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는 오늘의 우리 경제문제의 시각을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경제의 근대화>로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경제사에 우뚝 솟은 인물.
건설.중공업. 자동차에서부터 전자의 첨단산까지 우리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
고희를 넘긴 나이를 잊은 듯 발걸음이 끊겼던 소련으로 북한으로 바쁜 일정을 잡으며 또 한번 우리 경제를 새로운 출발선에 세워 놓고 있다.
정회장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곧 한국경제의 근대화 였다.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어떻게 발전시켰느냐가 중요
「2차대전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일본 사람들이 떠나간 후 극빈으로부터 탈피해야 했고 치안문제도 큰 것이었습니다. 초대 이대통령 시절은 일단 치안을 잡는데 성 공했습니다. 치안이 안되면 사회가 어지러우니 자연히 치안중심의 정치였습니다. 경제발전 도 하고 싶었지만 10년 통치기간 동안 결국 못했습니다. 제2공화국도 민주정치를 표명하고, 하려고 했지만 못했습니다.」
어느 정치가가 민주정치를 좋아하지 않겠느냐 반문하며 2차대전 후 발전한 모든 나라들이 경제가 발전한 후 정치가 병행해서 발전했다고 강조한다.
「나는 왜 박대통령에게 정권이 넘어 갔는가를 중시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혼란, 학생운동 등 그 형편, 주어진 여건에서는 민주정치를 확립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민 주정치만을 표방할 실정이 아니었죠, 그리고 정치나 사회가 국민 뜻대로 되어가지만은 않 습니다. 」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권을 어떻게 물려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치를 맡은 기간동 안 어떻게 했는가, 어떻게 국가를 발전시켰는가를 중시해야 한다고 정회장은 말한다.
「박대통령은 보통나라 정치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6.25 이후 폐허 속에서 우리나라는 기술, 자본, 근로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죠. 그분은 첫째 자본을 어떻게 구 할까 고민하다가 차관을 구해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구상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어느 기업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차관을 구해올 신용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박대통령은 정부가 그 보증을 할 테니 기업이 알아서 잘해 가지고 한국산업을 근대화시키자고 하셨습니다. 」
그래서 당시 기업들은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실패한 사람은 형무소행을 각오하고 차 관을 들여와 산업근대화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산업의 근대화는 다른 나라 정치가가 할 수 없는 차관기업의 성 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빚을 들여온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차관을 들여와 한 국산업을 근대화하였습니다.」
88올림픽 유치신청도 박대통령이 한 것이다.
대통령 시절에 하나도 놓지 못한 한강다리를 9개나 건설한 것만 보아도 경제발전은 획기적인 것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들이 밀접해 있는 한강변의 반포에서 잠실까지의 제방을 쌓아 「강남」지역을 건설한 것도 박대통령이었다고 상기시킨다.
「요즈음 공산권과의 수교, 경제 교류 등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박대통령의 한국산업 근대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88년 서 울올림픽을 성대하게 마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 경제가 발전되지 않았으면 올림픽을 유치하지도 치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 동안 특히 소련, 동구권 나라들은 북한의 선전 때문에 우리나라를 거지나라로 알다가 올림픽 때 다녀가서는 그 실상을 알게된 것이 죠.」
지금 우리나라가 소련이나 동구 등 우리와 교류가 없고 적대시까지 하던 나라들과 활발하게 정치.경제적 교류를 갖게된 것도 모두 박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이 기틀이 되었 다고 강조하는 정회장. 그가 소련과의 경제교류에 주력하는 이유를 소련을 통해 북한을 개 방시켜 남북평화 통일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련에게 우리가 정직. 성실하여 도 움이 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줄 수 있으면 그 영향으로 북한도 우리를 적대시할 수 없 을 것이고 경제교류로부터 이루어져 남북의 국민이 하나가 되면 정치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편다.
