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내륙지방과 다른 문화권
문화유적 도서관 ()
제목 : '택리지'의 마을을 가다 (1)-충남 내포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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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를 보면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우리나라를 행정구역에 따라 8도로 나누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산이나 물에 따라 형성된 생활 풍속이나 양식이 같은 지역을, 가령 작으면 서너고을, 많으면 10여 고을을 한 단위로 묶어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택리지¬의 저자가 생활권의 범위와 특징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터이지만, 그가 묶은 단위가 오늘 어떻게 보존되고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찾아보는 일은 곧 우리의 삶이 2백여 년간에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아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충청도 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를 가장 좋은 곳으로 친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백리 지점에 가야산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요, 동쪽은 경기도의 해읍(海邑)과 한 큰 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대평야를 이루고 평야 안에 또한 큰 포구가있는데 유궁진(由宮津)이라 한다. 만조를 기다리지 아니하면 배를 사용할 수가 없다. 남쪽에 떨어져 있는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따라온 지맥인데, 다만 이 산 동남을 따라 공주와 통한다. 가야산 둘레의 10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구석에 막히어 끊기었고, 또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임진,병자의 두 차례의 난도 이곳에 미치지 않았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넓다. 물고기,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또 대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이 기록을 보건대 내포는 차령산맥 이북이요, 오늘의 삽교천 서쪽인 해안 반도 일대를 말하는 것 같다. 가야산 둘레의 10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고 했는데, 그 10현은 대충 덕산,대흥(이상 현재 예산), 서산,태안,해미(이상 서산), 면천,당진(이상 당진), 홍주,병영,결성(이상 홍천)으로 보아 틀임이 없을 것이다.그러나↙택리지¬는 이어 '목천리 마일영 서쪽에서 내포리 동쪽, 차령의 북쪽에 걸쳐있는 천안,직산,평택,아산,신창,온양,예산 등 일곱 고을은 민속이 거의같다'고 설명하고 있는 바, 오늘 이 고장 사람들이 차령 이북의 충청도 땅을 통틀어 내포지방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 달에는 이곳으로 길을 잡기로 하고 먼저 82년 예산군에서 발행한 ↙예산의 얼¬을 뒤져보니 '내포라는 말은 서부 충남에서는 30-40년전까지도 연세 많은 분들은 '내포사람', '내포지방'등 흔히 쓰던 말로서, 양분된 충남의 서북부 해안지방 즉 천수만(淺水灣)지방인 보령,홍성,서산군과 삽교천 유역이자 아산만 지방인 예산,당진,아산, 넓게 천안(원)군이 이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금강유역인 충남의 내륙지방과 서북부인 내포지방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다름이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1) 기후와 강수량이 달라 내륙지방이 한재와 수재가 심한 데 반하 여 내포지방은 한재나 수재를 모르는 옥토지대이다.
2) 언어가 서로 달라 충청도 사투리는 실은 내포 지방 말이다.
3) 생활권이 달라, 내륙지방의 중심은 대전이었지만 내포지방의 중 심 은 천안이었다. 차령산맥이 갈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있는 것은 일찍부터 내포지방에 내륙지방과는 또다른 독립된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주장들이다. 가령 내포지방에 남아있는 백제의 유물이나 유적들은 백제의 변두리 문화가 아니라, 삼국시대 이전에 형성된 문화를 이어받은 독특한 문화의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또 이 책에는 진번군(眞番郡)이 있던 자리가 바로 이곳으로서, 이미 그 이전부터 진번국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으면서, 당진(唐津),한진(漢津)등을 통하여(양자강 유역과 가장 가까운 곳이 이 곳이다) 중국 양자강 유역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여 청동기문화를 이루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o. 복지(福地)에 남은 전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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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지라 예산에 닿아서는 시간에 대기위해 점심도 먹지않고 군청으로 달려갔지만, 공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토요일에 길을 떠났지만, 역시 토요일은 길 떠나기에 마땅한 날이 아니다. 군청에서 나와 시장 골목에 들어가 장국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버스 정거장 가까운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이번 길을 다시 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2만 5천분의 1지도에 흥미가 끌렸던지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젊은이들이 말을 붙여왔다.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에 살고 있는 예산 농대 학생들이었다. 이번 길의 목적지 가운데의 하나가 대흥이라 했더니 그들은 그곳까지 길 안내를 하겠다고 나섰다.
