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가 익어갈 무렵
(Le Temps Des Cerises)
작사 : 장 바티스트 클레망
작곡 : 앙투안 르나르
체리가 익을 무렵이면
쾌활한 나이팅게일과 개똥지빠귀는
신이나 흥겨워지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가슴은 터질듯 부풀고
연인들의 가슴은 뜨거워진다.
체리가 익을 무렵이면
개똥지빠귀의 지저귐은 더 한층 높아만 간다.
하지만, 체리의 시기는 짧고
둘이 함께 꿈꾸며
귀걸이를 따러가는 계절은
꼭 같은 옷을 입은 사랑의 체리가
핏방울처럼 나뭇잎 그늘에 떨어진다.
허나, 체리가 익을 무렵은 짧다
꿈꾸며 산호색 귀걸이를 따는 계절은.
사랑의 상처가 두렵다면
아름다운 아가씨를 피하고
비참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체리가 익을 무렵엔
당신도 역시 사랑의 괴로움에 빠지겠지.
난 언제까지나 체리가 익을 무렵을 사랑한다.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엔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 온다 하더라도
이 상처를 고칠 수는 없겠지
언제까지나 체리가 익을 무렵을 사랑한다.
마음속 그 추억과 함께
페르 라셰즈 묘지(Pere-Lachaise)
몇 년 전 늦가을, 곰PD는 파리에서 몇 달을 머문 적이 있습니다. 외곽의 한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해가 질 때까지 파리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발길이 닿은 곳이 페르-라셰즈(Pere-Lachaise) 묘지였습니다. 입구에서 몇 프랑인가를 주고 유명인들의 묘지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사서 들어간 그 곳은 작은 도시처럼 넓었습니다. 하기야 7만기가 넘는 무덤이 있는 곳 이었으니까요.
코뮌 전사의 벽.
쇼팽,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이브 몽탕 같은 사람들이 다 그곳에서 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언덕을 넘어서 묘지 97구역의 동쪽 벽, 총알구멍이 군데군데 나있는 그 허름한 벽 앞에 곰PD는 섰습니다. 그 벽엔 이런 동판이 붙어 있더군요.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코뮌의 죽은 이들에게, 1871년 5월 21-28일)
“나는 5월의 햇살을 받으며, 그리고 말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며 묘지의 담길을 따라 ‘코뮌 전사들의 벽’ 앞에 닿았다. 허름한 벽에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붙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초라한 비석이었다. 벽 앞에는 순례자가 없었다. 그래도 벽 밑에는 빨간 장미꽃 다발이 많이 쌓여 있었고, 벽 틈에도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코뮌 전사들의 벽’.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더 전인 1871년 5월 28일 페르 라셰즈에서 최후까지 항전을 했던 147명의 ‘코뮌 전사’들이 바로 그 벽 앞에서 총살당했다. 이로써 ‘역사적 대희망’이었다고들 하는 ‘파리 코뮌’은 막을 내렸다.”(홍세화 선생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중에서)
1870년 7월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개전 후 2달 동안 프랑스군은 거듭된 졸전을 벌였고 황제 나폴레옹 3세(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 불행하게도 그는 큰아버지의 군사적 재능을 조금도 물려 받지 못했습니다)는 세당에서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9월 2일 항복합니다.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인 루이와 의붓딸 오르탕스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 황제를 폐위 시키고 임시 국방정부를 구성하여 프로이센군에 항전하였으나 9월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 메츠 요새가 함락되고, 이듬해인 1871년 1월 28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진주합니다.
파리를 공격하는 프로이센군.
임시정부는 프로이센과의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지만 대다수 프랑스 국민은 이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개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은 프로이센군에 맞서 계속 항전할 것을 선언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벌어지자 임시정부는 국민방위군의 해산을 명령하지만, 이에 반발한 수도 파리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1871년 3월 18일 새로운 정부를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기존의 군대 대신 시민들이 직접 무장하고 나섰고, 새로운 행정·대의기관을 만들었습니다.이 새 정부는 '코뮌'(Commune)이라 불렸죠. 세계 최초의 노동자 자치 정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프랑스에 적기(赤旗)가 등장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코뮌은 입법과 행정의 임무를 겸하는 기관이었고, 파리의 다양한 구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의원들을 선출했습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노동자 계급이었고 시민들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여성 참정권을 실현했고 아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으며, 징병제와 상비군 폐지, 종교재산의 국유화, 이자 폐기, 노동자 최저생활보장 등의 혁신적 정책과 법령들을 공포했습니다.
바리게이트를 만드는 파리 시민들
그러나 코뮌의 아름다운 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해 5월 21일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임시 정부군은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받아 파리 시내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파리의 거리 마다 바리게이트를 사이에 두고 코뮌군과 임시정부군 간의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파리의 거리, 거리를 체리 빛깔처럼 붉게 물들였던 이 전투는 나중에 프랑스 역사에서 ‘피의 일주일’로 기록 됩니다. (5월21일부터 일주일간 많게는 3만 명, 적게는 1만 7천 명의 파리 시민들이 임시정부군에 의해 살해 당했습니다.)
