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서기1503년 연산군 9년에 태어나 1557년 명종 12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조 연산, 중종, 인종, 명종의 4대에 걸친 55년에 대한 그의 생애와 가계의 상세한 기록이 있다. 그가 세상을 뜬지 120여년 뒤인 1678년 숙종4년 당시 광주 목사로 부임한 西河(서하) 李敏敍(이민서 1633∼1688)에 의해 쓰여진 瀟灑公行狀(소쇄공행장)이 그것이다. 특히 1677년 광주목사 재임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옥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을 제향하였다. 소쇄공 양산보의 행장을 실는다.
서석의 응달에 옛적 한 선비가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그이가 소쇄원 선생이다. 선생은 양씨 이름은 산보이며 자는 언진이라 하는데 중종과 명종 시대에 벼슬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직 세상에 폐단을 바로잡고 덕을 세우는데 힘쓴 선비이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의 일이나 그가 남긴 책이나 업적은 남쪽에 사는 사람이면 언제나 외워 읽고 있어서 듣기 싫을 정도이다. 이제 그의 집에 전하여 내려온 문집이나 그가 남긴 언행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을 보니 전에 들은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감개 무량한 심정으로 큰 한숨을 쉬며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양씨의 시조는 제주에서 탄생하였으니 梁(양)·高(고)·夫(부) 세 사람이 한라산에 내려와 한 섬을 셋으로 나누어 살게 된 것이 단군 때의 일이라 한다. 그 후 良(양)을 梁(양)으로 고쳤으며 신라 때 순이라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과거에 급제하여 翰林學士(한림학사)가 되었다가 죽자 耽羅君(탐라군)에 封爵(봉작)되었고 고려 때 峻(준)이라는 사람이 또한 섬에서 나왔는데 이때 상서로운 별이 나타났기에 星主(성주)라 불리었다. 또한 淳(순)과 遵(준)이 계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직문 한서의 벼슬을 지냈는데 淳(순)은 나중에 讚(찬)이라는 賜名(사명)을 받았다. 다음에 碩材(석재)는 전직사서가 되었고 漢賢(한현)은 재능이 있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제)는 判書(판서)로 雲觀事(운관사)였으며 조선 조에 들어와 思渭(사위)가 학문과 행실이 두드러져 儒學敎導(유학교도)가 되었다. 그 뒤로 潑(발)은 그의 증조부이며, 조부는 允信(윤신)인데 두 사람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父親(부친)인 泗源(사원)은 숨은 덕이 많았고 또한 仁(인)·義(의)·禮(예)·智(지)·信(신)·樂(락)의 6행이 뛰어나 고을에서 천거되어 宗簿主簿(종부주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를 蒼巖(창암)이라 하였고 증병조참의 신평인 송복천의 딸이요 헌납 송희경의 증손녀인 송씨와 혼인하여 弘治(홍치) 癸亥(계해) 1503년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단정하고 정직하고 얼굴이 잘 생겼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글의 참뜻을 깨달아 알았고 장성함에 따라 높고 원대한 뜻을 품고 힘써 글공부를 함으로 아버지 蒼巖(창암)이 크게 기뻐하며 사랑하였다. 나이 겨우 열 다섯 되던 해 부친이 靜巖(정암) 趙光祖(조광조) 선생에게 데리고 가서 그 밑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청하자 靜巖(암) 趙(조)선생이 기특하게 여겨 쾌히 승낙하고 소학 책을 주었다. 그 때에 聽松(청송) 成守琛(성수침)·成守琮(성수종) 형제가 같이 입학하였는데 처음 한눈에 존경할만한 벗이라 하여 친근히 지내자 다른 친구들에게도 더욱 존경을 받았다.
2년 후인 己卯(1519)年에 중종이 조광조의 제자들 중에서 합격자를 뽑으려 할 때 選考官(선고관)이 이미 뽑은 급제자가 많으니 오히려 삭제해야 한다고 해서 숫자를 줄이는 바람에 선생의 이름이 삭제되고 말았다. 중종이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며 불러 보시고 위로하면서 종이를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하여 그를 비롯한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겨우 열 일곱에 불과한 때인데 이러한 일을 당하고 보니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 살기를 결심하고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소쇄원이라 이름하고 두문 불출하며 한가로이 살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호도 소쇄옹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수십년간 많은 무리들이 간악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세상이 되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해져 선생은 처음 가졌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행여나 벼슬 같은 것은 꿈에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 숨어 있는 선비를 찾는 중에 누차 벼슬에 청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평안하고 한가롭게 산중 숲 속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고 밝히는 일로 깨끗하고 고요함에 만족하며 30여년간을 시름없이 살았다. 아아 그 한 행실이 높고도 굳세나 가서 돌아오지 아니 하도다.
선생은 원래 덕성이 높은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안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으며 "사람의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또한 수백 마디로 된 孝賦(효부)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 정신과 사상을 가르쳤다. 더욱이 문자에 익숙지 못한 일반 백성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을 새기어 적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렸기 때문에 매우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相國(상국) 宋純(송순) 선생은 그의 內兄이다. 이 글을 보고 "효행에 대한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몸소 행하며 독실히 한 이가 아니면 이를 실천하기는 어렵겠다"하였고 河西(하서) 金厚之(김후지) 선생도 역시 "송순 선생의 말이 맞다"하며 그 글을 차운 하였다.
