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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묘방(妙方)은 무방(無妨)이다
시중에는 ‘글쓰기의 성공에 일조하겠다’는 관계 서적들이 많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는 소리이다. 그중 많은 글쓰기 관련 책들은 ‘글쓰기는 글쓰는 것’으로부터 풀어야 한다고 비의(秘意)인양 서두를 뗀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아스의 매듭(Gordian Knot)을 한 칼로 쳐 풀 듯, 글쓰기 고민을 이 한 마디로 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끊어진 것일 뿐.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택도 없는 소리다. 저 쾌도난마식 글쓰기 묘방(妙方)이란, 실상 무방(無妨)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는 글쓰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글을 쓰려는 마음 자세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은 마음속에서 느끼어 밖으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만 마치더라도 다 글을 읽고 쓰는데 아무 문제없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기에 글을 못 쓴다는 말인가? 왜, 주제는 실종 신고요, 문장은 앞뒤가 묵은 원수처럼 서걱거리고, 내용은 읽으나마나한 아롱이다롱이요, 더욱이 글과 글쓴이가 어쩌면 저리도 데면데면하단 말인가?
이제 내 나름의 글쓰기 묘방을 세 가지만 적어보겠다. 묘방인지 무방인지는 독자제현께서 판단하시라.
첫째, 글은 마음이다.
글을 곰곰 살펴보면 첫째 글재주로 쓴 글, 둘째 글쓰기 기술을 습득하여 쓴 글, 셋째 마음으로 쓴 글이 보인다. 첫째와 둘째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글쓰기 재주로 문장을 희롱하고, 서론,본론,결론 등 글쓰기 구성 방법에 맞추어 국수기계로 국숫발 뽑듯 하면 된다. 이른바 뽐내는 글발도 있고 구성도 나무랄 데 없으나 마음, 즉 글을 쓰려는 진정성이 없다. 재치 문답과 요설과 재담이 설레발을 치고 경직된 어휘들만이 기계적으로 연결되어있을 뿐이다. 글 치장만 요란한 ‘포로노성 글’과 인간으로서 모양만 갖춘 ‘로보트성 글’은 여기서 나온다.
짙은 화장으로 치장했으되 마음이 없는 여인을 사랑할 사내가 없듯, 억센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의 근육질 몸매이나 차디찬 심장만이 뛰는 사내를 사랑할 여인도 없다.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도 겉꾸림을 알아챈 독자는 이내 돌아앉는다. 이런 글들은 대개 허섭스레기가 된다.
그래 글쓰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셋째이다. 셋째는 재주와 기술이 아닌 마음이다. 이태준 선생은 이제는 글쓰기의 정전이 되어버린 《문장강화》에서 “글은 아무리 소품이든 대작이든 마치 개미면 개미, 호랑이면 호랑이처럼,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는, 일종의 생명체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글이 생명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 눈과 귀로 낚아 온 사물을 마음으로 조리할 줄 아는 글쓰기에 대한 정열, 진정성이 있어야만 글은 생명력을 얻는다. 글쓰기의 문제의식, 풀이하여 ‘글은 왜 쓰는가?’의 출발점은 그래서 이 마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고전으로 불리는 글들에는 모두 이 마음이 들어 있다. 글쓰기의 대가인 연암 선생이나 다산 선생의 글도 물론이다. 글을 쓰려는 자, 마음을 도스르고 글을 쓰겠다는 마음 자세를 갖추어야한다. 오늘날 고전으로 불리는 글들에는 모두 이 마음이 들어 있다. 글쓰기의 대가인 연암 선생이나 다산 선생의 글도 물론 이 마음을 디딤돌로 한다.
“연암 선생은 평소 글을 쓰실 때 천근의 활을 당기듯 하셨다(平日著作 如持千斤之弩).”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 연암 선생의 문집인 《중편 연암집》을 간행하며, 그 <서>에다 적어 놓은 글귀이다. 연암 선생의 글쓰기가 ‘천근의 활을 당기듯’ 그렇게 신중했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목숨을 걸어서였다. 연암은 글쓰기를 전쟁터에 나서는 마음으로 임하라고 한다. 전쟁터에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은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글쓰기의 최고수이다. 그의 글 중,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라는 글은,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겐 최고의 지남석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였다.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이고, 제목은 적국이라고 한다. 그만큼 치열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글은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이다.
마음 자세를 갖추었다고 글쓰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소박하고 깨끗한 마음이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박하고 깨끗한, 진실한 마음이라고 다산 선생은 말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사의재기(四宜齋記)>를 읽어 보자.
<사의재기(四宜齋記)>
사의재(四宜齋)라는 것은 내가 강진(康津)에 귀양 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四宜齋)라고 한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四宜齋者 余康津謫居之室也 思宜澹 其有不澹 尙亟澄之 貌宜莊 其有不莊 尙亟凝之 言宜訒 其有不訒 尙亟止之 動宜重 其有不重 尙亟遲之 於是乎名其室曰四宜之齋 宜也者義也 義以制之也 念年齡之遒邁 悼志業之頹廢 冀以自省也).
