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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대한불교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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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사 마당 스크랩 참회의 진실
명현(明賢) 추천 0 조회 23 10.10.12 19: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참회의 진실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참 자(字)만큼 많이 사용되는 글자도 드물다.

말도 참말이 있고 거짓말도 있다.

거짓이 아닌 진짜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든 사물에 참자만 붙이면 진실 된 것이 된다.

참기름 참외 참나물 참나무 참깨 참게 등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다 거짓 아닌 허위 아닌 진정(眞情)을 나타내는 말이다.

참!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의 참자(字)는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

문득생각이 나거나 느낌이 극에 달했을 때 “참말로! 의 참 자(字)와

“참 귀가 막혀서!” 와 “참 어제일은 잘 되어서!”의 참 자(字)는

과연 이라는 뜻의 말로 쓰인다.

참회(懺悔)를 줄여서 참(懺)이라는 말로 쓰기도 하고

또 다른 참(斬)은 무시무시한 참수(斬首)를 참(斬)이라고 쓰기도 한다.

또 있다. 참(站)은 길가다가 쉬어가는 곳을 뜻하는 글자(字)이다.

우리인생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길이 참되게 살아가는 길일까?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과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생각해도 참말로 귀가 막히는 한심한

인생을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후회 막급한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 그때는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스스로 판단해도 부끄러운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래 그때 그 일을 참 잘한 일이야! 라고 만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지 궁금할 것이다.

스스로 내가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참회(慙悔)또는 참회(懺悔)라고 한다.

막상 참회를 위하여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인생살이가

비참(悲慘)하고 무참(無慘)할 것이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죽(참斬)이고 쉽도록 밉고 내가 나를 생각해도

불상(참慘)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그때 우리는 참회(懺悔)를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열일을 제처 두고 우선 참회를 하는 것이다.

참회를 생활화하는 인생이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참회는 무슨 놈의 참회?

하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참! 참자(字)중에 쉬어갈 참(站)자도 있다.

노동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먹는 음식을 쉴 때 먹는다 하여

쉴 참(站)이라고 한다.

아침과 점심,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 중간에 먹는 음식이라고 하여

새참(站)이라고도 한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휴식시간을 갖고 새로운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참회라는 참(站)을 갖고

보람 있는 활력소를 재충전하는 것이다.

참회에는 두 가지 참회가 있다.

금생(今生)에서 자신이 저질은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뉘우치는 참회(慙悔)와 세세생생 이어오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체

모든 업장을 회개하기로 부처님과 신들에게 맹세하는 참회(懺悔)가 있다. 

부처님이나 신(神)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참회 이다.

이때 참회를 통하여 잘못을 용서하고 새로운 다짐을 받고 계(戒)를

주는 사람을 참회사(懺悔師)또는 참회스님이라고 한다.

유명(有名)인사들이 자신의 인생을 기록으로 한 자서전을 많이들

남기기도 하는데 원래 자서전은 자기가 살아온 한평생 인생을 뒤돌아보고

부끄럽고 잘못된 일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이나 후세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의미(意味)가 강한 것이다.

외국인들이 남긴 자서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중심의 주관적(主觀的)

삶들을 비교적 객관적(客觀的)시각(視覺)으로 뒤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는

회고록(回顧錄)이나 참회록(懺悔錄)들이 많다.

대한민국의 유명 인사들이 남긴 자서전들은 그들이 얼마나 모범되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는지 잘은 몰라도 온통 자기 자랑 일색이다.

자서전이 아니라 자신을 선전(宣傳)하기위하여, 자신을 내세우기

위하여 유명작가를 동원한 P. R전(傳)이요. 타서전(他書傳)이다.

꼭 자서전이 아니라도 참회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으려는

참회정신으로 쓰는 소설을 참회소설이라고 한다.

루소의 참회록(懺悔錄)은 대표적 참회소설이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업장을 소멸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첫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는 참회(懺悔)를 말하는데 다른 말로는 참괴(慙愧)라고도 한다.

