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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편 성씨(姓氏)와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
○ 제1장 성씨
○ 제2장 친족
○ 제3장 과거급제자
▣ 제1장 성씨(姓氏)
○ 제1절 성씨의 유래
○ 제2절 성씨의 특징과 본관
○ 제3절 성씨의 종류
○ 제4절 과천의 성씨
▣ 제1절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에서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자(漢字)문화가 들어 온 이후인 삼국시대부터라 하겠다.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인 원시시대, 고대의 씨족사회 내지 고대 성읍(城邑)국가시대에는 성이라든지 본관(本貫)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시대의 경우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각기 집단을 이루고 살던 혈연공동체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의 그들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각 씨족들은 다른 씨족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각각 명칭만 있을 뿐이었다.【주】1)
그러나 명칭이 삼국시대 이후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비록 『삼국지』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동성(同姓)끼리는 같이 혼인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이것은 당시 사회의 일정한 집단 안에서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곧 중국인의 눈에비친 이러한 기록은 당시 우리의 족내혼(族內婚) 풍속을 보고 그 일정한 집단을 같은 성이라 표현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문화를 수입한 이후에 사용한 것이다. 비록 『삼국사기(三國史記)』니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사서(史書)에, 고구려의 경우 시조 주몽(朱蒙)이 건국하여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 하고,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夫餘)씨, 그리고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3성 전설이 있다고 하여 마치 삼국이 성읍국가시대부터 성을 사용한 듯이 기술되고 있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문화를 수용한 이후, 즉 한자를 사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7세기 이전 건립된 금석문의 내용을 볼 때, 인명의 경우 성을 가진 자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을까.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는 대략 장수왕(長壽王)대인 413∼491년부터 중국으로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를, 백제는 근초고왕(斤肖古王)대인 346∼374년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武王)대인 600년∼640년에는 부여씨라 하였다. 한편, 신라는 진흥왕(眞興王)대부터 김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왕성(王姓) 이외에도 고구려의 경우에는 해(解)·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舟)·마(馬)·손(孫)·창(倉)·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乙支)등의 10여 종이, 백제에는 사(沙)·연(燕)·협(?)·해(解)·진(眞)·목(木) 등 8 대성과 왕(王)·장(張)·수미(首彌)·고이(古爾)·흑치(黑齒) 등 10여 종, 그리고 신라에는 박·석·김의 3성과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등의 10여 종이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성씨의 취득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즉, 다른 여러 집단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종전보다 더욱 자기 씨족내의 혈연공동체의 일체감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성을 최초로 가지는 집단은 왕실이나 귀족과 같이 최상층의 지배집단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관료, 양인, 천민의 순서로 점차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
성씨의 보급을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성씨는 점차 도태되어 계승되지 못하였고, 단지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부터 한자성이 보급되어 갔다. 신라의 경우, 7세기 초에 신라의 종성(宗姓)인 김씨·박씨가 나오게 되며,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景德王)대에 그리고 정씨·손씨·배씨는 통일신라시대에, 마지막으로 최씨는 신라하대에 나타난다. 특히, 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당과 신라 간의 문물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을 계기로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과 6두품(頭品) 계층이 점차 성을 취득하였다. 또한 신라의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왕족이나 귀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결과, 성을 취득한 중앙의 귀족과 관료들이 수도인 경주 뿐만이 아닌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방의 호족(豪族)·촌주(村主) 등의 세력이 중앙집권화가 무너진 틈을 타 자칭성(自稱姓)·모성(冒姓) 등의 방법을 통하여 점차 성씨를 취득하게 된다. 그들의 이같은 성씨 취득은 그들의 지방사회 자체내에서의 성장과 신라의 중앙통치력의 약화라는 정치적인 배경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들 호족과 촌주들은 당시 사회·정치적 변동을 이끄는 주도 세력으로 그 시기의 지방 군·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계층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독자적으로 중앙정부와 버금가는 스스로의 관반(官班)을 형성하고 지역주민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삼국시대 호족 출신 왕건(王建)은 이러한 배경에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가 건국 후 곧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을 실시함과 아울러 군현에 각기 출신지와 거주지의 토성을 분정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성씨체계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 성씨의 보급시기를 고려 초기로 잡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를 들 수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성씨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성씨를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특수층을 제외하고는 성종대(982∼997)에 가서야 비로소 지방 군·현의 양인층에 이르기까지 조금식 성씨가 수용되고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확립되기 시작한 성씨의 체계는 계속하여 분관(分貫), 분파(分派) 등 성의 분화와 함께 발전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성립과 아울러 이 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는데, 이것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관찬(官撰)지리지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성씨조이다. 위의 양 지리지의 각 읍(邑) 성씨조는 인민(人民)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제된 성씨체계의 구체적인 자료로 이를 통해 당시까지의 성씨를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조선 중기에 편찬된 『과천현신수읍지』의 성씨조에는 성과 씨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고 있다.【주】2)
옛날 우(禹) 임금이 동서남북의 땅을 나누어 주면서 성관(姓貫)의 기초를 삼았는데 그 뜻이 이에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100세를 이어가는 것으로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씨라고 하는 것은 그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후세에는 봉작(封爵)·관함·이름(名)·자(字)·사물(事物) 등으로 씨가 되기도 하고, 그 밖에 9가지 사실로써 세(世)를 내려 주는 경우가 있으니, 또한 성과 씨의 관적을 구별해서 상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성씨가 보급된 이후로도 공·사노비와, 향(鄕)·소(所)·부곡(部曲)민, 역민(驛民)·진민(津民) 등의 무성층(無姓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비록 점진적으로 성씨를 취득하긴 하였으나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성씨가 보급되는 데에는 시일이 걸렸다. 그들은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이 이루어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성씨를 취득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노비를 위시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서 무성층도 그만큼 많았다. 이러한 무성층은 16세기 말기에 이르러 신분의 향상 내지는 신분해방을 통하여 서서히 성을 취득하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 300년의 기간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과 계급이 타파됨으로써 성의 대중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이어 1909년에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의 시행으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성씨사상 가장 큰 수난기를 맞이하였는데, 바로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었다. 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고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창씨개명은 1939년 말부터 시행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50대 후반의 이름에는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창씨개명은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9월부터 미국이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무효화되었다. 곧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이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법령 제122호로 공포하여 일제하 창씨개명으로 성과 이름을 빼앗긴 우리 민족은 법적으로 다시 옛 성과 이름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성씨의 수용과 보급과정을 간단히 말하자면, 삼국시대 말기부터 신라하대까지는 왕실과 중앙의 귀족이 성과 본관을 갖게 되었고, 지배층 일반에게 성과 본관체제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였다. 이후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양민층에 점차 성씨가 보급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의 상승과 해방으로 말미암아 천민층도 비로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성씨는 이렇듯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신분과 특권의 표시였으므로 성이 있는 자가 죄를 지으면 신분이 천인으로 전락되기 때문에 성씨를 박탈당했고, 승려들도 출가하면 역시 성을 쓰지 않았다.
