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암에서 내려와 선운사 경내로 들어가려니 왜인지 더욱 높아진 것 같은 천왕문을 만난다. 없던 흙돌 담장을 쌓아놓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계단이 높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느낌은 그런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져서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며 천왕문을 들어선다. 오늘따라 동,서,남,북의 천왕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더욱 작아진 내몸을 느끼며 경내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선운사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북 고창, 도솔산(또는 선운산이라고도 한다) 북쪽 기슭에 자리한 선운사(禪雲寺)는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창건했다는 설과 위덕왕 24년(577년)
백제의 승려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이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1707년 쓰여진 '도솔산선운사 창수승적기(創修勝蹟記)'에 다음과 같은 선운사의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 밤에 좌변굴(左邊窟; 진흥굴)에서 잠을 잤다. 꿈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는데, 이것이 선운사의 시초라고 한다. 한창 때는 암자 89개, 당우 189채, 수행처 24개소 그리고 승려 3천여명을 거느린 대찰이었다" 라고 선운사의 역사에 대해 말해준다.
[선운사 천왕문...]
도솔교를 건너서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위층에는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천왕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기록에 의하면 천왕문은 1624년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만 현재의 문은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최근 사역을 정비하면서 앞쪽으로 이건되었다. 아래층에는 중앙에 통로를 내고 좌우 협칸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여 천왕문의 성격을 가지게 했는데, 위층에는 범종을 두어 범종루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몸은 푸른 빛을 띠고 있으며, 손에는 늘 비파를들고 비파줄을 있고.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몸은 붉은 빛을 띠고 있으며, 손에는 칼을 들고 주먹을 쥐고 있으며.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몸은 하얀 빛을 띠고 있으며, 손에는 용을들고 여의주를 들고 있고.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몸은 검은 빛은 띠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을들고 보탑을들고 있다.
[선운사 만세루와 대웅보전...]
[선운사 대웅보전 (보물제 290호)...]
보물 제290호(지정일:1963. 1. 21).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현판...]
대웅보전 앞마당 오른쪽에 위치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방형의 축대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탑의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양식을 지녔고, 5단의 옥개층급을 지니는 등 부분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탑을 연상케 하는 고려 초기의 작으로 추정된다.
대웅보전의 왼쪽에 있는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전각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고 1713년에 단층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건물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초석의 형태인데, 전면의 초석을 보면 위치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생겼음을 볼 수 있다. 즉 어칸은 육각형의 대석에 원형으로 다듬어진 초석을 사용한 데 비해 측면 쪽으로 그 다음 것은, 아래는 자연석 초석이나 상단을 원형으로 쇠시리한 것을 사용하였고, 제일 바깥쪽의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공포는 쇠서를 내밀지 않고 초각으로 말아 올린 물익공 형식에 가까운 형태로 처리하였으며, 상단에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고 화각첨차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하였다. 불단은 전면과 측면의 벽체에 붙여 ‘ㄷ'자 형태로 구성하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명부시왕을 봉안하였다. 천장은 노출천장 을 하였으나 지장보살이 봉안된 윗부분에만 빗천장을 설치하고 운룡문을 그려 닫집을 대신하였다.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좌상 (보물 279호)...]
보물 제279호(지정일:1963. 1. 21).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높이는 1m이다. 머리는 고려시대 지장보살상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두건(頭巾)을 쓴 모습이며, 두건을 묶은 좁은 띠가 이마를 두른 후 귀를 덮고 양 가슴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풍만한 얼굴에 조그마한 아래턱 주위로 살집이 많은 이중턱을 이루어 후덕한 인상을 주며, 목에는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무릎 높이가 낮아서 상체에 비해 빈약한 편이고, 결가부좌한 다리는 옷에 덮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서 엄지와 넷째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에 붙여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렸는데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에서 끈으로 매듭지은 독특한 치레장식이 특징적인데, 이는 고승의 진영이나 불ㆍ보살상에서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겉옷 안에는 수평으로 가로질러 가슴까지 올라온 군의(裙衣)를 띠매듭으로 단정하게 동여매었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보물 제280호)과 목걸이 장식이나 밋밋한 가슴표현 등이 유사하지만,
머리가 크고 하체가 빈약하여 신체비례가 부자연스러운 점, 목이 짧고 어깨가 올라가 움츠린 듯한 자세, 간략한 장식과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고려 보살상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상의 하나로,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산전 뒤편에 길게 설치된 기단 위 팔상전의 옆에 위치하였따.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일반적인 산신각과 달리 선운사의 창건주인 검단선사와 참당사의 창건주인 의운스님을 함께 그린 진영이 중앙에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으로 산신당의 주인인 산신을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당에는 창건주 검단조사와 의운스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선운사 동백숲 (천연기념물 184호)...]