“마음을 청정(淸淨)이하고, 몸을 단정(端整)하고, 속으로 참괴(慙愧)한 생각을

가지고 밖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멸(滅) 하지 못할 죄가 없느니라. 고 부처님은 설하셨다.

참괴(慙愧),의 마음이란 무었을 말하는 것일까?

참(慙)은 부처님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참(慙)은 스스로 참회하여 맺힌 원결을 풀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참(慙)은 자기가 저질은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가 수치심을 가지고

뉘우치며 스스로 착한 일을 통하여 선업(善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괴(愧)는 다른 사람에게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다른 중생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한다.

괴(愧)다른 사람에게 다른 중생들에게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

고백(告白)하고 그들로 하여금 용서를 받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맺힌 원결(怨結)의 결박(結縛)을 풀게 하는 것이다.

이두가지 방법의 참(慙)과 괴(愧)는 수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에

장애를 없애고 낙(樂)을 얻게 하는 수행의 바른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이 행(行)하는 계율(戒律) 중에 자자(自恣)라는

참회의 방법이 있다. 하안거(夏安居)의 마지막 날 정진하던 대중스님들로

하여금  안거(安居) 수행 중에 눈으로 보고(見), 귀로 듣고(聞),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탐구(疑)하는 세가지일을 행(行)함에 있어서

자신이 범(犯)한 죄과(罪過)를 대중들에게 고백(告白)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잘 꼬집어 내면서도 자기의 허물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들추어내 말하기 좋아하면서 자기의 허물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감추기를 좋아한다.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것을 불교에서 참회(懺悔)라고

하는 것처럼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한다.

고해성사는 자신의 저지른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하느님께 고백하게 되어 있어나 하느님을 대신한

신부(神父)님께 고백하면 죄를 면죄 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어도 하느님을 대신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올리면 법률적 실정법(實定法)은 몰라도 인간이 저질은 원죄(原罪)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얻은 일체의 정보와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비록 고해성사를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질은 중죄인이라도 보호해야할

종교적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한때 명동성당이 학생데모나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소위 시국사범(時局事犯)들의 피난처 역할을 전담한 경우도 있다.

천주교 교리에 의하여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와 고해성사한 사람은

범죄유무에 관계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성당에서 지켜주어야 한다.

죄질(罪質)의 강약(强弱)에 관계없이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시절 명동성당을 찾아든 시국사범들을 끝까지

지켜주고 정부와 힘든 타협을 통하여 해결점을 찾아 보호해 주었든

것이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권력 앞에 의연한 자세로 임하셨든

선종하신 고(古)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전의 당당하든 모습이 바로

천주교 참회의 고해성사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다.

정부의 졸렬한 미국과의 소고기 협상파동이 몰고 온 전 국민들이

참여한 촛불시위의 주동자들이 서울 조계사로 몰려들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의 품안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는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님이 탑승한 차량이 검문검색을 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도 지켜줄려고 무던히도 애써서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보호는커녕 그들을 검거라는 삭막한 세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내몰고 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정부의 대응방법 부터 달랐다.

검찰을 비롯한 경찰등 사법당국의 시각(視覺)이 판이(判異)했다.

명동성당은 뭐인가에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접근했으나 조계사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소홀하게 취급하고 들어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불교계의 대응방법부터 달랐다.

애초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하는 생각부터 판이(判異)했다.

천주교는 꼭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대적 의무감으로 접근했으나

불교는 꼭 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감이 부족했다.

꼭 그들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없이 소홀히 접근했든 것이다.

연말 입시불공 철에 사찰입구를 봉쇄한 경찰들이 출입하는 불자들을

일일이 이 잡듯이 검문검색을 강화(强化)하고 있으니 귀가 막히고

참말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종교시설을 그렇게 

오랜 세월 장기간 포위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나라에 포위된 안시성도 아니고 불교계가 지쳐갔다.

그들에게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날라든 새 짐승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 꼭 불교가 아니라도 동양의 미덕인데 대자대비의

불교계가 인욕(忍辱)을 외면하고 그들을 거리로 내몬 것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장시간 노숙에 지친 그들 스스로가 보호받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있다. 불교계의 자생능력이다. 자활능력이다.

