 튀어나와야 한다.”고 한다. 예술가는 세상이 그의 기승을 굴복하려하지 않고 분명한 완고성과 세상이 그의 민감한 정신에 입히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충성이란 결국 사랑하는 자에의 싸움에 보상을 주는 사랑이기 때문에 기본적이고 확고하다. 여기서 “나님이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세상은 우리에게 서로 협력하는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즉 죄로 물들어 있으나 구원받을 수 있는 세상은 우리의 존경과 기쁨을 위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은총은 자연의 성취이듯이 자연은 은총을 둘러싸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은 예배와 증언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자연적으로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적인 세상의 이해함에 있어 공존하고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3)예술가의 소명은 어떤 중요한 점에서 사제와 예언가의 부르심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각자의 소명에 따라 살아가고, 참되고 진실된 것을 행할 때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예언자나 사제직처럼 직업적으로 진지하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자세에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다. 여기서 예술가의 역할은 하나님의 중재자나 선포자의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옹호자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사제적이고 예언자적인 자세는 남아있다.
까뮈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특권적인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자극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을 까뮈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명석한 언어와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문화적 풍토에서 예술가는 성서적인 의미에서 사제로 보지않는 것이 사실이다. “신성한”(hieratic)이라는 말은 “사제적”(priestly)이란 말과 동의어인데, 고통스러운 것을 암시하는 말과 함께, 오히려 전조가 되거나 예감이 드는 것을 것의 의미와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베케트와 이오네스코가 “불합리한 연극”에서 말한바 대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단절시킨다. 풍자나 환상이나 묵시를 통해서 그들의 작품이 우리에 대해 어떤 정보를 제공하게 될 때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면 포오크너의 말처럼 “가슴에 와 닿게”된다. 이것을 바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우리는 제사장이고 예언자적인 충격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 병합되는 것을 때때로 본다. 예술가가 자기의 진실이 침해되려고 할 때 정당하게 경고하고, 동정심을 가지고인간의 더러움을 그려내며, 깊은 연민의 정을 가지고 통렬히 경멸할 때 그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기독교 신앙에서 함께 선포된 심판과 화해의 말씀과 유사하게 된다. 까뮈는 말했다. “예술작품은 우리의 비참하고 때로는 훌륭한 인생에 경의를 표한다.”
4)예술을 지식적, 사상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매력적인 주제는 성자와 같은 예술가의 면모이다. 라무즈, 오스카 와일드, 앙드레 지드 등은 “예술가와 성인은 같다.”“복음의 진리들이 미학에 이전된다.”“완전한 성취가 있다.”로 표현하였다. 예술이 거룩한 행동이 될 수 있는가?하는 레브에 의해 지기된 질문에 긍정적이 답변을 한다. 그러므로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가 예술가인 동시에 성자의 모습을 보여주듯, 성자를 영적 생활의 예술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포기, 검소, 삶의 엄숙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개방성, 즐거운 단념, 예술적 기품,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기쁨이 있다. 성 프랜시스에 의해 시작된 것과 같은 운동이 예술에 깊고 창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감사와 전유를 나타내는 근거가 된다. 이제 예술을 거룩한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감”이 필요하다. 영감이 무의식적으로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낭만과 시인들에 의해 유행되었던 개념은 작품자체를 검사해보면 분명해진다. 플라톤이 상기시켜준 바와 같이 “그가 영감을 받기 전의 영감이 그에게 발명이 없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는 영감에 대하여 창조적인 질서의 원칙으로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무질서의 동의어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감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백되는 것이다. 니체의 표현대로 하면 “압도하는 힘을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예술가와 성자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같다. 그들에게 소명은 인생의 근본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소명은 그들이 열중하도록 요청을 받은 선교와 증언에 봉사하는 종사직의 형태를 취한다.
4.찬양으로서의 예술
1)조셉 시틀러가 말하듯이 어느 때든지 예술작품은 난관을 극복하여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는 “죽음에 대항하는 주문”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각각 매력적이라고 느끼든 못느끼든 간에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인간의 업적으로만 찬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예술자체가 인생을 찬양하는가? 수단은 다르다 할지라도 행하여진 일에 의해서 예술은 인생을 찬양하는 행위이다. 객관적으로 예술은 찬양이며, 예술가가 느끼는 어떤 것을 선별하여 승화시키는 일은 항구적이며 공유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예술에 있어서 인간의 진리를 전달하고 그래서 축복하는 새로운 언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예술의 목적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것에 굴절되게 비추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작품에서 무엇이든지 찬양의 요소를 보고 감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 필립 모리의 글에서 보듯, 우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을 즐기기를 다시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오든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 “영혼은 영혼에 대한 향유의 음계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내가 다시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시오”말하듯 기쁨이란 꼭 현재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때때로 불완전하며, 종종 상실해버리는 개인적, 문화적 존재의 목표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것을 향유할 음계를 연주해야 하고, 우리 시대의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신나는 방법으로 되어가고 있다.