자연과학도들이었지만 지금의 예산의 속면인 대흥이 옛날에는 꽤 이름있는 독립된 고을이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자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예당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가장 넓은 땅을 물에 빼앗긴 고장도 대흥이라고 했는데 이 저수지로 해서 많은 박토가 옥토가 되었다는 사실도 그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교촌리는 바로 대흥의 소재지로 옛날에는 현청이 있었으며, 원래는 '향교말'이라 했는데 읍내, 칠전과 합쳐져서 교촌리로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호숫가이기 때문에 낚시군도 많이 모이고 관광객도 모여 꽤 놀기 좋은 곳이지만, 겨울 한철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라 했다.
예산에서 교촌리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버스는 홍성쪽으로 가다가 오가(吾可) 어디쯤에서 갈라져서는 왼편으로 꽁꽁 얼어붙은 예당 저수지를 끼고 잠시 달려와서는 섰다. 새집과 옛스러운 집들이 뒤범벅으로 섞여 있는 마을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탓인지 마을은 더욱 추운 것처럼 보였고, 길에는 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학생들이 자기들 집으로 가자는 것을 뿌리치고 될수록 저수지에서 가까운 여인숙을 찾아 잠자리부터 정했다.
그리고는 여인숙까지 따라온 학생들과 함께 밥과 술을 파는 집을 찾아 들어갔다. 장터 한 구석에 자리한 보기 드문 구식 음식점이었는데, 학생들은 50년은 된 집이라고 했지만, 주인 노파의 말에 따르면 30년이 좀 넘은 집이다.
예산읍내에 살다가 6.25때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피난 와, 예산읍내의 집이 (거기서도 식당을 했다한다) 폭격에 타버리는 바람에 그냥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않아 큰 난을 피했다는↙택리지¬의 기록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나보다. 아들 둘, 딸 여섯의 막내라 해서 이말년(75세)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그녀는 6.25때 남편과 오라버니 하나와 조카 둘을 잃었다. 모두 빨갱이라 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한동안 숨겨 왔지만 이제 다 산 나이에 숨길 게 있남유. 빨갱이라고 하지만 닭 한 마리 못죽이는 순디기들이었는 걸유. 잘못 휩쓸린게 죄지유."
학생들과는 오래 전부터 친숙한 사이인듯 붕어찌개의 막걸리 상 머리에 앉아 노파는 거리낌없이 얘기했다.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총 멘 사람만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는 것이다.
좀 뒤에 술을 마시러 들어왔다가 학생들의 권유로 우리와 자리를 같이하게 된 50대 역시 6.25때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느 지방보다도 피해가 심했는데, 그것은 좌익이 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까닭을 그는 바로 이웃인 '신양'이 박헌영의 고향인 탓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조금도 박헌영을 탓하고 있지는 않았다.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인물이라면서, 그가 공산당인 된 것을, 또 이북에가서 김일성이한테 죽임을 당한 것을 몹시 애석해 했다. 그가 들려 주는 박헌영 신화를 또한 모두 흥미있는 것들이었다.
o. 백제 3만 병사가 잠든 임존성, 그리고 '묘순이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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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일어나 보니 날이 많이 풀렸다. 한 학생네 집에서 아침을 먹고 광시면 동산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한 후, 의자왕의 종제 복신(福信), 승 도침(道琛),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중심이 된 백제의 유민들이 의자왕의 아들 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4년간이나 백제 부흥 운동을 펼쳤다는 봉수산의 임존성(任存城)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대련사를 거쳐 올라간 사적 90호의 임존성은 눈으로 덮여 있어 완전히 볼 수는 없었으나 둘레 2.5킬로미터의 성곽(↙동국여지승람¬에는'둘레 5.194척, 안에 우물 셋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은 제대로 보존돼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이 성에는 3만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데, 나당 연합군에게 빼앗겼던 2백여 성을 되찾은 3만 대군이 패한 것은 신라의 꾀에 넘어가 복심과 도침이 서로 싸웠기 때문이라면서, 동행한 학생은 그 일을 애석해 했다. 그때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을 쳐부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 내는데 성공했더라면 우리가 오랫동안 중국한테 지배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요, 나아가서 외세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지도 않았을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소설같은 발상이지만, 공상으로 들어넘길 수만도 없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성 서남쪽에 묘순이 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재미있는 얘기가 얽혀 있다.
옛날 백제에는 오누이가 쌍둥이로 태어나면 한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잘된다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한집에 오누이가 쌍둥이로 태어났다.