한국천주교 뒤에는 로마 교황청이라는 막강한 힘이 있다.

한국 기독교 뒤에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개신교국가들이 소위

인권보호라는 미명아래 거대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계는 그런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깔본 것이다.

그래서 검찰이 경찰이 무시하고 천대하고 깔아뭉갠 것이다.

그래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불자들은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으로 한심한 불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처님께 사죄하고 참회해야한다.

아직 대한민국은 불교국가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는 불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까지는 불교를 믿는다.

불교를 지키고 불교다운 불교는 우리가 가꾸고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 불자님들의 손으로 불국정토를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회는 속죄(贖罪)를 말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태어난다는 원죄(原罪)론 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모두 받쳐 잘못을 용서를 받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잘못을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참회(懺悔)대신 회개(悔改)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회개(悔改)는 이전(以前)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을 뜻하는 말이다.

스스로 고백하고 고쳐나가는 참회나 고해성사가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

작용하는 자율적 개선책(改善策)이라면 회개는 나보다는 남을 우선

고쳐가려는 외면적 교육에 작용하는 타율적 요소가 많다.

기독교는 타종교와는 달리 왕성한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는 끝임 없이 “회개하라! 고 소리 높여  외쳐댄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 자체가 회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 밤에 오줌을 싸 이불에 지도를 그릴 때가 이었다.

요즘 어린아이들도 자주 오줌을 싸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고 한다.

미국아이들은 오줌을 싸고도 그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한다.

“애 어쯤 지도를 이렇게 잘 그렸니? 어느 나라 지도야! 하며

아이의 창의력을 키워준다고 한다. 미국식이다.

한국아이들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가는 어머니로부터 혼쭐이 난다.

“애 또 쌌니? 이불에 오줌을 싸면 어떡해! 혼 좀 나야 되겠다.

아무리 현대식 어머니라도 아이에게 혼쭐부터 내고 본다. 한국식이다.

정서(情緖)가 다르다. 음(陰)이고 양(陽)이다.

공격을 좋아하고 수비를 좋아한다. 육식(肉食)이고 채식(菜食)이다.

양이고 공격적이고 육식을 선호하는 막강한 미국아이들은 체력이 강해

성장하면 고쳐질 수가 있어나  음이고 수비적이고 채식을 선호하는

연약한 한국아이들은 성장해도 못 고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릴 때 고쳐주어야 한다.

지혜로운 한국어머니가 쓰는 전통치료법이 있다.

“애야 이것 쓰고 옆집에 가서 소금 좀 얻어오너라!

오줌 싼 아이에게 머리에 키를 씌워 소금심부름을 시키는 것이다.

오줌을 싼 아이는 오줌 싼 미안함 때문에 거절도 못한다.

아무영문도 모르고 머리에 키를 쓰고 심부름을 가서 옆집 어머니로

부터 밥주걱에 뺨 한대 얻어맞고 소금 한 사발 얻어 돌아오는 것이다.

신통하게도 그것으로 그 아이는 밤에 오줌을 안 싸게 된다.

불교에서 얻은 지혜이다.

아이는 자기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인간의 일체 행위는 의식(意識)으로부터 나온다.

의식의 작용으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타인에 알리게 됨으로서 의식에 부담을 가져 그 허물을

고쳐나가는 것이다. 스님들이 행하는 자자(自恣)도 똑같은 이치이다.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특히 정치권에서 더 말이 많다.

국민들은 차분한데 정치인들이 야단법석들이다.

600만도 넘는 조문객들이 몰려들고 100만이 넘는 인파가 서울시청광장에서

서울역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그렇게도 애도(哀悼)하고

그렇게도 분통(憤痛)해 하면서도 자제(自制)하고 끝까지 법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했는데 그 잘난 정치인들이 추태를 떨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죽이지는 안아도 주검의 원인을 제공했으면 당연히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참 한심한 사람들이다.

사과를 요구하는 쪽도 그렇다. 그쪽부터 사과를 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사가 진행 중일 때 그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가?

