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윤겐,『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요약3) pp 145~
5장 분별력
닭고기 수프 현상
얼마 전 아주 높은 평판을 얻으며 크게 호평을 얻은 책 시리즈가 나왔다(8천만부 판매). 많은 기독교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책들은 잭 켄필드와 빅터 한센이 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이다. 켄필드는 최근의 글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해 “?러 다니신다”고 느끼게 된 “영적인 각성”을 대학의 요가반에서 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여러 신비 사상 작가들을 추천한다. 깨달음의 이야기는 당신을 감동시킨다. 당신의 자각을 확대한다. 당신은 전과 달리 짜릿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된다. 당신은 여기에 담긴 도구, 기법 그리고 전략을 통해 새로워질 것이다. 당신의 신비한 심령이 신비하고 기이한 여정에 함께하길 바란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당신의 신념을 바꿀 것이다. 당신의 지성을 넓히고, 마음을 열며, 의식을 확대할 것이다.
켄필드는 초월 지식과 비즈니스에 필요한 창의성을 통합하는 일에 뛰어난 업적을 자랑한다. 자신이 명상을 통해 좀 더 영적으로 적응했을 때, 당신 자신의 고양된 자아의 목소리 혹은 신의 음성이 말, 이미지 그리고 떨림 등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더 잘 분별하며 인식할 수 있다.
뉴에이지 성향의 책들이 기독교 서점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프다. 어떤 한 서점에서 보니 사라 밴 브레스나크의 책 <소박한 풍요>, <위안과 기쁨의 일기장>이 묵상이라는 표지 아래 진열돼 있었다. 이 여류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우리가 모두 “우리의 신성에 대해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뉴에이지와의 노골적인 연계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교회의 여성 기도 모임에서 이 책을 다량으로 구입해갔다는 말을 들었다! 151
다수, 어쩌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세속 사회뿐 아니라 기독교계에도 이미 섞여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인식을 못하거나, 아니면 실용적인 신비가들의 접근 방법이라는 용어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신비주의적 실용주의는 다양한 뉴에이지 치유 기법들을 통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가고 있다. 이 중의 하나가 ‘레이키’다. 이 말은 일본어인데, ‘보편적인 생명 에너지’ 혹은 ‘신 에너지’라는 뜻이다. 레이키는 방사 기술을 말한다. 레이키는 고대 티베트 불교의 치유책이었다. 1800년대에 한 일본인이 이것을 재발견했다. 레이키는 도사의 에너지를 받는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가 흘러가도록 불어넣는 것이다. 레이키를 할 때, 나는 통로가 된다. 나를 통해 이 힘, 우주의 정수가 내 손바닥을 통해 내가만지고 있는 사람에게로 쏟아져 들어간다. 레이키에 적응할 때 신성한 초월 지식적 질서가 시작된다. 초월 지식적 질서는 수천년 전부터 이미 이 땅에 와 있다. 이 집단의 한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 역시 레이키의 안내자 그리고 다른 영적 존재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적응을 마치고 나면, 영적 안내자의 임재를 강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느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눈에 보이기도 한다.
많은 간호사, 상담가, 그리고 특별히 마사지 치료사들이 보조 수단으로 레이키를 사용하고 있다. 1998년 레이키와 관련하여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검색 건수는 약 33,000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숫자는 일부 검색 엔진들에게서 22,000,000건으로 늘었다. 불과 10년 사이에 700배가 늘어난 것이다. 미국에만 백만 명이 넘는 레이키 수련자들이 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영적으로 긍정적이면,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레이키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책은 말한다. 레이키 적응 과정을 통해 몸 안에 열린 길이 레이키가 흐르게 하고, 이것이 또한 정신의 소통 중심을 열어젖힌다. 많은 레이키 수련자가 영적인 세계와 언어적으로 소통했다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런 치료법 가운데 또 다른 것이 심리 요법적인 지압이다. 비밀 종교에서 말하는 기혈 체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우리 몸에는 영적인 기운에 적응하는 일곱 군데의 경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경혈은 모든 것을 보시는 신과 동일시된다. 심리 요법적인 지압은 병의원에서 간호사들이 널리 행하고 있다. 유용하고 간병에 보조적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레이키는 불교에서 나왔다. 한 머튼 연구가가 쓴 것처럼, “머튼이 기도 가운데 지각한 신은 불교도들이 도를 깨달을 때 말하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이 레이키 사범과 현재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두 인물(리쳐드 포스터와 브레넌 메닝)이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영적 여정의 모범으로 똑같은 사람을 지목한다는 것은 뭔가 소름끼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스트레스 해소
한 신문의 기고문이다. 한때 대부분의 신비가들과 신비 사상 신봉자들에게만 설득력을 발휘하던 하나의 수련법인 관상이 이제는 미국의 주류 사회를 공략하고 있다. 의료 기관들은 이제 관상 그리고 다른 신체 유탈적인 정신 상태가 스트레스와 관련되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한 명상 지도사는 말한다. 명상은 단지 스트레스 해소용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자신의 신비적인 전통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식을 나눠 주기 위해 사용하는 방편이다.
의사인 보리센코는 이렇게 밝힌다. 나는 처음에는 의학적인 유익 때문에 일반 명상을 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의 더 깊은 심리학적, 영적 유익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업에서 의사결정 능력을 높이는 분야의 일을 하는 앤 와이즈가 내놓는 관찰이다. 이 작업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업에서 자신의 생산성을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부사장이 말한 것처럼 “일을 할 때 솟아 나오는 영성의 가치와 필수불가경한 초점”을 보고 놀라며 만족한다. 나는 특정한, 객관적인 목적을 위해 뇌파 훈련(명상)을 시작한 사람들 역시 더 높은 영적 의식의 단계에 관련되고 그것을 추구하게 됨을 자주 본다.
여기에 기본 메시지가 있다. 침묵은 똑같다. 침묵이 상황을 초월하게 한다. 스트레스 해소에서부터 관상 기도에 이르기까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침묵은 결국에 일정한 영적 지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복음에 위배되고 구원의 요체인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것이 문제다. 미국 주류 사회에서 인기를 끌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명상에 대한 <타임>지의 표지 기사를 보자. 현재 1천만 명에 달하는 미국 성인들이 일정한 명상을 정기적으로 행한다고 말한다. 십 년 전에 비해 두 배 늘어난 통계다. 이런 추세라면 명상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학교, 병원, 법률 그룹, 정부기관, 기업체 그리고 교도소에도 명상이 들어가 있다.
이 기사는 이제는 “보르스치(뉴욕주 한 휴양지) 벨트”에서 “불교 벨트”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수많은 명상 센터가 그곳에 문을 열고 있다고 전한다. 다른 기사다.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과학이 합류했다. 의사들은 명상이 신선하고 참신해서가 아니라 특히 스트레스와 관련된 병증에 효과가 있다는 과학적인 연구 때문에 명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요가
이 새로운 영적 각성은 요가라 알려진 대중적인 수행법에서 종종 발견된다. 1998년 <유에스에이 위크앤드>의 보도다. 이 몸 비틀기 수련은 일부 깜짤 놀란 만한 진영에서조차 명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오늘날 6백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요가를 한다. 그리고 수련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한 요가 잡지는 설명한다. 스와미 사치다난다는 영적인 사부로서 1969년 우드스록(유명한 히피들의 음악제)에서 사회를 보면서 베이비부머의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 잡게 되었다. 사치다난다는 이 세대 전체에게 “옴”이라는 독송을 가르쳤다.
