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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광 (레 9:22-10:2)
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 '제사장 나라' 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대신해서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이 덩달아서 함께 천국에 가는 희한한 나라가 바로 제사장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원리는 누가 일등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세상 나라의 원리이고, 이 제사장 나라는 누가 대신 희생을 하는가? 즉,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이 다른 사람에게 미쳐서 함께 잘되는, 구원받는 곳이고, 또한 그러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누가 잘났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남이 하지 못하는 희생을 하였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세상처럼 1등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남들도 그것을 보고 본 받아 잘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1등이라는 상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교회는 언제나 교회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그런 기준은 버리고서,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10장 1절과 2절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불벼락을 맞아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들인데, 그러면 이들이 왜 죽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지를 않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금 시집을 온 며느리가 밥상을 준비하는데, 시어머니가 미리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가야, 너희 시아버지는 나물은 좋아하지만, 고기는 싫어한단다. 그러니 나물을 맛있게 무쳐서 음식을 하도록 해라' 라고 분명히 말을 했는데, 그런데 며느리가 삽겹살을 굽고, 소고기 국을 끓여 가지고 갔다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 밥상은 올라가자 말자 마당으로 와장창 내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도무지 용서를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리 다 가르쳐 주었는데도, 그렇게 하지를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는 데로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벼락을 맞아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데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간직하고 살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아간다고 말은 잘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과거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서 나온 것으로 대단히 잘못된 말입니다. 귀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나 고사를 드릴 때에는, 돼지머리를 놓고 정성을 다하면 통할지는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께는 전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절에 가서, 부처에게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빌던 그러한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제는 '부처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정신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에 사로잡힌 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살아가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교회가 아니라 그 어느 장소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기도하는 내용이 모두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아니라, 이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일을 당해도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그리고 더욱더 대신 희생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그러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마치 자식이 아버지께 사고 싶은 물건을 적어서 갖다 내미는, 그러한 청구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그런 것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달라고 반복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는 이런 것을 갖고 싶지만, 그런 것을 참고, 오히려 내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오히려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살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러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한번도 그런 기도를 하지 못했다면, 죄송하지만 한번도 하나님 앞에 제대로 기도를 한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실제로 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두 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 하지를 않고, 설사 하나님께 한다고 해도 그 竪뎨뼁育?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우상에게 기도하는 내용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면, 다 뽑아 버리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흥회를 잘 안갑니다만, 그래도 가끔 부흥회 설교 테이프는 한번씩 들어봅니다. '혹시나' 해서 들어보면, '역시나' 입니다. 그 내용들이 주로 어떤 것인가 하면, 첫째로 목사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게 전부 다인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만,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하겠지요. 목사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의 뜻이,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기에 순종하면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아실 줄 압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이란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을 하게되고, 미련을 갖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하늘나라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하는 것은 좋지만, 마치고 나서 결과가 중요합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나서,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면 성공한(?) 부흥회이고, 그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생각이 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받아서 세상에서 성공할까?' 라고 한다면, 그런 부흥회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간에, 항상 주님만을 생각하면서,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쫓아가는 주님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자기의 뜻보다는 보다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쫓아간 그분이 우리에게 사탕이나 주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살라고 했다면, 우리가 그렇게 살면 되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그분을 따라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다고 해서, 가르쳐 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인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전달하는, 그것만을 외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는 나라가 제사장 나라이고,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사장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장 23절과 24절입니다.
(레 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레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여러분, 하나님의 불이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백성 위에 떨어졌습니까? 아니면 제물 위에 떨어졌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 여호와의 불이 백성이 아니라, 제단의 제물 위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사장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은, '이 불은 여러분들에게 떨어져야 마땅한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제물 위에 떨어지게 하셨다' 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하나님의 불이 우리가 아닌 다른 곳에, 우리 대신 제물 위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사장의 임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가 바로 제사장 나라이고,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나 대신에 따로 희생된 분이 있는 나라, 그래서 그분의 은혜로 내가 살아나는 그러한 나라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천국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을 보면 얼마나 천국이 좋은지 모릅니다. 온갖 말할 수 없는 보석으로 그 나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열두 진주 문, 금으로 된 길 등, 우리가 이루 상상할 수 없는 만큼 화려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하늘나라의 가장 특징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말할 수 없이 화려하게, 황금으로 꾸민 집이 아니고, '어린양'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어린양이 있어야만 진짜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열두 진주 문, 황금 길 등은 이 어린양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보조 역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누구입니까? 누구이기에,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주인인 것입니까? 바로 2000년 전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국을 예수님의 나라, 혹은 아들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 10장 1절과 2절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왜 죽었습니까? 설교를 시작할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해서,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하지 않아서 불을 맞고 그 자리에서 타 죽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태울 때에는 그 사용하는 불을 하나님께서 따로 정해 놓으셨는데, 이 나답과 아비후는 그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다른 곳에서 불을 가져다가 제물을 태우려고 하다가 그만 자기들이 타 죽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섭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한번 정도의 실수는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봐 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한 방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불이라야 죄가 용서되는 것이지, 다른 불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이지, 제사장을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자기가 죄를 용서해 준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전부가 이단들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받아서 희생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로 나아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 세상에 나타난 유일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구약에서는 제사장 나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에 와서 하나님 나라, 예수님 나라,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인 것입니다. 목사가 있어야 되고, 장로가 있어야 되고, 집사가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가대가, 주일학교가 전도회가 있어서, 사람이 많이 모여서 북적북적 거려야만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속기가 쉽습니다. 전혀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은 없는데, 사람들만 많이 모여서 붐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냥 친목단체이지 결코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너무 민감합니다. 교인 수가 줄어들고, 주일 학생 수가 줄어들면 당장 걱정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적게 모이는 것도 자랑이 아니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몇 명이 모이든지 주님을 자기 인생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 대속의 희생정신을 본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에 따라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에 따라서 알아서 세우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목사, 장로, 집사가 아니고,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으면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이러한 봉사 직분이 눈에 보인다고 해서 먼저 앞세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안 되었다고 토라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때로는 우리에게 큰 시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가 가리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니까, 같은 말이라고 여기실지 몰라도 같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모임이지, 주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 아니고, 바로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절대시하고, 교회를 믿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로마 카톨릭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백년이 걸려서, 수 십억을 들여서라도 그렇게 웅장한 성당을 짓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려고 말입니다. 물론 자기들은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오실 때, 그 유명한 베드로 성당, 그리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충현 교회, 다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무너집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고, 주님이시고, 또한 주님의 몸인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를 믿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과연,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이 세상을 쳐다보지 마시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를 마시길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을 쳐다보십니까? 목사를 쳐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도 인간이고 실수투성이의 연약한 사람입니다. 장로님을 쳐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연약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족하지만, 우리들도 주님처럼 희생하며, 헌신하며, 봉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