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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민 (인연 소중한삶)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방촌리
인연 소중한삶 추천 0 조회 196 13.11.19 21: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방촌리 

 

1

방촌마을 당산목과 돌탑

방촌 마을에는 원당산?앞당산?뒷당산 등 3곳에 당산이 있다. 원당산은 마을 뒷산 7-8주의 소나무가 있는 곳인데 예전에는 여기에는 제주가 제를 준비하기 위하여 움막을 짓고, 산제당도 지어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앞당산은 팽나무로 된 숲이며, 뒷당산은 마을 뒤편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다. 방촌마을 당산제는 갑자년 홍수로 돌아가신 영령을 위하여 모셔졌다고 한다. 방촌 마을에는 현재 5년 전에 새로 쌓은 탑이 3기가 있다. 모두 마을 앞에 위치하며 모두 1기의 탑윗돌이 올려 있다. 방촌마을에서는 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① 방촌 마을에는 5년전에 다시 쌓았다. 정월 초사흗날에 탑제를 드리는데 이는 탑이 무너지면 손해를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탑윗들을 대왕대신이라 하여 최고 영으로 부르고 있다. ② 방 촌마을에 갑자년(몇 갑자인지는 모름)에 큰 수해가 있었는데 그때 마을에 살던 업(뱀 또는 구렁이)이 곡성으로 떠내려갔다. 그래서 업이 곡성양반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탄원을 내서(현몽으로 나타남) 방촌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에 돌탑 3개를 쌓고 업 이 돌아와서 살수 있도록 했다. ③ 마을 앞 하천에 폭우가 범람하여 청년들이 복구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청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돌무덤을 쌓고 남근석을 세웠다. ④ 고리봉에 묘가 있는 천장군을 숭배하기 위해 돌무덤을 세웠다.

(출처:이상훈<남원군 마을지킴이>)

 

2

방촌(芳村)마을

이마을은 단일마을로서 1168년경 예조 판서의 관직을 그만두고 한양으로부터 하남한 나주박씨가 신록의 꾸지봉 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터를 잡아 정착하였는데 그 후 나주박씨는 떠나고 금성나씨, 밀양박씨, 진주하씨, 흥덕장씨 등 여러 성씨가 와서 마을을 형성한 이후에 산록의 꾸지봉 나무에 꽃이 다발지어 있는 것을 보고 꽃다울 방(芳)자와 마을촌(村)자를 합하여 방촌(芳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옛부터 대대로 선달(先達), 대부(大夫) 등의 벼슬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한다. 그런데 한 도사가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벼슬한 분들의 압력에 못이겨 주지를 못하게 되자 보복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주지는 주민들에게 마을에 있는 꾸지봉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면 이 마을이 더욱 부흥될 것이라고 마을분들을 설득하였다. 주민들이 이 말을 진정이라고 믿어 이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 이후로 벼슬하던 분들이 하나 둘 떨어지면서 고관대작이 없어졌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출처:남원시청<금지면사무소 홈페이지>)

 

3

천장군 묘소

방촌리에 위치한 환봉(環琫:고리봉)이라는 산줄기에 천장군묘라는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은 천만리(千萬里)라 하는 분이다. 천씨는 본래 영양(穎陽) 천씨 단본이다. 영양은 중국 노나라의 지명인데 영양천씨 세보에는 그 시조는 명나라 초기의 중신 천암(千巖)이라 하는 분으로, 그 후손은 대대로 이곳 영양에 살았다. 천만리는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천씨들의 중시조로 아호(雅號)를 사암(思庵)이라 하였다. 일찍이 중국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취하의 영양사 및 총독장으로 있어 그의 아들 천상(千祥)과 천희(千禧)와 함께 싸움에 참전하여 군량수송 및 그 보급에 만전을 기하여 평양 및 곽산 등지에서 아군이 크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양호(楊鎬), 마귀(麻貴)등과 함께 세부자가 다시 조선에 나와 직산(稷山).울산(蔚山)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명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어 조선에 귀하하니 조정에서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또한 훗일에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숙종때 조정에서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대보단을 설치하여 이에 봉안하였고 순조때는 고성군 호암서원에 봉안하고 헌종때에는 청도군의 황강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때에는 문경군의 노양각, 진주의 만첨각, 안동의 동산서원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고종 33년 (1896)에는 이곳 금지면에 환봉사를 세워 그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 했던 천장군은 천사했다고 한다.풍수지리에 능한 이여송 장군이 이곳 고리봉 기슭에 명당을 잡아 안장했는데 이 무덤자리를 풍수지리학에서는 무자 천손지지(無子 千孫之地) 라고 했는데 '아들은 없는데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는 묘자리'가 된다. 그러고 보면 중국에서 나온 천장군이 이곳 조선 땅에 천씨의 손을 퍼뜨린 바로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이곳 환봉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천장군묘의 지형은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이곳 무덤 주위에 이르면 마치 따스한 안방에 오는것만 같아 그렇게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 모진 바람도 잔잔해 지고 고리봉을 향에 등산길에 올라 이곳에 다달으면 쉬어가지 않을수 없단다. 이 곳 환보의 산세가 험하지 않다면 더욱 개발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남원시청<금지면사무소 홈페이지>)