2005년판 <영성이란 무엇인가>지에 따르면, 요가 수행자들은 상시 수련자들이 2천만명으로 늘어났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 관심의 촉발제는 더 온전한 건강, 웰빙 그리고 평정심을 찾는 진지한 열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을 구푸렸다 펴는 것이 요가가 아니다. 요가란 무엇인가와 연결됨으로써 “연합”한다는 뜻이다. 본질상 영적인 것이다. 요가 수련을 다루는 주요 책들에서 ‘사마디’, ‘차크라스, 쿤달리니’ 그리고 ‘나마스테’와 같은 단어들이 페이지마다 나온다. 이 단어들 하나 하나는 인간이 신이라는 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나마스테란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과 인사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힌두교 대학의 티와리 교수는 기사에서 “요가는 힌두교다”라고 말했다. 요가 전문가의 말이다. “궁극적으로, 요가 수련은 미국 문화의 뒷문을 통해 신비주의가 침투하는 방법일 수 있다.” 이 전문가는 한 고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철학이나 명상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하루에 10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문서작업을 합니다. 나는 그냥 긴장을 풀고 싶어요.” 그러나 이런 태도는 변한다. “1년 정도 지났을까-- 그는 명상을 하고, 프라나야마(일종의 호흡 조절법)를 따라 했다. 그리고 요가 스트라스(경전) 워크숍에 등록했다.
자기 계발의 구루
현재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치는 실용적인 신비가가 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다. 윈프리의 여성 청중, 수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청자들은 윈프리를 영적 영감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말이다. 에릭 버터워스의 책(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라)은 인생과 종교에 대한 내 입장을 바꾸었다. 에릭 버터워스는 신이 “저 위에”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신은 우리 각 한 사람 안에 존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윈프리의 토크쇼는 마리안 윌리엄슨, 사라 밴 브레스나크, 이안라반잔트 그리고 체릴 리처드슨 등과 같은 뉴에이지 저자들을 일약 미국의 저명 저자 반열에 올려 놓았다. 윈프리의 인품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과 독자들이 뉴에이지 영성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 웨인 멀러는 <안식>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멀러의 책은 헨리 나우웬에게 헌정됐다. 멀러는 나우웬을 가리키며 “나의 선생님”이라 하고, 이후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이 점을 반영한다. 성령과 “불성”을 동의어로 제시한다. 멀러는 시편 23편을 <주역>에서 인용한 구절들과 연결하여 인용하고 있다. 멀러는 헨리 나우웬을 직접 언급하는 한 문단에서 책 전체의 주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안식의 순간에 온전히 순복하면, 요란한 근심으로 가득 찬 삶, 삶의 선물과 복에 귀를 막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예수 그리고 모든 부처들과 성인들, 성현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고 가르치는 메신저들의 음성을 듣는 삶으로 천천히 옮겨 가게 된다. (여기서 안식은 명상 혹은 관상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안식> 책의 추천의 글은 몇 십년째 공영 텔레비전의 인기 있는 어린이 쇼 <미스터 좋은 이웃>의 진행자 프래드 로저스가 쓰고 있다.
뉴에이지 기독교인-용인한 괴물
사람들이 관상적인 신비주의에 큰 관심을 갖는 현상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에 전혀 새롭고 황당한 도전을 던지고 있다. 뉴에이지 혹은 물병자리 시대 기독교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용어는 모교회에 남아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삶에 뉴에이지 혹은 물병자리 시대의 사상을 여러 국면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추세를 더욱 밀어 붙이는 것은 뷔페식 발상이다. ‘뷔페’는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종교적 지각의 표상이 되었다. 즉,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취하고 남기고 싶은 것은 남기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원하는 종교를 취해서 섞는다. 커피점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할 때의 기분이다. 원하는 어떤 혼합을 해도 커피는 커피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적인 여정을 택해도 여전히 신에게 도달한다. 영적 취향에 맞춰 배합하면 된다 그 결과 뉴에이지 영성이라는 변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수 십년 동안 견고한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도 뉴에이지 영성에 빠져 든다.
뉴에이지의 메시지는 아주 긍정적인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이처럼 매력을 끄는 폭포수 뒤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레이키를 하는 마사지 치료사를 찾아갈 때는 이 수행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사가 명상을 해보라고 하면, 비성경적인 명상이 주는 영적인 위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세상은 점점 더 농익은 신비주의를 향해 가고 있다. 많은 친구, 식구 그리고 동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안한 사회와 세상에서 영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차크라 체계에 대해 쓴 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정수리 부분의 기혈이 열린 사람들은 심오한 영적 경험을 한다. 평소 분리되고 떨어져 있던 감각이 사라지고, 전체 그리고 모든 것과 하나가 된 느낌이 깃들인다. 하나됨의 심오한 감각이 찾아온다.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신이다. 그리고 나 역시 신이라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레이키 뉴스”가 증거를 제시한다. 첫 번째 레이키 교숩을 받을 때였다. 나는 안내자들과 치료하는 영들의 천상적인 형상을 보았다. 그들은 초보 수련자의 손끝에서도 밝고 빛나는 치료 에너지의 광선을 쏟아 냈다.
한 유명한 상담가는 점증하는 뉴에이지 신비주의의 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교육, 비즈니스, 의학 그리고 심리요법에서 느껴지는 뉴에이지 신비론의 영향이 얼마나 깊은지는 절대 과대평가가 아니다. 미국에서 떠오른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뉴에이지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탄은 자신과 하나님, 선과 악 사이의 간극 자체를 완전히 없애 버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신과 연합해 있다고 하는지, 만물을 통해 흘러나오는 신을 느낀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과 하나님은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함께 만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견해가 참이라면, 한 구속자를 통한 구원은 필요 없게 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완전히 헛된 빈말이 될 것이다. 십자가가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완벽하신 본질과 인간의 죄로 물든 본질 사이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탄에게는 단 하나의 원수, 즉 십자가가 있을 뿐임을 알고 있다. 사탄은 인간이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께로 가서 회복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성경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적대하는 영적 영역이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언제나 이기셨고 앞으로도 이기실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사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그들 스스로의 선포로 부인하는 실용적인 신비가들에게 넘어갔다. 사람들의 다수가, 모두가 하나요 선과 악에 관련해서는 금을 그을 것이 없다는 말을 믿게 될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이라(고전1:18)
6장 과연 세상의 끝인가
오시는 이
엘리스 베일리의 추종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을 어떤 이름으로 칭하든 간에 아바타(세계 지도자)의 재출현은 비학(신비 종교) 전통뿐 아니라 많은 종교에서도 예언되었다. 세계 지도자들은 주로 물병자리 시대와 연관지어 명시되고 있다.
