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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 All sailing ships rely on having their masts and sails in positions that give them a balanced and evenly weighted push from the wind.
모든 범선은 풍압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균형이 맞춰진 마스트와 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Bomb ketches are not handy sailing vessels, thanks to their compromised rigging and the weight of the mortar and its mounting.
밤케치는 다루기 쉬운 범선은 아니었습니다만 그것은 박격포의 무게와 사격을 위해
타협한 결과 였습니다.
The design needs to keep the forward portion of the ship clear for firing the mortar.
박격포를 사격하기 위해서는 함 의 선수 부분에 사격을 방해하는 구조물이 있어선 안됐습니다.
\n\nThe strength of a bomb is in its mortar.
박격포는 강력한 포탄을 발사 할 수 있었습니다.
This can throw an explosive shell high into the air to plunge down on enemies. The fact that the shell is explosive rather than solid adds to its deadly qualities: men and structures are equally shredded by the arrival of a shell.
박격포는 폭발탄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려 지상의 적을 향해 떨어졌습니다.
폭발탄은 일반 포탄에 비해 더욱 치명적이었는데 일단 포탄이 떨어질 경우 인마와 구조물
은 모두 똑같이 산산 조각나기 마련이었습니다.
\n\nDuty aboard a “bomb” was not an enviable posting, and there was a good reason why bomb ketches were named after volcanoes, fire-gods or fearsome ideas.
유독 이 배에만 “bomb” 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불공평 할 수도 있지만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에서 밤케치 는 이후에 화산, 불의신 이나 기타등등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리워
졌습니다.
They had a nasty tendency to explode, thanks to the shells that they carried; fire aboard a mortar was far more dangerous than aboard any other type of sailing ship, as the ammunition as well as the propellant powder could go up! Despite this, all navies found them a useful ship to have, and the original French design was soon copied by all the sea-going European powers.
그 함들은 적재된 포탄들에 의해 종종 폭발하는 고약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박격포가 발사되고 있는 함은 그 어떤 범선보다 위험했는데 이 포탄에 들어있는 장약은
배를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들의 해군에서는
그 함선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프랑스군이 최초로 고안해낸 이 배는 곧 유럽
의 열강 각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2번
총기병들은 마치 야수와 같이 전장에서 적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백병전에 매우 우수한 능력을 지녔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잘 훈련된 정예보병들이 이룬 사각방진이었습니다.
이 방진은 천천히 기동하는 총기병들에게는 무척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중기병이었던 총기병들은 적 보병을 추격하는것 보다는 적의 경기병들
을 상대하는데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많은 왕립군단들은 해체
되었고 프랑스 총기병들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을 보전하고 총기병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de Pradel 백작 대령에게 법률적인
존립허가를 탄원하였습니다. 결국 투표 끝에 프랑스의 신생 기병대 창설이 가결 되었고
총기병들은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척탄기병이라 불리워졌고
금빛투구대신에 높은 길다란 곰가죽 모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3번
중기병들의 주요 목표는 적대열에 대한 충격 분쇄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근위기병대들은 그들의 속도와 중량을 이용해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의 횡대를
돌파하는 것 이 주 임무였습니다. 단, 그들은 파성추 처럼 쓰인것은 아니며 주로 근거리
에서 밀집대형을 형성한 적진을 돌파하여 혼란을 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사각
방진을 형성한 정예보병대와 맞딱뜨렸을 경우 맹목적인 돌격은 아주 큰 손실을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윌리엄 켄트에 의해 1755년 처음시작된 근위기병 퍼레이
드는 휘황찬란한 부대들의 행진으로 유명하며 오늘날까지 지속 되고 있습니다.
근위기병대는 근위용기병과 일반 근위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현재 까지도
영국군의 특색있는 부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들은
말 보다는 기갑차량을 이용합니다.
4번
전진연대 혹은 전열대대는 육군의 주력을 차지합니다. 그들은 주로 전열을 형성하여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열을 이뤄 배치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기병돌격이 있을 경우 사각방진을 이루는 것이 방어에 유리했습니다.
