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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자 : 2011. 3. 15(화)
산행장소 : 창녕(관룡산)
(미나리축제)
참가회비 : 금일만오천원정(\15,000)
(단, 차량 1대 초과시 회원우대)
준 비 물 : 개별도시락 지참
집 결 지 : 두대새마을금고 본점 오전 8시출발 시간엄수!
문의전화 : 055)273-1617, 1610
055)251-1609, 1610
창녕 관룡산(750m)
용이되어 꿈틀거리는 구름같은 화강암 바윗길
태풍 매미가 울고 간 옥천 골짜기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다. 물길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몰고 가버린 사람, 가축, 집과 농지는 길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것은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 그런 태풍의 강력한 힘 앞에서 인간의 작고 연약함과, 인간은 결코 자연과 둘 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옥천저수지를 지나 관룡사 주차장에 도착, 소형승용차에서 빠져나온 다섯 명은 제각각 신발 끈을 조여 매며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오늘 산행에 같이할 길동무는 마산 무학산악회 김영길(60세), 성복돌(54세)씨 부부와, 하원식(44세), 문춘자(46세)씨다.
석장승이 반기는 관룡사
산죽숲 사이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들어서자 석장승 2기가 기다리고 서 있다. 좁은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마주선 한 쌍의 석장승은 길손에게 무어라 소리치는 듯 했다. 무서운 얼굴로 "왜 이제야 오느냐?"고 나무라기도 하고, 온화하고 포근한 얼굴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구나"며. 옛부터 석장승은 영역을 표시하거나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악기를 막아주는 수문장이었다.
석장승을 지나니 이제 관룡사의 영역이다.잠시 후 오솔길은 넓은 포장길을 만나왼편의 대나무숲을 돌아서니, 크고 묵직한 돌계단 위에 조그만 석문이 열려 있다. 길손 일행은 넓은 길을 버리고 석문을 지나 관룡사 일주문 앞에 멈춰 섰다.
일주문의 현판 '火旺山觀龍寺'란 글씨를 읽는 순간, 관룡사도 관룡산을 버리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숱하게 관룡사를 오르내리면서도느끼지 못했던 일주문 현판에 대한 감정이, 오늘 따라 서운함으로 다가옴은 왜일까?
관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다.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39)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583년(진평왕5) 증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천 명에게 '황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을 이뤘다고 전한다. 748년(경덕왕 7년) 추담의 중건과, 조선조에 들어 1401년(태종1) 대웅전을 중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부분 당우가 소실되어, 몇 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루어져 지금에 이른다. 관룡사는 대웅전(보물212호)과 약사전(보물146호)을 비롯하여 석조여래좌상(보물519호)과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295호) 등의 굵직한 국가 및 지방문화재가 있다.
천년고찰 관룡사를 둘러보고, 대웅전 마당을 가로질러 서쪽의 요사채 담벼락을 돌아가니 잘 닦여진 등산로가 나온다. 관룡산 산행길의 초입니다. 군립공원지역이라 비교적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솔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코를 벌름거리며 휘돌아보니 온통 소나무 산이다.
그래서 관룡산 일대가 자연산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것이다. 옥천골을 접어들면서 집집이 내 걸린 '자연산 송이판매' 라는 간판의 사연이 여기에 있었다. 송이가 자생하는 중요한 요건은 마사토의 토질에 소나무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길손의 후각을 자극하며 풍기는 소나무의 진한 향기와, 등산화 굽 아래 모래도 흙도 아닌 굵은 입자의 마사토가 바로 자연산 송이를 키워내는 그 원천인 것이다.
등산로의 오름길에는 마사토가 빗물에 씻겨내려, 소나무 뿌리는 마치 촌부의 거친 손가락 마디처럼 온통 상처로 점철되어 있다. 등산화 발길에 밟히고 채이는 솔뿌리에게 미안한 마음도 잠깐, 땀을 훔치며 걷는 눈앞의 소나무 가지를 비집고 살포시 부처님의 모습이 스친다(2003년 10월 현재 태풍 매미로 인하여 관룡사에서 용선대 가는 사면길이 일부 유실되어 우회하도록 노끈을 설치해 놓았음. 복구가 불가능해 보임. 당분간 우회로를 이용해야 할 것임-홈지기).
여기가 용선대다. 하얗게 빛나는 화강암 바위덩이는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인다. 부처님이 자리하고 계신 곳은 요새처럼 둘러진 산줄기의 그 정점이다. 해뜨는 동쪽을 향하여 천 년의 시간을 기다려온 용선대 부처님의 이름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이다.
