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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남자
2023년 10월 8일 본문 말씀: 디도서 2:1-5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2: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2: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 아닌 것’이라는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이 만드신 하나님의 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다는 점 때문에 남자가 인간의 대표하기는 했지만 아담은 처음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서 자기 대표성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네가 곧 나요 내가 곧 너다”고 말합니다. 둘로 보이겠지만 실은 한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한 몸이 둘로 나뉘어지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따먹지 말라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여자쪽에서 먼저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남녀가 ‘하나됨’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잔재는 각자의 인간 마음 안에 남아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야 하는데 각자 도생하는 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자 내부에 여성의 소리가 살아 있습니다. 이 여성은 맨처음 범죄한 사건의 여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즉 진실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므로서 발생하는 현상을 모든 인간 내부에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살게 되면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 죽지 말어!”라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지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지시가 따로 말씀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도의 내부는 자기 지시와 주님의 지시가 경쟁하는 마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지시를 거부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 힘으로 늙어감을 다시 젊음으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말입니다.(마 18:3)
이것은 곧 이런 기존 환경에서는 인간으로서는 손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구약에 예언에 보면, 어린아이들이 등장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왜 어린아이들이 독사와 함께 장난치듯이 놀지요? 그것은 전혀 해롭지 않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환상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환경으로 바꿔지기 위해서 이 말씀을 달성한 분이 오셔야 합니다. 신약에 있어 의미있는 남자와 여자는 모두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령에 의해서 제공된 환상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환상의 특징은 ‘더는 자기를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은 출생 때부터 이미 인간의 허물고 망가뜨리는 죽은 힘과 동반하며 살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늙음’은 하나님께서 내린 저주성을 뜻합니다. 동시에 성도에게 있어 ‘늙음’은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즉 늙어가면서 그 늙음에 맞는 역할을 다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을 쏟아내는 일입니다. 나이 많다고 다 지혜자가 아닙니다. 지혜를 아는 자가 젊어도 예언자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 32:7-9)
지혜란 딴게 아니라 왜 자신은 마땅히 망가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은 곧 굳이 내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진실과 지혜와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성도는 이 땅에 늙어죽어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스스로의 지시에 의해 내려진 자기 사명 곧 “나는 절대 죽으면 안돼!”를 대체하는 겁니다. 이런 지혜의 남자의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마노아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천사가 와서 삼손 삶의 특이성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나실인’ 곧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일단 삼손은 강한 자로 자라납니다. 하지만 그 강함에도 감당 못할 요소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와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번번히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삼손의 운명은 그가 적들에게 내민 수수께끼 안에 담겨 있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삿 14:14)
이 수수께끼는 삼손은 길에서 힘센 사자를 잡고 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죽은 사자 시체에게서 달콤한 꿀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곧 ①죽은 것에서 단 것이 나왔다②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왔다③강한 것은 죽는다④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강한 삼손 속에 삼손보다 더 센 여자, 곧 최초에 남자보다 먼저 범죄한 적이 있는 여인의 욕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한 삼손은 죽지만 그 강함의 상징인 머리카락이 잘리고 그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죽게 되는 그 상황이 하나님의 언약에 맞춰 들어가는 순간, 언약은 모든 것이 이기는 겁니다.
민수기 6:18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내가 세상을 산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예언을 살려낸다’를 말해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예언을 무장으로 하는 늙은 남자는 비로소 다음과 같은 말씀의 실천자가 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3-10-08 18:41
7강-디도서 2장 1-5절(늙음+남자)23100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2장 1-5절입니다.
디도서 2:1-5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사람들이 등장하죠. 이 사람들은 일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이 남자, 늙은 남자 또는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 나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나누어지게 됨으로써 인간이 남자가 된 것, 여자가 된 것, 이 자체가 우리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다 남자가 아니고, 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 따로 있고 여자 따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었으면 그 뒤에 반드시 따라붙는 게 있어요.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것이 따라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남자에게 준 것을 여자가 가지면 안 되고, 여자에게 준 것을 남자에게 주면 안 된다는 거죠.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남자로서의 사람 따로 있고 여자로서의 사람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로 만드시고 남자 역할을 맡겼고, 여자로 만드시고 여자 역할을 만든 거예요.