그들의 힘은 밀집대형을 이뤘을때 화력의 집중과 백병전에서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
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형은 적의 포병과 유격병들에게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사들은 전장식 활강 머스켓 총을 장비하였으며 이 머스켓 총에는 사람의
엄지손톱 만한 납탄을 장전하였습니다. 이 머스켓 총은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에 오로지
200보 부근에서 사격을 해야 효과적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대개 일제사격을 통해 명중
률을 높이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한 단위부대 전체가 동시에 장전을 하는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같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영국군은 소대사격
이라고 하는 완벽한 지속사격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1개연대는 두 개의 단위부대로 나뉘어 순서대로 사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개 소대가 ( 현대 군 편제의 소대와는 규모가 다름 ) 사격을 개시라는 동안 나머지 한 개 소대는 장전을 했습니다.
5번
만일 어떤 장군이 진정으로 지휘에 소질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휘하의 장병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장군은 “잘 먹이고 잘 지휘하고 잘 죽여라” 라는 17세기의 군사금언 만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당시 장군이 자신의 휘하부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장군과 그의 호위대들은 종종 전투 중 적진의 균열된 곳이나 결정적인 부분에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헛된 일이었습니다. 장군은 전투 요원이 아닙니다. 장군의 임무는 부대를 지휘하는것
이지 적의 피로 그의 검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Michelangelo-Colli Alessandro Marchini 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이끄는 야전사령관 이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에 대한 제한적인 승리를 반대하였습니다. 1796년 첫 전역에서 그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던 군사 전략의 천재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의 불운 이었습니다.
Colli는 사르데냐군에 대한 책임이 있었지만 Beaulieu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주력과 깨끗하게 단절되었습니다.
그는 이후에 교황령의 군대를 이끌기도 했지만 결국 큰 군사적 성공 없이 또 다른
오스트리아 지휘관 Karl Mack von Leiberich이 이끄는 나폴리 군대에 배속되게 됩니다.
Colli는 결국 플로렌스 지방에서 오스트리아 대사로 생을 마쳤습니다.
6번
만일 어떤 장군이 진정으로 지휘에 소질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휘하의 장병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장군은 “잘 먹이고 잘 지휘하고 잘 죽여라” 라는 17세기의 군사금언 만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당시 장군이 자신의 휘하부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장군과 그의 호위대들은 종종 전투 중 적진의 균열된 곳이나 결정적인 부분에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헛된 일이었습니다. 장군은 전투 요원이 아닙니다.
장군의 임무는 부대를 지휘하는 것이지 적의 피로 그의 검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트만 장군들의 경우 그 휘하 장병들의 복지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신경을
쓰느라 온전히 지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약점이 드러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상관없이 제거 되었는데 이는 술탄 이나 술탄 의 광신적 친위대였던 예니체리에 의해
수행되곤 했습니다. 예니체리들은 그들의 특권이나 특전 만큼이나 그들의 국가와 명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큰 성공을 이룬 장군이나 예니체리의 권력에 대해 도전
을 했던 장군들은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7번
만일 어떤 장군이 진정으로 지휘에 소질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휘하의 장병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장군은 “잘 먹이고 잘 지휘하고 잘 죽여라” 라는 17세기의 군사금언 만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당시 장군이 자신의 휘하부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장군과 그의 호위대들은 종종 전투 중 적진의 균열된 곳이나 결정적인 부분에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헛된 일이었습니다. 장군은 전투 요원이 아닙니다. 장군의 임무는 부대를 지휘하는 것 이지 적의 피로 그의 검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Ahmed al-Jazzars 는 오트만의 파샤 혹은 장군이었습니다. 터키의 영토였던 보스니아에서 출생 했습니다. 그는 1799년 나폴레옹의 에이크
포위당시 도시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덕에 서구 역사가들에게 매우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웅적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무척
잔인한 통치자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잔인한 통치수단이 합법적으로 용인되던 시기에
조차 잔인한 통치자 였습니다. 그는 직접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의 통치하에서는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즉각적으로 처벌이 시행되곤 했습니다.