누이의 이름이 묘순이었다. 묘순이는 크면서 지혜도 뛰어나고 힘도 세었다. 그대로 두면 사내동생이 죽을 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두 남매가 힘과 지혜를 겨루어 지는 쪽이 죽기로 정했다. 내기는 아들은 사흘 동안에 서울을 다녀오고 묘순이는 그 동안에 돌로 성을 쌓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 성이 다 쌓아져 가는데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 꾀를 내어 딸에게 딱딱한 콩이 든 밥을 먹게 해서 성 쌓는 일을 늦추었다. 마침내 그 사이에 아들이 돌아와 묘순이는 약조대로 바위 옥에 갇혀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남매 힘겨루기 이야기는 곳곳에 있어 가령 청원의 구녀성, 보은의 삼년성, 충주의 남산성, 중원의 보련산과 장미산에도 거의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 남매 힘 겨루기 이야기는 우리의 아들 선호사상이 매우 뿌리 깊은 것임을 암시하는 터여서 자못 입맛이 쓰다.
성을 내려와서는 장대리행 버스를 탔다. 늦은 점심참이었는데 장날이라면서도 장바닥에는 거의 장꾼이 없었다. 플라스틱 바구니며 그릇을 파는 장수와 옷 장수, 기성구두 장수 등 몇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어, 가까스로 무싯날이 아님을 말해줄 뿐이다. 그 한 옆에는 토정비결을 보는 노인이 남바위를 쓰고 앉아 있었는데 생년 월일을 대면 토정비결을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하는 부분을 한장 아예 떼어서 주었다. 초록색 쉐터에 짧은 치마를 입은 예쁜 처녀가 좋은 괘라도 나왔는지 환한 얼굴로 웃다가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자 황급히 미장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서 순대국으로 점심 요기를 했는데, 거기서 먼저 요기를 하고 있던 탑골이라는 동네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한 50대의 중년은 내포가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는↙택리지¬규정을 한 마디로 비웃었다.
"아,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곳은 대전이나 청주지유."
돈이 모이는 곳이 제일 좋은 곳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곳은 서울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밀린 찌꺼기가 이런 시골로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지방대학 농과를 중퇴했다는 그는 시골이 최고니,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느니 하는 말이 서울 사람들 입에서 예사롭게 튀어 나오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히 서울 사람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감정은 똑똑한 시골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것인 듯 했다.
o. 다방 출입하는 칠순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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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헤어져 장대리에서 버스를 타고 예산으로 되짚어 나오다가중도에서 내려서 오가면 역탑리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아직 시장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거기서 만난 김길환(70)노인은 젊어서는 농협에서 일한 일도 있는 면내의 유지였다.
↙택리지¬는 '남쪽은 산골에 가까우며 토지가 기름져 오곡,목화에 적당하다'고 내포의 동쪽, 차령의 북쪽에 걸쳐 있는 예산 등 7읍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 고장에는 옛부터 목화는 그다지 많이 심지 않았다고 김길환 노인은 말했다. 주로 쌀 농사였고, 지금은 거의 과수원으로 바뀐 밭에 보리, 조, 밀 등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과가 이 지방의 가장 주요한 산물이 되었다.
그는 몽뚱그려서 내포 지방의 자랑을 하나만 말해 달라니까 땅 기름지고 물 좋아서 풍요롭다는 것을 들지 않고 서슴지 않고 반골 많이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봉길(덕산), 김좌진(갈산), 박헌영(예산), 이강국(예산), 한용운(홍성), 유관순(천안)....이렇게 손을 꼽는 데 한이 없었다. 충청도라면 순하기로 소문났고, 게다가 이 고장 땅은 맺고 끊는 데 없이 펑퍼짐하고 기름진데 어떻게 그런 분들만 골라서 낳았냐니까, 원래 인물은 평지에서 나고 독은 순한 음식 속에 들어 있는 법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오가에는 잘 데가 없어 삽교로 나가, 다시 거세지는 추위를 피해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무엇을 먹을까 내가 망설이자 찻잔에 더운 물을 따르면서 주인 아낙 네가 말했다.
"백반 잡숴유. 성리 쌀로 지은 밥 먹을만 혀유."
성리란 삽교의 한 마을로, 성리 쌀이 유명하다는 소리는 이미 김길환 노인으로부터 들은 터다. 쌀의 고장이기도 한 예산에서도 삽교는 생산량도 많거니와 미질도 좋아 예산 쌀 생산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성리와 목리는 질과 양에 있어 함께 으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 고장의 토질과 수질이 뛰어난 탓이기도 하지만 가급적 금비를 적게 쓰고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어 씀으로써 토질이 산성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농민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김길환 노인은 말했다.
