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페셜 (1999.10.23)에 「1,300 여년전 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시체는 다리 밑에 매장 되었다. 사건의 피살자 그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 이었다」라고 방영된 다리는
우리함창 지역의 3번 국도상 윤직사거리와 점촌 시외버스 터미널 사이, 시계표지판 아래에는 작은 교량이 하나 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당나라 소정방 군사를 물리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옛 부터 여기에는 농사용의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함창지방 사투리로 “뙤놈(唐人)”을 쓸어 없앤 곳이라 하여 “뙤다리 또는 띄다리(唐橋)”라 부르고, 김유신(金庾信)장군이 당군을 쓸어 묻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三國遺事1卷-1紀異-太宗春秋公-13 에 의하면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 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 라고...
신라에 온 당나라는 663년엔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도둑으로 격하(格下)시키고, 신라의 국호도 계림도독부로 고치는 큰 잘못을 범한다. 이에 격분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은 왕년엔 우군(友軍)이었으나, 적군으로 돌변한 당나라 소정방군과 상주 관내의 당교(唐橋)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어 당나라군을 격퇴시킨다. 당교의 개울은 적군의 피로 물들었고, 야트막한 산은 적군의 시체로 덮였다고 전한다.
당교란 순수한 우리말로는 뙤다리다. 되다리가 경음화 현상의 덕분으로 뙤다리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는 전형적인 중국의 외교수법인데,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없애고,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했으니 되놈은 역시 되놈일 뿐이다. 국가 간엔 절대적인 원수도, 항구적인 우방도 없음은, 현대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깊이 깨달아야 할 큰 교훈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왜군은 중요한 거점인 이곳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도 전세를 만회하고자 이곳 탈환에 심혈을 경주하였으며 그 가운데 큰 사례는 창의군 선봉장인 李軸(이축:1,565~1,647년,1592년 황령에서 의병을 일으킴)의 공격과 향병들의 항쟁으로 당교는 우리측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묻어 있는 당교가 도로확․포장 사업으로 사라졌으므로 그 유래를 밝히고자 여기에 작은 비가 하나 세워져 있으니(2008년) 상주인의 긍지를 고취 하고 산 교육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당교에 관하여 꾀 큰 규모의 비는 현재 문경시청사 전정에 서 있다는 것이다. 뒷면의 글을 모두 읽어 보면
“우리고장에 있는 찬란한 호국의 명소이건만 지금은 잊혀진 다리가 당교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라고 표기를 하고 점촌시민은 그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고,
그러나 당교의 위치는 현재도 엄연히 상주 인것을.....
물론 문경시청사가 소재하는 지역도 1914년 이전까지는 함창군 지역이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 하리오.
위에서 본바와 같이 함창은 삼국시대, 고려시대(홍건적을 물리침), 임진왜란, 6.25 전쟁(육군 2군단 창설지)등 국난을 피하여 본적이 거의 없는 군사적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리라.
첫댓글 뙤다리에 그런사연이 있었네요 늘 궁금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