 

4

골회봉(?回峯)

일명 고리봉(環峯)이라고 한다. 기지방(機池坊, 금지면 옛지명)에 있다. 암벽들이 높이 세워져 있는데, 네 면의 어려운 가장자리에 하나의 쇠(鐵)로 만든 큰 고리가 낭떨어지(崖) 위로 드리워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읍(현 남원시)의 터가 흘러가는 배(舟) 모양이기 때문에 이 고리를 만들어 닻줄을 매어 놓은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출처:남원문화원<용성지>1994)

 

5

고리봉

일명 환봉, 고리봉이라고 보통 불려지고 있다. 요천강변에 위치하여 야산에 돌출하였으므로 높지는 않으나 절벽의 가경(佳境)을 이루고 요천강변에 임한 암벽에는 커다란 쇠고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남원의 지형이 요천과 축천으로 (둘러)쌓여 있어 오행지리설에서는 행주형이라고 하며 마치 일엽편주 돛단배가 물결따라 흘러가는 격이니 배가 떠나가지 못하도록 매어 두어야 남원읍(현 남원시)의 발전이 있다는 풍수설에 근거해서 이곳(고리봉)에 쇠고리를 걸어 놓았다고 전한다.

(출처:조성교<남원지>1972)

 

 

6

고리봉(환봉)

고리봉은 대강면 사석리와 금지면 방촌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708미터이며, 천지개벽 때 봉우리에 박혀 있는 고리에 배를 매었다.

(출처: 한글학회<한국지명총람>1981)

 

7

고리봉(골회봉)

남원시가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그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이곳에 쇠고리를 묻었다 함.

(출처:최창조<한국의 자생풍수2>2002)  

 

8

고리봉

(시의 금지면 방촌리에 고리봉(710미터)이 있다면서)남원 읍기(邑基)의 지세는 동쪽의 요천과 서쪽의 율천에 둘러싸여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세(行舟形)로 이 형국을 비보하기 위하여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인공적으로 토성을 쌓고 배를 매어두는 산(造山)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용성지>에 '전해내려 오는 말로 도선이 (중략) 남원부 지리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러 비보사찰과 함께, 축천(丑川)에는 철우(鐵牛)를 만들었고, 골회봉에는 용담(龍潭)과 호산(虎山)에 철환의 탑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 산의 지명과 관련해 천지개벽 때 봉우리에 박혀 있는 고리에 배를 매었다는 이야기를 수록 하였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9

마을 앞이 허하니 나무를 심고 탑을 쌓은 것이 좋다(금지면 방촌리, 서매리, 고죽동 고산골)

(출처:오종근<남원지방의 민간신앙>)

 

10

고리봉 Goribong 시의 금지면 방촌리에 위치한 산 이다(고도:710m). 백두대간의 주맥인 덕유산과 영취산(靈鷲山)에서 맥이 갈라져서 동남쪽으로 천황산과 교룡산에 이르고 그 주맥이 남쪽으로 곧장 뻗어 내려와서 문덕봉, 삿갓봉을 이루고 이어진 산줄기에 고리봉이 있다. 섬진강은 산의 기슭을 남쪽으로 감돌아 흐르면서 청계동 계곡을 만들며, 다시 남원을 관류하여 흘러나온 요천과 합류한다. 산은 방촌리·서매리·강석리·사석리·상귀리·택내리의 경계에 있다. 남원 읍기(邑基)의 지세는 동쪽의 요천과 서쪽의 율천에 둘러싸여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세(行舟形)로 이 형국을 비보하기 위하여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인공적으로 토성을 쌓고 배를 매어두는 산[造山]을만들었다는해석도있다.『 용성지』에 “전해내려 오는 말로 도선이 (중략) 남원부의 지리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러 비보사찰과 함께, 축천(丑川)에는 철우(鐵牛)를 만들었고, 골회봉(..回峯)에는 용담(龍潭)과 호산(虎山)에 철환( 環)의 탑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지
명총람』에 산의 지명과 관련해 천지개벽 때 봉우리에 박혀 있는 고리에 배를 매었다는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출처:국토지리정보원<한국지명유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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