그는 1804년에 사망했는데 에이커가 대대적으로 확장 될 때 그를 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나폴레옹의 시리아 전역 초기 성공적으로 나폴레옹을 막는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8번
만일 어떤 장군이 진정으로 지휘에 소질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휘하의 장병들을 고무 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장군은 “잘 먹이고 잘 지휘하고 잘 죽여라” 라는 17세기의 군사금언 만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당시 장군이 자신의 휘하부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장군과 그의 호위대들은 종종 전투 중 적진의 균열된 곳이나 결정적인 부분에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헛된 일이었습니다. 장군은 전투 요원이 아닙니다. 장군의 임무는 부대를 지휘하는 것 이지 적의 피로 그의 검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Louis Aloy Prince de Hohenlohe-Waldenburg-Bartenstein 장군은 주목할 만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팔라틴 경의 부대에서 복무했었고 이후 그의 아버지의 영지였던 호헨홀레- 바텐슈타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결국에는 나폴레옹의 몰락이후 프랑스군에서 복무 했습니다.
그는 혁명이후 숙청당했던 프랑스 왕자의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무척 모험적이었다고 밖에 묘사할수 없는 경력을 가진 그는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소장이 되었고 이후
갈리시아 총독겸 오스트리아군 중장으로 승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부친의 영지를 미끼로 프랑스의 괴뢰국가였던 라인연방군에서 복무 하도록 그를 매수 했지만
그는 나폴레옹의 이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부르봉 왕가의 복권이후 프랑스군으로 복무해서 프랑스군의 원수를 역임한뒤 죽었습니다.
9번
콘노트 레인저는 아일랜드 전열보병연대 로서 약간 거칠긴 했지만 전장에서 용맹스러운
정예부대 였습니다. 적진에 대한 착검 돌격이나 질서정연한 일제사격에서도 그들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전열보병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포병과 유격병들의 저격에 취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재빨리 사각방진을 만들어
기병돌격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1793년에 창설된 콘노트 레인저는 웰링턴 휘하의 부대
중 최정예부대 였으며,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 투입되어 그들의 차별화된 우수성을 증명
하였습니다. 그들을 지휘했던 픽턴 장군은 그들을 약탈이나 일삼는 어중이 떠중이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출신지나 종교에서 기인한 모욕에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아주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1810년 부사코
전투에서 웰링턴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웰링턴 생애에 있어서 결코 보지 못했던 가장 저돌적인 돌격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픽턴 장군의 명령 없이 수행되었던 것입니다!
10번
패주중인 부대는 종종 다른 부대들의 동요를 일으킵니다. 공황 상태는 아주 금새 대열사이
로 확산되기 마련입니다. 병사들이 동요할 때 지휘관의 존재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을수
있고 그들의 열성을 배가시킬 수 있습니다. 이토록 지휘관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적들
의 목표가 되기 쉽기 때문에 예민한 장군들은 휘하의 장병중 가장 우수한 자원들을 선발
하여 그의 경호부대를 구성합니다. 이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그들의 장군들을 보호하며
그들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장군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은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코앞까지 돌격해온 경험을 한뒤에 200명으로 구성된
그의 경호부대를 창설 합니다. 이 경호부대가 이후 제국근위기병대의 모태가 되게 되는데
자연히 그들은 나폴레옹의 총애를 입습니다. 여전히 병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만이
황제의 경호부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수많은 전투의 와중에서 그들은 그들의 황제를 경호하는데
뛰어난 자질과 용맹을 갖추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11번
예거는 적들의 전술에 맞춰 그때그때 느슨한 대열을 이뤄 저격을 하거나 혹은 전열을 구성하여 일제사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전투경험과 우수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예거들의 이러한 유연성은 부대의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유격부대들 처럼 정밀한 사격을 할 수 없었고 일제사격을 할때도 적 보병대열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방진대형을 구성하는데 서툴렀습니다. 다시말해 그들은 기병돌격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1804-1813년 당시 러시아는 두 곳의 전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한곳은 나폴레옹을 막기 위한 것 이었고 다른 한 곳은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을 막기위한 것
이었습니다. Russo-Persian 전쟁은 두 지역민들이 통일을 주장하며 발발 하였습니다.
러시아는 그들의 제국을 확장시키려 하였고 페르시아는 그에 대항하여 그들의 영토를 지키
기 위해 맞섰습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부대를 페르시아 전역에 전게 시킬 수 없었고, 그 대신 그들은 우수한 기술과
작전으로 러시아군의 우위를 차지하려 했었습니다.