바울이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4)이라 불리는 자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하기도 할 것이라 밝힌 사실은 흥미롭다. 오시는 이는 기독교인, 힌두교인, 불교도, 또한 미국인, 유대인, 이탈리아인 혹은 러시아인이 아니다. 이분의 호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분은 모든 인류를 대신한다. 모든 종교, 철학과 민족을 통합한다.
이 오시는 이가 출현할 때, 자신의 고양된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각성한 사람들은 그를 통일 성취자로 알아보고 오시는 이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다. ‘스리 친모이’라는 힌두교 영적 교사가 한 쪽 팔로 300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를 들어 올리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20명의 증인들이 이 일을 목격했고 사진과 비디오로 녹화도 해두었다. 영적 교사는 자신의 경탄할 만한 능력이 명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고, 명상 없이는 3킬로그램도 제대로 들 수 없다고 고백했다.
망령된 바벨론
귀신들은 단지 소수의 개인을 잘못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귀신들은 온 세상을 속여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게 한다. 사탄은 “오시는 이”, 즉 무소불위의 적그리스도의 배후에 있는 세력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에게 있는 종교 체계의 기원을 계시록 17:5에서 명백하게 밝힌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구약 성경에 나오는 바벨론의 또 다른 이름은 갈대아다. 갈대아 사람들은 초월적인 기예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갈대아 사람은 최초의 신비주의 학교를 세웠다. 다니엘서 4:7이다. “그때에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가 들어왔으므로”. 이 망령된 바벨론이 오늘날의 뉴에이지 초월 지식의 기원 혹은 모태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적그리스도의 영적 형식을 밝힐 때, 고대에 최초로 신비 종교를 유행시킨 도시와 민족의 이름을 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신비주의 학교들이 바벨론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 즉 고양된 자아를 가르친다. 요한은 이것을 역사에서 끊어지지 않은 계승으로 보았다. 에베소 신자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진리를 위해 부와 신비한 술법들을 내다 버렸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상에서는 정반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분의 이름으로 오는 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록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3~5)
뉴에이지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에서 나왔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이 말이 고양된 자아 혹은 신적 본질로 ‘기름부음 받았다’, 혹은 ‘만져졌다’는 뜻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은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예수가 자신의 고양된 자아와 완전하게 조화했다고 믿고, 그래서 예수가 하나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각성의 상태이며 영적인 조건이지 호칭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신적인 정수와 온전히 하나된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다.
나는 마태복음 24장5절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다. 나는 놀라 넘어질 뻔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많은’은 헬라어로 ‘폴뤼스’다. 아주 큰, 혹은 극단의 숫자를 뜻한다. 이 말은 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사람들이 스스로 신성을 주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일 수도 있다.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예수가 뉴에이지 혹은 물병자리 시대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경지의 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의식에 도달한 한 영혼이다. 지금까지 많은 다른 영혼들이 있었다. 예수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청사진이다. 이 길은 예수가 걸었던 같은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스도 의식을 얻어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예수의 중요성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완성의 모델에 있다.
이 세계 지도자는 아무튼 새로운 물병자리 시대를 표상하고 모든 인류의 하나됨, 즉 한 종교를 수립하는 분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구세주는 모든 우주적 진리가 오는 길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이다. 당신이 ‘오시는 이’다. 당신 각 한 사람이 그렇다. 당신 각자, 그리고 당신 모두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됨은 바로 지금이다. 내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다. 당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다.
유대계에서도 한 운동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상적인 영성에 버금가는 것이다. 유대교 신비서인 카발라에 기초를 둔 이 관상 기도의 일종은 유대교를 통해 들불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동네 서점에서 유대교 부문을 들여다 보면 유대 신비주의의 책들로 가득찬 것을 보게 된다. <뉴에이지 유대교>는 명상가인 멜린다 라이브너의 저술이다. 유대교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뉴에이지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면 많은 사람이 놀랄 것이다. 우리가 뉴에이지와 공유하는 신념과 수련의 상당 부분은 새로울 것도 없이 유대 신비 전통인 카발라의 일부다. 이 지식은 세월의 흐름에 대부분 숨겨졌지만 카발라는 최근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메시아”라는 용어가 한 실제 인물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메시야가 모든 사람의 의식 가운데 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 메시야의 불씨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유대 신비주의의 영성에 달아오르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책,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나 로젠탈의 작품인데, 갤럽과 이스라엘 정부가 공동수행한 한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사람 60퍼센트가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사실 ‘레이키 뉴스’는 이스라엘에 6천명에 육박하는 레이키 사람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적은 인구를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대배교
엘리스 베일리는 “교회의 중생”이라고 스스로 이름 분인 말에 열을 낸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뻗어 나갔다. 이런 교회는 광야에서 외친 세례요한처럼, 세계계명을 완수하는 일의 중추로서 쓰일 수 있다.
비밀 종교는 기독교를 적대하기보다는 기독교에 신비사상을 섞고, 이로써 뉴에이지 의식을 전파하고 확산하려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 교회는 외부적으로는 교회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내부에서는 관상적인 영성이 거기에 마음을 여는 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기독교 전체를 놓고 보자면,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토머스 키팅 혼자만 해도 1년이면 31,000명의 사람들에게 신비 기도를 가르친다. 이 얼마나 영적 사기인가! 혹시 이것이 바울이 말한 떨어져 나감이 아닐까?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이 배교가 “불법의 사람”의 드러남과 맞물려 있음을 유의해서 보라. 만약 이 자가 베일리의 말대로 “오시는 이”가 맞다면, 바울과 베일리의 예언은 서로 완전하게 들어맞는다. 진영과 시각만 정반대일 뿐인 것이다.
영적 사상의 통일은 단일한 단체 혹은 세계 교단이 아니라, 잡다함 속의 통일체, 다문화적, 다신앙적, 다종교 간의 통합이다. 다음 글을 조심스럽게 살펴 보자. 기독교인이 힌두교 혹은 불교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 힌두교 혹은 불교도 역시 기독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각자는 다른 편에 서 있는 영을 이해해야 한다-비베카난다.
다른 많은 (비기독교) 전통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명상을 해 본 결과, 우리는 침묵 가운데 깊은 통일성을 경험했다. 우리는 이성적인 마음의 관문을 넘어 경험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오로지 한 신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바실 페닝턴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 간 대화는 기독교와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직관 깊은 종교 전통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다.- 틸덴 에드워즈
복음을 재고함
초월 명상 전문가며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 인기 강사인 존 그레이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오는지 말하고 있다. 나는 스위스의 산골에서 9년 동안 수도자로 지냈다. 내가 내면적으로 신과 연결돼 있음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나는 명상을 가르친다. 나는 사람들이 훨씬 진보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내가 명상을 시작했을 때보다 몇 년 앞서 간다. 그들은 불과 수주 만에 손 끝에 흐르는 에너지를 경험한다. 내 세미나에서 명상을 배우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은 하루 혹은 이틀 정도 지나면 이 경험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흥분이 된다.
역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즉각적인 경험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과거 위대한 신비가들과 성인들은 영적 경험 하나를 하기 위해 수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라도 에너지 흐름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7장 미혹하는 영
리처드 포스터를 인터뷰하는 라디오 토크쇼 사회자는 말한다. “박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분이지요 정말 소중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포스터의 저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커리큘럼”이라고 말했다. 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포스터는 말했다. “기독교는 관상의 차원 없이는 완전할 수 없다”.