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바덴바덴에서도 우리나라와 최후까지 경쟁을 벌였던 일본은 우 리나라를 일본에서 60억불 차관을 가져가는 가난한 나라하고 악선전하기도 했다고 올림픽 유치현장을 되새기는 정회장은 올림픽 유치신청도 이미 박대통령이 해놓은 것이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처음 박대통령과 만난 것이 제2한강교 건설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의 뜻은 가장 싸고, 가장 튼튼하게 되도록 빨리 다리를 놓자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싸고, 튼튼하고, 빨리 만든다> 이것처럼 박대통령의 건설이념을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결국 제2한강교는 가장 튼튼한 다리로 인정되어 그 후에도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무거운 기계가 들어올 때 여러 다리의 역학 조사를 한 결과 그 곳으로 들어오도록 했다고.
「그 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문에도 자주 뵙게 되었지요. 경제가 발전해 화물량은 늘어나 철도화물 만으로는 안되고 고속도로를 건설해야겠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고속도로에 대해 지 식이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태국에서 고속화도로를 건설중인 현대건설을 찾으신 거죠. 당시 현대건설도 태국에서 고속도로도 아닌 고속화도로를 독일 건설팀에게 배우며, 장비를 빌려 쓰며 공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시 박대통령은 최소의 비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안을 내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정회장이 이 명을 받고 서울서 부산까지 헬기로, 지프차로, 걸어서 3번을 다니며 가장 적은 비용으로 산출한 것이 380억불.
그러나 자신만 지시받은 줄 알았던 이 건설계획은 육군공병단에도, 건설부에도, 서울시에 도 내려가 있었고 재무부에는 자금조달이 시달된 것이었다고, 결국700억불의 건설부, 170억 불의 서울시를 제치고 현대의 안이 가장 타당하게 인정되었고 전체 고속도로의 5분의 2는 현대가, 나머지는 다른 회사들이 나누어 맡아 건설하도록 결정되었다. 처음에 현대가 낸 안 은 굴은 뚫지 않고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고속도로라는 점을 감안해 길이 나쁘면 굴을 뚫는 다는 계획으로 수정돼 경부고속도로는 410억불로 완공을 보게된 것이다.
「우리 경부고속도로는 일본의 동명선보다 늦게 시작해 일찍 끝났습니다. 물론 보상비도 일본이 비싸고 두껍게 시공한 이유도 있겠지만 박대통령의 뜻은 우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통행료를 받아가며 보수하는 것이 차관 금리보다 싸다는 계산이었죠. 개인이나 국가나 그 사정에 맞게 살림을 펼치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박대통령의 그 치밀함은 말할 수 가 없습니다. 밤10시에도 부르셔서는 1억을 들여 건설한 외국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그리 면서 이렇게 하면 7-8천이며 안될까 설계하는 분이셨습니다.」
정회장은 박대통령이 설계자이며 구상자이며 또한 실현되도록 독려하는 감독자였다고 회 상한다.
나라와 민족만을 생각한 국민에 귀감 되는 지도자
「그 분이 불행한 일로 돌아가셨지만 땅이 있습니까, 집 한 채가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장기 집권할수록 부패하기 쉬운데 우리는 그 정반대의 경우를 그분에게서 보았습니다. 아 울러 통치자가 청렴결백할수록 나라는 더욱 부강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
통치이념은 박대통령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박대통령을 닮은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 겠다고 말끝을 잇는다.
「지금도 박대통령이 주신 휘호하나를 거실에 걸어놓고 있는데 <청 렴 근> 이라는 내용입 니다. 평소 그 분의 생활태도나 정치가로서의 신념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사리사욕으로 장기 집권한 것도 아닙니다. 나라는 부강시키고 기업도 성장시켰지만 자손에 게는 남긴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한 것입니다. 」
현대, 근대사에서 이만하면 우리나라도 <괜찮다>고 표현하는 정회장. 메스컴이 단점들을 쓸 기회는 많지만 역대 대통령의 장점들을 써서 후세에 많이 알리고 가장 좋은 장소에 동상 도 세워 국민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앞으로 박대통령 통치기간 동안의 사업을 책으로 발간했으면 합니다. 정치학박사 학위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농담의 반은 진담이라 했던가. 웃으며 하는 말속에서 뼈를 찾을 수 있는 것을 보면, 박대통령 때 시작한 서산 간척지에서 올해에는 쌀을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쌀 농사가 잘되면 그 때 초대할 테니 꼭 오라는 당부를 들으며 문득 먼 데 앞을 내다본 그 분의 또다른 구상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오 늘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박정희는 정말 인기 없는 인물이다. 왜 그는 그토록 인기가 없을까?