역할을 맡겼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주관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한테 역할을 맡긴 적이 없거든요. 내가 남자인데 여자 되고 싶다, 여자인데 남자 되고 싶다 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 한 그 사실을 전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 자기 자신에게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지시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죠. 하나님의 뜻은, 너라는 인간 속에 하나님의 뜻이 따로 거기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내 속에 내가 나에게 지시하고 싶은 뜻과 주님의 지시하는 뜻이 내 안에서 서로 투쟁하고 경쟁하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지시한다는 말은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뜻이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그것. 그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 안에서 ‘네가 남자냐, 여자냐’ 딱 지정해서 역할을 맡겼고 그 역할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 주의 지시가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 돼 버리고 맙니다.
주님의 지시가 따로 있는데 그거 아주 무시해버리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살겠다. 난 주의 지시 필요 없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남자 되게 할 때 남자보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여자가 여자 될 때 여자 보고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이미 남자 여자 되는 것 자체도 주님 지시의 시작, 개시된 거예요. 벌써 주의 뜻이 개시된 겁니다.
임의로 나를 처분하거나 임의로 내 뜻은 이겁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우리에게 있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로 여자로, 이렇게 성이 다른 두 분류로 나누었던 겁니다. 남자가 될 때는 나는 여자 아니라고 표현해야 되고, 여자는 남자 아니라고 표현됨으로써 내가 남자라면 여자 것까지 접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스스로 최후에 통합된 통합체가 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가게 되어도 여전히 통합되지 못한 그런 존재가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 보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남자가 남자로 사는 것은 살아 있을 이 기간뿐입니다. 여자가 여자로 사는 것은 살아 있을 이 기간뿐이에요.
통합되는 것은 남자 여자 없이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때 그때 통합되는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날 때는 이미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이렇게 살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자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따로 있는데, 주께서 남자 여자에게 다 같이 통합적으로 주신 지시가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너희가 선과 악을 아는 과일을 따 먹지 말라”라고 했어요. 주님의 지시가 벌써 있었어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낙원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가 심겨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악과와 생명 나무로 다루시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최후의 존재로 부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겠다, 이것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아시다시피 인간은 그때부터 선악과 지식을 따먹었습니다.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선과 악에 대해서 갈라진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예 선과 악이 뭔지 모르는 건 어린아이 같은 경우에 해당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아예 천국에 못 가요. 그런데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해서 분별심이 벌써 발생 된 상태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 만든 때의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는 어린아이 그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보시기 심히 좋았던 처음 상태의 그 인간 모습이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망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망가진 거예요. 고장 난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헛된 인생인지, 망가져 버렸는데 안 망가지기 위해서 그 많은 평생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후에 마귀가 그런 작당을 했죠. “너는 대단한 존재야. 망가지면 안 돼.” 자꾸 마귀가 우리를 들쑤시는 거예요. 벌써 망가졌는데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망가졌냐 하면요, 자기에 대한 자기 사명감을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그 사명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절대 죽지 마라.’ 절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냐면, 늙은 남자한테 이야기한다고요. 늙은 남자는 ‘늙음’과 ‘남자’ 둘로 나뉠 수가 있어요.
남자는 남잔데 늙은 남자예요. 늙는다는 것은 우리 계획에 없는 겁니다. 우리 소원이 늙는 게 아니에요. 뭐 어린애 같으면 철이 없어서 “빨리 어른 되고 싶어.” 하지만 일단 나이가 ‘서른 즈음’에 벌써 서른 때부터 곡선이 내려가죠. 서른 즈음에 내려가고 사십 되게 되면 ‘아, 참 그때 20대 항저우 축구 할 때 잘 뛰었는데, 금메달 뛰어서 군에 안 갔는데…’ 그건 20대고 나중에 30대 되고 40대 돼버리면 그때를 젊었다고 규정하고 지금은 그것보다 모든 기능이 쇠약한, 늙었다고 규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사명은 여전해요. ‘절대 죽지 말어. 절대 죽으면 안 돼.’ 마귀가 집어 넣어준 사명이죠. ‘누구든지 너를 비난하거든 죽여버려.’ 이런거죠. 내가 죽지 않고 나는 살아갈 가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비난하는 자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거예요. ‘너는 죽어야 되지만 나는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인간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늙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은 거예요. 늙는다는 것 다음은 죽음이거든요. 늙어 죽는 것, 저주받은 겁니다. 늙어 죽을 때 저주받는 이유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을 살피십니다. ‘네 안에 악마 있다. 네 안에 귀신 들었다.’ 이 말이 굉장히 기분 상하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건 기분 상할 문제가 아니고요, 모든 인간은 그런 운명을 지니고 있어요.