천년의 미소 용선대 부처님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높이가 1.88m로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이다. 나발에는 육계가 높직하고, 얼굴은 사각형이나 살이 쪄서 부드러운 윤곽이다. 여기에 작은 눈, 크고 명확한 코, 듬직한 입을 묘사하여 얼굴 전체에서 미소를 발산하고 있었다. 대좌의 반구형 상대석은 꽃잎 안에 꽃무늬가 새겨진 겹 연꽃무늬로 조각되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각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고, 하대석은 사각형 받침 위에 겹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시간을 소급해 올라가보자. 이곳 관룡산의 화강암을 쪼아 대좌와 부처님을 만들어 앉히고, 동쪽을 향하여 잔잔한 미소로 침묵하며 흘러온 세월이 천년이다. 시간의 흐름은 세상을 많이도 변하게 했건만, 변함없는 것은 부처님과 그 잔잔한 미소뿐이다.
"당시 상황으로, 이렇게 아찔한 바위 위에 어떻게 부처님을 모셨을까예? 요즘 같아 헬리콥터로 싣고 온다면 몰라도..." 라며 묻는 하원식씨의 궁금증에도,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무던히 살아온 우리들 또한 묵묵부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답은 용선대 부처님과 잔잔한 미소와 이제 가버리고 없는 천년 전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등산로는 오름길로 접어든다. 다리 쉼을 하면서내려다본 옥천골의 허공 위에, 화강암으로 우뚝 서 빛나는 용선대와 부처님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만치에서 소나무를 기대고 앉아 땀을 닦는 김영길씨 옆에서, 부인 성복둘씨가 수통을 꺼내 "여~물 있습니다. 한모금 하이소" 한다. 수통을 주거니 받거니 휴식시간 내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인다.
계속하여 등산로는 오름길이다. 간간이 아래로 옆으로 이어지는 송이채취로의 희미한 길들이 보이긴 하지만, 관룡산으로 향한 등산로는 확실하고 뚜렷하다. 다만 눈에 튀는 것이 있다면, 안전사고와 무관해 보이는 등산로를 따라 설치된 굵은 로프가 오히려,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길손 일행은 행여 송이라도 눈에 띌까봐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송이는 뵈질 않는다. 볕이 들지 않는 나무그늘이나 바위 밑에는 송이 대신, 크고 작은 독버섯들이 지천으로 솟아나 있었다. 그물버섯 같이 예쁘고 재미있는 버섯이 있는가 하면, 어른 손바닥처럼 넓게 핀 흑갈색의 이름 모를 버섯들은 징그럽기까지 하다.
관룡산 정상은 속살을 드러낸 헬기장이다. 햇볕을 가려줄 나무그늘 하나 없이 오는 사람들을 재빨리 몰아내 버린다. 조금 전 올라오면서 하원식씨가 "저 우에서 사람소리가 들립니더"던 그 목소리의 일행들도, 관룡산 정상은 소리없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
화왕산 그늘에 가리어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관룡산. 몸 마저 그늘의 지하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다. 관룡산은 많은 사람들이 화왕산을 오르기 위한 등성이 하나에 불과한 산이다. 트이는 시야 또한 좁다. 다행히 서쪽으로 살포시 열린 시야는 화왕산 배바위와 산성과 이어지는 산줄기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나 관룡산도 이렇게 살아있노라!" 소리 지르는 모습같다.
정상 삼거리 길의 왼쪽은 화왕산 방향이고 오른쪽이 구룡산 길이다. 길손 일행은 구룡산으로 방향을 잡아 소나무 아래로 걸어간다. 솔바람 한줄기가 지나가고 갑자기 막힌 시야가 훤하게 뚫린다. 우리 앞에는 하얀 화강암이 만든 바위능선이 눈을 부시고 있었다. 옥천골에서 산줄기를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던 병풍 같은 바위능선이 바로 여기다.
구름 같은 화강암 바윗길
시야는 앞뒤좌우 티끌하나 가림없이 시원하게 연출된 자연의 파노라마다. 저만치 다소곳이 앉아있는 관룡사 가람과, 발치아래는 바위절벽에 매달린 청룡암이 내려다보인다. 이제 용선대 부처님도 작은 점 하나로 변해버렸고, 옥천저수지 옆으로 굴러가는 자동차도 다른 세상의 것으로밖에 뵈질 않는다.