관상 기도 운동은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에 이미 튼튼한 뿌리를 내렸다. 많은 신실한, 경건한 그리고 존경받는 기독교인들이 토머스 머튼의 다음과 같은 환상을 받아들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필요는 관상의 영에 이끌려 피어나는 내면적 진리다. 관상과 내적 기도 없이는 교회가 인류를 변혁하고 구원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복음이지 침묵이 아니다. 머튼은 ‘계몽한다’를 ‘구원한다’로 쓰고 있다. 머튼의 영적 세계관은 내재신론적인 하나됨이다. 관상적 영성의 오류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간단하면서도 명쾌하다. * 성경적이 아니다. * 신비 종교의 방법론에 연결되어 있다.(만트라, 증언부언 등). * 동양의 신비 사상에서 나온 개념들에 관대하다(모든 것 안에 있는 신, 모두가 하나다.-내재신론)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4:).
귀신의 교리(가르침)는 그것이 얼마나 그럴싸하고, 매력적이고, 경건해 보이든 간에, 온 세상이 신적인 임재를 소유하고 있다(온 세상이 하나다!)고 한다. 이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단이다. 이것은 사탄과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즉, 나루시퍼는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사14:4). 만약 헨리 나우웬이 선포한 것처럼 “우리는 존재하는 온 세상의 연합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 옳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 역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영이나 가르칠 법한 말이다!
이 속이는 자의 솜씨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의문시하는 신념 혹은 교리가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목자가 할 가장 핵심적인 일은 양 떼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양 떼는 목자를 믿고 따름으로써 목자의 음성을 안다. 목자는 양 떼가 그분에게 더 가까이 오기 위해 어떤 방편 혹은 종교적인 기술을 행하길 기대하거나 바라지도 않는다. 목자는 양 떼가 지가 것이라고 이미 알렸다. 기억하라! 종교성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사람의 방편이지만, 기독교는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인간의 또 다른 자기 노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사 받을 때, 성령을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받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어떤 요상 망측한 기술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충만이 이미 그리스도를 받은 자들 안에 거한다. 신자의 반응은 어떤 방법론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내어 드리는 것 뿐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감정 혹은 특정한 경험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분명한 원칙이 있다. 이런 말이 널리 오르내린다. “하나님을 상자에 넣지 말라.” 이 말은 일부 맞지만, 이 상자가 성경이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그분의 메시지 안에 놓으신 내용 밖에서 일하지 않으신다.
관상 기도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 관상 기도가 하나님의 사랑, 인도, 이끎 그리고 돌보심을 더 층만하게 가져오게 한다는 말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하자면 욕이다. 본질로 보자면 적그리스도적이다. 폴 법나의 말이다. 그리그도를 알아간다는 것은 굳건한 신학적 이해의 여정이다. 성령께서 성경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과 지성에 조명해 주셔서 그 조건 없는 사랑의 경이가 착상되게 하시는 것이다.
관상적인 메시지는 하나님 은혜의 놀라운 일 그리고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일과 심각하게 어긋나 있다. 성령님은 신자를 이끄셔서 모든 진리에 이르게 하신다.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모신 자들에게는 침묵이 필요 없다.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것과는 별개다. 그러나 변용된 의식 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신자는 관상 기도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5~17)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고 하신다. 포스터는 자신의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해 관상적인 신비가들에게 호소한다. 그의 글을 보자. 현대 기독교인들이 수백년 동안 신실한 신자들이 전하는 기독교 명상에 대한 글들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항구적인 교제라는 기쁜 삶에 대한 신자들의 간증은 놀랍게도 하나같다.
이게 문제다. “놀랍게도 하나같다.” 그들 모두 하나님과 예수 사랑을 고백하고 있으나, 그들 각자는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에서 전하시는 바에 상충하는 무엇인가를 더했다. 관상적 신비가인 존 영블럿은 말한다. 신비 경험의 핵심은 통합의 인식, 연계성의 지각이다. 이로써 세계의 신비가들은 하나다.
포스터의 말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정서적이고 영적인 공간을 지어낸다. 그래야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 내면적인 성소를 건축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미 모든 신자 안에 성소를 두셨다. 신자 각자가 인도와 이끄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성령을 통하여)이다. 포스터는 수 멍크 키드와 같은 사람을 자신이 말하는 바의 모범으로 인용한다(그의 저서 <기도: 마음의 진정한 집을 찾아서>가 그 예다). 멍크 키드의 영성은 <기다리는 마음>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인간(기독교인이 아님)의 마음 속에는 진리의 전구가 묻혀 있다. 이 전구는 “오직 하나님”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얻거나 구해 낼 것 그 이상이다. 마음은 내면의 신성, 신의 이미지, 우리의 가장 진실한 조각이 앉는 자리이며 안치소다.
멍크 키드는 침례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신자였다. 주일학교 동료가 그녀에게 토머스 머튼의 책을 한 권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 책을 한번 읽고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멍크 키드의 신비 보편 구원론은 힌두교도들의 인사인 나마스테, 번역하자면 “나는 네 안에 있는 신을 경외한다”는 말을 기독교인들이 꼭 써야 한다고 충고하는 누군가를 인용하는 모습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멍크 키드의 책 <불평 많은 딸의 춤>의 한 대목을 보면 누구도 관상 기도 배후에 있는 세력을 쉽게 간과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내 삶의 궁극적인 권위는 성경이 아니다. 한 책의 앞장과 뒷장 사이에 내 인생을 가둘 수는 없다. 내 인생은 사람이 쓴, 시대에 의해 멈추어 버린 무엇이 아니다. 인생은 내 밖의 원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나의 궁극적인 권위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신적인 음성이다. 더도 덜도 아니다.
포스터의 동료 한 사람은 청중에게 자신이 고양된 상태에 들어갔을 때 “복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관상 기도 운동을 연구해 보면, 당신은 가스펠(복음)이 아니라 갠지스 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머튼이냐 성령이냐
영국 출신의 두 저자가 뉴에이지 영성이 무엇인지 소름끼치도록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뉴에이지 영성의 주된 경향은 온 세상의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통일성과 이것이 가져오는 하나됨의 감각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통합운동이다.
모든 생명의 하나됨은 뉴에이지 운동의 중축이다.
바실 페닝턴은 관상적인 영성의 세계관을 자신의 책 <나의 형 토머스 머튼>에서 규정한다. 그 영은 온 세상의 진정한 종합(통일)과 살아 있는 존재의 거대한 하나됨의 조화 안에 서 있는 그(머튼)에게 빛을 밝혔다. 머튼은 그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모든 차별을 해소하고 신적인 선함을 온 세상 안에서 그리고 모든 사물을 통해 현재적으로 자각하고 향유하는 꿈이다.
관상 기도는 진정한 기독교에 대해 어떤 몫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은 구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인도의 길이 열린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루이스 스페리 샤퍼는 탁월한 저서 <은혜: 영광스러운 주제>에서 투명함으로 말한다. 로마서 5장5절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진술한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참이다. 성령은 새로운 삶에 따르는 장자권이다.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정상적인 일상의 삶에 속한 성품과 봉사가 실현될 수 있다. 성령은 “원전하게 충족하시는 분”이다. 새로운 삶에서 거두는 모든 승리는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는 모든 상급은 그분의 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결과로서만 얻어진다.