혹시라도 불티가 퇼까? 바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았든가?

혹시라도 흙탕물 뒤집어 쓸까봐 몸 사리고 숨어있든 사람들이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봐나? 입이라도 한번 뻥긋 해 봐는 가?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다. 죽고 나니 검찰은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했다고

약을 주더니 법무부는 안양교도소에 노무현 대통령 수감 감빵 독실(獨室)을 만들고

있었다고 언론이 보도한다.

또 법무부는 아니라고 잡아뗀다. 도데체가 참회 할 줄을 모른다.

참으로 독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래도 괜찮은 인연(因緣)도 있다.

대북특사로 김정일도 만나고 김대중 대통령 방북도 주선했다가

노무현 정권하에서 대북송금 위반죄로 감빵간 사람이다.

고 정몽헌 현대아산회장도 이사람에게 제공한 자금액수 밝히라고

조사받다가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했다.

얼마든지 노무현에 대한 원망과 원한을 품고 있을법한 사람이다.

이분이 나셨다. 노무현대통령의 불구속수사 결의안 제출을 위한

국회의원 서명 작업에 나선 것이다.

아쉽게도 그 결의안은 국회가 아닌 노무현대통령 빈소에 제출되었다.

서명이 늦은 것이다. 며칠만 서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안타깝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뿐만 아니다.

이일을 서둔 박지원 국회의원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더 서글프도록 안타까운 것은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성이

매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라도 놈의 새끼 또 꼼수 쓰고 있네!

T. V 앞에 앉은 경상도 어르신의 논평이다.

아니 그 아름다운 정성이 경상도면 어떻고 전라도면 어떤 는데!

어쩌면 노무현의 주검은 여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생전 정치개혁을 위하여 한몸을 바쳐온 분이다.

비교적 당선이 보장되는 서울의 종로를 버리고 지역갈등을 해소한다는

큰 뜻을 품고 부산에서 출마하는 모험을 감행한 사람이다.

부산사람들은 노무현을 싫어한다. 아니 미워한다.

한때는 당시 여당 민정당의 실세를 거부하고 청치초년병 노무현을 선택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 준 부산사람들이 이제는 악을 쓰고 그를 미워하고 저주한다.

언제는 5공 청문회 스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찬사를

보내드니1년도 안 되서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여소야대의 정국을 타파한다고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하고 노무현이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비난과 저주를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뿐만 아니라 이기택도 미워하고

김정길도 미워하고 박찬종도 미워한다.

모두가 김대중이 꼬봉이라서 김대중이 새끼라서 싫어한단다.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말도 안 되는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부산정치인들이 만들어난 추잡한 지역이기주위 현실이다.

부산에서는 상대후보를 빨갱이로 몰고 전라도 놈으로 몰면 당선된다.

김대중은 빨갱이이고 전라도 놈이고 부도덕한 놈의 표상(表象)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욕만 잘해도 특정정당 공천 받을 수 있고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이다.

부산시민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워할 일이 없다.

부산시민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미워할 일이 없다.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고 사기를 쳐간 사기꾼도 아니다.

직접적으로 아무런 피해도 입은바 없는 사람들을 괜히 미워하고

 원수보다도 더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 부산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선동이요 유언비어의 산물이다.

나도 한때는 이들과 어울려 추악한 선동에 말려들기도 했다.

부산에서 행사깨나 하려고 하면 이들에게 말려들 수밖에 없다.

아니면 소외당하기 일수 이다.

내가 잘 아는 어느 공직자가 한분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분의 수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관내 거주 외국인 명단” 이라고 제목을 단 수첩을 내가 주웠든

것이었다. 주인을 찾아주기 위하여 본의 아니게 수첩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분이 관리하는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호남인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관내거주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특별 관리하고 있었든 것이다.

일본제국주위도 아니고 공산주위국가도 아닌 민주국가 대한민국

공직사회에서 백주대낮에 이루어지고 있는 있어서는 안 될 범죄가

아무런 죄의식조차 없이 자행되고 있었든 것이다.