다산 선생은 강진에 처음 도착해 4년 동안 주막집에서 기거했다. 귀향을 와 주막집 곁방살이일망정 글하는 선비로서의 기개를 꺾지 않고자 사의재(四宜齋)라는 방 이름을 지었다. ‘사의재’란 ‘네 가지의 마땅함이 있는 서재’라는 뜻이다. 생각은 담백하게(思宜澹), 외모는 장엄하게(貌宜莊), 말은 적게(言宜認), 행동은 무겁게(動宜重)가 ‘사의’이다. 다산은 그 중, 담백한 생각을 초꼬슴으로 들었다. 담백한 생각이란 욕심이 없고 마음이 소박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정직한 성품, 살아 있는 감성, 창의적 사고, 풍부한 독서력, 강한 집중력’ 1980년대 미국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연구소가 실시한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 600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성공한 사람들의 다섯 가지 특징이란다. 그런데 여기에도 글 쓰는 이의 마음이 보인다. ‘정직한 성품’과 정약용 선생의 이 ‘담백한 생각’은 너나들이하는 이웃이기에 말이다.
어느 책을 보니 ‘글을 아는 만큼 쓰고, 쓰는 만큼 는다’라 하였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담백한 생각’이 없으면, 글을 써도 글로 남지 못해서이다. 조선시대 ‘담백한 생각’으로 쓰이지 않은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글로 다가서지 못한다. ‘담백한 생각’이 없는 글들은 하나같이 태평성대 운운에, 충신연주지사였기 때문이다.
담백한 마음으로 보았기에 다산은 “천하가 이미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天下腐爛已久)”라고 시대를 토혈하였다. 그래 다산의 시들은 조선후기, 막돼먹은 세상의 방부서(防腐書)가 될 수 있었다. 다산은 당대의 곤욕스런 현실에 발 개고 나앉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글은 이러한 사회 현실에 대해 잔뜩 뼈물고 쓴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다산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있지 않다면 시가 아니다(非有美刺勸懲之義非詩也)”라고 시의 정의를 내렸다.
다산 선생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있어야 글이라고 한다. 세상의 허위, 위선과 싸우는 것이 글의 사명이라 저렇게 자각하였기에, 자신이 양반이면서도 그른 행동을 일삼는 동료 사대부에게 칼날을 겨눌 수 있었다. 그가 저술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와 2000여 편이 넘는 사실적인 시들은 모두 담백한 마음으로 조선의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한 데서 나온 결과들이다.
따라서 정약용 선생의 글쓰기를 ‘광제일세(匡濟一世)와 문이재도(文以載道)’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오해는 말아야겠기에 몇 자 적바림해 두어야겠다. ‘문이재도 글쓰기란’ 문장은 바른 도리를 싣는다는 소리요, ‘광제일세 글쓰기’란 글로 세상을 바르게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문이재도는 조선의 글쓰기 오백년의 못된 관습이요, 광제일세 또한 교훈성이 지독히 강하여 중세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고들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다산 선생의 글은 한 치도 중세의 헛된 구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이재도나 광제일세를 외치는 중세의 글들에서 자주 만나는 충신연주지사나 태평송, 혹은 풍월이나 읊조리는 음풍영월은 정약용 선생의 삶과 글에 아예 없다. 그는 이러한 글을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꽃이요, 떠내려가는 꽃술’에 지나지 않는다며 글로 여기지 않았다.
곰곰이 따지자면 광제일세와 문이재도라는 말도 딱히 중세의 표본실에 박제되어 안치될 용어로만 볼 것은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그제나 이제나 늘 악다구니판이다. 더욱이 현대는 더욱 그러하잖은가. 그나마 있던 도덕과 정의와 인간이 실종된 자리에는 부도덕과 부조리와 비인간성만이 차고앉았고, 보태어 생게망게 돈이란 천하말종까지 경제 운운하며 한몫 끼자고 덤비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이다. 그래 몇 몇 잘난 자들의 그들만의 천국이 되어버린 이 세상이기에, 글에서나마 인간의 보루로서 문이재도와 광제일세를 추구한다면 딱히 나무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다. 글쓰기가 단순히 오락과 실용이어야 할 이유는 전연 없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들로서는 다산 선생의 글쓰기에서 시대와 공간을 극복하는 글쓰기로서 나아갈 바를 찾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작금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외수 선생의 말이다. 다산 선생의 ‘담백한 생각’과 다를 바 없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600명의 다섯 가지 특징 중 하나인 ‘정직한 성품’과도 차이가 없다.
다산 선생은 이를 ‘미자권징(美刺勸懲)이라 하였다. 미자권징이란’ 글은 진실한 마음이다라는 정의이다. 사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을 담은 다산 선생의 저 ‘미자권징’은 《논어》 <팔일>편에 보이는 ‘회사후소(繪事後素)’와 이웃하고 지내는 사이다. ‘회사후소’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할 수 있다’는 뜻이니,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말한다. 백지가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박한 마음의 본밑’이 없이 눈과 코와 입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이다. 화가의 붓이 지나간 자리에 폭포가 떨어지고 기암괴석이 솟는 것이 아니라, 폭포와 기암괴석을 그리려는 화가의 뜻이 먼저라는 말이니 이를 좀더 짚어 보자.
《논어》의 <팔일八佾>편에 보이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앞과 뒤는 이러하다. 자하가 “‘아양 떠는 웃음의 보조개며 아름다운 눈의 눈동자가 시원스럽고 또렷함이여! 바탕으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하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라고 물으니, 공자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깨우침을 준다.