바리게이트를 수비하는 코뮌군.
그리고 이 전투의 와중에 이 샹송의 작사자인 장 바티스트 클레망(Jean-Baptiste Clement)이 등장합니다. 코뮌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던 클레맹은 시인이기도 했죠. 그가 갓 스무 살의 루이즈(Louise)를 만난 건 코뮌의 마지막 날, 퐁떼느 오 루아 거리의 바리게이트 속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해서 코뮌군 부상병들을 돌보던 루이즈에게 클레망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합니다. 이런 루이즈의 당찬 모습은 클레망의 뇌리속에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묘지 벽에서 최후까지 저항했던 코뮌 전사 147명이 총살 당합니다.
5월 28일, 코뮌군의 마지막 저항지는 시내 한가운데의 페르-라셰즈 묘지였습니다. 화력과 병력에서 열세였던 코뮌군은 비석을 방패삼아 최후의 항전을 벌입니다. 마침내 탄약이 떨어지고 정부군에 사로잡힌 147명의 코뮌 전사들은 묘지 동쪽 벽에 선채 전원 총살됩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무기를 들었던 이들이 묘비도 없이 묻힌 곳은 바로 그 묘지의 벽 밑이었습니다. 정부군은 코뮌이 무너진 뒤에도 대대적인 노동자 사냥에 나서서, 파리의 페인트공, 기와공, 제화공의 반 이상을 살해했습니다.
클레망은 코뮌 함락 직후 영국으로 망명해 십년간 런던에서 거주 합니다. 사면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 온 클레망은 1885년에 시집 ‘노래들’을 간행하며 거기 묶인 ‘체리가 익어갈 무렵’을 그가 만났던 코뮌의 여성 간호사 루이즈를 기념하기 위해 헌정합니다.
장 바티스트 클레망, 1836-1903
“1871년 5월 28일 일요일 퐁텐 오 루아 거리의 구급요원이었던 용감한 시민 루이즈에게.”
루이즈가 퐁텐 오 루아 거리의 바리게이트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페르 라세즈 묘지의 벽에서 총살당했는지, 아니면 체포를 모면해 살아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클레망도 코뮌의 마지막 날 이후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평등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걸었고, 자유와 박애를 바리게이트 안에서 몸소 실천했던 한 젊은 여성에게 14년 뒤 바쳐진 이 헌사를 통하여, 이 노래는 파리를 핏빛으로 붉게 물들인 1871년 5월의 뜨거운 상징이 되어 지금도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장 바티스트 클레망은 ?
사회주의자로 일관한 삶 살아...
장 바티스트 클레망은 ?
장 바티스트 클레망은 1836년 제분업자의 아들로 볼로뉴 쉬르센에서 태어났습니다. 14살 때 집을 나가 구리 세공사의 견습공이 되었고 이후 술 도매상 등에서 일을 했는데,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21세 무렵입니다. 클레망 초기의 시는 전원 분위기를 담은 목가적인 내용이 많았습니다. 1866년에 발표된 이 노래에도 그 정서가 잘 반영되어 체리가 여무는 계절의 짧은 사랑이 아름답게 엮어져 있습니다. 이 시를 쓴 이듬해, 클레망은 브뤼셀에서 테너 가수이자 작곡가 앙투안 르나르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해서 1868년 클레망의 로망스에 선율을 붙였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아마도 이 노래는 코뮌 이전부터 불리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의 마지막 절 “그 때부터 내 마음 속엔 /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어”는 단 2개월로 막을 내린 파리코뮌과 거리의 간호사 루이즈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파리 코뮌 이후 10년간의 영국 망명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 온 클레망은 나폴레옹3세의 제2제정과 파리코뮌 이후의 제3공화국 시대를 노동운동에 종사하면서 사회주의자로 일관하며 살다가 1903년 세상을 떠납니다.
‘체리가 익어갈 무렵’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좌익 레지스탕스를 하나로 묶어세운 연대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티노 로시, 이브 몽탕, 쥘리에트 그레코, 나나 무스쿠리, 장 뤼미에르 등 백 명이 넘는 가수들이 자신들의 앨범에 이 노래를 삽입했습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작고하고 이틀 뒤인 1996년 1월10일, 미국 소프라노 가수 바바라 헨드릭스는 파리 바스티유광장에서 ‘체리가 읽어갈 무렵’을 부르는 것으로 이 사회당 출신 대통령을 기렸습니다.
-windbird님의 홈페이지에서 /capa1954
(이 글은 시사저널에 실린 고종석 선생의 글을 참고로해서 썼습니다.)
아래 보너스 동영상도 보시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