이건 내가 사는 부산에서 일어난 한심한 사건이다.

부산만 그럴까? 부산 정치인들만 이런 몹쓸 선동을 하였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모르긴 몰라도 영남도 그렇고 호남도 그렇고

충청도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90%넘는 지지율이 나오고

작대기만 갖다 꽂으면 무조건 당선된다고 하는 것 아니가?

노무현 대통령의 유언을 두고 정치권의 해석들이 분분하다.

모두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참말로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이고 파렴치(破廉恥)한 집단이다.

한때나마 그곳에 들랑거렸든 사람으로 나(我)라도 참회를 하고자 한다.

“다음은 오늘 이 행사를 빛내주시기 위하여 참석해 주신

모 모모 국회의원님으로부터 건배(乾杯)제의가 있겠습니다.

술잔을 높이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행사장의 사회자가 건배를 안내한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국회의원 모 모모입니다.

제가 건배를 제의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하나로! 를 선창하면

여러분들도 크게 하나로! 를 따라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로! 하나로! 외고 펴고 선거 운동이다.

평소에 얼굴도 한번 안보여주든 국회의원님께서 회식을 베푼다더니

결과적으로 “하나로! 선거운동이건만!

국회의원뿐만 아니다. 모단체장님도 또 다른 모단체장님도.

또 작은 의원님도 모두가 그렇고 그런 모임을 주선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로! 는 기호 1번을 찍자는 말이다. 1번 정당은 뻔하다.

부산에서 한때는 회식자리 건배에서 하나로! 가 싹 사라졌다.

기호1번이 기호2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구호가 싹 바뀌었다.

“제가 선창으로 우리가! 하면 여러분들은 큰소리로 남이가!

로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로 확 바뀐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남이 아니면 누군데 일가친척이라도 되나.

부모형제 일가친척이 왜? 평소에는 코배기도 안보여주더니

선거 때만 되면 찾아오누!

우리가 남이가! 는 원래 영남정치인들의 하나로! 구호에 대응하여

호남정치인들이 호남인들 결속을 위해 만들어낸 구호란다.

모두가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정치인 자격도 없다.

지도자! 지도자는 무슨 놈 지도자!

국민들에게 아직 더 배워야 하는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제가 선창으로 이대로! 하면 여러분들도 같이 큰 소리로 이대로!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낮선 정치인이 제창한 구호이다.

이상한 구호이다. 처음 들어보는 구호인데? 대체 또 무슨 꿍꿍이

음모(陰謀) 숨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일단은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래 맞다. 나의 추측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맨 날 국회(國會)원내(員內) 2등만 하든 세력이 열린 우리당 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에 힘입어 원내 제일 당(黨)이

되고나서 앞으로는 제발 “이대로”만 유지되게 하여달라는 구호란다.

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자기밖에 모를까?

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욕망만 채우려고 할까?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기세력 자기종교 만을 고집하고

다른 세력을 깔아뭉개고 다른 종교를 부정하려고 할까?      

우리는 대한민국 국운융창과 국민화합 복지향상이라는 단어는 모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들이 한때 주창(主唱)했든 정의사회구현

복지국가 건설은 알만한데도 그 말들은 까 막게 잊고들 있는 것이다.

언제인가 어느 회식자리에서 우리 능엄정사 능엄회 장춘남 회장님이 건배제의 하겠단다.

또 어는 얼빠진 정치모임에서 한 말씀 배워왔거니 하며 궁금한 마음으로 기대를 했다.

“건배제의를 하겠습니다. 따라해 보세요. 9,9,8,8,2,3,4.”

내용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따라했다.

“아니 장 회장님 그건 또 무슨 구호입니까?

궁금한 누군가 묻고 나셨다. 나도 처음 듣는 구호이다.

‘99세까지 88(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다가 죽자(4死)“

라는 뜻이라고 장 회장님의 설명이다.

누가 이런 기발한 구호를 생각해 냈을까? 궁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다방면으로 살펴보니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장관재직시절에 만든 구호란다. 그래 가능한 말이다.

