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을 지나는 법, 혹은 사막에서 사는 법
-도종환·허형만·공광규·김복연·홍윤숙·이지담의 시
1. 생의 모든 길이 사막의 모랫길이었는지 몰라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자본문명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다. 그 결과 인류의 삶은 풍요롭고 윤택하고 편리해졌지만 삶의 본질에 대한 회의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그것은 자본문명과 인간의 운명이 철저하게 자연의 원리에서 일탈해 가는 까닭이다. 이미 문명이 끊임없이 가속도를 더해가며 자연을 파괴하는 여정에 있듯, 인간 역시 여기에 동승해 있다. 인간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 더 이상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본문명의 상징인 도시는 어떤 곳인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풍요롭고 윤택하고 편리한 공간이다. 기술문명의 차원에서 볼 때, 문명 자체는 자연 극복의 과정에서 출발했으나 극복과정이란 다름아닌 자연의 파괴와 변형을 기반으로 한다. 도시건설이란 이런 파괴와 변형을 당연히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시의 발전은 인공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다. 자연에 조작을 가하기도 하고 이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기술문명의 집합인 도시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도시는 인간 욕망의 혓바닥인 셈이다. 그 낼름거리는 혓바닥으로 자연과 인간 자신을 입맛 다시는 것이다. 다시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인은 이를 우울하게 노래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있는 이곳은 고층건물의 창가가 아니라
사막의 가장자리인지 몰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포장도로가 아니라
모래벌판인지 몰라
늘 땀으로 끈적끈적 해지는 몸
지치고 목이 마르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고
숨쉬기가 이렇게 갑갑한 걸 보면
아직도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틀림없어
틈만 나면 나무 그늘에 기대어 쉬고 싶고
차고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해지고
열사 이래 지고가야 하는 짐을
어디든 내려놓고 싶어지는 걸 보면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간절하고
가끔씩 뜨거운 허공에 거꾸로 뜬 오아시스를
보기도 하고 반드시 맑은 물과 충분한 여유와
숲과 마당과 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는 걸 보면
오늘도 나는 돌아가는 길에 약탈자나
무뢰배를 만날까봐 두려워하지 않는가
한 손에 경전 한 손에 적의를 품고 조심조심
공포와 불안과 경계심을 발 밑에 감추고 가지 않는가
도처에 원수와 선인장 가시와 독을 품은 것들과
순식간에 길을 지워버리는
매몰찬 모래바람이 매복해 있으므로
늘 오늘도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내가 있는 이곳은 사막의 한복판인지 몰라
어쩌면 여기까지 걸어온 내 생의 모든 길이
사막의 모랫길이었는지 몰라
-도종환, 「사막」(《열린시학》, 2005 겨울)
오늘의 시인들이 자본주의 현실을 사막으로 인식하며 고뇌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도종환의 「사막」은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도시를 “사막의 가장 자리인지도” 모르겠다는 회의를 하고 있다. 물론 실제의 사막은 아니지만 `불모의 땅' `절망의 공간'인 사막과 다름없는 곳이 자본문명으로 이룩한 도시이기에 도시를 사막에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포장도로가 아니라/모래 벌판”일 수도 있고, “지치고 목이 마르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고/숨쉬기가 이렇게 갑갑한 걸 보면/아직도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자는 “틈만 나면 나무 그늘에 기대어 쉬고 싶고/차고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해지고/열사 이래 지고 가야 하는 짐을/어디든 내려놓고 싶어지는 걸 보면” 여기가 사막이 분명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막은 불모의 땅이며 절망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가끔씩 뜨거운 허공에 거꾸로 뜬 오아시스를/보기도 하”지만 사막 어딘가에는 반드시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오아시스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절망의 상태이다. 화자가 “숲과 마당과 별이 있는 곳으로/돌아가리라 다짐하는” 이유는 그곳이 그늘이 있고 시원한 물이 있는 편안한 공간이기 때문이며, “약탈자나/무뢰배를 만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아늑한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현실의 적나라한 현장인 도시는 “한 손에 경전 한 손에 적의를 품고 조심조심/공포와 불안과 경계심을 발 밑에 감추고 가”야 하는 사막같은 곳이다. 뿐만아니라 “도처에 원수나 선인장 가시와 독을 품은 것들과/순식간에 길을 지워버리는/매몰찬 모래바람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만큼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도시문명은 위태롭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화자는 그런 도시적 삶을 살아온 “내 생의 모든 길”조차 “사막의 모랫길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모습과 더불어 성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나무들이 사막을 건너는 법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우리의 현실을 `사막'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현실을 각박하고 우울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사막 같은 불모의 현실에서 삼백 오십 세를 살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경이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셨다