선생은 평소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말과 행동이 모두 법치과 일치한 생활을 하고 실천하였는데 예를 들면 상사를 당하였을 때나 제사를 드릴 때 오로지 예법에 따라 행했으며 추호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 형제간에는 특별히 우애가 깊었고 종족은 물론 이웃간에도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발벗고 나서서 일을 돌보아 주었다. 선생이 어릴 적 홀로 된 고모가 있었는데 그녀의 품에서 자라다시피 하였다. 그 고모의 상을 당해서 부모의 상을 당한 듯 心喪(심상) 3년을 입고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선생은 평생을 스스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을 기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우리집안은 세세토록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로 이름이 있는 집안인데 내가 선조들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고 땅에 명예를 떨어뜨리고 세속의 깨끗하고 고상한 처신에 이르러 그 이름을 취함을 내가 본받지 못하였다"하였고 또 여러 아들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중 누구도 이름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유명해 지면 곧 한 사람이 반드시 헐뜯을 것이다"하니 하서 김후지 선생이 듣고 지당한 말이라 하였다.
하서와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로서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사돈까지 된 사이인데 늙도록 오가며 서로 만나면 반가워 하며 해가 저무는지 달이 밝는지 모르고 의리에 대하여 그 뿌리부터 더듬어 가며 토론에 열중하였고 때로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노래하였다. 하서가 소쇄원에 오면 문득 두어달 쯤은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같은 때에 勝地로 이름이 나서 임석천 송규암 유미암 이청련 등 여러 사람들이 사모하고 기뻐하며 서로 좋아했는데 석천이 가장 좋아했다. 존재 기대승이 말하기를 "소쇄옹은 겉으로는 매우 부드러운 것 같으나 내심은 강직한 사람이며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다"라고 하였다. 고태헌(경명)도 "내가 어렸을 적에 소쇄옹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면 비린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했으며 정임정(송강)이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매번 소쇄옹을 대할 때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 속이 맑고 상쾌하게 하며 또한 그것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선생의 학문은 小學(소학)을 굳게 믿고 모든 학문의 기초로 삼았다. 다음으로 사서오경을 항상 책상 옆에 두고 공부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역학을 깊이 연구하여 천지만물의 강유와 소장과 왕래 등 그 발전과정을 깊이 있게 새겼다. 하서가 말하기를 "소쇄옹은 정밀히 생각하며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물고기와 솔개같이 치솟음 같다"하니 믿을만 하다. 대저 선생의 올바른 행위는 모두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한 고을에 퍼졌고 집안의 모든 범절과 법도는 스스로가 먼저 지키고 다음에 자손들에게 유전되고 다음에 백성들까지 따르게 된 것이다.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솔선수범 하여야 한다. 선비로서, 그 자식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는 항상 얼굴 빛을 부드럽게 유지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노여움이나 욕하는 경우가 없었고 물건에 대한 욕심도 없이 초연하였으니 백세의 뒤에까지 표본이 되어 그를 아는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자세는 늠름하였으며 그의 앞에는 성곽과 길이 있었고, 仲弓(중궁)의 덕행을 가졌으니 어찌 大雅(대아)에 일컫는 탁이불군자가 아니겠는가. 丁巳(정사 1557)년 3월 소쇄원의 正堂(정당)에서 명을 마치니 향년 55세였다.
?굳萱? 현감 金珝(김후)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나 선생의 나이 25세에 상처를 하였는바 일가 친척들이 재취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옛적에 증자도 아들 증원이 재취할 것을 권하였으나 내 이미 선조에게 옳은 일을 못했고 문중에도 좋은 일을 못했는데 새삼 재취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며 끝내 재취를 아니했으니 성현도 이러했거늘 내게는 세 아들이 있어 대를 이을 수 있고 제자도 모실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장가를 들겠느냐"하며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장남 자홍은 문장과 행실이 뛰어나 희망을 걸었는데 일찍 죽고 둘째아들 자징은 호를 고암이라 했으며 덕행이 뛰어나니 고을에서 천거되어 현감벼슬을 했고 셋째아들 자정은 호를 지암이라 하며 학문과 행실이 비범하여 교도의 벼슬을 했다. 딸 하나는 노수란에게 시집 보내고 아들 자호는 참봉이며 다음 딸은 우후 정붕의 아내가 되었다.
큰 아들 자홍은 현령인 최대윤의 딸과 결혼하여 천리 천심 형제를 두었고 둘째아들 자징은 처음 하서 김인후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어서 생원 김송명의 딸을 재취로 맞아 3남3녀를 낳았는데 천경과 천회는 재능과 기예가 뛰어났으나 신묘사화에 모두 죽었다. 천운은 진사로 주부가 되었고 장녀는 오급에게 시집 갔으나 난리를 만나 욕뵈임을 피해 물에 빠져 죽었고 차녀는 고경명의 진중에서 순직한 안영에게 시집 갔으며 다음 딸은 서호갑에게 시집갔었다. 셋째아들 자정은 장가들어 천건 천주 형제를 두었으며 여식은 생원 홍경복에게 시집 보내어 딸을 낳았고 자호는 김윤충의 딸과 혼인하여 생원 천지와 진사 천장을 낳았다. 세월이 오래되어 다른 자손도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내가 호남지방을 왕래한지 이미 오래이지만 시골 노인들이 선비의 품행을 즐겨 노래할 사람들은 많으나 그 가운데 선생에 비길 만큼 덕이 높고 고결한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으니 이 어찌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위와 같이 선생의 평생의 행적을 적는다. 후세의 여러분은 소쇄공의 행적을 널리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