신선이 되어 구름 위를 거닐 착각을 일으킬만한 하얀 구름 같은 바윗길. 난이도를 말할 정도야 아니지만 순간순간 조심을 요하는 구간들도 나타난다. 청룡암으로 내려서는 삼거리 소나무그늘에 자리를 잡아, 우리는 준비해간 점심을 요기하고 구룡산을 향한다.
바윗길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어지는 구룡산 오름길에, 멧돼지들이 부엽토를 뒤져 먹이를 찾은 흔적은, 마치 쟁기로 밭갈이를 해놓은 것 같다. 구룡산 정상도 나무로 가리워 조망이 전혀 없다. 이곳에서 계속하여 이어지는 산줄기는, 영취산과 종암산을 거쳐 부곡온천의 뒷산 덕암산으로 연결된다.
길손 일행은 구룡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아니하고 돌아선다. 왔던 바위길을 버리고 북쪽 사면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니, 커다랗게 세로로 누운 화강암 바위 아래 널찍한 동굴이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동굴 안에는 비닐로 만든 천막 한 동이 쳐있고, 바위 모서리 곳곳에 타다만 양초가 있는 것으로 봐 기도하는 사람들의 거처인 듯하다.
삼거리에 도착하여 청룡암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간다. 경사가 무척이나 가파른 등산로 좌우는 바위벽이다. 장정 몇 명이 끙끙거리며 짐을 지고 올라오고 있다. 기도처인 동굴로 올라가는 짐꾼들인 듯하다. 먼저 내려간 성복둘씨와 문춘자씨를 청룡암 약수터에서 만났다. ㅁ불을 한 잔 마시고 쉬고 있으니 할머니 한 분이 올라오신다. 어디 가시냐고 여쭈니 기도하러 가신단다. 이 할머니가 바로 바위동굴 비닐천막의 주인 보살인 모양이다.
하산길 발걸음은 바쁘다. 저녁약속 시간을 지켜야 한다며 긴다리를 쭉쭉 뻗어 걸어가는 김영길씨를 따라, 실속없이 바쁘기만 했던 우리들의 짧은 다리도 어느듯 관룡사에 다다랐다. 길손은 관룡사를 지나치며 일주문의 현판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火旺山 觀龍寺".
순간 길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한줄기 섬광은, 관룡산을 산이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관룡산은 화왕산의 그늘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다거나,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했다. 관룡산은 부처님을 태우고 용화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달리는 한 척의 용선이다.
*산행길잡이
화왕산 그늘에 가리운 이름 관룡산
주차장-(10분)-관룡사-(20분)-용선대-(50분)-관룡산-(15분)-청룡암 삼거리-(20분)-구룡산-(15분)-청룡암 삼거리-(10분)-청룡암-(25분)-관룡사-(10분)-주차장 2시간45분 걸림
창녕 땅의 옛이름은 비사벌이다. 본래는 가야 땅이었지만 신라로 흡수되면서 빛벌 또는 비사벌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졌다. 창녕땅에는 가야고분군을 비롯하여 신라시대 문화유물들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리하여 창녕은 경남의 경주로 불리고, 창녕을 본관으로 하는 창녕조씨, 창녕성씨 본향의 땅이기도 하다.
관룡산을 얘기하면서 옥천골을 뺄 수 없다. 옥천골은 지형도에 계성천으로 표기된 골짜기 이름으로, 풍부한 수량을 가진 계곡과 자연산 송이요리가 유명하여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옥천골에는, 지금은 폐사지로 남겨져 있지만 신돈과 연결된 옥천사라는 절이 있었다. 고려 말 공민왕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도했던 승려 신돈. 때로는 요승으로 때로는 총명하고 자혜로운 신료로 '고려사'에 백 번이 넘게 언급되고 이름이 신돈이다.
고려 말 만인지상일인지하의 권력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펼쳤던 풍운아 신돈. 그러나 베일 속에 가리워 사적인 행적은 거의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어머니가 이곳 옥천사의 사비였고 그래서 옥천사에서 출생했다는 것뿐이다.
절 사비의 몸에서 태어나 승려가 되어, 한때 절대통치권을 행사하던 신돈이 추풍낙엽처럼 떠나간지도 육백 삼십 여 년이 지났고, 그가 태어난 옥천골도 조그만 전설 같은 얘기로 전해질 뿐이다. 신돈의 본관은 이 지역 영산의 지명을 관향으로, 매울 신(辛)자를 쓰는 영산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