▣ 제2절 성씨의 특징(特徵)과 본관(本貫)
우리나라의 성씨제도는 비록 중국 한자성(漢字姓)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을 수용하고, 정착·분화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관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만의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복잡하고 고유한 면이 많이 보이는데, 이를테면 성과 본관은 가문을, 그리고 이름은 자기 가문의 세대를 알려주는 항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성과 이름을 알면 개인은 물론 그 가문의 세대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한국인의 성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부계(父系)를 본위로 한 칭호이므로 소속된 가정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호주가 ‘장’을 성으로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내는 ‘박’을 성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며느리도 ‘홍’이라는 다른 성을 가지고 있는 식이다. 이러한 사실은 출가한 후라도 반드시 자기의 혈통을 나타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성불변(姓不變)의 원칙은 우리의 성씨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즉, 외국의 경우 가령 미국이라든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원칙적으로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의 성을 좇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남편의 호적에 입적되어도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 성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재한다. 또한, 성씨에 대한 관념이 지극히 남달라 호적에 반드시 본관을 기재하여 부계의 혈통을 밝히고, 동성동본(同姓同本) 사이에는 혼인도 하지 않으며, 이를 법제화까지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는 성의 수에 있어서 270여 성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수이다. 더욱이 인구의 50% 이상이 김·이·박·최씨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성씨는 그 분화 과정에 있어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분할 수 없어서 본관(本貫)이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으로 여기고 성과 본이 같아야만 동족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예외도 많다. 성과 본관이 같아도 조상의 연원을 달리하는가 하면, 성과 본관이 다르더라도 조상이 같을 수도 있다. 이처럼 성과 본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나라 성씨체계의 또 다른 특징을 이룬다. 본관도 역시 성과 마찬가지로 분관·분적(分籍)이 늘어남에 따라 처음에는 시조의 출신지나 거주지를 발상지로 하여 본관을 정하였으나, 점차 자손이 늘어나고 현달(顯達)하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벼슬 이름, 후손의 일부가 새로 이주하여 정착한 곳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본관지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본관은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기에 성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로 지배층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성이 보편화되고, 이에 짝하여 본관도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본관제가 정착하게 된다. 본관제의 기원은 고려 초 호족들이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신분상승을 하여 새로운 관료군으로 편입되자 현 거주지가 아닌 조상의 원래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칭하면서부터이다. 곧 새로운 관료군(官僚群)으로 편입된 호족층이 수도에 올라가 벼슬길에 오름으로써 개경에 모여살게 되자 다른 호족의 가문과 자신의 가문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관이 하나일 경우 점차 그 가문의 수가 느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종전의 본관과는 다른 또 하나의 본관이 생겼으며,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본관의 수가 수 십이 넘는 현상을 야기시켰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우 후손들 가운데 현달한 자가 배출되면, 그를 중시조로 하여 새로운 본관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또한, 본관은 개변(改變)이 심하였으니 전통적으로 신분질서를 중시한 우리 사회에서는 성과는 또 다르게 본관을 통해 집안의 격(가격: 家格)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족보(族譜) 역시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의 하나로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처음 조선시대 초기 왕실과 관부(官府)에 의해 처음으로 작성 간행되었다. 그러던 중 명문 가문에 의해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는 바, 성종 12년(1481)의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최초의 것이다. 이후 16세기 중반인 명종 20년(1565)에는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 이를 모범으로 하여 명문세족(名門勢族)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이의 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는 등 성의를 보였을 뿐만아니라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일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관계 자료의 검토도 없이 자의적으로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졌음은 물론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였으며, 심지어 조작한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거나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몄다. 이는 당시 중하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의 소산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을 높이려는 성급한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실(佚失)된 선대의 자료를 보완하지 않고 간행하였다. 한편, 1909년 새로운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주위의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대성·대본관의 구성원 수가 더욱 늘어갔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앞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성과 본관을 개변하는 사람들이 당시 대성거족(大姓巨族)에 투탁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족보들 가운데 대부분은 19세기 말이나 일제시대, 심지어는 최근에 간해된 것도 많다. 족보의 허구성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러한 족보를 만고의 진리인 양 믿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반드시 당시의 역사적 사료와 비교·검토하여야만 선대의 인물이나 성격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도 제대로 파악될 것이다.