다산 선생이 미자권징을 쓰고자 하는 마음도 이와 동일하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을 쓰려면 글을 읽는 마음자리부터 비뚤어지거나 굽은 데가 없어야만하고, 사물을 진실하게 그려낼 수 있는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연암 선생은 “방과 창이 비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고 유리알도 비지 않으면 정기가 모이지 않는다”하고는 “뜻을 분명하게 하는 방법은 진실로 비움에 있다(夫明志之道 固在於虛)”라고 확정하였다. 방에 물건이 빼곡히 차 있고 창은 흙으로 덧칠하고, 유리알엔 때가 잔뜩 끼었다면, 어떻게 안을 볼 수 있으며 유리알은 햇빛을 모으는 렌즈 구실을 하겠는가?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글 짓는 이의 마음은 이렇듯 비어 있고 깨끗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발언이다. 이러한 사물의 참모습을 제대로 분별하려는 마음눈이 없을 때, 세상에 영합하거나 안간힘으로 남의 꽁무니만 붙좇으려는 글을 써 댄다. 공자님이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 마디로 평하면 사무사(思無邪)이다(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라고 한 것도 이와 동일하다. ‘사무사(思無邪)’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는 진솔함이란 뜻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비평가 이지(李贄, 1527~1602)의 동심설(童心說)은 글을 쓰는 이라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한다. ‘동심설(童心說)’이란, ‘동심’ 즉 어린 아이의 마음이란 뜻이다. 아이들의 사물에 대한 감각 표현은 성인들보다 진솔하기에 확장된 세계를 갖고 있다. 각종 사회적 관습과 문화, 제도 따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마음 바탕을 그대로 갖고 있어서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 <종북소선(鍾北小選)>에서 이 동심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사단(雩祀壇: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의젓하니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을 앓는 남녀들을 관운장이 앉아있는 상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혼비백산되어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럽고 존귀한 관운장의 상에게 무례한 짓을 한다.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으니,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라(雩祀壇之下 桃渚之衕 靑甍而廟 貌之渥丹而鬚儼然 關公也 士女患瘧 納其牀下 神褫魄 遁寒祟也 孺子不嚴 瀆冒威尊 爬瞳不瞬 觸鼻不啑 塊然泥塑也).”
어린아이는 아직 사람들이 살아가며 만들어낸 관습을 모른다. 실상 관운장의 소상에 무서움을 느끼는 것은 관운장의 소상이 아니다. 중국의 귀신같은 장수로 이미 죽은 관운장에 대한 사회적 관습 때문이 아닌가. 우사단에 모셔져 있는 흙으로 빚은 소상은 실상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운장의 혼령이 있다고 믿으니 생각해 보면 우리네의 모든 상식이 다 이러하다. 그래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 아이의 마음만이 바로 진실 그 자체에 접근할 수 있다.
연암 선생은 계속 말을 잇는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담비가죽)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다. 관운장의 거짓 소상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다(由是觀之 外舐水匏 全呑胡椒者 不可與語味也 羡鄰人之貂裘 借衣於盛夏者 不可與語時也 假像衣冠 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 ‘이웃 사람의 초피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는 사회적인 통념으로 제 생각을 덮어버린 자들이다. 결코 수박, 후추의 맛을 알지 못 하고 제 아무리 좋은 갖옷이라 한들 한여름에는 입지 못할 겨울옷일 뿐이다. 흙으로 빚은 관운장의 거짓 소상에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그것은 한갓 흙덩어리일 뿐이다. 이렇듯 거짓을 진실로 믿는 이유는 물론 배움을 통해서다. 저 위의 이지는 <동심설>에서 “대저 배우는 자가 독서를 많이 하여 의리를 알게 되면 동심에는 걸림돌이 된다”라고 동심을 위협하는 요소로 배움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저 어린아이도 배움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학질을 떼러 제가 코를 후비던 관운장의 소상을 제 발로 찾을 것이다. 이쯤 되면 배우는 것의 어려움 또한 작지 않다.
다시 어린 아이를 주목해 보자. 어린 아이가 사람의 처음이니, 어린 아이의 마음은 사람 마음의 시작이다. 사람 마음의 시작이니 가식 없는 순수한 본마음이요, 순수한 본마음이니 진실이요 참이다. 연암 선생은 글쓰는 자라면 마땅히 이 진실과 참으로 우리의 삶을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문하고 있다.
현대의 문호라고 다를 바 없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세계적인 문호가 된 호르헤 보르헤스(Borges, Jorge Luis, 1899~1986)도 그의 강의를 묶은《칠일밤》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의 믿음을 갖고서 책을 읽고 그 책에 빠져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보르헤스의 말 또한 연암의 글에 보이는 ‘어린아이의 진솔함(幼子之眞率)’과 다를 바 없다. 자기의 본바탕으로 돌아가라는 ‘환타본분還他本分’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가 관운장의 소상을 보고 공포에 질리는 것은 사실 소상 자체가 아니다. 소상에 입혀진 관습적인 해석 때문이다. 이 관습으로 싸인 해석을 벗겨 낼 때, 글을 쓰고자 하는 대상의 진실을 비로소 포착할 수 있고, 진실의 조각이 모일 때, 비로소 진정성(眞情性) 있는 글이 된다. 어느 유명한 교수님의 글짓기 책을 보니 좋은 글의 조건을 독창성, 충실성, 진실성과 성실성, 명료성, 정확성, 경제성, 정직성을 들었다. 여기서 진실성과 성실성이 바로 진정성이다.
조선 후기의 선진 학자들이 말하는 성령(性靈) 또한 이 진정성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마음이니 글쓰는 이의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이는 형식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이를 써라’는 것이 이 성령론의 주문이다.