[선운사 대웅보전 처마기둥이...]
[선운사 요사채?...]
2년만에 다시 찾은 선운사 이건만 추운 겨울에 온 것과 여름에 온 것이 다를 뿐 사찰은 말이 없다. 다만 몹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확 트인 경내이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흙돌 담장을 그것도 한길이 넘게 높이 쌓아놓아 답답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리고 또 달라진 것은 약수터의 감로수이다. 그렇게 맑고 투명하던 물줄기가 허옇게 변했다. 그리고 3단계로 되어있는 돌그릇의 바닥을 보면 석회석이 녹아내려 부옇게 가라앉아있는 것이 보여 이상하였다. 평일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그룹의 관광객들이 있어 썰렁한 경내를 밝게 빛내주었다.
카메라를 안가지고 오신 분들이 계셔서 성산이 몇팀의 모습들을 찍어준 모양인데 전부 접사모드로 찍어주어 아마도 사진이 잘 안나온 모양이라 올릴 수가 없다 한다. 그리고 가슴아 팟던 것은 멋진 고목이 길옆에서 자랑을 하며 서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팔이 부러진 것 모양 하나 남은 가지가 부러져 땅바닥에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그래서 재작년 겨울 사진과 같이 올려보았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3호(지정일 : 1974. 9. 27).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하였다. 중앙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
[선운사 요사와 선불장...]
[앗! 특이한 고목이 부러진 까닭은 무엇일까?...]
[이곳도 고목위에 돌무더기를...이곳은 옛 그대로인데]
[온산엔 밤꽃이 활짝...]
[휴게소 식당 뒤 저수지건너 멋진 바위산...]
선운사를 돌아보고 나니 정말로 시장기가 돌기 시작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에 열중하다 보면 전부 잊어 버리는데 일을 마치고 나면 힘들다던가 배가 고프다던가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꽉 메우게 되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는가?... 오늘도 여지없이 남들 점심 시간에 아침 식사를 하게 된다. 이제 시계는 12시를 향해 달려간다. 이곳에 온 이상 고창읍성과 고인돌은 보고 가야 된다고 생각을 한지라 우선 고인돌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고창읍 매산리로 향한다. 가는 도중 아산면 휴게소 식당에서 아침겸 점심을 때운다.
식당 뒷마당에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 뒤도 멋진 바위산이 있는 그런 식당에서 먹는 점심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고창의 고인돌 유적지를 둘러보고 이제 법성포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해변을 따라 해수욕장과 영광원전을 지나 아름다운 해변을 내려다 보며 계속 법성포쪽으로 내려선다.
[부영루와 기념광장 공사 중...]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관광사업 조망도...]
이제 법성포만으로 천천히 해변길로 향해 달리는데 또 밤색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백제 불교 최초도래지" 라 쓰여있다. 아니 가볼쏘냐 차를 우측으로 돌려 산을 넘어 가보았는데 이제 공사가 얼마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내년에나 오픈을 할 것같은 진척도이다. 이곳은 불갑사에서 주관하는곳이라 한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어두워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의 쉴 곳을 마련해야 했다. 법성포를 가 보았으나 복잡하기만 한 것이 영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다. 그럼 불갑사가 가까운 영광에서 숙소를 잡자고 생각하고 컴컴한 22번 국도를 달려 영광에 입성을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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