다시 아까 이야기를 하면 남자라는 것은 여자 아닌 거예요. 여자가 아닌 거죠. 남자가 되어서 여자까지 통합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망가졌습니다. 안 망가질 권한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늙어 죽습니다. 젊어질 권한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속에 이런 목소리가 있어요. ‘너는 죽으면 안 돼.’ 내가 나보고 하는 소리예요. ‘나는 죽으면 안 돼.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인생 성공한 거야.’ 이건 어디서 나온 목소리죠? 누가 집어 넣어준 목소리죠?
이 목소리 역할을 누가 담당하는가? 여자가 담당하는 거죠. ‘늙음+남자’예요. 그 남자 안에 여자가 들어있는데 그 여자의 기능은 뭐냐? 처음 선악과를 따먹을 때 제일 먼저 따먹은 존재가 여자예요. 여자가 화근이죠. 문제 있지요. 그 여자의 목소리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내가 꾹꾹 눌러앉은 진실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처음 선악과를 따먹던 여자가 하는 행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살고 싶고, 더 젊고 싶고, 더 늙어가기 싫고 누구나 인간은 죽기 싫어요. 그런데 인간이 죽기 싫으려면 내 내부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가 안 들려야 되거든요? 내가 안에서 완전체로 통합되어 있어야 돼요.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하나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죽기 싫다는 이 말은 통합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나는 지금 매사 죽음에 쫓긴다는 뜻이에요. 나는 죽을까 봐 겁내고 있고,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고 있다는 표현이 그 표현이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게 한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와 부부가 된다는 말은 창세기 2장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들 때 그 원칙을 양보 없이 그대로 주입 시킨 거예요. 처음 인간을 만들 때 그 원칙과,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달라진 원칙을 한 번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비교해 볼 때 처음에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부담이 하나도 없었어요. “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네가 나고 내가 너다.’ 전혀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구약 아가서에 나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벌거벗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서 여자 앞에서 남자는 나라고 주장하지 않고 여자는 남자 앞에서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 둘이 통합되어서 ‘나’가 되기 때문에 단독으로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 그 상태가 이상 상태죠. 바로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남녀가 결혼해서 부부가 되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이야기 합니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네가 왜 그리 잔소리가 많아?” 갑자기 한집에 사는 사람이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여기서 ‘아멘’ 나와야 돼요. 노래도 나오잖아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너 안 만나고 다른 남자 만났으면 나 이렇게 안 산다.” 이런 식으로 현재 있는 남자를 완전히 기죽이는 발언을 서슴없이 해대죠.
그리고 남자도 뻔하게 이렇게 나오죠. “그럼 그 남자랑 살지 왜 나하고 만났어?” “그래 내가 눈이 삐었나 보다.” 이렇게 이상하게 방향이 과거 이야기까지 해서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버리죠. 이게 통합이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천사가 안 돼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게 바로 남자라는 거예요. 특히 결혼한 남자.
그런데 그 남자가 아내가 자기보고 잘해주길 바라면서 본인은 지금 늙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 늙어가는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아내가 나에게 삼식이처럼 밥 세 끼 해주고 다 좋은데 내가 늙어간다는 것, 나도 거울 볼 때 추한데 아내나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얼마나 추할까, 남들이 추하다고 얼마나 욕들을 하겠느냐, 그것이 나의 내부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거예요.
나는 껍데기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내 내부에서는 ‘안 늙어야 돼.’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그 목소리는 뭐냐? 죄짓기 전에 하나님 보시기 아름답고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의 목소리가 지금 현실의 늙어가는 내 목소리와 거리를, 격차를 만들죠. 이걸 우리는 늘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말은 마치 이와 같은 거예요. 여러분, 기차가 그냥 땅으로 가면 잘 모르는데 철교, 큰 강물 지나는 다리 바깥을 보세요. 그 강물 위에 달리는 기차 그림자가 보입니다. 강물에 비치죠. 늙는다는 것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죽음이 평생 우리와 동반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같이 가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잘못 생각해서 ‘살다 보면 죽겠지.’ 그게 아니고 출생부터 죽음과 짝을 맞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살아온 겁니다.