데이비드 라스트가 토머스 머튼에게 불교의 어떤 면이 그의 영적 생활을 더 깊어지게 하느냐고 물었다. 머튼은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독교를 불교의 빛으로 보지 않고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내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관상기도는 세계의 신비 종교 전통과 똑같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더 큰 경건을 추구하다가 불행스럽게도 이것에 낚이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종말 배교를 신비주의적인 미혹을 배경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의식을 전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거듭나면 된다. 8장 미국을 대표하는 목사
2002년 가을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때, 다른 한 권의 책도 출간됐다. 이 책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유명세를 탔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집집마다 한 권씩 두는 책이 됐다. 수백만 미국인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았다. 1300만 부가 팔렸고, 이 수치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패러다임이 복음주의 교회를 제2의 종교개혁과 영적 대각성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믿고 있다.
관상적인 영성은 혼합 영성으로 향하는 길목이고 따라서 십자가의 메시지를 부인한다.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은 하나님이 기독교 진영에서 “태만히 방치한 목적”을 바로 잡기 위해 “일으키”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적 훈련 운동은 “영적인 제자도”를 통해 관상 기도를 권장하고 있다. 워렌은 이 운동의 지도자로서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를 내세운다.
그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내세우고 있으나 목적이 이끄는 패러다임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종교개혁과 영적 대각성의 전술이 아니라 영적 배교라는 몰락을 너무 쉽게 이끌 수 있다는 결론이다.
목적이 이끄는: 신비가, 수사 그리고 호흡 기도
그에 대한 비판은 이렇다. 고도의 마켓팅 방법과 죄 그리고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 물탄 복음을 써서 기독교를 판, 그리고 예배에 대한 난잡한 접근, 상담 프로그램에 호소하는 세속 심리학을 부추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워렌에 의하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기 위한 비결은 “호흡기도”라고도 하는 일종의 관상적인 영성이다. 호흡기도의 비결을 배워서 이 관계를 만든 사람으로 카르멜 수도회 소속의 수사인 로렌스 형제를 든다. 카르멜 수도회는 백 년 전 수도회를 개혁한 아빌라의 테레사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우르슬라 킹 교수의 말이다. (기독교의 신비가들) 아빌라의 테레사가 지닌 유대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그의 사상에는 유대교 카발라 신비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신비주의 요소들은 테레사의 글들에서도 얼마든지 추적된다.
로렌스 형제를 우러러 보는 한 신자의 말이다. 로렌스 형제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무엇인가가 사랑의 임재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앗아갈 때면, 로렌스는 “하나님에게서 경고”를 받았다. 영혼이 울린 그는 “울부짖고, 마치 광인처럼 고성방가하고 춤추었다.” 이 경고가 하나님에게서 왔고, 자신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데 눈길이 갈 것이다.
로렌스 형제는 배회하는 생각의 번거로움에 대하여 말하며,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습관이 자신이 아는 한 산만함을 해결하는 데 “유일한 치료”이고, “최선의 그리고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릭 워렌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이 수사를 열렬하게 소개하면서, 수사의 사상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때 뉴에이지를 따랐던 워렌 스미스는 <목적이 이끄는 삶: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뉴에이지의 징후>에서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 “안에” 계시다는 릭 워렌의 말은 뉴에이지 가르침의 정 중앙이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릭 워렌이 인용하고 있는 뉴 센츄리 역본은 에베소서 4장6절을 위험천만하게 번역하고 있다. 새로운 영성을 말하는 뉴에이지 교사들은 전체 인류에게 적용하기 위해 이 구절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릭 워렌은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 가지 방법은 “호흡 기도”를 하루 종일 사용하는 것이다. 수백 년 전 많은 성도가 이렇게 했다. 짧은 문장 혹은 문구를 하나 골라라. 호흡을 할 대마다 그것을 예수께 반복하여 올려라.
워렌은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기술이다. 발전시킬 수 있는 습관이다.”고 말한다. 워렌에 따르면 수사들이 수련한 이 호흡기도는 “주님께 속한 접니다”, 혹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와 같은 "간단한 문구“를 ”가능한 한 자주 기도하는“ 것이다.
호흡 기도가 정당한 훈련인가? 심령술 계발에 대한 소니아 코케티의 책, <마음의 열망>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내면적 안내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 정신적 각성을 확대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하고 권유하는 방법은 호흡 기도와 똑같은 원리를 통해서다. 누군가는 ”내 마음은 평온해“를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워렌의 방법이든 아니면 비밀 종교에서 말하는 방법을 사용하든, 만트라의 사용은 똑같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워렌이 가르치는 내용은 관상 기도의 고대 입문서인 무명 수사의 책 <무지의 구름>의 파생물일 뿐이다.
관상 사제인 켄 카이쉬는 학생들에게 로렌스 형제의 글들에서 나오는 기도 방법을 가르친다. “임재”라는 말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신은 점점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완만한, 떨리는, 깊은 에너지가 당신을 에워싸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에너지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라. 이것이 우리 주의 임재다. 이 임재 안에 잇대어 거할 때, 강도가 더 세진다. 이 경험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다.
무시할 수 있는 증거
워렌이 리처드 포스터, 브레넌 매닝, 헨리 나우웬, 그리고 토마스 머튼을 권장한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워렌은 다른 관상가들을 열렬히 추천하고 반복해서 권장한다. 워렌은 트리시아 로드의 책<쉬는 영혼:관상 기도로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하나님과 더 큰 친밀감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건의 시간 안내서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국면에 신선한 이해를 시도한다. 그리고 관상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여정을 한걸음씩 소개한다.
릭 워렌의 “애독 저자”는 심호흡 훈련을 묘사하면서 수련자가 나쁜 것을 내뱉고 좋은 것을 들이마신다고 했는데, 이는 많은 세계 종교에서 신비가들이 사용하는 주문 방법이다. 로드가 어떻게 기도 시간을 준비하라고 했는지 들어 보라. 심호흡을 하라. 긴장을 푸는 일에 신경을 쓰라. 천천히 리듬을 타라. 하나님의 평화를 호흡하라. 스트레스, 산만함 그리고 두려움을 내뱉으라. 하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자비를 들이쉬라. 죄, 실패, 그리고 좌절을 내뱉으라. 당신 안으로 들어오는 대화의 흐름을 차단하라. 그리고 그것이 멈출 때까지 천천히 지속하라.
그저 숨을 깊게 들이쉼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을 읽어 본 기억이 전혀 없다. 그리고 숨을 깊게 하여 죄를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구절도 읽은 기억이 안 난다. 로드가 이 대목에서 모턴 켈시를 인용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켈시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깊은 곳에서 뉴에이지 수행의 대부분을 찾을 수 있다. 거룩하신 자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살고 계신다고 믿는다.