문장력이나, 표현에 있어서 소박한 글이지만 글 속에서 글쓴이의 진정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면 된다. 화려하여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은 글도 좋지만, 담박한 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수더분함이 오히려 내용 있는 글로 나아간다. 진정으로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러한 글쓰기를 정약용 선생은 “맛 좋은 술이 입 안으로 들어오면, 얼굴에 붉은 빛이 도는 것이란다(猶酒醪之灌於肚 而紅潮發於顏面也)”라고 설명하였다.
앞 문장은 다산 선생이 제자인 <이인영에게 주는 글(爲李仁榮贈言)>에 보인다. 이 글은 다산 선생이 제자 이인영에게 문장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다산 선생은 제자에게 문장이라는 것이 ‘맛 좋은 술이 입 안으로 들어오면 얼굴에 붉은 빛이 도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글쓴이가 자신의 진실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자연스럽게 이를 써야겠다 싶어 쓴 것, 이것이 바로 다산 선생이 말하는 문장이다. 이러한 글이라야만 글쓴이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음식으로 쳐 문체의 수식을 고명이요, 짭조름히 간을 맞추는 것이라 하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성은 음식 바탕인 재료이다. ‘알심 있는 글’의 출발점은 여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봉건왕조에서 일제치하를 거쳐 독재정권까지 남은 글들은 모두 저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것들이다. 잠시 논의를 벗어나지만 세상에 잇속을 댄 책과 독서계에 야합하는 글들이 많은 세상이다. ‘부처님 반 토막’ 같은 소리요, ‘말만 귀향 보낼 넋두리’일 터이지만, ‘저 재주들을 이렇게 써야 만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짓, 위선이 설쳐대면 순수와 진실이 설 자리는 없다. 순수와 진실이 글의 변방에 위치하면 그것은 더 이상 글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자, 어린아이처럼 도덕적으로 무잡하고 순결한 심성을 가져야 한다 함은 이런 의미에서다. 이 마음이 없는 자 글을 쓸 수 없고 글을 써도 글이 아니니, 글쓰기는 눈썰미로 밀어붙이는 학습이나 기술연마가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글쓰기를 통해 출세나 해보려는, 혹은 재간으로 붓장난이나 부려 매문(賣文)하려는 속됨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진정, 이 인위적인 가식이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표현하였을 때 비로소 글이 됨을 잊지 말자. 저자로서 글을 쓰고 싶은 설렘, 문자와 문장과 단락의 어울림, 독자의 책에 끌림도 여기서 부터다.
‘거짓 없는 솔직함(直而無僞)’, 이것이 글의 정신이요, 글쓰는 자의 마음이요, 이러할 때 다산 선생이 말하는 ‘미자권징’의 글이 된다.
셋째, 글은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이다
다산 선생은 <상중씨(上仲氏)>라는 글에서 자연의 색깔이 다양하거늘, 어찌 안동답답이처럼 일곱 가지 색으로만 규정짓느냐고 아래처럼 우리의 짧은 앎을 통매한다.
시험 삼아 풀잎이나 나무껍질을 채취하여 즙을 내기도 하고 달이기도 하여 물을 들여 보니 청ㆍ황ㆍ적ㆍ백ㆍ흑 따위의 오색이나 자주색ㆍ녹색 이외에도 이름 지어 형용할 수 없는 여러 색깔이 튀어나와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색 이외에는 오직 자주색과 녹색 두 색깔만을 알고는 이것 이외의 모든 물건의 빛깔을 다 버리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안동답답(安東沓沓: 융통성이 없이 미련하다는 뜻)이라는 것이겠지요(試取草葉木皮 或汁或煎 以之涫染 則於五色紫綠之外 潑出不可名狀之諸色 奇異雅靜者甚多…我邦之人 五色之外 惟知紫綠二色 凡物色之外於此者 皆棄不容 此 所謂安東沓沓)
보면 볼 수 있거늘, 보려하지 않으니 보지 못하고 없다고만 한다. 자기만의 생각으로만 세계를 보려는 안동답답은 다산 선생의 글 도처에 보인다. 그의 <중씨께 답함(答仲氏)>이란 글을 보면 “옛 사람의 법은 따를 만하면 따르고, 어길 만하면 어기는 것입니다.…선생께서는 요즈음 수학(數學)을 전공하시더니 문자를 보면 반드시 수학으로 해결하려 드는군요. 이는 마치 선배 유학자 중에 선(禪)을 좋아하는 자가 불법으로 《대학(大學)》을 해석하려던 것과 같고, 또 정현(鄭玄)이 성상(星象)을 좋아하여 성상으로 《주역(周易)》을 해석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은 치우쳐서 ‘두루 섭렵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병통(不周之病)’입니다”라고 하였다. 식견이 좁다는 뜻의 ‘보면옹장(保面甕腸)’도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다산 선생은 “옛 사람의 법은 따를 만하면 따르고, 어길 만하면 어기는 것입니다(古人之法 從則從之 遠則遠之”라고 전제한 다음, 수학을 안다고 세상을 수학만으로 읽고, 선을 좋아한다고 불법으로 《대학(大學)》을, 또 후한 때 선비인 정현이 별자리로만 《주역》을 해석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다. 다산 선생이 말한 ‘두루 섭렵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병통(不周之病)’을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이해해 보자.