누가 세냐? 죽음이 더 세죠. 우리는 죽기 싫고 늙어가기 싫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늙은 남자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면서 말씀이 훼방되지 않도록 하고,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라.’ 이렇게 하나님의 지시가 주어진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지시, 그 지시가 점점 더 내용이 많아졌고 확산되면서 지금 늙어죽어 가고 있는 늙은 남자에게 동일한 주의 지시가 동반해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뭇슨 뜻이냐 하면, 늙는다는 것은 단순히 망쳤다, 망했다, 곧 죽는다, 끝났어, 가 아니라 늙는다는 것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는, 저주받고 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저주받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지시를 어겼기 때문에 저주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저주받는 너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를 저주케 하는 말씀에 신경 쓰며 살아갈 때 이게 늙음에 나름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늙더라도 의미 있는 늙음, 이게 하나님 계시의 역할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연극무대로 본다면 연극에는 젊은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늙은 사람도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 하나님께서 맡겨준 역할이 있어요. 그 역할에 충실하는 것도 늙어가는 하나의 지혜입니다. 늙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늙는 역할 잘 해야 돼.’ 죽으면서 ‘죽는 역할 잘 해야 돼.’라고 맡겨주신 거예요. 이게 늙음이 가지고 있는 지혜라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늙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지혜가 뭐냐? 욥기 32장 7절에서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욥의 친구 세 명이 말로 욥을 이기지 못하니까 네 번째 친구로 등장하는 사람이 엘리후인데 엘리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오래 산다고 해서 지혜를 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이 말은 “내가 친구 네 명 중에 제일 어리지만, 지금 나보다 다 연배가 높지만 그런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은 지혜는 내가 보기엔 어른다운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늙은 자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 있는 자가 지혜로운 늙은 자가 되는 거예요.
오늘 디도서 본문에서 늙은 남자라는 이 말은, 늙은 남자, ‘아 난 늙어 죽는다. 인생 끝났어.’ 이러지 말고 세월을 보낸 만큼 하나님이 그동안 인생 살면서 깨닫게 했던 지혜를 끄집어 내라, 이런 뜻이에요. 그 지혜의 내용은, 제가 설교 처음부터 했습니다. 지혜의 내용은 뭐냐? ‘왜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통합되지 아니한가? 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남자 여자 따로 나뉘어졌는가? 처음에는 여자와 남자가 하나였는데 왜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따로 되어있는가?’
늙은 남자는 그 내용에 대해서 한 말이 있어야 해요. 이 점에 대해서 성경 신약 여러 군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뭐냐? 복음을 아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환상을 얻은 자, 환상을 보게 된 자다. Vision, 환상, 현 인간이 알고 있는 현실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올 때는 필히 환상으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 그게 나옵니다. 마지막 때에 성령을 보내줄 테니 성령이 오게 되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러분, 꿈이나 환상이나 같은 말이에요. 18절에 “내가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그 다음에 여기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예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젊은 사람들은 환상, 늙은 사람들은 꿈, 18절에 보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는데 그 내용이 뭐냐? 예언이다. 이 예언은 뭐냐? 하늘에서 주신 지식이다,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혜가 어디서 왔느냐?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면, 이 땅에서 십자가 지셨다가 하늘나라에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누가 보내줘야 돼요. 하나님 오른쪽에 간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아시고, 오른쪽에 앉으신 그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것을 이제는 성령을 통해 ‘내가 아는 것을 너희도 알아라.’ 해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에 대해서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있으니 제가 두 군데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에서 9절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젖 뗀 어린아이가 왜 독사랑 놉니까? 해롭지 않습니까? 다치지 않아요? 인간은 선악과를 알고 난 뒤, 망가지고 난 뒤 제일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내가 다치는 거예요. 내가 다쳐서 죽는 거예요. 절대로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위험한 것을 피해야 하잖아요? 인간이 늘 신경 쓰는 것이, 매일 신경 쓰는 그거에요.