▣ 제3절 성씨의 종류(種類)
우리나라의 성수(姓數)는 이웃 나라인 중국에 비해 1/10, 그리고 일본의 10만에 비하여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성씨에 관한 자료에 의거하여 볼 때, 우리나라의 성수는 역대 관계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15세기의 성씨를 집대성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50여 성씨가 보인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대략 성의 종류를 4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첫째 본관에 의한 구분, 둘째 성씨의 출자(出自)에 의한 구분, 셋째 성의 소멸과 이동 등에 관한 구분, 넷째 사성 및 귀화성에 의한 구분이다. 여기에는 이미 소멸된 망성(亡姓)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성종 17년(1486)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270여 개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 이후의 귀화성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영조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 성이 보인다. 그 내용은 저성(著姓), 그 다음 저성, 그 다음 다음 저성, 희성(稀姓), 그 다음 희성, 벽성(僻姓), 귀성(貴姓), 복성(復姓)의 8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도곡총설』에 수록된 성수는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의 성과 『동국여지승람』의 성수 및 이후 귀화한 성의 수를 합한 것으로 여기에는 조선 후기에 이미 소멸된 망성도 포함되어있다.
정조 대에 이덕무(李德懋)가 편찬한 『앙엽기(촖葉記)』는 성수를 음운별로 구분하여 379성을 싣고 있다. 이 역시 이미 소멸된 망성을 포함하여 한자성이 들어오기 이전까지의 성을 모두 기재하고 있다. 한편, 19세기 후반인 고종대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가장 많은 496성이 나타나는데, 이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하던 고문헌에 수록된 모든 성을 총망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략 조선시대의 성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수록된 성수대로 약 250여 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와 관련하여 근대적 의미의 전체적인 연구조사가 이루어진 때는 1925년이었다. 이후 인구조사와 더불어 성씨와 본관이 조사된 시기는 1930년에 이르러서였다.【주】3) 비록 국세조사(國勢調査)의 일환으로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사되긴 했지만, 우리나라 전체 인구와 성씨, 본관을 모두 파악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결과 우리의 전국에 걸쳐 250성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그것과 별반 큰 차이가 없는 수치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우리 손으로 성씨를 조사한 것은 1960년에 이르러서였다. 인구센서스의 부대조사로 실시된 것이지만, 30년 전의 성수보다는 8성이 많은 258성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는 성씨만을 한자로 기입하게 하여 여기에 기록된 성씨의 종류와 분포상황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조사가 불충분하여 미확인된 것이 상당수 있었으며, 특히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은 조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 1966년의 인구센서스, 1975년의 총인구 및 주택조사에서도 가구원 개개인의 성씨를 조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가구의 성씨만을 한자로 기입케 하여 조사하였므로 역시 미확인된 성씨가 많았다.
그러던 중 1985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여 북한을 제외한 전국의 성과 본관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가장 최근의 것으로 조사 결과 275개의 성과 3,435개의 본관이 파악되었는데,【주】4) 이 숫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그것과 비교할 때 성수는 비슷하나 본관은 약 1천여 개가 적은 것이며, 1975년의 247성에 비하여는 25성이 새로이 나타난 것이다.
1985년 현재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100명 이상의 성은 223개로 우선 인구 2만명 이상인 84개의 성씨를 순위별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 김(金) 2 이(李) 3 박(朴) 4 최(崔) 5 정(鄭)
6 강(姜) 7 조(趙) 8 윤(尹) 9 장(張) 10 임(林)
11 한(韓) 12 신(申) 13 오(吳) 14 서(徐) 15 권(權)
16 황(黃) 17 송(宋) 18 안(安) 19 유(柳) 20 홍(洪)
21 전(全) 22 고(高) 23 문(文) 24 손(孫) 25 양(梁)
26 배(裵) 27 백(白) 28 조(曺) 29 허(許) 30 남(南)
31 심(沈) 32 유(劉) 33 노(盧) 34 하(河) 35 유(兪)
36 정(丁) 37 성(成) 38 곽(郭) 39 차(車) 40 구(具)
41 우(禹) 42 주(朱) 43 나(羅) 44 임(任) 45 전(田)
46 민(閔) 47 신(辛) 48 지(池) 49 진(陣) 50 엄(嚴)
51 원(元) 52 채(蔡) 53 천(千) 54 방(方) 55 양(楊)
