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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용 식탁>의 여인들은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베란다에 서 있던 연이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거꾸로 떨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한숨과 눈물까지도 보고 만다. 그 찰나의 순간은 연이에게 남겨진 거대한 흉터다. 남편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세상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내몰리다가 연이도 같은 길을 간다. 그렇게 세상의 그녀들이 죽어간다. 어딘가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해도, 이 사회의 곳곳에서 숨막히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고꾸라진다.
<여고괴담>의 소녀들도 그렇게 죽어간다. 성적 때문에, 외모 때문에, 우정 때문에, 따돌림과 질시 때문에 소녀들이 죽어간다. 결코 나약하거나, 현실감각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성적만이 최고라는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외모만을 중시하는 그릇된 가치관 때문에,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비틀린 세태 때문에 소녀들은, 살해당한 것이다. 그것이 억울해서, 그들은 돌아온다.
한국 공포영화에서는 기묘하게도 자살한 원혼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살해당한 자가 복수의 염을 품고 돌아오거나 외부의 괴물이 침입하는 경우가 주류인 외국 공포영화와 비교해볼 때 지나치게 많다. 한국 공포영화에서 자살한 자들의 원혼은 여전히 세상에 머무른다. 그리고 복수를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원한을 품고 돌아오는 이유는, 죽음의 이유가 타인이나 사회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보기에도 그들의 원한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사회적인 것이다.
나카다 히데오의 <링>에서, 사다코는 자신을 죽인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에 복수를 꾀한다. 사다코는 자신을 우물에 밀어넣은 살인자가 아니라, 그녀와 어머니를 벼랑으로 몰아넣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복수한다. 저주의 비디오를 본 사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에게 복사한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 대신에 타인에게 죽음을 전가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기본 법칙이다. 로또처럼, 한 사람의 행운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주머니가 털리게 된다. 누군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링>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누군가에게 전가해야만 한다면, 결국 그 사회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링>의 원제에는 ‘바이러스’란 부제가 붙어 있다. 바이러스처럼 사다코의 원한은 급속도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전파된다.
전환점을 맞이한 한국 공포영화
<4인용 식탁>에서 보이는 자살, 혹은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죽음이란 충분히 고려해볼 법한 도피처다. 아이들과 함께 죽는 것이 유아살해라고도 하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동반죽음이 한편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아이들만 살아남았을 때, 그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의 보호 속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비참한 미래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다. 한국의 공포영화에서 유별나게 자살이 많고, 아이들의 죽음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유별난 공포심을 자극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면한 한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보호받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고괴담> 시리즈와 <4인용 식탁>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이다. 우리의 현실이 안겨주는 공포가 그려진다. 성적이 나쁘고, 일류대학에 가지 못하고, 좋은 직장을 들어가지 못하면 그는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 오로지 그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소녀들은 단지 떨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발버둥을 치다가 자신의 발이 이미 선 밖으로 나왔음을 깨달았을 때, 소녀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사람들이 굳이 외면하는 것들을, 나만이 홀로 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비정상이라고 차별받고, 사회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한번 보기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다. 고개를 돌려도, 한번 눈에 보인 것은 영원히 남아 있다. 내 망막에서 잠시 사라져도, 그것은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함을 알고 있다. 영화의 공포는 며칠이 흐르면 잊혀지지만, 현실의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장화, 홍련> <여우계단>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등 최근 만들어진 공포영화들은 그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현실의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몇년 전 등장했던 <해변으로 가다> <하피> <찍히면 죽는다> <가위> 등이 단지 ‘공포’만을 부각시켰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가위>를 제외한 10대 슬래셔 영화들이 대중의 외면을 받은 것은 단순한 쾌감을 느끼기에는 영화의 숙련도가 너무 낮았고, 현실과의 접점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올해의 공포영화들은 <여고괴담>과 <소름> 등이 보여주었던 현실의 공포를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한국 공포영화의 전환점이 된 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싸구려 장르? 현실에 대한 스케치!