공자가 말씀하시길, “군자는 주이불비(周而不比)하고, 소인비이부주(小人比而不周)하다”라고 하였다. ‘주이불비’는 원만하여 편벽되지 아니한 것이요, ‘소인비이부주’는 소인은 편벽되고 원만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다산 선생은 그래, “이 세상에 살면서는 두 가지 학문을 겸해서 공부해야 하니, 하나는 속학(俗學)이요, 하나는 아학(雅學)입니다”라고 한다. ‘속학’은 속되고 정도가 낮은 학문이고, ‘아학’은 고상하여 정도가 높은 학문이다. 그러나 속학과 아학은 그 공부가 따로일 수 없다. 속학이 아학이며 아학이 곧 속학임을 다산선생의 <기유아(寄游兒)>라는 글에서 찾을 수 있으니, ‘이물견물(以物遣物)’이 바로 그것이다.
‘이물견물’이란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낸다’는 뜻으로, 다산 선생의 둘째 아들인 학유가 양계를 한다고 하자 준 글인 <기유아>에 보인다. 다산 선생은 이 글에서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하며, “또한 이 중에도 우아하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亦有雅俚淸濁之殊)”라고 한다. 그리고 ‘아리청탁(雅俚淸濁)’의 차이를 구별하려면 농사에 관한 서적을 구하여 그 좋은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며 “혹 그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 보기도 하고, 혹은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서 닭이 살지고 번식하게 하여 남의 집 닭보다 더 낫게 해보거라(或別其色類 或異其塒桀 使雞之肥澤繁衍 勝於他家)”라고 그 방법까지 일러준다. 그리고는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독서한 사람이 양계(養鷄)하는 법이니라(又或作詩 寫雞情景 以物遣物 此讀書者之養雞也).” 다산 선생은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내는 것(以物遣物)’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양계를 치는 일에서 삶의 이치를 살펴내고 이를 글로써 풀어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양계라는 속학이 시라는 아학이 된 것이다.
다산 선생의 편지를 마저 읽어 보자.
“만약 이득만 보고 의리(義理:도리)를 보지 못하며 기를 줄만 알고 취지(趣旨)를 모르는 채 부지런히 힘쓰고 골몰하면서 이웃의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서너 집 모여 사는 촌구석의 졸렬한 사람의 양계법이다.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若見利不見義 知豢不知趣 孳孳滾滾 與鄰人圃老 早莫爭鬨者 此直三家村裏拙夫子之養雞也 未知汝何所安).”
다산은 닭 기르는 일에서도 의리(義理:도리), 취지(趣旨)를 찾으라고 한다.
다산 선생이 하고 싶은 말은 그 뒤에 나온다. “이미 양계를 하고 있다니 모름지기 여러 사람의 서적에서 양계에 관한 글을 뽑아 계경(鷄經)을 만들어서 육우(陸羽)의 《다경(茶經)》과 유혜풍(柳惠風)의 《연경(煙經)》과 같이 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맑은 운치를 간직하는 것은, 항상 이런 방법으로 예를 삼도록 하여라(旣養鷄矣 須將百家書 鈔取鷄說 彙次作鷄經 如陸羽茶經 柳惠風之煙經 亦一善也 就俗務帶得淸致 須每以此爲例)”라고 단락을 맺는다. 다산은 양계가 치는 것에서 ‘계경(鷄經)’까지 나아간다. 물론 예로 들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과 유혜풍(柳惠風)의 《연경(煙經)》도 앞의 것은 차에 관한 글이요, 뒤의 것은 담배에 관한 글이지만 모두 명문으로 인정받은 경우이다.
이것이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내는 것(以物遣物)’이요, 한 편의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요, 속학이 아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다산 선생은 <오학론>3에서 “문장은 밖에서 구할 수 없는 것(文章不可以外求也)”이라고 단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이란 글쓰는 자의 삶의 축적과 경험을 통한 앎의 총체가 닭을 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문자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산 선생처럼 자질구레하니 닭치는 일에서까지 배우려는 트인 배움의 자세가 있어야만 계경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거늘, 모든 사물을 안동답답식으로 본다면 글쓰기의 길은 멀고도 멀다.
다산을 거친 오늘날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안동답답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글쓰기를 현대문학의 전유물로 여긴다거나, 국문학자만이 <춘향전>을 연구한다거나 하는 따위는 그 소박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안동답답이식 사고로 세상을 본들 보일 리가 만무하다.
언젠가 풍 맞은 친구를 만났다. 말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요, 간단한 산책에 술 한 잔도 괜찮았다. 벗은 뇌의 99%를 쓸 수 없다고 병원에서 진단받았다. 단 1% 뇌의 기능만으로 생활을 한다. 다만 음식의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는 이 모든 것이 뇌의 영역임을 알았다. 입이 맛을 보고, 코가 냄새를 맡는 것이 사실 뇌의 영역이다. ‘슬픈 일이 있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른다’
중국의 소설 비평가 김성탄이 “나는 우리 집 안마당에서 세계를 본다”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였다. 김성탄은 “사물을 느끼는 특별한 가슴과(胸中才賦) 자연을 볼 줄 아는 신통한 안목(眉下神眼).”을 요구한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코끼리를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온 힘을 쏟는다”라고도 하였다. 코끼리와 토끼를 동일하게 보고 온 힘을 다한다는 사자에게서, 벌레수염과 태산준령을 따지지 않고 사물을 꿰뚫어 보려는 김성탄을 만날 수 있다.
