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호 위클리포커스] 축구 인생 44년 만의 첫 메이저 트로피, 레드넵 감독
기사입력 2008-05-20 17:39 |최종수정2008-05-20 17:40
영국 남부의 해안 도시 본머스(Bournemouth)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도시의 규모는 런던, 맨체스터, 버밍험 등의 주요 도시보다 훨씬 작지만 수 많은 랭귀지 스쿨이 존재하는 까닭에 사시사철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레드넵 감독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필자는 지금부터 본머스에 있는 축구를 좋아하는 한인 유학생들에게 2007-08컵 우승 감독을 만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려 한다. 물론 약간의 운은 필요하다.
시즌 중이라면 경기가 끝난 일요일이나 월요일을 선택하는 것이 좋지만, 당분간은 아무 때나 상관 없을 듯 하다. 우선 본머스 타운센터에서 10여분을 이동해 ‘본머스 인터내셔널 센터’가 위치한 해변까지 간다. 해변에 도착하면 바다를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풀(Poole)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30~40여 분을 걷다 보면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자들이 산다는 ‘샌드뱅크’라는 지역에 도달하는데, 거기서 몇 시간 서성이다 보면 리트리버 종류의 큰 개 두 마리와 함께 해변을 어슬렁대는 졸린 표정의 아저씨와 마주칠 수 있다. 그 사람이 바로 2007-08 잉글리쉬 FA컵의 우승, 감독 포츠머스 FC의 수장 해리 레드냅(61)이다.
2007년 5월 17일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스타디움에서 FA컵 트로피를 두 손 높이 치켜든 레드냅 감독은 우승 축하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내와 함께 본머스의 집으로 달려가 개들이 잘 있나 확인하고, 동네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저녁을 들고 싶소.”
축구 인생 44년 만의 첫 메이저 트로피
해리 레드냅은 영국 축구계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하나로 꼽히지만, 명성과는 달리 그의 44년 축구 인생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레드냅은 1964년 17세의 나이로 웨스트햄에서 미드필더 겸 윙어로 데뷔해 1982년 본머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18년을 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디비전 1(현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한 시간은 5년 정도였고 많은 시간을 하위리그에서 보냈다. 1976년부터 79년까지는 북미리그 시애틀 사운더스에서 선수 겸 코치로 뛰었고, 1982년 본머스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5년 감독 생활의 시작도 디비전2 (3부리그) 본머스였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본머스를 이끌며 선수 조련과 발굴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94년 친정 팀인 웨스트햄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웨스트햄 시절에도 레드냅은 딱히 드러날 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웨스트햄의 성적은 늘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최고로 높이 올랐던 것이 5위, 가장 인상적인 업적은 1999년의 인터토토컵 우승이었다.
2002년 포츠머스로 자리를 옮겨 곧바로 디비전1(현 챔피언십) 우승하기도 했지만, FA컵이라는 메이저 트로피를 손에 쥔 것은 2008년 5월, 그가 축구계에 발을 담근 지 44년 만의 일이었다.
“대표팀은 내가 다 가르쳤지”
레드냅이 명장 반열에 오른 것은 리그 성적보다는 특급 선수들의 육성 때문이었다.
아들 제이미 레드냅(전 리버풀, 토트넘)은 그렇다 쳐도, 레드냅이 웨스트햄 아카데미를 통해 발굴하고 가르친 조 콜, 프랭크 람파드(이상 첼시), 리오 퍼디낸드, 마이클 캐릭(이상 맨유), 저메인 데포(포츠머스) 등은 하나 같이 특급 선수로 성장했다.
레드냅 감독은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보며 가끔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한다.
“글렌 존슨, 데이비드 제임스, 피터 크라우치까지 합치면, 대표팀 주전의 대부분은 내가 가르쳤던 애들이구먼”
저런 엄청난 재능들을 키워낸 낸 것이 축구 보는 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레드냅의 주위 사람들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리버풀의 화려한 시절을 이끌었던 제이미 레드냅(은퇴)은 축구전문 잡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포츠머스 선수들과 레드넵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아버지만큼 사람을 잘 다루는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죠. 그렇기에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훌륭하게 감독직을 수행하시나 봅니다.”
포츠머스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은완코 카누(32) 역시 레드냅 감독의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레드냅 감독은 좀 특별한 사람입니다. 선수들 모두가 그를 위해 뛰고 싶어하죠. 내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 킹(king), 피치에 나가 갖고 있는 능력을 보여주게. 자네는 최고니까.’ 이런 말을 듣고 나면 감독님을 위해 꼭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털털한 욕쟁이 감독 “저 XX는 당연히 후보요!”
영국의 많은 축구 팬들은 유명 감독이라고 무게를 잡지 않는 레드냅의 털털한 성격을 좋아한다.
별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지만, 레드냅과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친한 친구 사이로 알려져있다. 레드냅과 퍼거슨은 맞대결이 끝날 때마다 서로의 집을 방문해 술잔을 기울여왔다고 한다.
레드냅 감독은 자신은 맨체스터에서 600파운드가 넘는(약 120만원) 와인을 얻어 마신다면서, 퍼거슨이 포츠머스에 왔을 때는 대형 할인마트에서 산 6파운드(1만 2천원)짜리 술을 대접했다고 밝혔다. 포츠머스 팬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글래스고 부둣가와 런던의 가난한 동네인 이스트엔드에서 성장한 두 감독은 가식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다. 방송 중에도 거침 없이 비속어와 욕설을 내뱉는 행동은 방송국에는 곤욕을, 팬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한다.
레드냅 감독은 욕설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를 갖고 있다. 2003년의 어느 날 레드냅 감독은 포츠머스의 연습 구장인 이스트리에서 다가오는 울버햄튼전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관련 동영상 http://kr.youtube.com/watch?v=zRZTna7tRHk)
이 때 포츠머스의 한 선수가 찬 공이 날아와 레드냅 감독의 머리를 강타했고, 레드냅 감독은 카메라 앞에서 곧장 뒤돌아서 "지금 공을 어디다 차!”라며 고함을 쳤다. 범인으로 지목된 선수가 “죄송합니다. 잘 못 찼습니다”라고 사과했지만 그는 “뭐? 골대에 공을 안 넣고 날 맞춰? 빌어먹을 뇌가 있기는 한 거냐?"라며 화를 냈다.
이후 다시 인터뷰에 응한 레드냅 감독은 화가 삭혀지지 않는 듯 얼굴을 실룩거리며 "울브즈전은 빅게임이지만, 저 XX는 당연히 후보요!"라고 말해 많은 팬들의 폭소를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