(1) 우선 그는 그가 행했던 독재 때문에 인기가 없다 -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2) 그런가 하면 그는 그가 이룩한 엄청난 경제개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없다. - 이것은 당연한 일 이 아니며, 무언가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상당히 기묘한 현상이다.
그러면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한 '특별한' 설명으로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일단 두 가지가 가능하다고 생 각한다.
(가) 박정희를 싫어하는 이 나라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비=문반의 후예'를 자처하는 존재로서, ' 군인=무반의 후예'에 대해 조상 전래의 뿌리 깊은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정중부를 멸시했던 김돈중의 심리와 비슷한 것이 그들에게는 있다. 그런 그들로서는 바로 그 군인=무반의 후예에 해당하는 박정희라는 인간으로부 터 18년 동안이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이 잊을 수 없는 굴욕이다. 그러니 박정희가 제아무리 대단한 경제개발 을 이룩했다 해도, 그리고 그 경제개발에 의해 지식인들 자신이 제아무리 대단한 혜택을 입었다 해도, 그들로 서는 도저히 박정희라는 인간을 용납할 수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경제개발을 앞장서서 이끌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해서 박정희를 '히로뽕 판매자'라고 매도하는 투의 발언이 튀어나오게 된다.
(나) 박정희를 싫어하는 이 나라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의 발전법칙이니 절대적인 자 유니 하는 따위의 공소하고 추상적인 대언장어를 즐기며 또 그런 얘기를 정교하게 다듬는 데에 대단한 재능을 발휘하는 반면, 경제.사회 분야의 실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흥미도 없고 소질도 없으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런 실제적인 일을 잘하는 인간들이란 바로 저 미천한 중인 집단의 현대판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언장어를 구사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았던 양반 집단의 현대판인 자기네 지식 인들보다는 한 수 아래에 놓이는 존재들이라는 확신이 살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미천한 중인 집단의 현대판에 불과한 존재의 대표자에게 18년 동안이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이 고귀한 양반 집단의 현대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굴욕이다.
그렇게 때문에 박정희가 경제.사회 분야의 실제적인 영역에서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놓았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것 이 전혀 존중할 만한 것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경제,사회 분야의 실제적인 영역에서 대단한 일을 해놓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해서 박정희를 '히로뽕 판매자'리고 매도하는 투의 발언이 튀어나오게 된다.
윤보선에 관한 단상
홍 성원 소설<그러나>의 주인공이 행한 발언을 논박한다'라는 글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그를 찾아가서 당신은 장면 정권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혹은 1963년의 선거에서 윤 보선 후보가 이겼더라도 한국이 그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리라고 정말로 확신하느냐고 물어본 다면 그는 아마 웬만큼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발언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당신의 말은 장면과 윤보선 두 사람에 대한 부당한 과소평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나는 자신있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다. 장면과 윤보선 두 사람에 대하여 선입견 없이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장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찾기로 하고 여기서는 윤보선 한사람에 대해서만 논의를 조금 더 계속해 보자.
1963년의 선거에서 윤보선이 승리했을 경우 우리 나라의 역사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 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마다 나의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구름같이 떠도는 사나이 피티현 회고록'에 들어 있는 한 대목이다.
1963년의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당시 <뉴욕 헤럴드 트리뷴>임시특파원의 자격으로 윤보선, 박정희 두 후보를 차례로 인터뷰했던 피터 현은 자신의 회고록 속에 그 당시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60년대 초 남한은 세계에서 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특 히 대적하고 있는 북한보다도 경제면에서나 군사면에서나 모두 뒤지고 있을 때였다.
나는 윤 전대통령에게 이 참담한 현실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먼저 당선되는 게 중요하다. 일단 당선되고 나면 상황을 분석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내귀를 의심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어떻게 이런 멍청한 발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다음날 회견한 박 장군은 그의 '혁명적인 공약', 즉 '경제개발 5개년 계획'시리즈를 아 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연평균 7.1%의 GNP 성장률을 목표로 세운 데 대해 의문을 던졌다. 내 예측대로는 그런 성장률은 한국은 물론 대만이나 말레이시아 같은 어떤 개발도상국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에게 지적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에 다시 와보시지요. 당신은 그때 내 대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다시 그를 찔렀다.