‘난 다치면 안 돼, 난 굶으면 안 돼, 난 죽으면 안 돼, 난 아프면 안 돼, 난 실패하면 안 돼, 난 반드시 성공해야 돼.’ 이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뭐냐? 어린아이가 될 수가 없어요. 독자적으로 자기만 지키는 것이 전부예요. 어린아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는 말씀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게 있어요. 그게 지혜인데 지혜는 뭐냐 하면, 네가 현재 형편에 있는 그 선악 체계, ‘나를 지켜야 돼,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그 자체에서 네 힘으로는 벗어나질 못해요.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 가능해요. 환경이, 환경이 바뀌면 가능합니다.
어떤 환경? 젖 먹는 아이가 독사와 같이 노는 환경. 애한테 독사를 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줘도 괜찮다는 거예요.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표범과 사자와 어린아이 사이에 전혀 서로 해로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이사야 65장 25절에 봐도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주시는 겁니다. 주시는 것이 뭐냐? 그 주시는 것이 예언이고, 환상이고, 꿈이고 이렇다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 이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주신다는 말은, 듣고 배우라는 뜻이 아니고 환경이 그 말씀대로 바뀌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남자, 여자 없이 천사가 되는 그 세계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세계가 온다는 근거는 뭐냐? 온다고 해놓고 안 오면 어떻게 되느냐? 성경 말씀은 그냥 인간이 지은 글이다. 그냥 기대사항, 희망 사항이고 실제로는 이 말씀대로 안 되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건데? 안 오면 어떡해? 교회 수십 년 다녔는데 안 오면 어떻게 되나?’ 이런 염려 걱정이 또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런 비전이, 비전이 나오는 출처가 뭐냐?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뭘 했어요. 뭘 했는가? 십자가에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한 개인이 죽었다는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이 지구라는 환경은 이제는 재편되야 한다는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죽여버린 이 세상은 하나님이 나서서 불태워 없애줄게. 내가 네가 속해 있는 이 상황 없애줄게. 이 대자연 불로 태워줄게.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줄게.”라는 취지로서 예수님께서 먼저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이죠.
이 세상의 환경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이고 저주의 대상이니까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걸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매일매일 늙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 배려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내가 빠져나온 것처럼 너도 빠져나가게 해 줄게. 늙어서 빠져나가라.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울 거야.” 그냥 겉만 푸석푸석해지지 말고, 푸석푸석 하면서 속은 날로 새로움을 동반해서 푸석푸석 늙어가라 이 말이죠.
새로움도 없으면서, 성령 받은 것도 없고 비전도 없으면서 ‘아이고 늙어 죽겠지. 죽으면 천당 가겠지.’ 이거 어디서 그런 엉터리 희망을 갖습니까? 비전이 있어요? 없어요. ‘뭐 어떻게 되겠지.’ 그런 거 없습니다. 미리, 늙어가면서도 미리 ‘늙는데 이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 모든 인간은 늙어 죽는 게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요소가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냥 늙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예언이니까 그냥 늙으면 안 되고 예언을 들으면서, 그리고 그 들은 것을 퍼뜨리면서 늙어가야’ 되죠. 그래서 가정에서 남자의 역할은 바로 그 역할인 거예요. 이것은 남자가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고 남자 안에 일종의 parasite, 기생충이 들어있는 거예요.
어떤 기생충? 여자라는 기생충. 처음으로 아담이 있었을 때 따로 나와서 여자 단독으로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먼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여성적 요소가 남성 안에 이미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는 그런 여자하고 이혼하고 자기만 살아야 하는가? 아닙니다. 이혼하고는 정반대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5장 25절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다시 말해서 ‘남자들이여, 여자의 죄까지 감당하라.’는 뜻이에요. “여자가 지은 죄까지 감당해서 네가 고생해라.” 왜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여자가 몰라주면 어떡하냐? 모르고 자시고 할 거 없어요. 왜냐하면 연극 무대 위에서 하나의 역할이기 때문에. 남자하고 여자하고 서로 대사하는데 ‘내가 이렇게 대사를 쳤을 때 저쪽에서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왜 본인이 합니까? 감독이 역할을 줬으면 여자라는 배우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 역할 그것은 감독 책임이지 내 책임 아니잖아요? 여자가 어떻게 나오든 남자는 남자 할 도리를 다하면 되지 않습니까? 분명히 아멘, 했습니다.
