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09년 여름호.
□ 원로 시인을 찾아서
대담자 김규동 고형렬 맹문재
때 2009년 4월 4일 오후 3시- 6시
장소 김규동 시인 자택(대치동 미도아파트 102동 905호)
아직도 길을 찾는 노시인
개나리가 피어 있는 2009년 한식 하루 전날, 김규동 시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도로가의 플라타너스 가지들이 모두 절단되어 휑뎅그렁했지만 노시인의 모습은 정정했다. ‘후반기’ 동인답게 역사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꺼지지 않은 소원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가고 계셨다.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이나 시 쓰기에서 후회한 적은 없으신지요?
김규동 저는 의지력이 강한 편이어서 삶을 비관한 적은 없어요. 어릴 때부터 야단을 많이 받고 자라서 반항심이 있어요. 분단으로 인한 억울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뭔가 잘하는 것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요.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을 꼽으라면 어떤 시인을 추천하시겠어요?
김규동 역시 정지용이겠지요. 그리고 김기림, 이상, 이상화, 이육사 등이 되겠지요.
고형혈 백석 시인은 어떻게 보시나요?
김규동 백석은 너무 여려요. 시의 내용이 없고 너무 쉽지요. 사투리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뭐 있나요. 붕어 잡아먹은 이야기가 시가 되겠습니까? 시인은 그렇게 써서는 안 되지요. 이는 최서해와 이효석과 비교하는 것과 같아요. 서해는 불행해서 쓴 것이고 효석은 행복해서 쓴 것입니다. 어느 쪽이 셀까요? 불행해서 쓴 것은 한 시대의 불덩어리가 될 수 있지만 행복해서 쓴 것은 그냥 메밀꽃으로 끝나고 맙니다. 저의 이와 같은 평가는 1942년 무렵 함께 공부하던 학생들이 내린 것이지요. 지금하고는 평가가 달랐어요. 서정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정신 나간 놈이다, 역사 인식이 없다고 비판했지요. 이용악도 술주정뱅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이용악이 쓴 전라도 가시내라는 것이 뭐예요. 조선 땅에서 못 살아 만주로 가 중국인들과 싸우면서 땅을 일궈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딸입니다. 몸을 파는 그녀들과 술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반면에 김기림은 철학이 있고 문명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학생들이 인정했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김기림 선생님의 애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기림 선생님께 가장 배울 점은 무엇이었는지요?
김규동 한마디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지요. 근면하고 정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남을 위해 애쓴 분이지요. 문명에 참여해서 문명이 어떻게 진행할까를 공부했어요. 추운 겨울 오버를 입고 잠도 자지 않고 공부했어요. 일단 일을 하면 열심히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배구 선수가 되기도 했지요. 이상 시인과 매우 친했어요. 왕래한 편지를 보면 우정이 대단했어요. 『기상도』라는 시집을 이상이 만들어주었는데, 이상이 술을 먹다보니 받은 제작비를 좀 썼어요. 그래서 시집을 이해할 독자가 없으니 50부만 찍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자고, 또 시집 본문의 쪽수를 빼자고 제안했어요. 김기림은 친척들에게도 좀 돌리고 싶고 또 쪽수가 있어야 독자들에게 편리함을 준다고 생각해 돈을 더 부치겠다고 했어요. 대조적인 성격을 볼 수 있지요. 이상이 대중을 무시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김기림은 대중을 이해하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0년에 쓴 「문화의 운명」(『문예』)이나 「소설의 파격」(『문학』)에도 잘 나타나 있어요.
맹문재 김기림 선생님께서는 동시대에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대부분 월북했는데, 왜 함께하지 않았나요?
김규동 이유는 간단해요. 해방을 이북에서 맞이해 평양에 가 문단 활동을 한두 달 해보았는데, 조선문학가동맹 소속 문인들과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남조선으로 넘어왔어요. 친구들에게는 이남 가서 보고 올라오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렇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한국전쟁 때 제일 먼저 납북 대상이 되었지요. 잡혀가서 돌아온다고 해놓고 왜 오지 않았냐고 문초를 받았어요. 달리 할 말이 없으니 공부하는 아이들 때문에 못 왔다고 했지요. 얼마나 처참했겠어요. 김기림은 정지용과 박태원과도 가까웠어요.