로드는 ‘예수 기도’를 사용하라고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 기도에서는 예수의 이름에 초점을 두고 반복한다. 그리고 로드는 다른 많은 관상 운동가들이 하는- 순수한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능이라면 신물이 난다- 말을 똑같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거나 암송하는 것은 영적 성장을 향한 탐험에서 한참 빗나간 것이다.” 이것이 내 주장의 핵심이다. 관상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신비한 경험 등 황홀경이 필요하다.
워렌 부부의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이 나우웬 칭찬에 입술이 닳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릭 워렌은 성공하는 교회 리더십을 위한 로버트 슐러 연구소를 수료했다. 슐러 자신이 나우웬이 이 학교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모든 학생은 헨리 나우웬을 보고 들어야 한다. --나우웬이 자신의 눈을 청중의 눈과 어떻게 잇고 있는지 보고, 절대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늘 긍정적으로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릭 워렌과 이머징 교회
릭 워렌은 이머징 교회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이 출범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운 인물이다. 댄 킴벌의 인기를 모은 책, <이머징 교회>에서 릭 워렌은 이런 추천의 글을 썼다. 이 책은 놀랍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킴벌의 책은 이 일(“이머징 세대”에 다가가는 일)을 포스트모던의 용어로 생각하고 느끼는 문화적 창조자들과 더불어 어떻게 할지 설명하고 있다. 독자는 그를 주목해야 한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킴벌의 책은 이 세대에 다가가는 여러 방법을 소개한다. 여기에는 “침묵의 실천 그리고 ‘렉티오 디비나(일종의 관상 기도)’” 등을 포함한다. 그는 “미로 기도”라는 제목으로 침묵을 더 강력하게 권장한다. 그는 미로를 “중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고대에 사용했던 미로는 일종의 미로 구조물로서, 원래 신과 신비한 방법으로 연결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자들은 미로를 걸으면서(기도 산책 혹은 기도의 오솔길이라 불림), 단어 혹은 문구를 소리 내어 외운다(중심으로 내려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도자들의 영혼이 중심으로 가라앉고, 미로의 중심에 도달한다. 댄 킴벌은 미로 수련을 극찬한다. 미로에서 경험하는 이런 명상 중심의 기도는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고, 모든 세대로 하여금 공감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여유가 있으면 방 하나에 깊은 기도생활을 위해 미로를 영구적으로 설치해도 좋다.
워렌이 추천하는 단체 ‘우즈’의 총무 버크는 이런 말도 한다. 틱낫한이 말하는 <살아 있는 부처, 살아 있는 그리스도>는 내게 동양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보는 통찰력을 주었다.
본질적으로 릭 워렌은 관상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에 확산하는 데 중심 인물이 되었다. 워렌은 미래학자인 레오나르드 스윗을 “가장 중요하고 기존 틀을 흔드는 교회 사상가 중 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스윗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변화는 세상에 전하는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스윗은 말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때다. 영적 각성의 바람이 바다를 가로질러 불어오고 있다” 스윗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며, “21세기에 맞추어 자신을 다시 조립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윗은 기독교의 “옛 가르침”을 “새 빛”의 새 가르침으로 대체해야 한다면 주장한다. 그러나 새 빛의 새로운 가르침은 “고대의 가르침”(사막교부들)에서 나온 것이다. 스윗은 ‘그리스도 의식’, '고양된 자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명시적인 용어를 써서 뉴에이지 이념을 권장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에너지를 흘러가게 하는 수로로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의심의 여지 없이 뉴에이지의 용어다. 성경이 제시한 복음의 놀라운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고 믿음으로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로 나오는 자들과 관계를 맺는 인격의 하나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상 운동가들은 바로 이 점에서 틀렸다. 그들은 관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내가 워렌이 뉴에이지 동조자인 켄 블랜차드와 연결돼 있음을 발견한 것은 조지 마이어의 책에서였다. 마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새들백 교회는 노먼 빈센트 필 목사의 뉴에이지적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블랜차드는 <부처라면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서 말한다. 부처는 길을 가리키고 있고 우리가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나는 독자들이 깨달음으로 이어진 일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블렌차드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뷔제이 이스워런의 <침묵의 영역에서>를 극찬한다. 이 책은 침묵의 영역으로 어떻게 들어가고, 신에게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굉장한 안내서다. 뷔제이는 이 책에서 말한다. 침묵의 영역은 제대로 수련하기만 하면, 대단히 강력한 도구가 된다. 이것은 특정 종교에 편향되어 있지 않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신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수련하고 있다. 당신이 내면적인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침묵을 통해서다.
블렌차드는 계속되는 고독 관련 지침에서 손바닥 위 아래로 뒤집기 수련을 하라고 한다. 이것은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의식이다. 릭 워렌은 <예수 같은 리더>라는 블랜차드의 책을 추천함으로써, 블랜차드의 영성도 함께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끄러운 경사면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를 맹렬하게 인용한다. 워렌은 윌라드를 영적 훈련 운동(즉 관상기도운동)에서 포스터와 맞먹는 인물로 보고 있다. 포스터의 저서<훈련의 즐거움>과 제목조차 비슷한 윌라드의 책 <훈련의 정신>에서, 윌라드는 머튼과 나우웬을 인용하고 침묵의 수련을 높여 말한다. 우리는 침묵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소음”으로부터 지킨다. 이 소음은 정말 소음일 수도, 음악 혹은 말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침묵을 경험하지 못하고 침묵이 무엇인지조차 알고 있지 못하다. 침묵은 강력하고도 필수적인 훈련이다. 오직 침묵만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변혁적으로 집중하는 삶을 허락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릭 워렌과 같이 남침례교도다. 이 사실은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 안에서 신비주의적인 패러다임 변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적이 이끄는 운동과 영적 훈련 운동의 합작은 참으로 엄청난 결과를 일으킨다. 관상적인 영성은 미끄러운 경사면과 같다. 이 경사면은 신성이 모든 인간 존재 안에 있다는 혼합 영성과 미혹으로 떨어진다. 즉, 십자가의 메시지와 복음의 진리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뜻이다. 곧 세상의 희망이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 심장에서 도난당하는 비극이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마25:5)
9장 미래의 기독교인?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관상 기도를 점점 더 유포하고 또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관상 기도의 신비론적인 어두운 면모는 마모되고 많은 사람이 이제는 미래의 물결로 간주하는 형편이다. 최근 기독교 매체들이 점점 긍정적으로 관상 기도를 다루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이머징 교회
이머징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복음주의 지도자 스물다섯 명 중의 한 사람으로 <타임>지에 올랐다. 인기 있는 책들 중 하나가 댄 킴벌의 <이머징 교회>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다른 세대들과는 어떻게 달리 사고하고 느끼는지 설명하고 있다. 학습의 기초가 되는 논리와 추론, 조직적 사고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근대라는 토양에서 증거 중심 그리고 사실에 기초를 둔 신앙이 아니라 신비적이고 영적인 것을 점점 더 갈망한다.