공포영화의 목적은 ‘공포’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지만, 모든 공포영화가 단지 롤러코스터 같은 쾌감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공포영화는 인간의 근원적인, 사회적인 두려움과 불안감을 형상화하기에 적합한 장르다. 공포영화를 싸구려 장르라고 흔히 치부하지만, 그건 온당한 대접이 아니다. 1919년에 만들어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독일 사회를 거대한 정신병원에 비유하면서,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나치즘의 대두를 이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읽어낼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포영화의 원류라 할 고딕 소설 역시 시대상황을 담아낸 문학이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뱀파이어란 존재는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에 더이상 용납될 수 없는 광기와 야만의 상징이었다.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등 유니버설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공포영화들은 야만의 공포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을 응징하고, 무의식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폭력적인 내면을 탐구하기도 했다. 공포영화는 공포라는 자극을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그림자를 탐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조 단테의 <마티니>는 50년대 활동했던 괴짜 감독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공포영화를 홍보하기 위하여 괴물 분장을 한 사람이 객석으로 뛰어들게 하고, 관객의 공포감을 증폭시키기 위하여 의자에 전기장치를 하는 등 갖가지 기행을 일삼았다. 그의 기행은 너무나도 황당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시대 정신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현실의 공포는, B급 공포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공산주의에 지배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던 50년대의 미국인들은 그의 영화를 또 하나의 현실로 생각했다. 5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외계인 침공 영화들은 소련의 위협을 변종괴물이나 외계인의 침공과 동일시했고, 그뒤 발생할 암울한 미래를 그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포영화를 흔히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공포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들, 혹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만약 그것들을 우리가 현실에서 본다면, 그가 누구이든 연이와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당신 미쳤어!”란 말을 듣고, 따돌림당할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는 평화롭고 안온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악몽을 그린다. 행복한 결혼, 믿음직한 남편. 그러나 감옥처럼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이사온 여인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알고 보니 그 아파트는 악마교의 신자들이 모인 소굴이고, 그녀는 악마의 자식을 낳기 위한 제물이었다. 다정한 남편도, 친절한 이웃들도 모두 악마의 사제들인 것이다. <악마의 씨>는 60년대 이후 미국 중산층의 가면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얼굴과 이기주의를 그려낸다. 그건 폭로가 아니라, 현실의 충실한 스케치다. 로만 폴란스키는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인간의 마음에 감추어진 악마성을 그려내기에 골몰했고, <악마의 씨>에서도 동일한 주제를 파고들었다.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 폴란스키는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발견한 것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
토비 후퍼의 <텍사스 대학살>에는 캠핑에 나선 젊은이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죽이는 가족이 나온다. 이유라도 말해 달라고 절규하면서, 무고한 청년들이 비참하게 죽어간다.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도 이유없이 침울해진다. 이후 등장한 <13일의 금요일> 등 10대 슬래셔 영화에서는 10대의 방종에 대한 적의 등이 드러나지만, <텍사스 대학살>은 그냥 분노의 원형뿐이다. 하지만 그 분노에는 더욱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텍사스 대학살>을 만들게 한, 캠핑이나 하이킹에 나선 청년들을 연쇄 살인한 실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반전운동과 히피에 열광하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미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행복한’ 청년들을 죽였다고. 그것은 분명 시대가 유발한 연쇄살인이었다.
<텍사스 대학살>이 그토록 불온한 광기로 가득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베트남전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지만, 그들에게는 이유가 없다. 이역만리에서 북베트남 사람들과 총을 맞대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리가 말했듯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베트남인들과 싸우느니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대항해 싸우겠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다. 하지만 용감하게 시대에 맞선 알리는 미국의 배신자로, 전쟁을 기피하는 비겁한 영웅으로 비난받았다. 광기로 사로잡힌 미국 사회는 그를 고난의 길로 몰아넣었다. 정상적인 이성과 감성을 소유한 자라면 그런 폭압과 차별의 상처를 공유할 수 있었다. 광기로 미국인들을 전쟁에 몰아넣은 자들이나, 이유없는 전쟁을 거부한 청년들이나, 그 모든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소외감을 느낀 이들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이유없이 전쟁에 내몰리고, 죽어갔을 뿐이다. 죽은 자도, 죽이는 자도,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들도. 영화 속에서는 시대에 대해 단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지만, <텍사스 대학살>은 그 시절 당대의 대중이 느낀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슬래셔 영화는 깜짝 유행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주류에서 밀려났던 공포영화가 <스크림>으로 부활했지만, 주역은 슬래셔 영화가 아니었다. 지금 할리우드 공포영화를 장악한 것은 동양적인 원혼이다. <식스 센스> <디 아더스> 그리고 리메이크된 <링>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신과 악마의 이분법에 사로잡힌 공포영화가 아니라, 좀더 일상적인 공포를 포착하는 영화들이 서구 관객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것이다. <식스 센스>의 귀신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디 아더스>의 가족은 그들이 이미 죽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영원히 이승에 머무르려 한다. <식스 센스>와 <디 아더스>의 원혼들은 영원히 우리와 동거하고 있는 존재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갚아야 할 부채가 있음을 알려준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요 인물인 원혼들이 말하는 것 역시 같다. 장화와 홍련이 사또에게 나타난 것은, 현실의 부채를 갚아달라는 것이다. 그 호소를 제대로 듣지 못한 이들은 죽임을 당하고, 영혼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그들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공포영화가 말하는 것은 단지 악의 존재가 아니다. 공포영화가 환기시키는 것은, 공포를 자아내는 현실의 ‘악’이다. 단지 롤러코스터의 스릴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공포의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크루지 영감이 그랬듯이, 그 귀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포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했던 두려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