고형렬 정지용을 최고의 시인으로 꼽으셨는데 그 기준은 무엇인지요? 모더니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현재는 백석이 오히려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김규동 문명에 대한 인식 수준에서 본 것입니다. 백석의 경우는 대중성을 가진 일종의 서정시에요. 정지용이나 김기림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맹문재 그 무렵의 문단에서 잘 안 알려져 있는 시인이 있으면 들려주시지요.
김규동 박거영이라는 시인이 있었어요. 한국시낭독연구회라는 간판을 충무로에 걸고 활동했는데 상해에서 돈을 벌어온 시인이었어요. 여자를 매우 좋아했지만 거짓말은 안 했어요. 언젠가 염무웅 선생이 한하운 시집을 내겠다고 찾아왔어요. 그래서 제가 하지 말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그 시집은 한하운이 쓴 것이 아니라 박거영이 만들어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낸 것이거든요. 그런데 박거영은 좌익 문인한테는 돈을 주었지만 우익 문인한테는 돈을 안 주었어요. 그래서 김동리와 조연현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지요. 『인간이 그립다』라는 시집을 간행했는데, 백철이 서평을 써준다고 해놓고 오버만 얻어 입고 지키지 않았어요. 서정주도 시창작법을 써주겠다고 30만원이나 받고는 떼어먹었지요.
맹문재 미당의 권력이 대단했지요. 근래에 김준현의 박사학위 논문인 『전후 문학 장의 형성과 문예지』를 보니까 미당이 문예지의 추천을 완전 장악했던데요.
김규동 미당은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모두 미당에게 항복한 셈이었지요. 미당은 수법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시집 『나비와 광장』을 내려고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시집의 서문을 써드릴까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썼습니다 하고 거절했지요. 그 바람에 내가 고생을 했지요. 그렇지만 그때 미당의 서문을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박인환, 김경린 등과 ‘후반기’ 동인활동을 하셨습니다. ‘후반기’가 한국 시단에 어떤 의미를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규동 그룹운동이 한국 시단에서 어느 정도 가능한가를 실험해본 것이지요. 그룹 운동의 단점은 타자를 비판하게 되니까 그 반동으로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사생활까지 영향을 받았어요. 내가 서울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사장으로 있던 월탄 박종화가 반대해서 취소되었지요. 월탄이 문단 파괴분자에게는 일자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이전에 월탄이 이끄는 문총(文總)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거든요.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1925년생이므로 김수영보다는 네 살 밑이고 박인환보다는 한 살 많지요. 같은 동인이었는데 괜찮았나요?
김규동 박인환과 김수영이 다섯 살 차이인데, 박인환이 조금도 지지 않았어요. 완전히 동등하게 놀았어요. 그만큼 인환이 조숙했어요. 인환도 용했고 수영도 용했지요. 인환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가정생활이 어렵고 학교를 자주 옮겨 다녀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박인환의 시세계에요.
고형렬 1980년대에 참여시가 많이 양산되었는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시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규동 시인들이 현실로 내려왔었지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현실이 없어요. 저는 촛불 집회를 이해하기 힘들어요. 촛불은 너무 형이상학적인 거예요. 일종의 트릭으로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것 같아요.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요즘 나가지 않지요. 지금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대부분 정신 나간 소리입니다. 욕구 불만만 팽창되어 있는 것 같아요.