2)기독교인의 신앙과 관련하여 기쁨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자. 우리는 신앙을 위해서 그리도 우리 신앙안에 있는 기쁨의 중요성에 관심한다면 우리는 보다 허심탄회하게 예술과 보람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의 공통 근거는 선한 창조에 있으며, 예술은 신앙만큼이나 즐거운 것이다. 우리가 가장 무신론적인 현대 예술의 형태까지도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를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것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는 사실과 비교한다는 것은 아마 사소한 문제가 될 것이다. 예술가운데서 상징화된 자연과 인간의 융화는 체스터톤의 시가 암시하듯이 “만물”가운데로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암시한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공통적 피조성. 이것이 모든 비유, 이미지, 가락이 설정되고 가능케 되는 진실에 대한 기독교인의 언명이다. 그것이 예술과 신앙 모두에 의해 즐겁게 되고 찬양되어지는 진리이다. 음악의 작곡과 연주라는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것들이 찬양의 차원에서 신앙과 오랫동안 조화를 이루어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보다 흥미를 끄는 현상은 예배 중에 재즈 음악연주이다. 모든 실험들이 예배라는 관점에서나 음악적인 관점에서 뛰어나거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재즈가 교회음악과 관련하여 흥미를 끄는 것은 가장 즉흥적인 음악이라는 것이다. 음악과 건축에 있어 보다 새로운 발전과 전 세계를 통해 기독교의 편에 서서 잘 받아들인다는 것을 신앙으로 표현하고 심화시키는데 필연적인 기쁨을 다시 얻기 위한 모험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3)예술이 구속적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찬양적인 예술의 기능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말콤 보이드는 “지옥의 예술”은 “구속의 예술”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피력한다. 예술이 구속적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현대예술에 가장 영향을 주는 모든 예술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이는 양면성의 질문을 지닌다. 첫째, 복음을 증거하는 예술적 소재와 자료의 적합성에 관심을 갖으며, 둘째, 예술작품에 의해 발생되는 응답성을 취급하여야 한다. 이 두 가지 차원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봉사에 있어서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예술의 본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는 예술은 확실히 하나님의 구속적인 말씀을 증거할 수 있음이 수많은 교회음악을 통하여 증명되어 왔다. 특히 예술가가 기독교인일 때 그의 작품은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부활한다고 증거하는 모든 작품들이 마음속에 바로 그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예술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인간의 작품이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하다 해도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신학적인 완고성이 있다. 그럼에도 예술이 구속적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문제는 계속 고찰되어 왔다. 오직 신학적인 영역 안에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예술이 인간의 궁극 목적으로부터 구원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의미 있게 기여했다거나 예술이 적어도 구원할 수 있는 세계라는 우리의 신앙을 확신시켰는가?에 대한 진실한 대답은 주어져야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예술이란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는 기쁨에의 초대이다.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신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기쁨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구원의 기쁨과 해방을 노래할 수 있는 예술로서 자유의 길을 제시해주며 감금된 진리와의 계약을 새롭게 한다.
4)살얼음같은 세상과 환경에서 예술을 찬양할 수 있는가? 예술은 사태의 추이에 대해 반대하거나 반항의 행위로 떨어지지 않는가? 무엇인가 찬양되어야 한다면 사실의 승리 즉 세속적 도시생활의 비인간적인 익명성과 조직사회의 덕들 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술은 탈리히의 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는 매우 흡사하다. 예술가는 우리를 진정한 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세계를 거부하며, 바로 이것이 찬양과 기쁨의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찬양받을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인생의 찬양이다. 예술가의 창조적 모험들은 미술이나 음악에서 새로운 양식을 소개할 뿐 아니라 보다 크고 영속적인 기쁨을 위하여 우리의 반응 능력을 확장시킨다. 예술이 사치품이지 필수품은 아니라는 유용성이라는 불안 속에서 진리라는 유용성이 지닌 기쁨이며, 예술적 창조라는 특권이며 은혜라고 인식한다. 이제까지 영원한 나라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서 신앙에 대한 예술의 활동에 대해 생각해 왔다.
이 책에서 전개된 전체적인 사상은 예술에 대한 신학적 보수주의에 의해 제기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에서 돌파구를 찾고 인간의 진리를 보여주고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위한 예술의 중요성을 공언함으로써 시작한다. 이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홉킨스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끝없이 경계를 깨뜨리고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신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 크든 작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현대생활의 예술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진 영혼 대신에 찬양의 옷을 입을 절대 필요한 동기와 자원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나오면서
몇 년전에 동역자들과 함께 봄나들이하듯 정동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연결 되어 있는 성공회성당을 돌아보면서 중세 신학과 신앙이 만들어낸 균형미있는 건축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명동성당은 전형적인 중세 고딕양식으로 신에 대한 숭배를 상징하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 비뚤어진 예술도 볼 수 있었다. 소나무(영송)사진전 작품 하나를 위해 대자연과 함께 수백년 산을 지켜온 소나무들을 마구 벌목한 파렴치한 사진예술가의 작태를 보면서 자신의 예술을 빙자한 욕심과 물질이 결탁한 예술이 얼마나 자연과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가도 보았다.
「신학과 예술」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신앙 안에서 생각지 못했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었던 점이 새롭게 남는다. 이 책의 저자는 실로 전반적인 예술장르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광범위한 지식에 따른 관망이 너무도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고 진보적이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언급한대로 예술작업에 대한 솔직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해볼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하면서 저자는 모험이라고 표현했지만 시대적으로 매우 필요한 신학적 요청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세상과 인간 상황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차원에서 예술에 대한 신학적 사고야말로 저자의 말대로 “미래를 개척하는 것(통로)”으로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기독교적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는 기계적이고 얼음장 같은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며, 미(美)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인류의 모든 역사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예술은 직설적이든, 상징적이든 관계되어 왔으며 시대적 사상과 신학과 더불어 예술의 의존도가 높을수록 예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예술이 진정한 신의 자유한 수준의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해석과 하나의 진리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신학이 신의 창조와 신의 영역에 관한 학문이라면 예술은 열려진 창조의 과정으로서 기여한다는 점에서 신학과 예술은 언제나 무한한 자원을 가져올 수 있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의 차원에서 만들어낸 예술작품이든, 예술가 자신만의 예술적 삶의 고백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든 간에 그 예술작업에 대한 솔직한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서도 예술은 예술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을 기독교적 방식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