56 공(孔) 62 현(玄) 58 강(康) 59 함(咸) 60 변(卞)
61 노(魯) 67 염(廉) 63 석(石) 64 여(呂) 65 추(秋)
66 도(都) 67 신(愼) 68 석(石) 69 소(蘇) 70 설(薛)
71 선(宣) 72 주(周) 73 길(吉) 74 마(馬) 75 연(延)
76 표(表) 77 위(魏) 78 명(明) 79 기(奇) 80 방(房)
81 반(潘) 82 왕(王) 83 금(琴) 84 옥(玉)
한편, 인구 20,000명 이하 100명 이상의 성은 139개로 이를 순서별로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 1,000명 이상 20,000명 이하
육(陸)·인(印)·맹(孟)·제(諸)·탁(卓)·진(秦)·남궁(南宮)·장(蔣)·모(牟)·국(鞠)·어(魚)·여(余)·은(殷)·편(片)·용(龍)·예(芮)·구(丘)·봉(奉)·유(庾)·경(庚)·정(程)·진(晋)·사(史)·부(夫)·황보(黃甫)·석(昔)·가(賈)·태(太)·목(睦)·계(桂)·피(皮)·형(刑)·채(菜)·두(杜)·지(智)·감(甘)·동(董)·음(陰)·온(溫)·장(章)·경(景)·제갈(諸葛)·사공(司空)·호(扈)·좌(左)·선우(鮮于)·갈(葛)·범(范)·하(夏)·전(錢)·빈(賓)·팽(彭)·서문(西門)·소(邵)·승(承)·시(施)·상(尙)·간(簡)·화(化)·설(첁)·공(公)·강(疆)·빈(彬)·시(柴)·위(韋)·진(眞)·호(胡)·로(路)·우(于)·반(班)·천(天)·단(段)
◎ 100명 이상 1000명 이하
견(甄)·국(國)·순(荀)·도(陶)·당(唐)·강(强)·방(邦)·방(龐)·창(昌)·옹(邕)·독고(獨孤)·평(平)·승(昇)·종(種)·섭(葉)·묵(墨)·마(麻)·궁(弓)·대(大)·빙(氷)·도(道)·견(堅)·근(斤)·풍(馮)·기(箕)·원(袁)·연(連)·영(永)·이(異)·랑(浪)·한(漢)·내(乃)·장(莊)·아(阿)·만(萬)·채(采)·해(海)·창(昌)·이(伊)·궉(?)·판(判)·포(包)·초(楚)·매(梅)·요(姚)·필(弼)·점(占)·봉(鳳)·동방(東方)·개(介)·미(米)·범(凡)·준(俊)·구(邱)·야(夜)·자(慈)·종(宗)·송(松)·수(水)·운(雲)·국(菊)·뇌(雷)·연(燕)·량(樑)
이 밖에 인구 100명 이하의 희성은 52개로 돈(頓)·탄(彈)·옹(雍)·서(西)·초(肖)·군(君)·곡(曲)·여(汝)·수(洙)·순(淳)·사(舍)·나(奈)·애(艾)·내(奈)·운(云)·성(星)·편(扁)·후(后)·사(謝)·단(單)·강(剛)·묘(苗)·비(丕)·순(順)·어금(魚金)·학(?)·교(橋)·부(傅)·추(鄒)·단(端)·담(譚)·영(榮)·돈(敦)·난(欒)·강절(綱切)·영(影)·후(候)·십(?)·호(鎬)·환(桓)·두(頭)·강전(岡田)·뢰(賴)·루(樓)·장곡(長谷)·저(邸)·소봉(小峰)·초(初)·춘(椿)·흥(興)으로 나타난다. 이 성씨들은 대개 최근에 생겨났거나 외국인의 귀화(歸化)에 의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인구센서스의 조사시 호적기재의 착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수와는 별도로 본관의 수는 김(282)·이(237)·박(127)·최(127)·정(122)·강(32)·조(56)·윤(44)·장(61)·임(90)·한(40)·오(69)·서(54)·권(11)·황(55)·송(48)·안(35) 등으로 나타나며, 본관별 인구수는 아래와 같다.
◎ 본관별 인구수 (단위: 천명)
1 김해 김씨(3,767) 2 밀양 박씨(2,705) 3 전주 이씨(2,308)
4 경주 김씨(1,523) 5 경주 이씨(1,217) 6 진주 강씨(921)
7 경주 최씨(876) 8 광산 김씨(751) 9 파평 윤씨(647)
10 청주 한씨(598) 11 안동 권씨(559) 12 안동 장씨(539)
13 평산 신씨(460) 14 금령 김씨(424) 15 순흥 안씨(418)
16 동래 정씨(415) 17 안동 김씨(398) 18 달성 서씨(398)
19 남양 홍씨(382) 20 해주 오씨(377) 21 남평 문씨(344)
22 전주 최씨(343) 23 제주 고씨(318) 24 경주 정씨(301)
25 창녕 조씨(300) 26 수원 백씨(296) 27 한양 조씨(273)
28 나주 임씨(263) 29 문화 류씨(256) 30 밀양 손씨(243)
위의 30대 본관 가운데 김해(金海) 김씨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총 본관수 3,435개와 비교할 때 인구 수는 엄청나다 하겠다.
위의 대본관들의 대부분은 고려나 조선시대의 명문거족(名門巨族)들로 위의 대성(大姓)이 이미 당대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기도 하였겠지만, 문벌(門閥)을 숭상하였던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특히 위의 성들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16세기 내지 그 이후의 무성층 등이 족보를 개변(改變)하거나 윤색(潤色)하는 사례가 많았기에 후대로 내려올수록 대본관의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던 것이다.
▣ 제4절 과천(果川)의 성씨
과천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경기도의 여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행정구역의 개편이 여러차례있었다. 곧 고구려 때에 율목군(栗木郡),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이를 고쳐 율진군(栗津郡)이 되었다가, 고려 초기에 과주(果州)로 되었다. 이후 현종(顯宗) 9년(1018) 광주목(廣州牧)에 속하였다.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太宗) 13년(1413) 지금의 과천현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 금천(衿川)과 합쳐 금과(衿果)로 고쳤다. 그러나 수개월 후에 폐하여 원래대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다시 금천을 합하였다. 고종 32년(1895)에는 군으로 승격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이후 일제시대에는 시흥군 소속이 되었다.
과천의 경우 지금은 비록 인구도 경기도의 여타 시보다도 적고 지역도 조그마한 면적에 지나지 않지만 종전에는 이와 달랐다. 따라서 여기서는 당시의 상황을 참작하면서 서술하고자 한다.
