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4일 주일 저녁 예배 설교문
본문: 막 15:42-47
제목: 당돌한 믿음
예화) 당나귀 등에 물건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에게 어떤 도인이 말하였습니다. “짐 실은 저 당나귀가 방귀를 세 번 뀌면 당신은 죽소.”
처음에는 그 말에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했지만, 소심한 상인은 은근히 걱정됐습니다. 잠시 후 당나귀 엉덩이에서 방귀가 나왔습니다. 얼마 후 또 방귀를 뀌었습니다. 초조해진 상인은 엉겁결에 당나귀 항문을 돌로 막았습니다.
그러자 얼마동안 당나귀가 방귀를 뀌지 않았습니다. 이에 궁금해진 상인은 돌이 제대로 당나귀의 항문을 막고 있는지 확인하려 당나귀 꽁무니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습니다. 당나귀가 오래 참은 방귀를 그 찰라에 터뜨렸습니다. 항문을 막았던 돌멩이가 배가된 압력에 의해 대포처럼 튀어나왔습니다. 하필이면 그 때 상인은 그 당나귀 꽁무니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장거리 미사일 같이 회전하며 가속도가 붙은 돌은 상인의 이마를 명중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도인의 예언은 적중하게 되었고, 소심한 상인은 그 예언대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상인이 좀 더 담대했더라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소심하고 은밀하게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요 19:38). 그러나 주님의 대적과 원수들 앞에서는 당돌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장을 하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한(용기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1. 아리마대에서 부자였습니다(마 27:57a).
아리마대는 팔레스타인에 이 도시 이름으로 나타나는 여러 곳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아리마대는 예루살렘도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으로 구약시대에 사무엘선지자의 고향인 ‘라마’ 일 것으로 추측합니다(삼상 19:19). 그 곳에서 요셉은 힘이 있고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새 무덤을 가질 정도의 재력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물질적인 부유함만 가질 뿐 아니라, 마음의 부유함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대개 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부족함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내세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세상의 재물과 쾌락에 더 마음이 쏠리게 마련입니다. 부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부는 이 세상을 집착하게 만들고(마 6:21), 사람을 이기적으로 변화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부귀와 권세와 명예까지도 온전히 헌신할 정도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습니다(막 15:43, 눅 23:50).
고대 유대에는 최고 의결 기관으로 종교상ㆍ사법상의 재판권을 가진,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최고기관이 있었습니다. 대개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좋은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기 쉬운데, 그 당시 요셉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지만,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권력을 갖더라도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작년부터 1년 두 번 정도 치아와 잇몸 치료를 받는데, 계양구 병방동에 있는 명치과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원장님이 효성동에 있는 강성교회 집사님이랍니다. 이름은 안세용원장이시더라구요.
처음에는 저도 소개를 받고 치아가 페인 곳이 있어서 진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등록을 하고 치료를 받는데, 얼마나 선하고 친절한지 감동이자 감격스러웠습니다. 너무나 의아스러울 정도로 선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음속으로 “내가 목사라서 저 집사님이 잘해 주실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모든 환자에게 대할 때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많은 의사들은 받을 진료비를 다 받으면서도 거만한 자세로 진료를 하는데 반해, 강성교회 안세용 젊은 남자집사님은 친절과 사랑으로 진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저 집사님처럼 전문직이나 비전문직 분야에서 빛을 발한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확장되어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대교회 성도님들도 어디에서든지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착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려고 힘 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셉은 사회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재산과 권세를 지녔지만, 물질이나 권력을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라 선과 의를 좇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그들에 대한 도전 세력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수의 악을 따르지 않고, 의로운 길을 향해 걸어 나아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을 죽이려는 산헤드린공의회에서 그 일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눅 23:51).
그리스도를 위해 용기를 내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며, 비겁하게 불의와 타협해서라도 살려고 하는 자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공의회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릴 때 가표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들이 한다고 악한 일에 무턱대고 따라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의로운지 분별하면서 행동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산헤드린 의회에서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아리마대 요셉은 반대를 표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아무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막 15:43c).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았던 것이죠.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만이 다시 오실 주님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마 27:57b, 요 19:38).
요셉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화를 받고 예수님의 삶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박해 없고 탄압 없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가 힘이 드는데, 요셉은 박해와 탄압이 끊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아리마대 사람으로 선하고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며 지위도, 명예도, 지식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조건들이 그에게는 다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부자가 믿기 어려운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로서, 끝까지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세상적으로 무엇이 필요하여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그는 기꺼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서 부귀영화와 권세 그리고 목숨도 잃을 수 있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르는 자임을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지만, 요셉은 두려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당돌히 요구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인간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그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망에 이르게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와 담대함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현실을 극복하며 현실을 이기게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제자는 당돌하게 자신이 기독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시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당돌한 믿음을 가졌던 것처럼, 효성동에 있는 선대교회가 당돌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