할 도리를 다 해야지요. 뭐 ‘다 해줬는데 여자가 안 알아주고 잔소리만 하고…’ 그런 쓸데없이, 남자가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보고 이야기해야지 왜 여자보고 이야기를 하는지요, 자기가 책임져야지.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에베소서 5장 22절에 전 세계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뭐 주가 주 같아야 복종을 하죠. 주 같지도 않은데 뭐. 노름이나 하고, 바람 피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취미 생활하는데 그걸 뭘 복종해? 돈 갖다가 도박이나 하세요, 그럴까요?
주께 봉사하는 것. 주님께 어떻게 하는가를 남편에게 하면 되는 거죠. 그걸 가지고 세 글자로 ‘잔소리’라고 하는 거예요, 잔소리.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주께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5장 28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렇게 해놓고 그다음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이 비밀이 비전이에요. 이거 환상입니다. 꿈입니다.
환상이라는 말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환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다시 말해서 “너희 결혼했니? 교회 만들어라.” 그 뜻이에요. 교회 뭐 만드는 것은 주님 소관이니까 “교회 되어라. 교회 되게 하라.” 그런 뜻입니다. 가정이 교회 되게 하라. 역할이 뭐냐? 하나는 먼저 선악과에 손댄 죄인 역할, 하나는 그 죄인을 감싸고 용서하는 그건 남자 역할,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죄를 짓는 것은 남자가 자기도 죄인인 주제에 무슨 수로 남을 용서합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예수님 십자가 피가 들어가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부부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십자가 피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부부에게는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불신자가 헤어지자고 하거든 헤어져 버리라는 거예요. 나서서 헤어지자고 하지 말고 불신자가 헤어지자고 하거든 미련 없이 헤어져 버려라. 왜냐면 어차피 헤어져서 사나 안 헤어져서 사나 늙어가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늙어가기는 마찬가지고 어린애처럼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이렇게 남자 여자가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기 남자는 남자 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분리가 된 이 상황을 하나님의 예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죠. 그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하나의 남자가 나오는데 사사기 13장, 14장, 그리고 15장, 16장까지 등장하는 한 남자가 나와요. 이름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여자 세 명 때문에 망한 남자예요.
사사기 14장 1절에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이게 첫 번째 여자입니다. 16장 1절에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이게 두 번째 여자에요. 16장 4절에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이게 세 번째 여인입니다.
그리고 이 삼손은 그냥 한 개인의 존재를 위해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이 삼손은 하나님의 예언된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출생된 자에요. 예언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따라서 삼손이라는 인간을 보고 하나의 개인으로 보지 마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내야 돼요. 예언을 발견해야 됩니다.
삼손을 삼손되게 한 것은 삼손보다 먼저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어요. 그게 나실인이에요, 나실인. 사사기 13장에서 마노아 가정이 있는데 애가 없었어요. 애가 없었는데 여기에 천사가 내내려옵니다. 마노아 가정, 부부가 물어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요. 13장 17절에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비전을 이야기하고, 환상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성경에서 성도가 성령을 받아서 아는 예언은 모든 것을, 예수님이 알고 있는 전부를 다 받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에 있는 말씀,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어요. 모든 것, 더 이상 남아 있는 비밀은 없어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여러분도 비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요? 내 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도대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아무리 알아도 점점 모르는 게 더 생기는데 무슨 모든 것을 알아?’ 이렇게 하겠는데요. 여러분이 우리교회 부교역자 후보감이라면 제가 부교역자 하나 뽑는다 칩시다. 딱 하나의 조건만 물을 거예요. 딱 하나의 조건은 뭐냐? “당신의 신앙을 버리겠습니까?” 당신의 신앙을 버리겠습니까?
이게 뭐냐? 십자가를 제대로 자기에게 적용시킨 십자가를 알고 있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이미 망친 것을 망친 것으로 인정하겠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내 믿음, 나의 소망, 사랑, 그것 다 버리겠습니까? 안 버리면 부교역자 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고요. 나도 교역자 될 수 없고요.
이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내가 성경 지식을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닌 것을 아는 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나는 성경 지식을 가질 자격도 없고 가질 권한도 필요도 없고, 가졌다 해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모든 것을 아는 거예요. 모든 것은 주님만이 진리가 돼요. 주님만이 길이고 생명이 되고.