주인 아낙네의 말처럼 차지고 기름기 흐르는 성리쌀밥으로 저녁을 먹고 그녀가 추천하는 대로 여관을 찾아들어 갔다.
옛날에는 진번국-->진뻔국의 중심이었다는 내포의 한 고장,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뱃길을 통해 받아들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었다는 이 고장에도 서울 사람은 스며들어 여관은 도시나 전혀 다름이 없었다. 마침 주말의 명화 시간이어서 텔레비젼 속에서는 미국 서부에 살았다는 싱거운 총잡이들의 이야기-저질 활극이 벌어지고 있었고 물주전자와 물컵과 수건과 치약 칫솔을 쟁반에 받쳐들고 뒤따라온 젊은 여인은 방을 특별히 따뜻하게 해주겠다면서 천 원의 웃돈을 요구했다.
- "↙택리지¬의 마을을 가다 (1)" 끝 -
<내포땅의 문화와 역사>
역사탐방교실, 도서기획 然, 1994.
#####내포땅, 그 친근함
1. 자연지리적 성격
- 가야산의 정기를 받은 친근한 사람들-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서해바다쪽으로 그 맥을 주춤거리다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면 마지막 용틀임을 하듯 북쪽을 향해 치솟은 땅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옛날 중국과 한국을 항해하던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푯말 구실을 했다고 한다. 또한 차령산맥 위쪽에서 가야산을 둘러싸고
있는 예산,서산,홍성, 태안, 당진, 아산을 지나다 보면 非山非野의 너른 들판이 펼쳐있다. 옛날에는 여기를 內浦라 불렀고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내포평야라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사는 사람 들은 행정구역이 서로 달라도 마치 이웃 사촌처럼 친근한 동향의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린 그 사람들을 내포사람들이라고 부르는게 당연 할 지도 모른다.
이 내포지방과 대전, 공주,부여, 논산의 금강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방은 풍물이나 자연조건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 이 고장 사람들의 말이다. 예를들어 내륙지방에는 한재,수재가 모두 심한 반면 이곳 내포지방은 장마도 가뭄도 모르는 고장이며 말씨도 많이 달라 우리가 흔히 충청도 사투리로 알고 있는 이곳 말은 충북 지방의 말투도 충남내륙지방의 말투도 아닌 바로 내포지방만의 말씨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포사람들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이곳을 '충청도 중의 충청도'라고 주장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지도 모른다.
내포는 농사와 과일이 잘될 뿐만 아니라 안면도, 황도의 조기잡이, 간월도의 어리굴젓이 상징하는 바다의 풍요로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여 서울에서 세력있는 집안치고 여기 충청도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지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충청도에서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자, 동쪽은 큰 평야가,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내포는 지세가 한 쪽으로 막혀 끊겨 있고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않으니 임진, 병자의 두 난리 피해도 이곳에는 미치지 않았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며 넓다. 물고기와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다만 바다가 가까운 곳에는 학질과 부스 럼병이 많다."
내포는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큰 시냇물이 골마다 흘러내릴 뿐 아니라, 해양성 기후가 강하여 춥지도 덥지도 않다. 태풍이 통과하는 빈도도 6년에 한 번 꼴 밖에 안 되며 강우량이 적당한데다 집중호우가 있다해도 바다로 흘러드는 거리가 짧아 홍수의 피해가 크지 않아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고 魚鹽柴水가 고루 갖추어져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였다. 거기에다 이곳은 한반도의 곡창지대인 서해안의 남북 해상교통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남북중국과의 해상교통에도 가장 유리한 입지조건을 가진 지역이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가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금강유역으로 천도해 제해권을 회복하는 6세기경부터 이 곳이 백제해양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당시 내포는 한반도내에서 국제문화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선진 개방 문화지역이었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 주욱 남북조시대 불교문화의 영향을 이 곳 태안반도의 유적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2. 인문지리적 성격
-외유내강의 고장, '깡'이 센 내포사람들-
이런 내포땅인지라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없어도 낮은 구릉이 굽이치는 평화로운 전경은 일상과 평범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이 평온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씨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다. 부드럽고, 여유있고, 친근하고, 유순하고...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포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온화한 성품만이 아니라 강직함과 과격함을 겸비한 분들이기만 하니, 모름지기 옛부터 충청도 사람들을 가리켜 외유내강이라고 한데는 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같다.-시체말로 '氣가 센 놈들, 깡이 센 사람들'이 사는 고장이라고나 할까.
