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을 클릭하면 인터넷 라디오 팟캐스트 [똑소리닷컴]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은 초등학교 시절
“여러분은 초등학교 시절을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초등학교 6학년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다른 학년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역사적인 대 사건, 민족사의 상징 ‘8•15해방’과 여수시민으로서는 멍에처럼 따라 다니는 ‘여순사건’을 다 겪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인터넷 라디오 팟캐스트 ‘똑소리닷컴’ 47번째는 여수서초등학교 37회 졸업생인 김정한, 박중석 님을 김정한 님의 멋진 문수동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김정한 님은 6학년 4반, 박중석 님은 6학년 1반, 반은 달라도 친한 친구였습니다. 두 분 모두 격동기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녀서 그 때 기억에 남는 일들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1943년부터 1948년까지 일이므로 제대로 기억이 떠오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여수서교 37회 동창생 박중석, 김정한
당시 여수읍에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지금의 여수동초등학교와 한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지금의 여수서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여수동초등학교는 1911년 7월 15일 여수 거주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여수공립심상소학교로 시작하였습니다. 진남관에서 시작해서 1916년 고소동 옛 여수우체국 터에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고, 1935년 일본인 수가 늘어나 현재의 공화동으로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여수서초등학교는 1909년 여수사립경명학교로 시작하였습니다. 1911년 여수공립보통학교가 되어 노인당에서 진남관으로 이전하였다가 1935년 현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6학년4반 김정한 님
초등학교 6학년 때 겪은 여순사건
19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 다음 날 여수서공립국민학교,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학생들은 학교로 나갔습니다. 평소 구령대 위에 서지 않았던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모았습니다. “학교에 나오지 말고, 지금 당장 집으로 가라”는 말씀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막무가내로 집으로 갔습니다.
10월 27일 국군과 경찰이 시내를 진압하고, 어린 학생들까지 한데 모았습니다. 군자동에 사는 박중석 님은 진남관, 서교동에 사는 김정한 님은 서교에 영문도 모른 채 집합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큰 박중석 님은 붙들려갔다가 국민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혀 풀려났습니다.
서교동에 사는 김정한 님은 여수서국민학교에 모였습니다. 국민학생이라 별 탈이 없었지만 못 볼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순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학교 텃밭에서 호박잎을 뜯어오라고 시키고, 뒤에서 총으로 쏘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총살당하는 모습을 본 충격이 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6학년 1반 박중석 님
격동기를 이겨내고, 지역에서 인정받는 인사
학교도 동네도 모두 어수선한 가운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분은 공부를 잘하여 공립 여수수산중학교로 진학을 하였습니다. 학제가 바뀌어서 수산중학교가 ‘여수서중학교’와 ‘여수수산고등학교’로 분리되었습니다.
뒤에 여수서중 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수서중, 여수수고 동창들은 모이고 있으나 초등학교 동창회는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고,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한국 현대사 격동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두 분은 이제 여수지역에서 인정받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김정한 님은 부산수산대학교를 나와 모교인 여수수고 수산교사로 부임을 하여 전공인 냉동학 석사와 박사까지 취득을 하여 여수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박중석 님은 건설업을 하고, 여수시의원을 지냈습니다.
인터뷰를 한 문수동 김정한 님 자택
지금은 김정한 님께서 거동이 불편하여 박중석 님이 문수동에 있는 김정한 님 댁을 자주 찾아 만나고 있습니다. 여수서초등학교를 졸업한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다정하게 지내는 두 분을 보면서 부러워 보였습니다.
헌책방에서 구한 37회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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