이머징 운동이 경험에 굶주린 젊은 기독교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끌어당긴 것이 소위 ‘빈티지 기독교’다. 이 용어의 의미는 순환적이다. ‘빈티지’란 과거로부터 온 좋은 어떤 것을 가거리킨다. 따라서 이 유형의 기독교는 고대로부터 지식 혹은 관행을 끌어온다. 이 지식과 관행은 신비주의에서 끌어온 영적 훈련법들이다. 킴벌의 말이다. 이머징 세대는 하나님과의 입증된, 오래된, 순수한 연결을 찾아 헤맨다. 이들은 이런 고대의 훈련법들과 역사적이고 영적인 의식에 크게 매력을 느낀다. 이머징 세대의 참여 의지는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토니 존스는 <신성한 길>이라는 책을 썼다. <무지의 구름>에서 권장하는 기본 방법은 사고의 한계를 넘어 주님과 더불어 전적인 고요함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자들은 먼저 침묵과 관상의 상태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
이머징 운동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불리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이머징 교회의 주요한 조언자 중 한 사람”으로 리처드 포스터를 손꼽았다. 영국 성공회 주교인 앨런 존스는 <다시 상상해 보는 기독교>라는 저서에서 교회가 신비 기도라는 방향을 타고 가는 것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관상 기도를 드리는 삶이라는 맥락에서 사랑받는 그리고 온 세상과 교통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침묵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태어난다. 신비주의의 중심에 있는 이 침묵은 전통을 만나는 장소일 뿐 아니라 모든 마음이 한 데 모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 침묵의 만남이 가져온 결과는 두말할 나위 없이 혼합 영성이다. 존스의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또 다른 고대 지류는, 우리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신적 신비에 우리가 모두 얽혀 있다. 모두가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아직 측량하지 않은 해석의 깊이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성소에서 부처의 길을 따르는 자들과 힌두교도들의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해 “떡을 뗀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존스의 혼합 영성적인 기독교에 더 기울어져 있다. 맥클라렌은 존스의 <다시 상상해 보는 기독교>의 뒤표지에서 다음과 같은 추천의 말을 전한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제도와 교의 체계가 기독교인의 영적 생활을 끌고 나왔다. 그러나 점점 영성 자체가 다른 모든 것을 이끌어 가고 있다. 앨런 존스는 순수한 영성에서 솟아 나오는 기독교 신앙을 다시 상상해 보는 일에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존스의 저서는 내게 깊은 자극과 용기를 동시에 준다.
이 “순수한 영성”은 이머징 교회 운동을 움직여 나가는 똑같은 영성이다. 이머징 운동의 철학은 성경적 교리를 축소하고, 신비한 경험을 힘주어 말한다. ‘유스 스페셜티스’를 위해 일하는 자유 기고자 마이크 퍼숀은 이 신비한 삶에 대한 자신의 탐색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듣는 기도”라는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명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다. 나는 기도실을 하나 만들었다. 영적 훈련, 관상 기도,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책들로 빼곡하게 차 있는 지하실의 수납 공간 하나에 작은 성소를 하나 세운 것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묵주를 목에 걸고 베네딕트 수도사들의 성가 테이프를 듣는다. 그리고 단어, 형상 혹은 음향을 몇 시간 명상한다. 나는 알파 뇌파를 얻는 지점, 다시 말해 깨어서 명상을 하는 순간에도 꿈이 꾸어지는 단계까지 들어갔다.
로우리 캐벗의 책 <마녀의 힘>에서 저자는 ‘알파’라는 말을 ‘명상’ 혹은 ‘침묵’을 의미하는 말로 두루 사용하고 있다. 마술학은 우리가 “알파”라고 부르는 변화된 의식 상태로 들어가는 인간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은 알파 상태에서 마음을 텔레파시, 투시 그리고 선지와 같은 비범한 형태에 열게 된다. 또한 이 상태에서 탈체감과 정신 유동과 같은 경험도 할 수 있다. 또는 오감을 통해서는 오지 않는 신비한, 환상으로 나타나는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알파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현실을 끌고 가는 이성의 기능은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비범한 현실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녀의 다른 말이다. 모든 종교 전통에 서 있는 신비가들은 의식의 알파 상태 그리고 신적인 빛의 홀림에 대해 말한다. 물론 신비가들은 자신만의 은유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신비가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도 혹은 예배하면서 어떻게 알파 상태로 들어가는지 배운다. 신비가들은 견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이머징 교회 운동은 기독교계로 막 밀려 들어오고 있다. 초월론을 강조하고 성경 교리를 소홀히 하는 경향 때문에, 이머징 교회 운동은 수많은 사람의 삶에 엄청난 결과를 일으키고 말 것이다. 기독교 출판사들은 이머징 교회 지도자들이 저술한 많은 책을 일 년에 쏟아내고 있다. 기독교 대학, 신학대학원 그리고 심지어는 기독교 고등학교도 점점 이런 책들을 수업의 필독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고대의 수련법
‘유스 스페셜티스’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북미주 전역의 복음주의적인 청소년 사역에 대단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 단체는 미국 청소년 사역자 대회, 미국 목회자 대회 등을 포함해 여러 연례 행사를 주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들의 선택 강의 제목에 “거룩한 공간 만들기”, “이머징 예배”, 그리고 “하나님 만남: 학생을 변화시키는 영적 수련들” 등이 등장했다.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예수의 음성을 새롭게 들었다는 야코넬리의 주장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관상 기도의 훈련을 통해 사랑의 음성을 거듭해서 듣는 법을 배우고 사랑의 음성 속에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제시되든 간에 선언하는 지혜와 용기를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 지도자가 미래에도 진정으로 열매를 맺으려면, 도덕에서 신비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나우웬은 지혜와 용기를 침묵의 장소에서 발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신비론적 패러다임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미래의 기독교인은 어떤 모습일까? 기독교인들이 헨리 나우웬과 같은 영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나우웬이 그랬던 것처럼 불교도들과 함께 명상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런 모습을 “마음의 대화”라고 했다. 한 편으로 미래의 기독교인들은 나우웬이 그랬던 것처럼(레이키에 입각해) “일곱 군데 기혈”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우웬처럼 사람들이 “신에게 이르는 자신만의 길을 갖도록 돕는 모습(이것이 보편 구원론이다)일 것이다. 나우웬은 자신의 고독과 불교도 친구들의 고독이 ”서로 인사하고 서로 돕는다“고 했다. 이 말 한 마디에 관상 기도 운동의 결정적인 결함, 곧 영적 간음이 서려 있다.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을 모두 사랑하고 따를 수 없다. 실제로 선택은 자아의 신성을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것인가에 달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의 심장에 덧칠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똑같은 신비주의임을 쉽게 알아낼 것이다.
어떻게 신뢰받는 기독교 단체들이 동양 명상과 명백하게 유사한 명상 수련을 정당화하고 지지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신자들이 변화하도록 주의하여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널리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 몇 명만 있으면 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성경 구절의 문맥을 무시한 채 기도 방법 전체를 체계화한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지나치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스스로 진지한 성경 연구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별력을 기르는 일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관상기도 운동이 많은 사람을 엄청난 배교로 이끌 수 있는 하강 곡선이라고 믿는다.