보건복지부장관다운 구호이다. 정치인들도 이런 유머 있고

재치 넘치는 구호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참회를 해야 한다.

지도층인사들이 참회해야한다. 위정자들이 참회해야 한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서민들이 우선 참회해야한다.

대한민국의 주류(主流)는 아직까지는 서민들이다.

학벌은 아직은 고졸(高卒)이하가 진짜 주류이고

종교는 아직은 불교가 주류이다. 거주지는 아직은 지방이 주류이다.

그런데 진짜 주류는 가짜 주류한데 자리를 제다 빼앗기고 살고 있다.

돈이 많아야 주류가 된다. 서울의 명문 대학을 졸업해야 주류이다.

교회를 나가야 주류가 된다. 서울에 살아야 주류 가된다.

부자들의 부동산 과다(過多) 보유세금을 대폭 삭감하여

수십 조억의 세금을 깎아주더니 세수가 모자란다고 서민들이 먹고

쓰는 밀가루 관세를 올리고 LNG가스 관세를 올린단다.

특목고를 늘이고 자립형 사립학교를 늘이고 원어민(原語民)영어강사를

늘이는 등 서울사람 부잣집 자식들을 위한 고급교육정책을 펼치면서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 자식들과 지방출신학생들은 갈 곳조차 없는,

설 곳조차 없는 한심한 부평초신세를 만들고 있단다.

정부기관에서 만든 교육용 지리정보서비스 지도에서 오래된 전통사찰은

송두리 채 빼버리고 크고 작은 교회들은 상세히도 표시했다.

말도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세상인데도 턱도 없는 말인데도 국가는

잘만 유지되고 사회는 잘도 돌아간다.

왜? 못난 사대주의(事大主義)근성 때문이다.

돈 많고, 힘 있고, 잘난 사람 몇%로가 목에 힘주고 국가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고

사회를 통솔하고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왜? 못난 피(被)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 때문이다.

조선 5백년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잔재(殘在)로 돈 많고, 힘 있고,

잘난 사람들에게 예속(隸屬)되어 그 높은 사람이 떨어뜨린 떡고물이라도

좀 맞보자는 얄팍한 근성들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약한 심보들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줄을 선다.

그래서 자기들이 주류이면서도 주류(主流)의 자리를 양보하고

비주류(非主流)로 밀려난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다.

민주주위의 권력(權力)은 선거를 통하여 형성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희한하게 절대로 서민은 서민을 선택하지 않는다.

힘없는 서민이 힘 있고, 돈 많고, 소위 잘난 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는 자기가 선택한 사람들한테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줄을 댄다. 그러면서도 앞 다투어 줄을 선다.

그리고는 원망한다. 그리고는 또다시 그들을 선택한다.

그러면서 악(惡)의 순환(循環)고리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다만 유교(儒敎)가 개신교로 바뀌고 서당이 학교로 바뀐 것이고

선거라는 절차가 늘어난 것뿐이다.

이 악(惡)의 모진 고리를 끊어야 한다.

5백년 악(惡)의 순환을 지금쯤 끊어 내야한다.

그 길은 참회(懺悔)밖에 없다. 지도자(指導者)들의 참회가 아니다.

위정자(爲政者)들의 참회가 아니다. 그들은 참회하래도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한다. 서민들이 해야 한다. 불교인들이 해야 한다.

우리가 어려서 이불에 지도를 그리고 키 뒤집어 씌고 소금 얻으러

가든 그때 그 심정으로 참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지리도 못난 사대주위 근성에서 탈피(脫皮)해야 한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의 영원한 불제자가 되겠습니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제가 지금까지 세세연연 이어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어온 모든 업장을

진심으로 참회하옵나이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저는 지금까지 불자(佛子)로서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옵고

불법(佛法)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승가(僧家)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점을 진심으로 참회하옵나이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앞으로는 부처님을 여법하게 잘 모시고,  불법을 여법하게 수행하고

승가를 여법하게 수호하며 서민들을 잘 보호하고 중생들과 더불어

부처님의 불국정토를 여법하게 만들어나갈 것을 참회하옵나이다.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아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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