중국의 저 이뿐이겠는가. 연암 선생 또한 이를 <종북소선 자서>에서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글 지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작용하는 제 형상을 세심하게 따지지 않는 사람은 글자 한자를 제대로 모른다고 일러도 괜찮다(不屑於蟲鬚花蘂者 都無文心矣 不味乎器用之象者 雖謂之不識一字可也)”라고 적어 놓았다.
보려는 마음 없이는, 보았다고 본 것이 아니다. 보려는 마음, 관심이 먼저이다.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를 보고 관심이 없다면 글 지을 마음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연암은 글쓰기의 시작을 ‘글 지을 마음(文心)’에다 두었다. 문심이 있어야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에 관심이 간다. 문심이 없어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글이 나오겠는가. ‘건너다보니 절터’라고, 하나를 보면 열을 속가량할 수 있다.
이덕무 선생의 <잡제>1이라는 시는 이러한 마음에서 나온 시이다. “비 온 못에 개골개골 무척이나 시끄러워(雨池閤閤太愁生) 돌을 주워 던져 개구리 울음을 그치게 하렸더니(拾石投䵷欲止鳴) 탈 없이 여뀌뿌리 푸른 글자를 내고(無恙蓼根靑出字) 비늘 고운 금붕어 물결 차며 놀라 뛴다(潤鱗金鯽撇波驚)”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누구나 듣는 개구리 울음이 한 편의 멋진 시가 되었다. 개굴개굴 개구리 울음이 꽤 시끄러웠나보다. 그래 조용하라고 돌멩이를 던졌겠다. 돌이 떨어진 곳을 보니 글자를 써 놓은 듯 여귀뿌리가 파랗게 올라오고 금붕어는 물결치며 놀랜다. 개인적으로는 “탈 없이 여뀌뿌리 푸른 글자를 내고”라는 표현이 참 멋들어진다. 연암 선생이나 이덕무 선생 모두 글을 쓰고자하는 자라면 벌레수염이나 개구리 울음소리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라한다. 융통성 없는 미련한 안동답답이는 되지 마라는 촉구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를 아는가? 그녀는 두 눈을 가린 채 한 손엔 저울을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다. 장님이다. 눈이 하는 거짓말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눈은 세계를 볼 수도 있지만 때론 제 앞도 못 본다. ‘눈 뜨고 봉사질 한다’나 ‘눈이 아무리 밝아도 제 코는 안 보인다’는 이러한 눈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속담이다.
“저거 봐! 달구지에도 볏단이 실려 있고 그 옆을 걸어가는 농부의 지게에도 볏단이 가득 실렸잖아요” 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가 김천을 지나다 한 말이다. 그녀는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을 저기서 보았다. ‘소를 생각하여 달구지에 앉지도 않고 또 자신이 소의 힘을 덜어주려 지게에 볏단을 한 짐 가득 지고 가는 농부의 마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건만, 우리는 보지 못한 것을 저 푸른 눈의 이방인은 찾아냈다. ‘조선의 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펄벅의 마음이다.
글쓰는 이로서 ‘마음’이 거론되었으니 이를 한 번 보고 가자. 글쓰고자하는 이의 마음에 대해 19세기 서화가요, 시문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선생은 가슴에 담아 둘 경구를 준다. 그의 노년기 산문을 모은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서 어떤 이가 시를 빨리 짓는 법을 묻자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非徒多讀書)”라고 단정 지으며 이런 말을 한다. “구름이 흘러가고 비가 오며, 새가 우지지고 벌레가 우는 것이 모두 마음에 관계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길을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이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서 생각의 길이 트이고 예리해진다(雲行雨集 鳥蟲吟 無一不關涉於心 行住坐臥 未嘗暫忘於是 從此思路闊利)”라고. 조희룡 선생이 글을 빨리 쓰고 싶은 자에게 준 비답이 이 마음이다. 글을 쓰고자하는 마음, 그래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 깊이 마음을 줄 때, 비로소 사물이 새롭게 보이고 생각의 길이 트여 핵심을 포착한 예리한 글을 쓰게 된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바다 위에 하나의 금강이 있으며, 그림 속에 또 하나의 금강이 있으며, 그림 속 사람의 마음에 또 각기 하나의 금강이 있으며, 그림을 보는 백천만인의 눈 속에 제각각 또 하나의 금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개자씨 속에 수미산이요 터럭 끝에도 절이 있다는 말이 광탄한 말이 아니다(須知海上有一金剛 畵中又有一金剛 畵中人胸中 又各有一金剛 觀畵者百千萬人眼中 一一各有一金剛 所謂芥子須彌 毛端寶刹 非誑語也).”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 죽은 강개한 선비 정온(鄭蘊, 1569~1641) 선생의 《동계집(東谿集)》권6 <제십이형적명소장해악도병(題十二兄 迪命 所藏海嶽圖屛)>에 보이는 말이다. 정온 선생은 금강산 그림 하나에 금강산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개자씨와 터럭 같은 작은 것에서 수미산과 절을 찾아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개자씨와 터럭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수미산과 절을 창 낸다는 것은 사실 여간한 일이 아니다.
다산 선생의 <이담속찬>을 보니 ‘수소유초(雖小唯椒)’라는 속담 또한 이와 같다. 풀이하자면 ‘작은 고추가 맵다’이다. 체구가 작아도 당차게 큰일을 해낸다는, 작지만 작지가 않다는 역설 아닌가.
어느 책을 보니 옛 선사들은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보라고 가르쳤다한다. 우주만물로 보자면, 미물(微物)과 대물(大物)은 존재조차 없다. 고(故) 이성선 시인의 이러한 시가 있다.