수많은 사리들을 거느리시며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시지만
원래 사람이 매긴 나이란 게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는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넓으신 그늘에 쉬다가
어찌나 한기가 드는지 벌떡 일어나
두 손 모으고 우듬지가 보일 때까지 우러렀다
한사코 햇살 탓만은 아닐 터
휘추리와 애채 사이를 포롱포롱 건너다니는
멧새의 깜찍한 발가락이 은비늘처럼 번득였다
그때였다 수많은 사리들은 서로 몸을 비벼댔고
고요한 파동은 서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백운면 애련리에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
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 한 분 계셨다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허형만, 「사리를 거느리시는 분」(《서정시학》, 2005 겨울)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한들 백년을 넘기기 어렵다. 인간은 늙어갈수록 병들고 서서히 죽어간다. 그러나 나무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수백 년을 살 수 있다. 또한 나무는 연륜이 깊을수록 그 품이 넓어지고 큰 그늘을 만들어 내어 하찮은 멧새는 물론 하늘까지 껴안는다. “백운면 애련리에/세수 삼백 오십 세가 되셨다는/느티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계”시지만 인간의 눈에는 그 존재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세수 삼백 오십 세와는 무관한/수많은 사리를 거느리신 분”으로 보이며, “세상의 발자국도 가는 체로 걸러내시”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 작품은 `사람'과 `느티나무'가 대비됨으로써 인간의 어리석음과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수많은 사리를 거느”린 범상치 않은 느티나무의 존재를 드러낸다. 느티나무에 비해 한 치 앞을 볼줄 모르는 인간의 근시안과 어리석음에 대해 성찰하고 인간의 존재 방식을 깨닫게 한다. 다음 작품에서는 늙은 미루나무를 통해 인간의 존재방식을 깨우친다.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서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의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엉엉 울거나 한 여름 사춘기처럼
잎새를 하염없이 반짝반짝 뒤집었지
미역 감던 아이들이 그늘에 와서 놀고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들을 기대어 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 것에도 못쓴다며 무시당했지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갔던 나무
아주 오래 오래 살다 천명을 받고 폭풍우 치던 한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공광규, 「미루나무」(《시와사람》, 2005 겨울)
공광규의 「미루나무」에는 작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앞 냇둑에 늙은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재질이 물러서 재목이나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핀잔을 받는다. 그러나 들판에서 차가운 북풍에 울거나 잎새를 하염없이 뒤집었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놀거나 시원하게 낮잠 잘 수 있게 했다. 아무 것에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무시받아서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갔던 나무는 오래 살다가 폭풍우와 맞서다가 장쾌하게 몸을 꺾는다. 이 작품에서 미루나무는 재질이 약하지만 그것이 꼭 자신을 손해 보게 한 것은 아니다. 덕분에 오래 살게 되고 사람들에게 그늘과 안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풍우치던 여름 바람과 맞서 장쾌하게 몸을 꺾는다. 비굴하지 않게 살다가 쓰러진 미루나무 이야기의 배면에는 또다른 존재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있다. 미루나무를 닮아 착하기만 한 `나'의 모습이 그것이다. 나는 “너무 물러서 재목으로” 쓸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기도 하고 사립문 밖에서 혼자 외롭다. 미루나무를 닮은, 착하지만 나약한 나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나'는 미루나무를 통해 사막 같은 “차가운 북풍”이 부는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터득한다.
김복연의 「문」에서도 나무를 통해 “험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을 수 있다.