오도된 목자
멍크 키드는 말한다. 내 자신이 여성의 영적 경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때, 그해 가을 나는 더 깊은 방법으로 내 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이 여신의 현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고등 종교의 전통에서 신비한 깨달음의 절정은 통일 혹은 비이원론의 경험 형태로 당도한다. 선에서는 이것을 사마디라고 한다. 사실 초월성과 내재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신성은 하나다. 춤추는 자와 모든 형태의 춤들은 하나다. 내가 대오각성한 날은 온 세상을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이 온 세상 안에 있음을 알고 본 그날이다.
찰스 스윈돌은 <삶의 통찰>이라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가 2005년에 낸 책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되길 원한다: 그렇게 되는 여덟 가지 핵심>을 보기 전에는 그가 관상 운동 저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책에서 스윈돌은 유진 피터슨과 달라스 윌라드는 물론이고 리처드 포스터와 헨리 나우웬을 인용한다. 스윈돌은 “전능자와의 친밀감을 배양해야 할 순전한 필요를 느꼈다.”고 진술한다. 스윈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간절히 원하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불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훈련은 그 목표로 향하는 수단이다.”라고 한다. 이 책의 3장은 “침묵과 고독”이다. 이 장에서 독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깊게 해 줄 비결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놓친 것”을 볼 수 있다. 관상가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구 하나를 뽑아낸다. 시편 46:10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전능자와의 친밀함을 향해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서, 시편46:10은 우리에게 침묵의 훈련을 요구한다. 우리가 절대적인, 방해받지 않는 침묵의 기간을 보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스윈돌은 테레사 수녀(관상가며 혼합 영성 주의자)가 전 앵커 댄 라더와 가진 인터뷰를 언급한다. 스윈돌은 포스터, 나우웬 그리고 윌라드를 자신의 책 전체에서 열성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억지를 쓰고 있다. “잠잠함과 침묵 없이 누구나 깊음의 사람(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스윈돌과 관상가들이 주장하듯이 “깊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보혈임을 명백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서 덧붙이거나 뺄 수 없다. 우리는 거듭날 때 그분에게로 연합한다. 앞으로도 계속 연합한다. 보혈로 인한 속죄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하며 직접적인 진정으로 순수한 방편이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출25:22)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문맥에서 구약 성경은 “속죄소”에 대해 말한다. 얼마나 숨 막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신다. 그러나 인간을 속죄하는 피가 있는 곳이라야 한다. 구약 성경의 이곳을 꼭 집어 말하는 있는 히10:19-22는 속죄 양 예수가 완성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가 죽으셨을 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이제 성소인 그리스도(새언약)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기 위해 관상적인, 자기 암시적인 상태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잠잠하고 알지어다
기독교 안에서 관상적인 영성이 점점 인기를 끌고 있는 증거는 흔히 볼 수 있다. 폭스 홈 엔터테인먼트는 2006년 4월 <잠잠하라>는 제목의 디비디를 출시했다. 그의 소개다. 특출한 작품이다. 관상적인 성찰이 우리 일상 삶의 중요한 일부임을 보여 준다. 유용한 “어떻게”라는 부분이 들어 있는데, 관상 기도를 삶의 개선을 위해 누구라도, 또 어떤 경우에라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이 작품에는 리처드 포스터, 베빈 밀러, 얀 존슨 그리고 달라스 윌라드와 같은 관상 지지자들이 나온다. 또한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 베스 무어와 맥스 루케이도도 나온다.
결별의 시간
관상 기도 옹호자들은 이렇게 제안한다. 교회가 지난 수 세기 동안 대단히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이 영적인 활력에 반드시 필요한 무엇을 빠뜨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사고 때문에 전통적인, 성경적인 기독교가 단지 관상 기도의 요소를 빠뜨린 하나의 철학에 불과하다고 믿게 된다. 관상 기도가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 사이를 구별해 준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연구하거나 그냥 펑범한 기도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관상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언제나 그랬다. 말씀이 우리 마음을 채우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 멈춰지는(잠잠함) 신비 수행을 해서가 아니다.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의식의 흐름이 멈췄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헛된 동어 반복을 경계하고 있다.
3장에서 나는 다양한 동양 종교가 (기독교신비가인) “자신의 삶을 형성했다”고 말하는 머튼의 진술을 인용했다. 인식과 실천의 차원에서 기독교와 동양 종교는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신비적인 요소를 더한다 해도 기름과 물에 비누를 섞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신비 경험을 선호하여 성경의 진리를 희생함으로써 교리적 차이를 중화시킬 것이다. 신비주의는 공통분모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공통분모는 추측컨대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막12:32)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다.
나우웬의 말이다. 머튼은 장자에게서 스즈키(선사)가 선(禪)에 대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배웠다. “선(禪)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선은 단지 우리가 깨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할 뿐이다. 무엇을 자각한다는 말인가? 불성이다.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성이다. 머튼이 우리 각 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 서로가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머튼은 말한다. 진정한 고독은 하나님의 홀로계심, 온 세상 안에 계신 하나님의 고즈넉함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우웬도 덧붙인다. 장자는 머튼을 깨워-- 의식의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갔다.
신비가가 되고자 한 머튼의 노력은 한 힌두 스와미이며 머튼이 브라마차리 박사로 부른 사람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꽃을 피운다. 나우웬의 말이다. 따라서 머튼은 이 힌두 수사가 자신에게 기독교 신비 전통에 대해 알려 주었을 때 큰 감명을 받았다. 이 힌두 수사가 머튼의 동야에 대한 청년적인 호기심을 상대화하고, 서양 신비주의의 풍성함에 눈뜨도록 해주었다.
왜 힌두 수도승이 기독교적인 신비 전통을 옹호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힌두교와 기독교적인 신비 전통이 본질적으로 하나며 똑같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신비적인 전통은 기본적으로 같은 원천에서 나오고 같은 원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천은 구약과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신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영이 아니다!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는 이제 관상 기도라는 ‘새로운 눈’으로 하나님을 보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길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토머스 머튼의 침묵, 헨리 나우웬의 공간, 그리고 리처드 포스터의 관상 기도가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인가? 아니면 사실은 성경이 절대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전면적인 구원을 획득하신 희생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하는 것이라는 메시지에 상충되는 영적 신념 체계인가? 나는 이 책에서 관상 기도의 위험을 보여 주는 광범위한 증거와 문서를 동원하여 이 질문에 답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여기에 미래의 기독교인을 위한 소망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소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지옥의 문이 우리를 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마 16:18의 말씀이 있다. 성경의 예언대로 결별의 시간이 올 것이다. 배교한 교회가 정해진 때에 “불법의 사람”을 이끄는 일에 앞장 서겠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에 자신을 준비한 신부도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독자들에게 경건한 분별력과 안전한 여행을 당부한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저자후기
그리스도의 사역이 불완전하거나 불필요했다고 암시하거나,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길이 있다고 시사하는 어떤 가르침도 따라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직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오는 평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로마서의 첫 다섯 장을 읽으라. 그리고 성령님이 거기서 말씀하고 제시하신 것으로 당신을 이끄시도록 내어 드리라. 유일한 선결 조건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 다음으로는 소박한 믿음으로 이제 그리스도, 오직 그분이 당신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나님께 말씀 드리라.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롬5:1-2)하는 분이시다. - 339면 끝.
|
출처: 청교도의 길을 함께 원문보기 글쓴이: 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