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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여 들라키라
- 살아있는 문화의 현장을 찾아서(제주편)
정연수
세 번의 제주 방문
제주란 이름은 외국만큼이나 아득하게 다가오는 땅, 그래서 국내 어느 지역보다도 더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세 번의 제주여행에서 얻은 느낌은 제각각이다.
첫 방문은 지난 1997년, 제주도 윤봉택 시인의 초청으로 한민족방언시학회(회장 김시라) 회원들과 함께 서귀포칠십리 축체에 방언시낭송을 하기 위해 찾아갔다. 제주도여행에 앞서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대한 설레임이 더 컸다. 또 제주에 도착해서는 야자수를 보면서 이국적 정취에 놀라고, 제주의 문화유산보다는 야자수 아래서 사진 찍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당시 유일하게 아는 제주도 사람이 윤봉택 시인이었다. 참 먼 곳에 사는 사람 윤봉택,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언제나 나보다 빨랐다. 서울에서 종종 만나곤 했는데, 한걸음에 달려오는 모습이 태백사람의 걸음보다 쌩쌩했다. 윤시인은 1997년 태백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데, 한민족방언시학회를 초청해 두 번째 시집 『박물관 속의 도시』 출판기념회를 겸한 문학행사를 가질 때였다. 윤시인이 제주에서 직송해온 감귤 2박스를 행사에 참석했던 손님들과 나눠 먹으면서 그에게 건네는 인사가 “제주도, 그 먼 곳에서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였다. 그러면 그는 “제주도가 제일 가까운 곳이지요. 제주도 사람은 전국 어디나 비행기로밖에 갈 수 없으니, 전국을 가장 빨리 가지요”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작 육지에 살고 있다는 태백시민들이야말로 제주도보다 더 먼 오지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두 번 째 방문은 2007년 3월1일∼3일에 있었다. 문화적 여행이 아닌 만큼 방문지라곤 폭포, 미니랜드, 성박물관, 골프장, 표선리 술집이 전부였다. 당시는 들불축제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제현장을 들리지 못한 아쉬움과 제주의 문화지를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세 번째 방문은 2007년 8월 24일∼26일에 있었다. 2박3일간 서귀포에 열린 <세계자연유산 등재기념 제2회 서귀포 전국문학인대회>에 참가하면서 제주도의 문화에 보다 깊이 다가설 수 있었다. 제주도는 올해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윗줄 좌측부터 김석기 유희정, 최정희, 이기애, 정연수, 좌측 앉은 순으로 심현옥, 000
와흘본향당, 문화는 사람이 만든다
24일 낮 12시50분,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오승철 시인과 윤석산 시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서귀포 문인들을 따라 전세버스를 타고 성산포로 가는 길에 와흘본향당(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소재)에 먼저 들렀다. 348개의 신당을 지닌 제주도에서는 본향당, 일뤠당(7일당), 여드레당(8일당), 해신당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었다. 그 중 일뤠당이 가장 많은데 매월 음력 7일, 17일, 27일에 제를 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매월 8일, 18일, 28일에 제를 지내는 여드레당은 뱀신을 숭배한다. 해신당은 풍어와 해상의 안전을 관장하고 있었다.
일뤠당에 해당하는 와흘본향당에는 자연석으로 3단을 깔아 마련된 원형 제단이 있었고 제단 가운데에는 '제십일도령본향신위'라고 쓰인 돌 위패가 있었다. 여신인 서정승 따님애기의 제단은 동쪽 팽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 주인은 여신이었는데, 돼지털 내음을 맡다가 남편인 남신에게 밀려났다고 한다. 제단 옆에 있는 큰 팽나무가 돌아앉은 여신이고 그 옆에 버티고 선 팽나무가 남신이라고 한다. 제단에는 음식상이 차려지는데, 소원빌기가 끝난 후에 그 제물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들이 먹는다고 했다.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나눔의 모습을 신당의 제물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김순이 시인이 제주의 당문화를 들려주는데 제주 전설 속의 남자신, 여자신이 생생히 살아있는 인물로 다가왔다. 김시인은 일뤠당과 여드레당의 신자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후더분하게 당의 위치를 가르쳐주면 일뤠당 신자, 깐깐하게 굴면 여드레당 신자라고 설명해준다. 무심히 지나갈 한 공간에서, 일뤠당의 사연과 제주의 당이 지닌 문화를 들으면서 한참을 더 '당'에 머물게 되었다. 팽나무 두 그루와 3계층의 돌계단이 전부인 황량한 공간이 제주의 문화적 집약지로 다가왔다.