고형렬 보들레르의 모더니즘은 일상적 권태를 타파하기 위해 출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격동이 없는 시대나 권태로운 시대로 볼 수 있는데, 시인들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김규동 요즘의 시인들은 보들레르처럼 미치지 않았어요. 의식이 말짱해 가지고 미친 짓을 하니까 미친 짓이 되지 않지요. 보들레르는 애인을 구더기가 득실대는 죽은 말 곁에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는 구더기의 모습을 보여주며 얼마나 치열하냐고 말했어요. 또한 죽은 말을 보고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된다고 했어요. 보들레르는 자신의 사상을 그렇게 전했던 것이지요. 보들레르의 시는 경험하고 실천해서 썼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시는 고통인데 가벼워서야 되겠어요. 인기라는 것은 반드시 들키고 맙니다.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전각에 취미를 가져 전시까지 하셨지요. 어떤 계기로 전각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그 외에 다른 취미는 없으신지요? 집안에는 전각 작품이 벽에 걸려 있는 한 점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김규동 어떤 시인이 신갈에 문학관을 만든다고 해서 기증했어요. 어릴 때부터 나무 깎는 소질이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는 나무를 깎는 저를 보고는 한숨을 쉬시면서 너는 이다음에 큰 목수가 될 것이라고 했어요. 아버님은 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셨거든요. 전각은 하도 답답하니까 했지요. 글자를 한 자 한 자 파노라면 고향 집까지 간다는 마음으로 한 것이에요. 인내심이 있어야 해요. 다른 취미는 그림 그리기이지요.
맹문재 사모님과는 어떻게 결혼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김규동 집사람은 아우하고 잘 아는 여자였어요. 아우가 김일성대학 의과에 다녔는데 집사람이 그때 간호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의 연구실에 오곤 했어요. 내가 남하해서 지내고 있는 어느 날 을지로 입구에서 만난 거예요. 먼저 넘어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더라구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외로웠는데 참으로 반가웠지요. 그래서 서로 합쳤어요. 전쟁이 나서 부산으로 피난 갈 때 같이 갔어요.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한 거지요. 집사람의 가족은 1․4후퇴 때 넘어왔어요. 집사람과의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해야지요.
맹문재 북한에 계실 때 만난 문인들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조기천 시인을 만난 적이 있으신지요?
김규동 한설야를 몇 번 봤지요. 한설야는 교육상, 즉 남한으로 보면 교육부 장관 같은 자리를 맡고 있었는데 모스크바대학을 시찰하고 와서 김일성대학에서 보고를 했어요. 그 뒤 몇 번 더 보았지요. 그 외에 황민, 안용만, 김조규, 이찬 시인 등도 만났어요. 김조규는 『민주시민』의 주필이었지요. 이찬은 만주에 있다가 해방이 되어 나와 농민 연극을 지도했어요. 토지개혁 등을 연극으로 만들었고, 김일성 장군 노래도 지었지요. 조기천 시인은 만나지 못했어요. 조기천은 소련에서 나왔는데 문학가동맹 회원들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요. 기득권을 잡은 집단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임화의 경우도 같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박헌영과 더욱 가까웠는지 모르지요. 임화와 박헌영은 일제 때부터 똑 한 짝이었어요.
고형렬 최근에 내면의 소리를 들으시는지요? 무엇인가 한마디 하실 것 같은데요.
김규동 나 자신도 듣고 싶은데 못 들어요. 나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요.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분명 어딘가에 내가 들어 있을 텐데요. 어디로 가면 나를 만날까 항상 생각하지요.
고형렬 선생님께서는 만약 돌아가시면 육신의 주검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김규동 내가 죽으면 유골의 절반은 남한에 묻고 나머지 절반은 이북의 고향에 묻어 달라고 아이들에게 유언을 남겼어요. 만약 너희 대(代)에 통일이 안 되면 다음 대에라도 해달라고 부탁했지요.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 김규동
1925년 함북 종성에서 태어났다. 1948년 『예술조선』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시집 『나비와 광장』『현대의 신화』『죽음 속의 영웅』『깨끗한 희망』『오늘밤 기러기 떼는』『느릅나무에게』 등을 간행했다.
■ 고형렬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시집으로 『대청봉 수박밭』 『마당 식사가 그립다』가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