○ 1. 성씨의 종류와 인구상황
○ 2. 관적성씨와 집성촌(동족마을)
▣ 1. 성씨의 종류(種類)와 인구상황(人口狀況)
우리나라는 고래(古來)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민에 대해 요역·징세 등을 부과하기 위해 호구조사(戶口調査)라는 명목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해 왔다. 정확한 호구조사는 나라를 살찌우는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강하게[富國强兵]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인정(人丁)이 세(稅)의 근간이 되었으므로 매 식년(式年)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밖에 총 인구의 수와 인구 동태 등을 파악함으로써 시정(施政)의 자료로 삼으려 했던 것도 호구조사의 목적 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지금의 인구조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호구 내지 인구조사는 근래에 실시되고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읍지를 편찬할 때 조사된 인구수나 호적대장(戶籍臺帳)을 기초로 하여 계산된 것이므로 일정한 시점에 있어서 현재의 수와 일치하지 않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16세기 이전까지는 천민계층이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 되었는데, 이들을 제외한 양인(良人) 이상 신분에 대한 통계였으므로 전체적인 호구나 인구조사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적인 성씨를 알려주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과천현의 성씨는 손(孫)·이(李)·전(田)·변(邊)씨 4개의 토성(土姓)과 신(愼)·안(安)·최(崔)씨의 망성(亡姓)이 보인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토성과 망성의 구분없이 위의 7개의 성씨를 그대로 싣고 있으며, 후기의 읍지나 『증보문헌비고』에서도 위의 7개 성을 보완없이 그대로 싣고 있을 뿐이다. 곧 당시 과천의 성씨는 3개의 망성을 제외한 손·이·전·변씨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성씨조사는 일제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1930년 10월 1일 실시된 것이 있다.【주】5) 여기에는 전국 도·군별의 성씨통계 및 동족마을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어 광복 후인 1953년 같은 내용이 조사된 바가 있어 『경기도지(京畿道誌)』 하권(下卷, 1957)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주】6)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당시의 조사들이 모두 시흥군(始興郡)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과천이 단독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과천은 면 단위에 불과하였는데, 당시의 조사는 군 단위로 실시되어 면별 통계는정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지 시흥군의 성씨만을 조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가운데 과천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표】1930·1953년 시흥군의 성씨별 세대수
【도표】1930·1953년 시흥군의 성씨별 세대수
▣ 2. 관적성씨(貫籍姓氏)와 집성촌(集姓村)(동족마을)
○ 1) 관적성씨
○ 2) 집성촌
▣ 1) 관적성씨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관적성씨라고 하는데, 과천의 경우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토성(土姓)인 4개의 성씨, 손(孫)·이(李)·전(田)·변(邊)과 망성(亡姓)인 신(愼)·안(安)·최(崔)가 있었다. 이와 아울러 조선 후기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도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위의 토성만을 열거하고 있다.
토성이란 성의 출자처(出自處)를 나타내는 본관과 부계(父系)의 혈통을 의미하는 성으로 구성된 복합어라 할 수 있다. 이 ‘토성’이란 용어는 15세기의 공·사문헌에 자주 보이고 있으며 그것의 형성시기는 신라말 고려초의 전환기였다. 곧 토성의 발생원인은 성씨의 보급이 확대되는 시기인 후삼국의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신라의 신분질서인 골품제(骨品制)를 대신하는 새로운 지배층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지배층은 전국 각지의 호족(豪族)들로서 그들은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이바지한 자들이었다.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는 그들에게 당시의 세력관계를 고려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성관(姓貫)을 하사 분정(分定)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과천의 토성인 손·이·전·변씨는 고려 초기 이래 『세종실록』 지리지의 편찬 시기인 15세기까지 과천에서 읍사(邑司)를 구성하여 지방행정을 장악하고 징세와 부역을 담당한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망성은 고려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적(古籍: 옛부터 전해오는 책)에는 있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의 편찬 당시에는 없어진 성을 일컫는다. 망성의 발생 요인은 자연적으로 족세(族勢)가 쇠하여 후손이 단절된 경우와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로 말미암아 가문이 갑자기 몰락한 경우가 있겠다. 특히 망성의 경우, 경기 지방이 다른 지역보다 심하였는 바, 그 이유는 수도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수도와 인접한 관계로 정치적 변화에 쉽게 휩싸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성쇠(盛衰)와 소장(消長)이 극심하여 빈번한 정권교체 때 세력을 잃은 재경관인(在京官人)들이 도태되어 지방으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신진세력이 상경입사(上京入仕)하면서 그들의 기반을 수도와 가까운 경기 지역에 마련했던 것도 망성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군·현 성씨의 도별·성종별 성관수를 보면 확인되는데, 경기도의 망성이 141개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과천의 경우는 경기도의 다른 지역보다도 비교적 수도와 가까웠기에 이러한 현상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곧 과천에 있어서 3개의 망성은 15세기 초기에 이미 소멸된 것이었으며, 토성은 15세기 당시까지 사족(士族)과 이족(吏族)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성씨 가운데 토성만이 조선시대에 과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성씨들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까지 족보를 편찬하거나 인물들이 보인다. 그러나 과천 이씨의 경우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씨 가문이 직(職)을 세습하면서 내려오기는 하였지만 이후 본관을 유지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이 외에도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을 본관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 가운데에도, 과천을 본관으로 한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사족이나 이족의 대부분은 이거(移居), 본관의 개변 내지 신분의 몰락으로 근대에 들어서는 그 계보를 계속해서 이어가지 못하였다.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가운데 유명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과천 전씨만이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보일 뿐이다. 곧 인조 11년 전호민(田?民: 1610∼?)이 식년시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전이공(田以功)이 숙종 13년에, 그리고 전처경(田處坰: 1642∼?)이 숙종 21년 장원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는 기록이 『국조방목(司馬榜目)』에 나타나 있다.
1930년의 전국 성씨조사에 의하면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16개로 나타난다. 이를 열거하면, 이(李)·최(崔)·조(趙)·안(安)·임(任)·서(徐)·유(兪)·임(林)·손(孫)·배(裵)·변(邊)·신(愼)·전(田)·상(尙)·유(劉)·천(千) 등이다. 위의 내용을 상고해 볼 때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곧 안씨를 제외한 망성을 포함하여 토성도 모두 나타나며 그 외에도 종전에는 없었던 성씨들이 추가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씨의 경우처럼 조선 후기에 한 동안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갑자기 본관 수가 늘어난 데에는 조선 후기나 일제시대의 무성, 무본관층이 본관을 과천으로 정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1930년 당시 과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었던 성씨가 16개였던 데 비해 1985년 경제기획원의 조사에 의하면,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단지 1개인 임(任)씨만이 있다. 과천 임씨는 전체 인구도 극히 적어 24명에 불과한데, 이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성 역시 시조를 고려시대에 사재시 부령(司宰寺副令)을 지낸 임경종(任敬宗)이었다고 하나 근래에 창성(創姓)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든 현재 과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위에 말한 과천 임씨 뿐이다.
