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배의 사람들은 직접 6.25를 겪지는 않았지만, 6.25 전란이 우리 민족에게 준 상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고, 우리 민족 개개인 누구 하나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피난을 다니고, 전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6.25를 어려서부터 배우고 느끼고 있지 않은가.
6.25의 포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끝난 것은 아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은 남북 분단 상태가 그대로 머무른 채 남아 있음으로 여전히 현존한다. 이 비극의 현존성은, 그 당시의 열 살 소년이 오늘에 와서 50대의 장년이 됨으로써 오히려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되었고, 추억 속에서 객관화된다.
김원일의 육이오는 그런 의미에서 정확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자신이 소년이 되어 되돌아본 그 시절은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잊고 싶은 기억이었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음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6.25는 그 자체가 작가의 소년 시절이었으므로 6.25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런 작가의 추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김원일의 다른 어떤 소설보다 자전적이며, 김원일로서는 이제쯤 자신의 얼굴로 돌아볼 때쯤 되었다는 대가스러운 문학 의식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6.25 이후 50년대초의 현실은 놀라운 기억으로 재생해내면서 치밀한 객관성을 확보해나가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추억을 통한 소년의 시점을 시종 유지해나감으로써 풍부한 서정성을 얻고 있다.
6.25를 말하면서도 그 시점을 소년으로 옮기고 있으며, 소년 화자에게 작가 자신의 이른바 자기 동일성을 전폭적으로 떠맡기고 있다. 소년의 시점에 의해 관찰, 파악된 정밀성이 객관성으로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면, 그것에 작가 자신을 거는 정서적 진술을 통해 높은 수준의 주관성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
『마당깊은 집』에서 소년의 시점에 의해 관찰, 파악된 현실은 육이오 이후의 후방 현실이다. 고향 진영에서 남의 집에 얹혀 지내다가 대구로 와서 장관동 세집에 있던 어머니, 누이, 두 남동생과 합류한 길남은, 그 시간부터 바로 주인집 이외에도 네 가구의 피난민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 네 가구는,
① 경기도 연백에서 피난온 경기댁으로 식구는 셋이었으며,
② 퇴역장교 상이군인으로 역시 식구는 넷이었고,
③ 평양에서 피난온 평양댁으로 식구는 넷이었고,
④ 가까운 김천에서 내려온 김천댁은 아들만 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밖에 소설에서 위채로 불리우고 있는 주인집 식구는 모두 여덟 명으로서,『마당깊은 집』은 출신과 구성, 직업이 서로 다른 스물 두 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이다.
소설은 우선 이 사회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행하면서, 소설화자로 나타나는 소년의 시점에 포착된 인상을 적절히 배분한다.
여기서 『마당깊은 집』은 이 작가가 그 동안 끈질기게 추구해온 한국전쟁의 이념적 허위성, 허구성에 대한 고발과 짝을 이루면서, 그 비극이 작용하는 일상적 삶의 바탕과 왜곡의 드러냄이라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마당깊은 집』을 이렇게 이해할 때, '마당깊은 집'은 하나의 상징성을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마당깊은 집'에 사는 여섯 가구는 6.25 이후 대구, 부산 등지에서 전개된 피난민의 삶을 우선 세태묘사적으로 대변한다.
거기에는 피난민의 삶의 양태가 골고루 나와 있다.
경기댁의 딸 미선이 미국 부대에 근무하다가 미군과 결혼하고 도미하게 되는 일, 상이군인 준호 아버지가 고무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일, 평양댁 아들 정태가 월북 미수로 체포된 일, 그리고 소년 길남의 어머니가 기생들 바느질 품팔이로 살아가는 일 등등은 모두 6.25 이후 피난민 생활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불구가 된 삶이다.
얼핏 보아 이 같은 성격에서 제외된 삶의 모습으로 주인집 식구들을 들 수 있겠으나, 경제적으로만 궁핍에서 제외되었을 뿐(궁핍은 커녕, 오히려 전쟁 경기로 치부를 했다) 불구의 삶 형태라는 점에서는 제외될 수 없다.
주인집은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피난민들에게 세돈을 받아가면서, 자기 아들을 불법으로 미국으로 보내는, 6.25 이후 너무나도 많이 보아온 졸부들의 상처난 정신 상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 부류는 한편으로 끼니가 간데없는 난민들이 신문팔이를 하며 밥을 훔쳐먹기까지 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들은 춤 파티를 열고 관리를 초청하는 등 완전히 비뚤어진 길을 걸어간다.
이들은 피난민의 고생과 궁핍한 삶이 육체적, 물질적 차원에서의 상처라면, 정신적인 차원에서 보다 깊은 내면적 상처를 입게 된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처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규범 자체에 큰 상처를 입히고, 이른바 전후 행태라고 할 수 있는 파행적인 삶의 질서를 재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사를 구분할 줄 모르는 관리들의 윤리, 법규의 자의적 운용, 배금주의. 출세주의와 같은 타락한 사회 형태는 이즈음 급격히 팽배하면서, 그 이후 우리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가 되어왔음을 부인하기 힘든 것이다.