<파도>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파도>라는 제하의 이 시는 자벌레를 통하여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자벌레라는 미물에서, 대지를 지나, 우주까지 이어지는 시인의 통찰이 보인다. 범주적 태도를 벗어난 사물보기이다. ‘범주적태도’란 대상을 어떤 테두리 안에 넣어 인식하려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황․자주를 빨강이라는 범주로 판단한다. 생각할 것도 없이 주황․자주․빨강은 색깔의 명도나 채도가 분명 다른데도 빨강이라는 일정한 개념체계에 귀속시켜서 인식하려는 태도이다.
연암과 이성선 시인은 모두 존재와 본질 중, 본질론에 입각한 사고로 사물을 세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암이 말한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 이성선 시인이 본 자벌레는 미물인 존재이지만, 그 본질은 사물을 이해하는 바탕이 되지 않았는가. 큰 존재 가운데도 본질은 작고, 존재는 작은데도 본질은 큰 것이 있다(大中有小 小中有大).
대만의 국립 고궁박물관에는 감람핵주(橄欖劾舟)라는 것이 있다. 길이 3.4㎝, 높이는 겨우 1.6㎝로 배 모양의 올리브 열매란다. 이 배에는 8개의 문이 있어 자유롭게 열 수 있고, 8사람이 타고 있으며, 배 밑에는 전문 357자나 되는 소동파의 <적벽가>가 조각되어 있다한다. 이 작은 조각 작품이 중국인의 기개를 널리 알림은 물론이다. 작은 것이 이토록 크다.
연암의 제자로 글을 쓰는데 광괴(光怪:작가의 독특한 정신)를 매우 중요시하였던 서유구도 도(道)가 ‘기와․벽돌에도 있으며 오줌에도 있으며 하물며 벼루, 안석, 종묘의 솥 등에 있다(道之爲物也 紛乎其無不爲也 密乎其無不寄也 在於瓦甓 在於屎溺 而况乎硏几鼎彜之屬邪).’라고 하였다. 서유구가 말하는 도란 모든 만물에 있는 자연법칙인 이치와 도리를 말한다. 그 대 원리인 도지만 그것을 기와, 벽돌, 오줌, 벼루, 안석, 솥 등 하잘 것 없는 것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구시심비(口是心非)라는 말도 그렇다. 뜻을 말하자면 ‘말로는 옳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입으로 나온 말과 마음이 다르다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역설이니, 존재를 본질로, 말을 곧 뜻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연암으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연암은 마음으로 본 사물을 흥미로운 방법으로 그려놓았다. 연암의 둘째 아들인 종채는 《과정록》에서 아버지께서 글을 쓸 때, “모양이 둥근 것은 모나게 그리고, 모양이 긴 것은 짧게 그린다貌圓方寫 貌長短寫”라고 써놓았다. 언뜻 보면, ‘거짓으로 그리라는 것인가?’하고 곡해할 수도 있다. 전연 그런 문맥이 아니다. 연암의 말은 실제와 상반되게 그림으로써 ‘실물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반어적 표현으로 실물을 그려내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함을 강조하려는 문맥으로 읽어야 한다.
사물의 현상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관념적 추론’까지도 요구하는 문장이다. 연암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것으로서 시를 알게 된다觀乎美人 可以知詩矣”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사물에서 뜻을 찾는 법을 밝히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데서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고, 턱을 괸 데서 원한이 있는 것을 보고, 혼자 서 있는데서 무슨 생각이 잠긴 것을 보고, 눈썹을 찡그린 데서 무슨 근심에 싸인 것을 보고, 난간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구를 기다림이고,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구를 바라봄이다(彼低頭 見其羞也 支願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이것은 시를 이해하는 방법을 기록한 것이지만, 이 시를 사물로 돌려 생각한다면 연암의 대 사물인식의 일단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여인이 고개를 숙인 데서 부끄러움을, 턱을 괸 데서 원한을, 혼자 서 있는 데서 생각을, 눈썹을 찡그린 데서 근심을, 난간 아래에 서 있는 데서 기다림을,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데서 누구를 바라봄을 읽었다. 연암의 사물인식의 자세는 현상을 깊이 있게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풍부한 사전지식을 동원한 주관적 관념의 세계와 객관적 사물의 세계를 합일한다. 즉 ‘경험론적 요소’와 ‘관념론적 요소’를 아울러야만 진정한 ‘진’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연암은 끊임없는 경험과 사물을 인식하는 자의 치열한 의식을 요구한다. 결국 연암이 추구한 사물인식의 ‘진眞’은 마음속으로 ‘사물을 번역해낸 그곳’에 있다. 음향, 감촉, 빛깔 따위와 같은 외형적, 감성적 성질, 즉 ‘벌레 수염과 꽃 잎사귀’만을 단순히 그대로 그려내는 모사(模寫)나 재현(再現)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암이 사물의 ‘진적眞的, 참되고 틀림없는 것’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이는 딱히 연암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조선 후기의 대문장가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선생의 《하산집(何山集)》서문을 보자. 그는 ‘대체 시는 어떻게 해서 짓는 것인가?’하며 “성령(性靈)에 바탕을 둔 생각을 물상(物象)에 가탁한 것이 시다. 푸르고 누른 것을 아름답게 꾸민 것이 문장이고, 궁성(宮聲)과 상성(商聲) 등 여러 가지 소리를 변화 있게 배치한 것이 곡조가 되는데, 이것은 일정하게 법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변화하는 데 맞춰 정신이 방향이 없으면 이도 변하여 일정한 체(體)가 없는 것이니, 시(詩)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상(象)이 변하기에 따라서는 눈 속의 파초라고도 할 수 있고 경(境)은 바뀌기에 따라서는 개자씨 속의 수미산(須彌山: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으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다는 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일정하게 안배해서 고정시키는 것으로 일을 삼겠는가”라고 하였다.