따라서 우리 인생을 살면서 나는 실망했다든지, 또는 만족했다, 그럴 자격이나 권한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하나의 맡은 연극, 역할을 할 뿐이지 그 역할이 만족스럽다, 실망스럽다? ‘네가 뭔데 네 인생을 평가해?’ 우리는 내 인생을 평가할 권한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불행했다, 불행한 인생, 행복한 인생, 주제넘은 짓이에요. 무슨 권한으로 우리 인생을 행복이나 불행으로 나눕니까?
나누는 것은 주님께서 나누는 것이지 왜 우리가 주제넘게 우리를 평가하고 판단합니까? 자기를 몰라서 그래요. 환상과 꿈이 온다는 것은 우리를 지배한다는 뜻이에요. 환상이 지배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현실에 내가 지배당하는 것을 이제 그만두라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으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말씀을 가운데 집어넣고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강도가 와서 나보고 칼로 찌를 때 우리는 막거나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하면서 피하지요. 그걸 보고 제 3자가 “강도가 칼을 들고 와서 당신을 죽이는데 당신은 왜 강도의 칼날을 피하느냐? 이 교만한 자!”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이건 뻘쭘하지요. ‘이게 무슨 소리야? 가만있으면 죽는데 그걸 피해야지 그대로 맞고 있어?’ 예수님의 나타남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장세워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는 칼날 같은 겁니다. 우리는 강도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을 피할 때 우리가 교만하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실 때 강도의 칼날로 오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오는 거예요. 말씀으로 올 때 우리가 그걸 피해버리면 우리는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아…, 강도 피하는 것을 통해서는 교만이 드러나지를 않는데 강도보다 더 센 말씀, 죽음의 저주가 들어 있는 말씀을 우리는 피해버리지요. 그러니 이것은 교만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의 완성이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나는 너의 신앙을 버리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내 신앙이 들어 있기를 원한다.” 이미 우리 속에 어떤 목소리가 있는데 그 목소리는 우리가 범죄한 목소리에요. 우리는 그 들리는 목소리를 눈으로 보고 싶어 했어요. 그게 메시아를 만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런데 메시아를 만났어요. 만났는데 죽여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께서는 보이는 주님이 이제는 들리는 목소리로 변했어요. 그게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8절 끝에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들리는 겁니다. 보는게 아니에요. 들리는 겁니다.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들리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예요, 들리는 것으로.
그런데 그 들리는 것은 뭐냐?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우리 속에, 우리 속에 내가 겉으로 늙어 죽는다는 것과 그리고 이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이 충동, 죽음에 쫓기는 이 마음가짐, 이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건, 선악과 따먹어서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주님의 목소리가 끝까지 따라온 거예요. 우리와 동반해서 따라왔고 출생했을 때부터 줄곧 따라다닌 거예요. 강물에 비친 열차의 그림자처럼.
떨어진 적이 없어요. 주님의 일관된 뜻은 우리 인생을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은 내가 너를 죽이고야 말리라.”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거고요. 그 말씀까지 포함해서, 그 말씀까지 포함해서 그 죽어야 될 사실, 목소리가 실제 사람으로 등장한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을, 오신 구세주를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끝났지요. 끝났는데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일어났던 그 환상, 인간의 현실에는 없다고 여긴 그 환상의 음성이 우리 속에,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지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내 안에서 들려지게 해야 돼요. 그만큼 인간 속에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거예요.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났는데 그 부모가, 마노아가 천사에게 묻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었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기묘자다.” 기묘자, 기묘한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 못 하는 것, 이 현실 세계에는 없는 거예요. 기묘한 거예요. 그러면 태어나게 된 삼손은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 기묘한 존재가 인간의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줘요. 인간이 늙어 죽는 것, 늙음과, 늙음의 저주와, 늙음 자체 안에서 지혜, 두 가지 다를 함축해서 지혜의 형태로 보여주는 젊은 사람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젊어도 지혜자에요. 하나님의 나실인이고 예언자에요. 그러니까 인간 내부와 외부를 삼손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삼손은 여자 세 명 때문에 망했어요. 삼손은 겉으로는 힘센 사람이었습니다. 힘센 사람이었는데 그 힘센 것이 여자 좋아함 앞에서는 맥없이 약한 자가 되었어요. 소용없는 힘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사자를 만났는데 힘이 세니까 그 힘이 센 것 가지고 사자를 때려죽였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삼손은 여자를 만났지요. 여자를 만나면서 여자를 얻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 수수께끼가 뭐냐?