제 몸에 문 하나 내고 서 있는 저 나무는
참 험한 세월을 살았다
수액 뽑아낸 군데군데 칼집 자국
그 중에서 제일 깊게 넓게 패인 상처가
문이 되었다 안과 밖의 경계
용서와 소통의 꼭지점
그러나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던 상처
잘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하던
분노와 절망 왜 없었을까
내어주는 삶이 그렇듯 바닥이 보일 때까지
그래서 문득 더 환해지는 것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더 내어 줄 것인가
끙, 문 닫고 들어가 골몰하는 듯
가끔 바람이나 별처럼
똑똑, 계십니까
안부 묻고 싶다
-김복연, 「문」(《애지》, 2005 겨울)
김복연의 「문」은 “안과 밖의 경계”인 `상처'를 통해 어떻게 화해하고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고로쇠나무로 짐작이 되는 나무는 타자에 의해 자신의 수액을 뽑아낸다. 그러나 나무에게는 칼집자국의 성처가 남게되고 그 상처는 “잘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하”는 분노와 절망이 된다. 그러나 “내어주는 삶이 그렇듯 바닥이 보일 때까지” 내어주다보니 자신이 “문득 더 환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상처는 “용서와 소통의 꼭지점”이 되기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나무의 상처는 안과 밖을 소통할 수 있는 상징, 문이 된다. 그래서 나무는 “무엇을 더 내어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타자에게 “똑똑, 계십니까/안부 묻고 싶”은 가까운 이웃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나무들, 즉 허형만의 애련리의 느티나무, 공광규의 미루나무, 김복연의 고로쇠나무는 인간에게 사막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 또는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세 그루의 나무를 자본주의 논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삼백 오십 세의 느티나무는 너무 늙어서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러진 미루나무 또한 재질이 나빠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다 내어주고 더 이상 내 줄 것이 없는 고로쇠나무 또한 아무 짝에 필요없는 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시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가치있는 나무로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모든 만물에 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物活論) 때문이다. 시인은 나무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격체로 바라보고 있다. 아니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물활론에서는 어떤 존재의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다. 바로 그러한 질서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3. 다시,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
나의 아버지는 팔순을 훨씬 넘겼지만 기도할 때마다 무슨 죄를 고백하시는지 중얼중얼 통성기도를 하신다. 당신 나름대로 사막을 건너는 주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문단의 원로인 홍윤숙 시인이 팔순을 훨씬 넘긴 연대에 깨달은 사막에서의 생존방식은 어떤 것일까?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 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
붉은 표지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히고
발 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 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의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스려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着地) 그
아름다운 낙하를…
-홍윤숙, 「落法」(《계간문예》, 2005 겨울)
과일나무가 봄에 싹을 틔워 열매를 맺기까지를 `오르기'라고 한다면 이후에 과일이 땅에 떨어지는 과정은 `내려가기' 또는 `떨어지기'일 것이다. 다시말해 세상 모든 것은 오르막이 있고 이후에 반드시 내리막(떨어지기)이 있게 마련이다. 젊은시절에는 “섣부른 혈기 하나로/오르는 일에만 골몰하”였지만 화자는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붉은 표지판”이 보이는 석양 무렵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화자는 “세상의 진 빚과 죄로/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추스려 이마에 얹고/남은 한 발 허공에 진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화자는 떨어질 일밖에 없다. 어떻게 떨어질 것인가가 문제이다. 외발 아래에는 아득한 허공인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추락하고 말 것이다.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바람에 섞이”어 향기롭게 허공으로 사라지는데, 화자는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를 잘 마무리해 “아름다운 낙하”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화자는 “일찍이 낙법을 배워둘 것을”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아름다운 후회를 하고 있다.
이와 반면 젊은 신인 이지담 시인은 「변신」을 통해 일찌감치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있다.
한때 바다였다는 기억 버려야겠지
제복과 구두 다 벗어두고
맨발로 걸어 나올 때 무언가 결정해야 했어
불순하거나 나태한 생각들
뒤척이며, 각을 세우며
버리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야겠지
소금 이전에 바다였다는 것이
때론 안과 밖을 분명히 하기도 하겠지
구르는 돌에겐 이끼 빌붙지 않듯
슬픔을 즐겨 마시는
포장마차의 등불이 될지라도
돌아갈 곳 없이
시멘트 바닥에 등 붙이고 떨고 있지는 말아야지
야적의 밤을 지새다
짠맛에 이르러 이미 소금이 되었더라도
내가 바다였다는 오만, 햇살 속에 벗어 던져야지
거품 같은 삶, 한 겹 뜯어내고
속까지 간 잘 밴
묵은 김치 한 사발로 누워 세상 바라본다
숨가쁘게 서둘러 걸어가고 있는 저것들을!
-이지담, 「변신」(《시와사상》, 2005 겨울)
화자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본다. 짠맛이 바다에 흘러들어 햇살 속에서 `변신'의 과정을 거쳐 빛나는 결정체가 된 후 “한때 바다였다는 기억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복'과 `구두' 등으로 상징되는 구속을 버리고 `맨발'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뒤척이며, 각을 세우며/버리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야겠”다는 자기성찰을 통해 소금은 바다였다는 오만을 버릴 수 있다. 바다는 지상에서 흘러드는 모든 것을 받아주고 껴안아주는 품이 넉넉한 존재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의 화자는 지금까지 “거품 같은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아니 “야적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슬픔이 변신하여 어둠을 밝히는 포장마차의 등불이 되어 빛나듯이 그 슬픔이 모여 짠맛이 되고 짠맛이 되어 “묵은 김치 한 사발로 누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쯤에 이르렀을 때 화자가 보는 것은 바다처럼 넉넉한 소금의 맛일 것이다. 그런데 화자의 눈에 “숨가쁘게 서둘러 걸어가고 있는 저것들”을 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참으로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