최영장군부터 시작해서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왜란때의 이순신장군, 추사 김정희선생, 구한말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신부, 윤봉길의사, 김좌진장군, 개화당의 김옥군,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의 박헌영, 이강국, 만해 한용운, 유관순열사에 이르기까지...
어디 그뿐이랴. 이곳은 퇴계의 道友였던 정존재 이잠선생 같은 대학자 를 위시하여, 배후에서 인조반정을 성사시킨 대시인 용계 이영원선생, 광해군조정에서 시인을 지낸 구원 이춘원, 다산 정약용이 존경해마지 않던 금대 이가환 선생, 인수체를 이룩하여 조선전기 4대명필로 꼽히는자암 김구, 인조대의 대학자 야곡 조극선, 병자호란때 순국한 충장공 이의배장군, 영조시대때 호파의 영수로 학계를 주도하던 병계 윤봉구 선생, 석문 윤봉오선생형제 등 큰 인물의 배출이 끊임없던 곳이었다.
이것은 내포지역이 본래 백제이래 충절의 땅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들이 쏟아져 나와 신명을 바쳐 순국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이러한 예는 김정호의 '대동지지'권5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조'에서 홍주를 백제시대 주류성이라 비정한 사실과,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백제멸망과 부흥운동 기사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복신과 승 도침이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고 주류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서북부인이 모두 따랐다"고 하는 기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니 내포사람들의 성정이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본보기라 하겠다.
내포땅의 가장 이름있는 명승지는 단연 수덕사이다. 수덕사는 백제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며 고려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한다.
근세에 들어와 이곳 수덕사와 깊은 과련을 맺고 있는 큰 스님들을 꼽으라면 경허와 만공스님을 지적할 수 있다. 만공 월면(1871-1946)스님은
근대 한국 선종의 중흥조인 경허 성우(1849-1912)선사의 高足弟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수행과 실천으로 이를 꽃피워 낸 大善知識이었다.
경허선사는 서세동점의 암울한 기운이 전아시아 대륙을 뒤덮어 가던 조선말기에 이땅에 태어나 불가에 출가한 이래, 우리와 정반대의 가치체계를 가진 서구문화가 기계문명을 앞세워 밀려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일체의 전통적인 사고와 관행의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가치관의 폭을 무한대로 늘려놓는 것만이 그 정반대의 문화충격을 감내해내어 전통문화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확고한 신념이 頓悟漸修의 맹렬한 수행과정을 거치게 하고 갖은 암시적 기행을 일삼게 하였던 것이다. 원효대사처럼 경허선사의 기이힌 無碍行은 범상한 눈으보면 한낱 괴이한 행동에 불과하겠지만 올바른 식자의 눈에는 세상을 깨우치는 풍유요 암시였던 것이다. 경허선사의 이런 사상은 비록 그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해도 우루과이라운드가 밀려오고 교육시장 개방압력에 맥을 못추는 거기다가 팝송과 코카콜라가 판을 치는 바로 우리시대 지금 이당에 아직도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지않는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로 만공선사는 스승의 이런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알던 분이었다. 그래서 경허선사가 자신을 인가한 다음 갑산으로 더나자, 스승이 장차 만주쪽에서 도모할 일에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자신은 민족정기의 최후 비장처인 수덕사에 주석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만공선사는 결성출신인 만해 한용운과 손을 잡고 한국불교가 일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본산 주지회의석상에서, 사찰령과 사법을 제정하여 조선 승려들을 대처, 식육, 음주의 누명으로 파계시킨 전조선총독 寺內正毅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비난하며 南次郞 일본총독에게 조선불교를 간섭하지 말라고 사자후를 토하였다.
이런 만공선사의 민족의식은, 선사를 오랫동안 옆에서 시봉한 김관호(1906-현재)선생이 "만공선사가 남차랑 일본총독을 제거하기 위해 한동안 비수를 품고 다닐정도로 투철한 분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도 만공선사는 정혜사의 能仁禪院에서 수많은 靑眼衲子들을 길러내어 일제화된 대처종단을 몰아내고자 하였으며, 見性庵을 지어 한국 최초의 비구뉘푀거맥의 문하에서 배출된 것이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20세기 조선 선종인맥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