12번
모든 척탄병들은 그들 스스로가 최정예부대원이라고 생각했고
행군시 대열의 영예로운 자리로 간주되던 맨 오른쪽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전 군에서 가장 키가 크고 용감한 자만이 척탄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큰키와 우수한 체력은 돌격전에서 빛을 발하였으며, 백병전시 척탄병들이 공격의 첨단에 위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기병들의 돌격과 유격대들의 저격에 취약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던 부대였습니다.
역사적으로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이후 프러시아군은 매우 급속한 재정비를 하게되었습니다.
그해 10월 현존하는 6개의 척탄대대는 2개의 척탄연대로 재편성 되었고,
프러시아의 왕은 존중의 의미로 이 두 개의 연대에 각각 반제연합의 황제 이름을 딴 부대 명칭을 하사했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더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시스가 그것이었습니다.
카이저 알렌산더 척탄병연대는 동프러시아의 제1,제2 대대로 구성되었고, 카이저 프란츠 연대는
포메라니안, 서프러시아, 그리고 슐레지안 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13번
모든 경기병들은 전투에 있어서 대담한 돌격을 감행하곤 했습니다.
전원이 능숙한 기수로 구성된 파블로그라드 경기병들은 유격대들을 추적, 섬멸하거나 적의 포병대를 제압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돌격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보병의
방진대형과 혼전에 취약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민첩한 공격과 힛트앤런 전술에 매우 적합
했습니다. 파블로그라드 경기병들은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덕에 불멸의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만 사실 그들의 명성은 톨스토이의 역작이 쓰여지기 이전부터 유명했습니다.
1797년 젊은 그루지아 장교였던 Spiridon Zhevahov는 파블로그라드 경기병들은
지휘하여 나폴레옹군에 대항헤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파블로그라드 경기병들은
나폴레옹의 경호부대였던 제3근위 창기병대를 격파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제 3근위 창기병대를 격파하고 그들의 군기를 탈취함으로서 그 명성을 날렸습니다.
14번
그들은 말을 타고 기동하며 보병대의 맨 앞에서 첨병 역할을 수행 했습니다.
기마예거들은 전장식 활강머스킷으로 무장했지만 일제사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대신 개별적으로 적을 향해 사격했습니다.
이런 정정당당하지 못한 개별 사격은 땅 혹은 그냥 말을 탄 상태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적진에 혼란을 주거나 유격병들을 격퇴하는데 아주 유용
했습니다. 그들은 사격훈련 만을 받았기 때문에 백병전이나 근접전에서 무척 취약했습니다.
Johan Ewald 는 예거군단을 이끄는 헤센지역의 용병대장이자 작가였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당시 병사로 복무했던 자신의 복무기록과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체류했던 지역의
자세한 정보및 요새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문서로 남겼습니다.
서점상의 아들이었던 Ewald는 16세에 그의 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전열을 지휘하는 대위로 승진하였고 이어 예거들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혁명당시 여 러번의 주요 전투를 겪은 후 그는 신분상승을 위해 덴마크군에 입대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중령으로 승진 되었습니다.
15번
발명된지 아주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다우선은 아주 효율적이면서 값싼 운송수단 이었습니다.
다우를 이용한 무역은 아주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우의 승무원들은 약간의 포로 배를 무장하여 해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우는 전함이 아니었고 승조원들은 승리의 영광보다는 생존을 선택했습니다.
무역선이었던 다우는 절대 어떤 전함과도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라틴세일 돛대를 장비한 배는 무조건 싸잡아 다우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동지역의 돛은 일반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이었습니다.
라틴세일은 삼각형 이었고 범선의 마스트 귀퉁이에 설치 되었습니다. 라틴세일로 인해 기동성은 향상되었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는 내구성이 떨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다우는 아랍지역 전역에서
무역과 해적행위에 사용되었습니다. 정직한 사람들과 해적들 모두 다우의 뛰어난 조타성과
안정적이면서도 빠른 속도에 매료 되었던 것입니다.
p.s 수정할 부분 ( 고유명사 ) 있으면 리플달아 주세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15번까지 수고해주세요.
박격포함 -> 밤케치
밤 케쳐 -> 밤케치
카라비너 -> 총기병
수정했습니다~
아, 죄송한데, 밤케치는 엠토용어였고, 나토에서는 박격포함으로 하는거 같더군요...다시 박격포함으로 고치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ㅎㅎ
엠토도 이에 맞춰서 수정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