말하자면 '마당깊은 집'에 온존하고 있는, 또는 서식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 모르는 동물적/생존적 에토스는 전쟁이 야기하는, 불가피한 삶의 모습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끼어들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다.
어두운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마당깊은 집'이 노상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밝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따뜻한 온기가 숨어있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도와가는 피난민들의 훈기가 있고, 그 폐쇄된 공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고, 작은 에로티시즘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도 있다.
작가 김원일의 원숙을 느끼게 하는 이 같은 분위기는 냉전 체제의 종식이 강조되고, 전후 행태에서의 과감한 전환이 요구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에 특히 감명스럽게 다가온다.
그것은 김원일의 육이오 문학이 전쟁의 허위성을 파헤치고,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전쟁의 참화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서도 결코 마멸되거나 쇠퇴하지 않는 인간성의 깊이을 증언하고자 하는 문학정신을 실제로 구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길남을 신문팔이에서 신문배달소년으로 끌어주고, 그에게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소년 한주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대목을 차지한다.
“보장하구 말구요. 제 말만 듣고 길남이를 한번 믿어 보세요.”한주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본 적도 없었고, 사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말은 마치 따뜻한 물처럼 내 마음을 덥혀주었다.
길남은 성장한 다음에도 한주를 잊지 못해, 한주가 말한 “길남이를 믿어보세요”라는 말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 구절의 소개를 기억한다고 고백한다.
남에 대한 신뢰와 성실성이라는, 일종의 좌우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주는 비록 '마당깊은 집'에 속한 식구는 아니었으나, 이 소설 전편을 통해, 깊은 마당에서 벗어나 높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받침돌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당깊은 집』만 마침내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이 지어지며, 6.25 전후 문학으로 그 집의 상징 구조는 헐려진다.
3.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설에서 소년의 어머니라는 또 다른 현실이다.
어머니가 소년 화자에게 어떤 현실로 인식되고 있는지 대표적인 인용문을 들어보겠다.
“……길남아, 길은 오직 하나다. 니가 크야 한다. 질대같이 얼렁 커서 뜬뜬한 사내 구실을 해야 한다. 그래야 혼자 살아온 이 에미 과부 설움을 줄 수가 있다.”
이 소설에서는 소년에게 있어서 육이오 이후의 생활, 즉 대구 장관동 시절의 생활이,
1) '마당깊은 집'을 중심으로 한 피난민들의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2) 이와 함께 어머니를 매개로 해서 다시 연결되어 있으며,
3) 어머니 그 자체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복합 구조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2)와 3)인데, 그 까닭은 이 현실이 작가 김원일의 6.25 소설 전반에 귀중한 심리적 모티프를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소년의 어머니는 육이오로 인하여 남편과 생이별한 생과부로서 딸 하나와 아들 셋을 거느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소설의 화자는 장남 길남이인데, 그는 가족과 떨어져 고향 진영의 남의 집에 있다가 뒤늦게 대구의 가족과 합류한다.
그러나 이 합가는 “왠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생활이 암담하게만 느껴지는”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화자는 이중의 고통 아래 놓이게 된다. 어머니는 딸인 누나도, 그리고 남동생들도 학교에 보내면서 화자인 소년, 즉 장남은 학교도 보내주지 않고 신문팔이를 시킨다.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시키며, 그 일이 힘들다는 호소도 묵살한다.
요컨데 비정스러운, 독한 어머니인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면모가 특히 장남인 길남이에게만 유독 편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과연 길남의 짐작대로 “다리 밑에서”데리고 온 아이였을까.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유독 자신에게만 증오, 비정의 감정이 편재해 있었다고 서러워하는 소년 길남이에게 있어서 당시로서 그 이유가 석연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비정, 독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단단함은, 혼자 남은 여성, 특히 전쟁터에서 혼자 남은 여성 특유의 생존 본능과 남편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장남을 향한 남편에의 대상 심리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좀처럼 허물어질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인용문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설움에서 확인될 수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설움을 단단하게 감추고 있으면서, 누구에겐가 기대어야 할 심리적 지주를 장남을 통해서 발견했던 것이며, 어머니→장남으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설움의 심리적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편과의 생이별, 생활고에 의해 모질어진 어머니의 설움이 장남에게 그대로 옮겨감으로써 아직 어린 장님은 어머니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서러움을 키워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어머니와 장남의 관계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먼저 어머니의 경우 그녀는 남편의 실종으로 인해서 발생한 부재/결핍의 상황을 자기 폐쇄/자기 훈련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만은 완전한 극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그 의존의 대상으로 장남을 끌어들이고, 장남에게 자신의 방법의 터득을 그대로 요구한다.
그러나 장남의 경우에 있어서 애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년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실종은 마찬가지로 부재/결핍이었으나, 그것이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부재/결핍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해지는 어머니의 요구는 절실성/당위성으로 다가오지 않으므로, 그러한 어머니의존재 자체가 모성의 부재/결핍이라는 이중의 상황을 그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이중의 억압을 의식하게 되고, 그로부터의 탈출이 가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출은 실패했고, 또 실패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심리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길남은 이미 어머니의 훈련 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 정도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