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3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서론
공연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도무지 힘도 없고 지금 이상태로 정지되었으면 좋겠다라던가 아무생각없이 몸만 빠져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은 없었는가?
삶의 무게가 너무 벅차게 느껴지고 슬프다고 느낀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바로 그것은 시 43편의 기자와 같은 느낌과 같은 것이다. 시 43편의 기자는 아마도 고라자손의 어느누가 지은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익명의 저자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저자만의 감정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느끼는 감정이기에 공감이 간다.
시인은 꼭 우울증의 초기 증세 같이 보인다.
2절의 내용은 두가지 방향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원수의 압제로 왜 나를 슬프게 다니게 하셨는가?
그럼,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한 것처럼 그를 버리셨는가?
그런데 이것은 성경전체에 흐르는 사상과 조화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은 함께 계시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적이 있지만 절대로 먼저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으신다.
예를 살펴보자.
첫 번째,
(레 26:43,44) 『[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44]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그들을 지키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버린다는 시편 43편의 내용은 맞지 않다.
두 번째,
(신 4: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세 번째,
(신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이 세가지 모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며 반면에 시 43편의 말은 사람의 말이다.
사람이 느낌으로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으로 느끼지만 하나님은 절대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이사상이 있다.
(히 13:5)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신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된 사상이다.
마 28:20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
그러나, 이 성경절은 조금 다르다.
(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 이것은 이제 어떻게 이해가 되는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따라 이말은 전혀 다르게 된다.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 먼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 그사람의 선택까지도 하나님께서 버린 것으로 하나님 능동형으로 표현하신 것으로 그 책임까지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림으로 즉,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을 하나님이 버린 것으로 설명함으로 내가 너를 버렸다고 말하신다.
이러한 표현은 그 선택까지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려서 그 결과를 하나님이 버린 것으로 이야기 한것이지 하나님은 한번도 버리신 것이 아니다.
곧, 시편43편 2절의 버리신....... 것은 사람의 느낌이다.
두 번째로, 2절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중압감을 느낄 때 슬프게 다녀야 하는가?
이것 역시 성경의 사상과 일치 하지 않는다.
성경의 기본적인 전재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다르며
(사 55:8,9)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일이 안되어서 고통스러워 슬프게만 생각해서 하나님 왜이렇게 하셨어요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생각이 내 방법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었는지 꼼꼼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생각이 일치 하지 않았다면 그 고통의 기간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곧, 시편 43편 기자는 괜한 오해로 힘이 빠지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랬던 그 사람이 그 이후의 고백에서 전혀 새로운 희망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4절 수금으로..
5절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우울증 증세를 극복하고 새로운 활기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자가 힘 빠지고 슬펐던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던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그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본론
첫째로, 주의 빛과 인도함을 받았다.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 -예수님을 드러내는 말씀, 예수님과 동일시된 말씀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상은 살펴보면
빛은 예수님이며 말씀으로 표현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세상의 빛을 예수님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즉, 빛은 예수님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요 17:17 주의 말씀은 진리이다.
곧, 주의 빛과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드러내는 말씀이며 예수님을 만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바른 품성을 드러내는 말씀을 만나야 만이 확신할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때 힘이 빠진 자가 힘을 얻고 슬퍼한 자가 기뻐한다.
나를 지지한자와의 관계가 흩어 질 때 힘이 빠지고 슬퍼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감정이지 말씀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씀 속에서 확신하고 예수님의 품성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받아 드릴 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의 약점중 하나는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최고로 여기며 나의 감정과 기분을 최고의 것으로 여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보다 내가 경험하고 본 것을 더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못된 결과로 인도될 수 있는, 사실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의 경험으로 감정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안 된다.
과학자들의 이야기로 첫눈에 반한다는 것 또한 어릴 적의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다. 어린 쥐로 실험! 신 레몬즙으로 엄마 젖에 발라 젖을 먹이고 성장 후 레몬즙을 바른 쥐를 만나게 하자 바로 그 어린 쥐가 레몬즙을 바른 쥐를 선택하였다.
이것은 바로 어릴 적 추억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추억이 잠재되어 있다가 이것이 익숙하고 편해서 자신의 상에 의한 것을 찾다가 발견했을 때 우리는 첫눈에 반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부부는 닮는다” 나와 익숙한 사람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얼굴을 자기가 보면서 멋있는 구석을 발견하며 거기에 맞는 익숙한 사람을 나와 느낌적으로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즉,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지극히 어릴 적 경험에 의한 추억에 의한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인 잠재적인 상이라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눈을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다.
자동항법장치를 장착한 비행기의 추락을 추적한 결과 조종사가 계기판을 믿지 않고 조종사가 그의 눈을 믿음으로 계기 대신에 자신의 눈의 판단대로 결국 산을 드리 박고 추락했다.
이처럼 사람의 눈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을 의지할 때 잘못될 결과가 많다. 그 감정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틀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공연한 좌절과 슬픔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
내가 좋다고 느낄 때만 좋아지는 우리의 감정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판단하거나 그분이 나를 슬프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를 그것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 그분의 품성이 묻어난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동행한다는 사실에 확신하자. 그리할 때
두 번째, 주의 단에 나아가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괜한 오해로 힘이 빠지고 슬퍼지면 그냥 있지 말고 주의 단에 나아가 극락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곧, 주의 단은 예배하는 장소를 말한다.