'온 나라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데 경험도 없는 군인들이 경제 기적을 주장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과연 그 들의 경제관리능력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국민들은 허리를 졸라매고 자신들의 미래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돼요.'
박 장군은 힘주어서 한마디 더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하면 국민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나는 합니다..... 국민들도 할 수 있어요.'
-월간조선 1996년 3월호 pp.509 ~ 510
위의 글을 쓴 피터 현은 의도적으로 박정희를 편들고 윤보선을 편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윤 전대통령 부처와는 집안끼리 서러 잘 아는 사이였고 특히 부인 공덕귀 여사와 우리 어머님은 오랫동안 두터운 친분을 가진 관계'였던 반면 박정희와는 그때의 인터뷰가 있기 이전에나 그 인터뷰가 있은 이후에나 아무런 개인적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는 민주당 정권 시절 파리 주재 초대 유럽 문정관으로 임명되었다가 5.16이 나자마자 군사정부로부터 일방적인 파면 통 고를 받고 '분노로 가슴이 쓰렸'던 체험을 갖고 있는 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차라리 의도적으로 윤보선 을 편들고 박정희를 폄하하는 쪽에 섰어야 자연스러울,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 위치에 놓인 사람이 하고 있 는 말이기 때문에 위에 인용된 대목은 우리들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받을 만하다.
자, 이상과 같은 사실을 전제하면서 위의 인용문을 다시 한번 차분히 읽어보라.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도 당 신은 내가 '1963년의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이겼더라도....'이하의 말을 한 것이 윤보선에 대한 부당한 과소평 가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심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왕 지난 1980년대에 윤보선을 직접 만나보았던 사람의 회상기를 인용하기로한 김에 하나 더 인용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강원용의 회고록 <빈들에서>중, 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그가 윤보선 의 집을 찾아갔던 때의 기억을 적고 있는 부분이다.
학생 시위가 고조되던 5월 말, 나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사태의 수습을 의논하기 위해 민정당 당수였던 윤 보선의 집을 찾은 일이 있었다. 안국동에 있던 그의 집에 갔더니 '먼저 온 손님들과 얘기가 아직 안 끝났으니 잠시 기다려달라'는 전갈이어서 나는 안내하는 대로 빈방에 들어가 내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방이 윤보선과 손님들이 만나고 있는 방과 맞붙어 있는 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애기가 다 내 귀에 들려왔다. 우선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의 볼멘 목소리였다.
'내무장관이라면 몰라도 그건 안됩니더.'
무슨 소리인가 하고 주의 깊게 들어보니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곧 박정권이 무너 진 후 윤보선이 정권을 잡는다는 가정 아래 자기들끼리 조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그냥 그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 <빈들에서> 제2권, 열린문화, 1993, pp.218 ~ 219 위의 글을 쓴 강원용 역시 의도적으로 박정희를 편들고 윤보선을 폄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부터 윤보선 내외와 가까원던 사이이며 1963년의 선거에서는 윤보선의 승리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야당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려고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던 사람이다. 그리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그의 집권기간 내내 일관되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사람이다. 그런 이력을 지닌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이기에 위에 인용 된 대목은 우리들의 전적인 신뢰를 받을 만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전제하면서 위의 인용문을 차분히 읽어 볼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윤보선이나 그들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당신에게는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가?
나는 윤보선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정적 인상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측근에 있었던 사람들이 남 기고 있는 그의 훌륭한 인간적 면모에 대한 증언들은 다 신뢰할 만한 것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 한 일이지만, 그러한 측면에 대한 나의 견해는, '그가 1963년의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였을 경우 우리 나라의 역사에 그가 미쳤을 영향'이라는 공적인 차원의 문제에 대한 나의 판단에는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없는것이다.
<편집자 주> 본 내용은 [한 문학평론가의 역사읽기 - 문이당 ] 에서 발췌하여 옮긴 것입니다.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각하께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시려는 모습이 보이는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