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망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10; 출애굽기 16:1-12
요즘은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결혼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부모님들이 사돈 맺자고 해서 자녀들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중매자를 통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중매자는 신부감이나 신랑감을 소개할 때 흠되는 것은 말하지 않고 좋은 것만 말해줍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얼마를 살다보면 좋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중매자가 속였다고 하며 원망합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해서 잘되었다고 하며 잘못된 것은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하자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일에 대해 변명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므로 싸우게 되니까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므로 싸우지 않고 서로 화해하자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된 일이 발생하면 남에게 그 원인을 돌리며 불평합니다.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것이 원망입니다. 여당은 야당 때문에 라고 하고, 야당은 여당 때문이라고 서로 타 당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기 당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원망을 너무 쉽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면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고 그를 원망합니다.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하물며 대통령을 원망하는 말들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말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원망의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인지 은혜롭지 않은 교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망하는 교회는 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원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성도의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은혜스러운 분위기가 오래가지 못하고 인간들의 모임이라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일치와 순결을 상실하고 세속 문화에 동화되어 분열될 위기까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바울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시는 가운데 “너희는 ... 원망하지 말라”(10)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도간에 서로 원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원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처럼”이란 말씀에 특별히 “너희”라고 말씀에 매우 매력을 느꼈습니다. ‘너희’와 ‘그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 받은 자들입니다. ‘너희’는 구원 받은 사람이고, ‘그들’은 멸망 받은 사람입니다. ‘너희’는 원망하면 안되는 사람이고 ‘그들’은 원망을 해도 되는 사람입니다. 이미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원망해도 무방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원망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야 원망을 하든 말든 너희는 원망하면 안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원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원망은 멸망 받게 되는 무서운 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망’은 사탄이 성도들을 시험들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성도를 가장 쉽게 시험들게 하는 것이 ‘원망’입니다. 쉽게 시험들지만 결과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원망’이란 반항하는 마음으로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이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라고 하는 ‘그들’은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원망하다 광야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이상을 애굽에서 종으로 노예로 바로의 학대를 받다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홍해도 갈라 길을 내어주셔서 마른 길로 건넜습니다. 뒤따라오는 바로의 군사들을 수장시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큰 권능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 모세를 믿었”습니다(출15:31). 그리고 온 백성은 여호와를 노래하며 춤추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찬송하며 춤추고 모세를 따르던 백성이 사흘이 지나 물이 써서 마실 수 있는 물을 얻지 못하므로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출15:24). 그래서 모세는 한 나무를 물에 던져 물이 달게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지 한 달 반이 되어 신 광야까지 왔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나온 지 불과 한 달 반 정도 되었는데 떠나온 애굽을 그리워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라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굽에서 가져 나온 양식이 그의 바닥이 나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 가마 곁에서 몰래 고기와 떡 먹던 때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니까 원망을 한 것입니다.
원망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만 생기면 그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원망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한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른지 모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을 때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고 이겨내지를 못하고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 도착했을 때 물이 써서 마실 수 없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실새”(출15:25)라고 했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원망하였을 때 역시 하나님께서 “내가 시험하리라”(출16: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에서 쓴 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실 때 원망을 하지 않고 모세에게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라는 말을 했더라면 시험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 광야에서도 ‘애굽에서 가져 나온 식량을 다 먹고 양식이 없다’는 말을 하였더라면 시험을 이겼을 것입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을 때와,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바닥났을 때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우상 섬기던 버릇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기도할 줄 몰랐다고 해도 어려운 문제를 모세에게 알려 주는 것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 원망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원망할 만한 일이 있을 때 ‘너희는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원망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원망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망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원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도 얼마든지 원망할 일이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르비딤까지 왔을 때 역시 마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또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합니다(출17:3). 백성들이 원망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출17:4). 모세도 하나님께 얼마든지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왜 나를 불러 이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까?’, ‘왜 백성을 물도 없는 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이러한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대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한 것입니다. 원망할 일이 발생하면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는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마라에서의 쓴 물도 나무 가지를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여 단 물이 되게 하였습니다(출15:25).
신 광야에서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원망했을 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도록 했습니다(출16:4). 드비딤에서 물이 없어 원망할 때 역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으로부터 반석을 치라는 말씀을 듣고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도록 해 주었습니다(출17:6).
원망할 수 있는 문제가 없어서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할 수 있는 문제가 있어도 원망하지 말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원망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은 하나님께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을 향하여 “너희의 원망을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16:8)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지만 모세는 그 원망이 ‘여호와를 향하여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망이란 이래서 더욱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원망’은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결혼이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매자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으로 믿고 참고 이겨야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쓴 물이 있는 마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신 광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물이 없는 르비딤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쓰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마실 물이 없어 모세를 향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은 누구를 향한 원망입니까?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고 한 사람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고전10:1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멸망시키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를 보내어 처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언제 때까지 참으랴”,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민14:27,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고 홍해도 건넜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도 먹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원망했다고 해서 당장 어떤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참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원망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통해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원망은 자신의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말씀은 우상 숭배자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사탄에 끌려 지옥불로 던져 멸망을 당하게 되지만 원망하는 자에게는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손에 끌려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원망이란 우상 숭배보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원망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망해서는 안되는 성도들이 원망을 하는 것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받게 되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든 남을 탓하지 말고 원망을 하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