▣ 2) 집성촌
성씨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집성촌이다. 동족마을이라고도 지칭되는 집성촌이란 성씨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느 한 마을에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곳이다. 이러한 마을 형태는 지금까지도 비교적 흔한 편이다. 집성촌의 호칭은 성씨와 관계되므로 이촌(李村)·금촌(金村)·장씨촌(張氏村)·박씨동(朴氏洞)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를 고대 내지 고려 초까지 소급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실제 우리나라에 동족마을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자기들의 가문을 높이려고 자기들의 마을이 3, 4백년 심지어는 5, 6백년 전부터 있었다고 과장하여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16세기 이전에는 철저하게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이 지켜져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와 친손자, 외손자의 구분을 짓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위를 거느리고 있었던 경우도 허다하였고, 제사가 있을 적에도 자녀가 돌아가면서 모셨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붕괴되기 시작해 사위나 외손이 외가의 재산상속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부계 중심의 동성동본(同姓同本)이 함께 사는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집성촌의 형성과정은 한 종족(種族)이 어느 한 마을에 계속해서 여러 대에 거쳐 거주하는 경우와 자기의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로 마을을 구성하고 후손들이 그 마을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천재지변이나 정치·사회적 급변으로 인해 도피 내지 유배된 이후 그 곳에서 일족이 터를 잡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비록 하여 세대에는 몰락의 길을 걷도 있었으나, 학문을 가르쳐 그 자손이 과거(科擧)에 급제 자신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도 하였다.
집성촌의 발생 요인으로는 우리 사회가 혈연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한 데에서 온 유습(遺習)을 들 수 있다. 동족마을을 영위하면서 마을의 제반 행사에 모두가 힘을 합할 수 있었고, 향촌 사회의 노동 집약적인 일들도 자치적으로 상부상조하며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동족마을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한 위계(位階) 질서가 너무 강하여 사회발전의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천의 경우, 이러한 집성촌이 많이 있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1930년의 일제의 성씨조사 자료에는 보이지 않고, 1953년의 인구조사 통계가 실린 『경기도지』(下卷, 1957)에만 나타날 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치 성관 세대수 형성시기
과천면 하리(下里) 합천(陜川) 이(李) 20 300년전
하리고령(高靈) 고령(高靈) 신(申) 50 400년전
하리회덕(懷德) 회덕(懷德) 송(宋) 20 400년전
주암리(注岩里) 진주(晋州) 강(康) 20 450년전
막계리(莫溪里) 전주(全州) 최(崔) 20 480년전
막계리평해(平海) 평해(平海) 손(孫) 20 480년전
막계리김해(金海) 김해(金海) 김(金) 22 510년전
위의 통계에 의하면, 경기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집성촌이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과천의 면적이 작았기 때문이다. 곧 당시의 통계로 보면, 과천의 경우 시흥군의 한 개의 면에 불과하였기에 집성촌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항상 서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과천이라 할 때 지금의 과천이냐, 아니면 조선시대으 과천이냐, 일제강점기의 과천이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것은 자료에 나타나는 과천의 행정구역이 시대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과천의 면적이 행정 구역의 변천에 따라 수 차례에 걸쳐 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준을 잡기가 매우 어려운 바 이를테면 언주면(彦州面)의 경우 구한말에는 과천의 구역이었으나 이후 광주군으로 편입되었고, 그 근처의 지역도 마찬가지로 행정구역의 변천에 의해 과천이 되기도 하고 다른 곳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편의상 자료에 나타나는 과천만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집성촌도 1980년 중반 이후 과천 신도시계획으로 말미암아 많이 없어져 현재는 매우 드문 편이다.
한편, 위의 『경기도지』와는 달리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거나 실지로 파악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기도지』의 경우 일정한 규모 이상의 세대 수 이상만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적은 호수는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과천 신도시 건설 이후 지금의 세거(世居) 성씨를 직접 조사한 결과, 비록 적은 세대수이긴 하나 자연마을의 경우 아직까지 세거하고 있는 성씨가 나고 있다.
먼저, 문원동의 경우, 세골에는 김해 김씨, 강릉 김씨, 순흥 안씨, 광산김씨가, 구리안에는 전주 이씨가, 사기막골에는 진주 강씨, 광산 김씨, 광주임씨가 세거하고 있다. 이 가운데 광주 임씨의 경우, 그 곳에 사는 후손의 말을 빌면 18대 350년 동안 살아왔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새텃말은 진주 강씨, 경주 김씨, 함열 남궁씨 등이 대대로 세거하고 있고, 현 정부제2종합청사 자리인 홍촌말에 남양 홍씨가 살았으나 신도시 개발로 인해 모두 이주하였으며, 갈현동의 경우에는 가일에 김해 김씨, 언양 김씨, 해주 오씨가 현재 세대를 구성하여 살고 있다. 이어 찬우물에는 김해 김씨가, 가루개에는 청주 이씨와 울산 박씨가 옛날의 전통을 이어 받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 또한 제비울에는 신창 맹씨, 옥탑골에 제주 고씨, 그리고 자경골에는 순흥 안씨가 세거하고 있다.
