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은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균형 감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균형
감각이란 한편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두 가지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부족한 부분을 충족하려는 의도가
과잉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
 |
|
|
|
ⓒ2005 폭스코리아 |
다른 한 가지는 문명적 자기 반성이다. <블랙호크다운>에서 미국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평가를 얻은 그가 '이번에는 기독교와 서양의 종교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평가를 얻으려고 한듯이 보인다. 신에 대한 배격, 십자군
전쟁의 이면, 전쟁의 이유와 원칙의 반복과 강조가 전반부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기존의 치우침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균형감을
얻었다는 평가를 원할 지 모른다.
거창한 주제만을 가지고 영화를 이야기하자면 보는 이나 만든 이나 섭섭할 듯 싶다.
우선은 <글래디에이터>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의 벗어남과 균형감 찾기가 더 드러나
보인다. 영화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뭔가 통쾌한 볼거리를 기대할 수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 <글래디에이터>의 장쾌한 후광의 즐거움을 느꼈다고 <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는 격일 수 있다. 특히
장군 막시무스(러셀 크로 분)의 영웅적 리더십이 지닌 카리스마를
빌리안(올랜도 블롬분)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트로이>의 섬약한 왕자의 이미지다.
물론 같은 점은 있다. 둘 다 평범한 인간을 강조하고 그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다만, 처음부터 출발이 다르다. 막시무스는 로마군 사령관이지만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노예에서 검투사로 다시
영웅으로 화려하게 등극하지만 농사꾼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막시무스.
<킹덤 오브 헤븐>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빌리안은 대장장이를 매개점으로 지닌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영주의 아들이라 밝혀지고 아버지의 기사 작위를 승계
부여 받으면서 예루살렘을 지키는 총대장의 위치에 서게 된다. 진행의 방향은
서로 역순이자, 교차적이지만 막시무스도 발리안도 영웅이 되기보다는 농사꾼,
대장장이로 남고자 했다.
여기에서 다른 점은 한 사람은 대장장이로 돌아왔고 한 사람은 농사꾼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평범성의 강조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그간 수퍼 영웅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별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둘은 모두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운명에 맡겨지지만 막시무스의
비극성에서 빌리안은 약간 벗어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응집력의
차이가 나는 것일 지 모른다. 한편 <글래디에이터>에서는 곳곳에 막시무스를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를 배치하고 있지만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유장한 내러티브에 중심을 두고 있다.
영화의 첫머리부터 화려한 전투신을 그려 막시무스가 어떠한 인물이고 이러한 인물이 모함과 음모에 노예 검투사로 전락한 뒤 복수하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응집력 있는 대결 전개 구도를 보이는데 비하면 <킹덤 오브 헤븐>은 다층과 분산의 전투 전개 구도를 보인다. 마지막 공성전은 기대감을 충족할 만한 전투신이라 조금 갈증을 채워준다.
빌리안은 오히려 막시무스의 전단계를 설명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발리안을 통해 막시무스와 달리 집중해 묻는 것은 있다. 군인 아니, 영웅은 무엇을 위해 전투를 하는가? 땅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신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막시무스는 이러한 의미 부여와는 관련 없이 땅과 가족, 개인의 평범한 삶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이럴 때 뭔가 중간의 단계가 빠져 버린 느낌이다. <글래디에이터>가 고대의 관점에서 현대의 주체적 인간의 관점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킹덤 오브 헤븐>은 신이 아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의미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느린 템포의 전개를 택했다. 백성을 위해 싸운다는 단계가 있어야 개인의 삶,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현대의 관점으로 넘어올 수 있다.
예수가 희생했고 무하마드가 승천한 예루살렘. 빌리안은 그곳을 지키는 데 어떻게 총대장의 위치에 서게 되는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그에 대한 그 명분과 개연성 안에 철학적 의미 부여까지 하기 위해 리들리 스콧은 각 에피소드를 길게 엮어 냈다.
하지만 감독의 의미 부여는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보인다. 더구나 별거 아닌 것 같은, "신이 아닌 백성을 위해"라는 화두는 신학적 질서의 틀에서는 대단해 보이지만, 현대의 동시대인들에게는 식상해 보일 수 있다. 길게 늘일 새로운 의미 부여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또한 성지 회복이라는 십자군 전쟁이 사실은 유럽인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메시지는 별 다를 게 없는 내용이다. 이를 영화를 통해 자인하는 것이 주목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근원적인 종교적 차원의 비판이 아닌 일부 십자군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기에 이슬람에서 주목할 일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에 대한 묘사가 성에 차지 않을 듯 싶다.
전쟁에는 적이 존재하고 그들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일단 그 적이 존재하는 내외부를 떠나 같은 맥락이다. 막시무스를 움직인 것은 끊임없는 복수심과 바로잡음이었다면 빌리안은 회개와 참회, 겸손이라는 점이다. 적과 나가 끝없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공존을 이루려면 자신부터 돌아보고 자제하는 것이 순서라는 점을 던져준다. 그러한 메시지를 얻기 위해 영화 끝을 보아야 할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더구나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평화 공존이 빌리안의 태도와 과연 연결이 될지는 숙고의 대상이다.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가. 아울러 백성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논리가 영화를 지배하고 있고, 이는 현시대의 갈등을 일으키는 커다란 국가, 민족주의의 큰 패권적 논리의 축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