글줄을 좇자면 김창흡은 시를 성령과 물상으로 나누고, 성령(주관적인 마음)을 물상(객관적인 세계)에 가탁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어디까지나 주체는 성령이고 물상은 객관적인 세계이기에 주체에 의해 물상은 얼마든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象)을 눈 속의 파초’도 볼 수 있고 ‘경(境) 또한 겨자씨 속의 수미산’으로 이해한들 어떠하냐는 말이다.
글을 쓰는 자가 이렇게 사물을 읽어 내려면 마땅히 연암 선생의 저 ‘경험론적 요소’와 ‘관념론적 요소’를 아울러 기르지 않고서는 곤란한 일이다. 그렇기에 김창흡 선생도 “어찌 일정하게 안배해서 고정시키는 것으로 일을 삼겠는가”라고 안동답답이 식의 고정된 생각을 꼬집는 것이다.
‘나뭇잎 잎’자
말로 모건이 지은 《무탄트 메시지》라는 책을 읽고 내 시야가 참 좁다는 것을 느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오스틀로이드’들(그들은 스스로를 '참사랑부족'이라 일컫는다)은 문명인들을 가리켜 '무탄트'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탄트는 ‘돌연변이’라는 뜻이다. 돌연변이란, 기본구조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원주민들은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인 동물, 나무, 풀, 구불구불거리는 샛강, 심지어 바위와 공기조차도 우리와 한 형제이며 누이라고 믿고 있다.
세심히 볼 일이다.
연암의 또 다른 사물보기이다.
잎을 표현하기 곤란하니 연암은 이렇게 ‘,(자세히 잎의 힘줄을 보면 ‘천자만년天字萬年’이란 글자라고 되어 있다. 《열하일기, 황교문답》에 보인다.)(편집자님, 그림으로 그려 주세요)을 그려 넣음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글자의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나뭇잎 잎’자 아닌가?
등산을 하다. 자귀나무를 보았다. 세 잎사귀를 잘 보라. 차이점이 있다.
양 쪽이 산초나무 잎이고, 가운데가 자귀나무 잎이다. 일반 잎사귀는 대부분 잎사귀 끝이 하나로 되어있다. 작은 잎들이 둘씩 비대칭으로 나고, 맨 끝에 잎이 하나 남는다. 아카시아 잎 떼기 놀이를 한 사람은 끝에 남은 하나의 잎이 새록할 것이다. 자귀나무 잎은 마주보며 사진처럼 대칭으로 짝을 이루는 모양이다. 이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잎을 오므린다. 광합성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이야기를 놓았다. 잎이 짝수이니 밤이 되어 서로 포갤 때, 홀로 남는 잎이 없다. 이것에 착안하여 부부 금슬을 이르는 합환목(合歡木),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라고 부른다. 자귀나무의 열매는 콩깍지 모양이다. 금세 떨어지지 않고 겨울바람에 부딪혀 달가닥거린다. 이 소리가 시끄러워 여설목(女舌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인들처럼 수다를 떠는 나무’라는 뜻이다.
가끔씩은 늘 보던 것도 이토록 새삼스럽다.
연암의 관찰력을 따라잡자면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일반 상식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페달을 구르지 않으면 자전거는 움직이지 않고, 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인생길을 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송곳의 끝이 뾰족하다고? 그렇지 않다. 돋보기로 보면 뭉툭하다. 흔히 밤하늘의 별은 반짝인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반짝거리지 않는다. 1년은 365일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1년은 365.2422일이 맞다.
계이름 역시 그렇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우리 선조들이 쓴 궁상각치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1에서 10의 중간은? 5가 아니라, 5.5가 맞다. 행복과 불행은 멀고 먼 관계? 아니다. 행복이라는 ‘행(幸)자’와 괴롬이라는 ‘신(辛)자’는 겨우 선 ‘하나(一)’ 차이일 뿐이다. 흔히 순금은 ‘다른 금속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금으로만 만들어졌다고 생각지만, 제 아무리 높아야 99.99%까지 밖에는 안 된다. 이 세상엔 어떤 물질이든지 100% 완벽하게 해당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관찰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관찰을 하면 파리 대가리나 모기 속눈썹에서도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사물을 세세히 훑는 눈빗질이 없이는 사물을 볼 수 없다.
관찰하기는, 저 바다 건너라고 다를 바 없고, 교육이나 소설도 동일하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첫 번째 교육원칙도 바로 이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아이들에게 관찰하기(Observes)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감각을 동원한 관찰하기이니 그냥 눈으로 대충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1천1백 쪽이나 되는 원본을 1백 40번이나 수정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1천1백 쪽, 그 조그만 개미도 관찰하기 나름이란 걸 알 수 있다. 책 한 권이 들어 있는 한 문장도 지극히 작은 지세지미(至細至微)에서 극히 묘한 지묘지화(至妙至化)의 경지가 있음도 모두 이 관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진기를 나무에 대보거나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자. 아마 사물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글은 바로 그곳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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