막계동의 경우, 홍촌말과 같이 신도시 개발로 인해 모두 이주하였지만, 안동 권씨와 평해 손씨, 전주 이씨, 전주 최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주암동에는 삼부골에 동래 정씨, 김해 김씨, 전주 이씨와 진주 강씨들이, 돌무께에는 전주 이씨가, 그리고 중촌에는 역시 전주 이씨와 선산 김씨, 죽바위에는 전주 이씨, 경주 김씨, 선산 김씨들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관문동의 경우도 과천 신도시 개발로 인해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과천의 향리 출신인 원주 변씨와 안동 권씨가, 그리고 향교말에 청주 한씨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리(현 과천동)의 동족마을로는 안골의 전주 이씨, 광창의 경주 김씨와 은진 송씨가 16대에 걸쳐 살고 있다. 한편, 하락골에는 전주 이씨, 선암에는 고령 신씨, 뒷골에는 합천 이씨가 세거하고 있고, 한계에는 함열 남궁씨와 거창 신씨, 고령 신씨, 그리고 남태령에는 전주 이씨가 세거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동족마을 중 비교적 성세가 있고 자료가 있는 성씨를 자세히 알아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여기서 거론된 성씨는 과천향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과천시의 행정계통을 통하여 자료제시를 요구하여(1991. 9. 4)이에 응한 경우와, 과천에서 오래 세거한 것으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문중에 대해 개별적으로 자료제시를 요구하여(93. 7. 31) 이에 응한 경우로, 본 원고의 서술은 각 문중이 제시한 족보자료를 중심으로 하였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안동 권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삼국을 통일한 행(行, 幸)을 시조로 한다. 이어 10세조를 파조로 하여 14개파로 나누어진다. 과천에 최초로 입향하여 세거하기 시작한 인물은 『고려사』 열전에 등재되어 벼슬이 추밀원 부사에 이르렀던 수평(守平)의 후손인 추밀공파(樞密公派)의 7대 손으로 성균간 대사성과 부제학을 역임한 건(健: 1458∼1501)이다. 그는 여말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근(近)의 증손이며, 그의 아버지인 람(擥)은 세종 32년 계유정란 당시 한명회(韓明澮)와 같이 공을 세워 정란공신(靖難功臣)이 된 인물이다. 건의 묘는 과천현 막계리(현 과천시 막계동)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 서울대공원의 공사로 인해 경기도 이천으로 이장하였다.
◎언양 김씨(彦陽 金氏)
언양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7남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인 선(鐥)을 시조로 한다. 그가 언양군으로 봉해지면서부터 그의 후손들이 언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갔다. 파계가 많으나 과천의 가일마을(현 갈현동)에 입향한 파는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이다. 즉 선무랑공파의 18세손인 경유(慶裕)의 아들 전(篆)이 숙부인 겅지(慶祉)에게 입양하여 가일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30세손까지, 12대에 걸쳐 내려오고 있다. 이 가운데 19세손 전(篆)이 동지중추부사를, 20세손 일중(一重)이 통덕랑을 지냈다. 이들의 과천의 생존시기는 일중의 아들인 석기의 생몰연 대가 1716년(內申)∼1769년(己丑)이므로 18세기 중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최초 입향조가 3대를 거슬러 올라가므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가일에 입양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현재 10여 호를 구성하여 살고 있다. 선대의 묘소가 여러 기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이장 또는 화장하였다.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
시조는 원청(元淸)으로 고려 성종대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감물아백(甘物阿伯: 함열의 옛지명)에 봉해졌으며, 이 곳을 그의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아 본관으로 정했다. 조선 명종대에 교리를 지낸 11세 희(憘)가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에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교리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13세인 격(格), 미(楣)의 대 이후 강원도 홍천군 일대와 과천, 함열, 파주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과천에 입향한 시기는 13세 니의 아들인 엽(燁)이 17세기 초에 가일에 들어와 살면서 부터이다. 이어 16세 길, 17세 호(浩)와 즙(楫) 등 22세까지의 묘소가 과천현 문원리(현 문원동)에 묘소가 있다.
◎울산 박씨(蔚山 朴氏)
울산 박씨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훈을 세워 개국원훈벽상공신(開國元勳壁上功臣)에 오른 윤웅(允雄)을 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초기 공을 세운 후 지금의 울산인 흥려백(興麗伯)이 되었으며 시호는 장무공(莊武公)이다. 직계로 12세인 의생(誼生), 13세인 지(祉), 14세인 유인(有仁), 15세인 세견(世堅)의 묘가 울산(蔚山)에 있어 매년 제향(祭享)을 거행하고 있다.
이 세계 가운데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장흥(行長興)·갑산(甲山)의 부사를 지낸 14세 유인의 3형제 가운데 막내인 15세 세윤(世允)의 직계 후손인 24세손 균한(均漢: 1782∼1823)과 연한(?漢)을 전후로 하여 과천 갈현리 가루개마을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가루개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울산 박씨는 24세부터 28세까지 20여기의 묘가 현 과천시 갈현동 32번지에 있다.
24세 연한은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25세 희문(羲文, 자 文基)은 중추부사, 그리고 26세손 윤풍(潤澧)이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현재의 인물로는 29세손 영재(英載)가 이사관으로서 수산청 어정국장과 시설국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직 후 과천문화원의 초대원장으로 있으며, 31세손 하영(夏泳)은 과천시의회의 2대 의장으로 재임 중에 있다.
◎은진 송씨(恩津 宋氏)
시조는 고려시대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진군에 봉해진 대원(大原)으로 이후 후손들이 은진을 관향으로 삼았다. 과천에 입향한 파는 14세손 석명(錫命)을 파조로 하는 유계공파(柳溪公派)이다. 이어 18세인 광성(光晟: 1702∼1761)의 묘가 과천현 하리 광창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18세기 초에 과천에 세거하기 시작한 듯 하다.
이어 19세 현문(賢文: 1727∼1790)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인 20세 성수(成修: 1754∼1814), 21세 형달(亨達: 1779∼1836), 22세 정렴(正濂) 등 26세까지의 묘소가 광창동에 있었으나 1984년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해월리로 이장하였다. 후손들이 처음에는 광창에 30∼40세대를 구성하고 살았으나 현재는 약 25호가 거주하고 있다.