사사기 14장 14절에 나옵니다. 13절 끝에서부터 보면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수수께끼의 내용은 뭐냐?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삼손에게는 이게 자기가 때려잡은 사자 이야기지요. 이게 삼손의 자기 이야기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죽은 것에서 단 것이 나온다.’ 이렇게 되고 그 죽은 자는 강한 자에요. ‘죽은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더 나아가서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다.’
그런데 ‘그 강한 자는 죽는다.’ 더 나아가서 ‘죽음이 어떤 것보다 더 강하다.’ 이 네 가지 절차를 삼손이 보여줍니다. 죽은 것에서 단 것이 나오고,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오고. 왜? 죽은 자가 사자기 때문에. 얼마나 강합니까? 사자보다 강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역할, 나실인은 그것보다, 사자한테 꼼짝 못 하는 인간, 사자보다 더 강한, 그 강함보다 더 센 자로 누굴 만드는가? 삼손을 만들었기 때문에 삼손이 사자를 때려죽일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강한 자가 죽습니다. 왜? 자기 내부에 있는 여성에 대한 욕구, 통합되지 않는 욕구, 나는 남자인데 왜 여자와 하나가 안되는가? 하나 되기 위해서 여자를 찾는 그 욕구, 하나에 대한 염원, 시도가 그 강한 삼손이 여자로 인하여 죽습니다. 특히 여자 때문에 머리카락이 잘리지요.
원래 나실인은 머리카락과 관련되어 있어요. 민수기 6장 18, 19절에 보게 되면,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찌며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나실인은 자기가 약속한, 서원한 기간 동안에 포도주를 멀리하는 그러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키면서 지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주인인 내가 살아 있다, 가 아니라 나는 서원대로 이미 죽은 자인데 네가 죽어 있는 기간의 표시가 머리카락의 표시에요. 그 머리카락은 ‘내가 살아 있다.’가 아니라 ‘주께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예언을 살리고 내 안의 지혜를 살리는 거예요.
구원의 복음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성도 만든 거예요. 나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그 머리카락의 내용이 뭐냐? 머리카락 안의 핵심이 뭐냐? 죽은 자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더 강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사람에게 맞아 죽은 그분이 살아 있는 나보다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 환상, 그 비전, 그 꿈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어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분에 의해서, 그분이 환상이라면,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은 것이 환상이라면 그 환상에 입각해서 세상은 환경이 바뀌어요. 이제는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쳐도 괜찮아요. 스스로 나를 지킬 필요가 없다니까요! 나는 늙어 망가져 가면서, 그리고 결혼해서, 내가 남자로서 결혼해서, 또는 여자로서 남자와 결혼해서 통합되지 않는 둘 사이를 억지로 통합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 망가짐이 더 망가지고, 부서짐이 더 부서지고, 성질 더러움이 더 성질 다 버려놓는 거예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이런 나쁜 여자 아니었는데 당신 만나고 나 욕 막 나온다, 정말! 당신 나한테 나쁜 남자야. 난 공주였어. 내가 이렇게 성질 더럽게 된 것 다 당신 책임이야.” 이것은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무너질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좋아요, 무너집시다. 무너지지만 이 세상 말고 다른 환경이 있는 것, 환상, 성령의 꿈을 꾸는 환상,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이 무너져야 마땅함을 서로서로 교환하는 이것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이야기, 주제가 되어야 되고 교회의 주제가 되어야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망가졌는데 고맙다. 무너질 것은 무너져서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리라, 나는 오래 살리라, 바르게 살리라…’ 하는 이런 부질없는 악마적 기대감을 다 묵살해 주니 고맙다.” 마땅히 죽어야 될 자가 죽는 것이고, 마땅히 죄인이어야 될 자가 죄인인 겁니다. 우리는 윤리, 도덕으로 살고 싶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욕망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후패하지만 우리 속에 새로운 지혜, 나실인, 삼손, 하나님께서 살려주면서 왜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왜 주께서는 죄인을 불러서 천국 백성을 채우는지를 아는 지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