예배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만나는 시간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나를 지이시는 창조주이시며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을 이렇게 받아들일때 여러 중압감과 슬픔을 돌파할수 있다.
창조주와 구원자로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평안을 확실할 때 혼자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함으로 우리는 극복할수 있다.
예배를 봄으로 즉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흔한 오해중 하나는 예배는 언제나 엄숙하고 조용해야 한다고 안다.
4절,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43:4) 『Then will I go to the altar of God, to God, my joy and my delight. I will praise you with the harp, O God, my God.』
불교의 용어인 극락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만나는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극락(極樂) - 지극히 기쁜 하나님께(NASB)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지극히 기쁘신 하나님인데 지극히 기쁘신 하나님께 우리는 엄숙, 조용함으로 기도한다.
힘이 빠지고 힘들 때 지극히 기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
내가 기뻐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엄숙하고 진지한 예배는 내가 기뻐하는 예배이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배가 아니다.
우리 고대의 예배는 가무가 있었다. 노래와 춤, 농사철 또한 모를 심을 때도 거기에는 반드시 춤과 노래가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세로의 장대를 들고 춤을 추면서 소리 메김하는 한사람의 선창에 일제히 모를 심고 심었던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후렴구를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아홉명이 일하고 한명이 노래부를때 힘이 덜 든다는 것을 알았다.”
한이 많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노래와 춤을 통해서 풀어냈다. 살풀이 한풀이...
우리 민족의 아픔의 한을 이러한 것으로 풀어내는 것에 우리는 익숙하다.
“농기계로 농사를 짓자 노래도 할수 없어 살맛이 안난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민족의 신바람은 노래하고 춤추는 가무에 우리나라의 신바람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예배가 엄숙하고 이러한 것이 우리의 전통과 맞지 않다. 서양의 문화인데 이것은 우리의 전통과 맞지 않다.
우리의 민요는 거의 다 낮게 쉽게 부를 수 있고 가락도 있고 덩실덩실 춤을 출수 있다.
찬미가 15장 ‘성소에 계신 하나님’ 우리 정서에 맞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종교적 모습 속에서 엄숙한 모습을 보여야 만이 신이 노여움을 거둔다는 통념이 우리 속에 남아 있으며 또한 기독교역시 서양 문화 가운데서 들어옴으로 엄숙함이 더해간다. 그렇기에 힘이 없고 기쁨이 없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있어서 서양으로 나아갔다면 그 찬미가에는 아리랑 과 같은 리듬의 찬미가 있었을 것이다. 찬미가에는 베토벤, 하이든 등의 곡이 있다. 이것은 서양의 문화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다.
지극히 기쁨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한국기독교에서도 북을 치며 박수를 치며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늘어갔다. 이러한 교회가 한국에서는 발전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행사만큼은 엄숙해야만 신들이 그 노여움을 푼다는 것으로 예배가 꼴지어졌는데 성경의 예배는 기쁨과 찬양의 예배였다.
(시 47: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성경에서도 이야기 하듯이 우리의 예배의 변화가 필요가 있다. 한국민의 정서에 맞춘 변화가 필요하다. 지적이고 이성적이긴 한데 흥겹거나 열정적이거나 감정적이어서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못한다. 이상하게 예배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고 감동이 없다.
극락의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만난 때 우리에게 힘빠짐과 슬픔을 이기고 기쁨과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가운데 찬미가외에 우리의 정서에 맞는 복음성가 등이 많이 보급되어 있다.
지난주에 부른 것처럼 “주만바라 볼지라”를 동작을 섞어 부르자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우리의 예배를 기쁨과 찬양의 예배로 바꾸어 보아야 한다.
가사와 곡을 우리와 맞는 것들을 부름으로 감동의 찬양을 부름으로 슬픔과 힘빠짐을 이겨낼수 있다.
세 번째로, 주를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5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엄마 우리 남편 우리집 우리아빠.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내 신앙이 중요하다. 우리 신앙의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신앙을 통해 우리 신앙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 관계 속에 놓여져야 한다.
더불어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 각자의 개별적 관계가 필요하다.
(겔 14: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오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다.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은 - 내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한 것 까지도 가능케 하심으로 내 얼굴을 도와 웃게 하신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게 하셔서 웃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이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시어 나를 웃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슬픔과 힘 빠짐에 있는 나를 기쁘게 하실 수 있다.
성숙한 신앙인은 울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이더라도 지금 슬프더라도 찬양할 수 있는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처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이 된다면 우리의 힘 빠짐과 슬픔은 극복된다.
결론
시 43 괜한 오해로 힘 빠지고 슬플 때,
1. 말씀 속에서의 확신으로
2. 주의 단에 나아가 극락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3. 나를 웃게 하신 하나님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확신함으로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 또한 극복하자 하나님은 힘을 주시고 돌파할 수 있을 때 까지 함께하신다. 우리는 오히려 찬양하며 힘을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시편 43편의 기록의 흔적을 우리도 남길 수 있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