◎거창 신씨(居昌 愼氏)
거창 신씨는 중국 송나라 개봉(開封)사람으로 고려 문종대에 벼슬한 신수(愼修)를 시조로 한다. 이후 8세인 성(成) 대부터 13세 이충(以衷)의 대에 이르러 거창에 세거하다가 14∼16세대에 걸쳐 전국 각지로 세거해 갔다. 이충의 세 아들인 기(幾), 언(言), 전(詮)를 파조로 하여 참판공파(參判公派), 서령공파(署令公派), 양간공파(襄簡公派)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양간공파의 18세손인 지(志: 1522∼?)의 묘가 과천면 상초리(霜草里: 현 서초구 서초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가계는 대략 16세기에 과천에 입향한 듯 하다. 이어 19세손인 사룡(士龍)의 묘와 여욱(汝郁), 회장(晦章, 1609∼1695), 만(滿: 1638∼1720), 익상(益相, 1659∼1710), 정휴(廷烋: 1693∼1742) 등 후손들의 묘가 거창 신씨의 세거지인 남태령 밑의 과천면 하리 물업동(현 과천동)에 있다. 이 곳은 아직까지 별 다른 변동을 보이지 않고 있어 현재까지 적은 가구이긴 하지만 후손들이 살고 있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
고령 신씨는 고령현의 향리 출신으로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 군기감을 지낸 성용(成用)을 시조로 한다. 고령 신씨의 분파는 7대조에서 3파로 나뉘고 그의 아들대에 다시 분파된다. 곧 7세조인 색(색), 평(枰), 제(梯)의 후손이 각각 암헌공파(巖軒公派), 정은공파(靜隱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로 나누어지고, 이 가운데 암헌공파에서 다시 맹주(孟舟)가 서윤공파(庶尹公派)를, 중주(仲舟)가 순창공파(淳昌公派)를, 숙주(叔舟)가 문충공파(文忠公派)를, 송주(松舟)가 안동공파(安東公派)를, 그리고 말주(末舟)가 귀래정공파(歸來亭公派)를 개창하였다.
과천에 입향한 고령 신씨는 귀래정공파로 8세부터 14세까지의 묘는 알 수 없으나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한 15세 수호(水扈)의 묘가 과천동 하리(현 과천동)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계속해서 과천에 세거한 듯 하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과천에 세거하는 전주 이씨는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를 시조로 하는 익안대군파로 4세손 천(쾪)의 묘가 과천면 하리 우만동(현 과천동)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전후하여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과천에 세거하기 시작한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는 다른 지역의 익안대군파와 구분하기 위해 3세 반남도정을 역임한 예(禮)로부터 시작하는 반남도정파(潘南都正派)로 부른다. 특히, 현재 과천동 하리에 거주하고 있는 파는 11세 세흥(世興: 1632∼1699)를 중시조로 하여 세흥파라고 한다.
또한, 지금은 과천 서울대공원이 위치한 막계 2리에 살았던 전주 이씨와 주암리에 사는 전주 이씨는 앞의 세가와는 달리 늦게 과천에 입향하였는데, 각각 양령대군파(讓寧大君派)와 효령대군파라 한다. 양령대군파의 경우, 그의 현손으로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를 거친 완산부원군 축(軸: 1538∼1614)의 후손들의 묘소가 막계동에 있다.
◎합천 이씨(陜川 李氏)
합천 이씨는 신라말 고려초의 인물로 전하는 개(開)를 시조로 한다. 이 성씨의 분파는 10세조를 파조로 하여 15개파로 나누어 진다. 이 가운데 공주(公柱)의 후손들이 목사공파(牧使公派)이며, 과천의 뒷골(현 과천동)로 입향하여 세거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1세손인 매헌공(梅軒公) 복원(復元)으로부터이고, 그의 아들인 우창(佑昌: 1665∼1757)이 자헌대부를 지냈다. 처음 합천 이씨가 전국적으로 세거하기 시작할 때 김포(金浦)로 갔으나 이후 이 곳으로 이주하였다. 현재 뒷골에 1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일대를 합해 30여 호를 구성하여 세거하고 있다. 누대 묘소가 현재 과천동에 있다.
◎전주 최씨(全州 崔氏)
전주 최씨는 서로 시조를 달리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문성공파(文成公派), 사도공파(司徒公派), 문충공파(文忠公派) 등 4개 파가 있다. 이들의 시조는 각각 순작(純爵), 아(阿), 균(均), 군옥(群玉)이다. 이 4파는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는데, 문열공파 가운데 순작의 9세손인 사위(士威)를 파조로 하여 판윤공파(判尹公派)가 성립된다.
과천 막계리에 입향한 전주 최씨의 경우, 이 판윤공파 사위의 장남인 한성판윤을 지낸 처사공(處士公) 조(肇)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헌대부로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과천에 우거하였으며, 묘소가 과천현 막계리에 있다. 전주 최씨는 15세기를 전후하여 과천에 입향한 듯하며, 이후 그들의 자손은 대대로 이 곳에 세거하며 살았다.
사위는 태종 4년(1404) 황해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부친인 유경(有慶)은 조선개국원종공신이다. 이후 11세 선민(善敏), 12세 옥순(玉荀), 옥호(玉浩), 옥명(玉明), 13세 정(瀞)과 심(沈), 14세 사립(士立)과 언영(彦英)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선민의 3형제 중 옥호와 심, 언영, 덕순의 자손들만이 과천에서 세거하였다. 이들의 묘소는 막계리에 있었으나 1979년 과천서울대공원의 건설로 인해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唐洪系)
시조는 은열(殷悅)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 1등공신에 올랐다. 13세에서 파조가 되는데, 운수(云遂)를 파조로 하는 익산군파(益山君派)가 과천에 입향하였다. 곧 30세인 하섭(河燮: 1786∼1857)의 묘가 과천현 문원리 홍말(현 중앙동 정부제2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므로 남양 홍씨는 18세기 말에 과천에 입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34세까지의 묘소가 있었으나 종합청사가 들어오는 관계로 화성군 비봉면 상하리에 이장하였다.
【집필자】 張得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