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나주. 광주 출신.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다. 1783년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합격하여 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 공서판(功西波)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로 유배되었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크게 활약하였다.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유배되었고, 이후 1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잇는 실학(實學)의 중농주의 학풍을 계승하고,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과감히 받아들여 방대한 저서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또 시재에도 뛰어나 어릴 때부터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10년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고, 59년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로 《정다산 전서(丁茶山全書)》가 있다.
2. 이 글은 편지글이다. 누구에게 왜 쓴 글인지 말해 보자
▶ 이 편지는 아버지인 정약용이 아들에게 남새밭을 기르면서 생활에 필요한 양식을 얻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또한 양반이라는 신분을 따지지 말고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호화로운 의식(衣食)을 탐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명심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생활의 가르침을 주기 위해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사구시 實事求是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중국 청(淸)나라 고증학(考證學)의 학문 방법론. 《후한서》 하간헌왕덕전에서 나온 말로, 대표적인 학자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주자학 경전 해석의 극복 등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실학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정약용(丁若鏞)은 주자학의 체계를 극복하는 길을 공자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에서 찾고 그 방법으로 철저한 고증과 실증적인 태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학파의 요구들은 당시의 현실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실학파 가운데 경세치용파는 거세되고 실사구시의 학문만 추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정희(金正喜)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학문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로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후 이 사상은 개화파에게 영향을 주면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