당 주변에는 관람석처럼 둘러쳐진 돌계단이 있었는데, 당제사 지낼 때 주민들이 모여 앉아 구경하는 스탠드인줄 알았다. 뻔한 질문 같아서 물을까 말까 망설인 끝에 그 스탠드의 역할을 물어보았는데 제단이라는 것이다. 상상도 못한 답이다. 좌석과 제단, 그 극과 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식이라면서 그냥 지날 뻔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강의시간에 학생들의 질문을 유도하기 위해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을 향해서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궁금한 것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질문을 늘여가야 한다. 질문과 의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해지고, 이 세상도 덩달아 정확해진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실감하는 것이지만 문화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와흘본향당 입구에 서 있던 볼품 없는 소개 입간판, 그 내용을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제주의 신당문화가 가슴에 전달되지 않았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 와흘본향당은 와흘리 주민들의 생산(生産), 물고(物故), 호적(戶籍), 장적(帳籍)을 관장한다. 이 당은 '와흘한거리 하로산당' 또는 '노늘당'이라고도 한다. 당신(堂神)은 '송당 소로소천국 열한 번째 아들 산신또'로 사냥을 하는 산신(山神)이기 때문에, 당굿을 할 때 산신놀이를 한다. 처신(妻神)은 '서울 서정승 따님애기'로 제단은 동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제일은 1월11일(대제일), 7월11일(백중제)이다. 당의 제일에는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는데 커다란 팽나무와 함께 진설해 놓은 제물들이 서로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이 당은 2005년에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입간판 전문) -
김순이 시인의 생동감 넘치는 설명이 없었다면 그곳은 돌덩어리, 흔한 나무 한그루, 미신덩어리의 얘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문화현장을 찾아갈 때는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해설사와 함께 만나야 한다. 그 지역의 웅숭깊은 문화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지역의 향토성이 몸에 벤 사람과 함께 문화현장을 찾아가야 한다. 이 참에 김순이 시인이 맛있게 차린 제주 당문화의 밥상이 푸짐했다는 인사를 전해야겠다.
와흘본향당에는 수령 400년을 맞은 둘레 4미터가 넘는 우람한 팽나무 두 그루, 남편과 아내역의 신목 둘이 서 있었다. 아내역의 신목 앞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행사장이 있는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로 향했다.
김영갑 갤러리에서 전시된 김영갑 작가의 사진을 촬영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곳에서 시를 낭송하다
서귀포문인협회(회장 오승철)는 우리나라 남쪽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성산일출봉, 세계자연유산인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야외에 행사장을 마련하고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시작입니다’는 슬로건까지 내세웠다. 한반도의 변방이 아니라 당당한 일원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점으로 세상을 열어가겠다는 야심이 보였다. 서울이란 지역이 중심으로 자리해온 모순된 지리적 위상에 대한 항변이자, 변두리 제주라는 이름의 극복을 통해 제주의 지역문학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올해 서귀포에 이어, 내년에는 성산포, 그 다음해에는 모슬포 지역으로 번갈아 가면서 행사를 열어가겠다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오후 4시 열린 개막 행사에서 시낭송의 첫 순서로 내가 지명되었다. 남쪽 기후다운 찜통 더위에 넥타이는 물론이고 윗 단추 두 개를 터놓고 있던 터에 갑작스런 호명을 받고 허둥지둥 무대에 오르면서 시가 수록된 페이지를 찾았다. 의도적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낭송 순서를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시인들은 늘 꼿꼿한 정신으로 행사장을 지켰다. 서귀포문협에서는 행사를 기념해 제주도를 소재로 한 시와 산문 등을 모은 『도채비꽃이 파랗게 질린다』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수록된 졸시 「지평선을 열며」를 낭송했다.
파도 어깨 짚고 비상하는 갈매기
성산일출봉 맴도는 날갯짓마다 햇살 뿌리며
막힌 밤바다 틔운다
육지를 떠나와
햇빛 두려운 낮이면 해저에 몸을 웅크리던 절망
밤새 뭍을 그리며 뒤척이던 그리움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따라 흐르더니
새벽이 오면서
절망도 그리움도 바다 속으로 침몰이다
정연수,「지평선을 열며」중에서
이번 행사를 위해 바쁘게 움직인 시인들로는 오승철(시조시인, 한국문협 서귀포지부장), 강중훈(시인, 제주특별자치도지회장), 한기팔(시인, 명예대회장), 참가시인 섭외에서부터 행사장과 숙식장소 안내에 수고가 많던 허은호(시인), 사진 촬영과 제주민속촌 소개를 맡았던 윤봉택(시인, 서귀포문협 감사), 공항 마중에서부터 마지막날 밤의 술자리에서까지 목청 높던 윤석산(시인, 한국문학도서관 대표), 제주도의 사연을 아름답게 풀어내던 김순이(시인) 등의 시인이 돋보였다.
첫 강연에는 중1 국어 교과서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란 시가 수록된 정일근 시인이 초대강사로 나섰다. 그는 자연경관보다는 사람을 들여다 볼 것을 강조했는데, 제주도의 야박한 인심을 들추면서 4·3사건이 빚은 비극의 역사가 현재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주도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로 두모악 갤러리를 꼽았다.
제주도 민속공연도 선보였는데 방언으로 부른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가졌다. 제주가수 양정원이 등장해 대중가요 <편지>를 제주도 방언으로 고쳐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혜은이의 <감수광>하고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방언을 일상에 접목시킬 수 있는 영역을 하나 더 배운 셈인데, 기회가 닿으면 강원도 방언으로 인기가요 하나 쯤 개작하는 것도 좋겠다는 구상을 해보았다. 13, 4년 전 방언시학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강원도 방언으로 시를 지었으며, 방언이 지닌 향토색이 표준어 앞에서 열등해지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던가.
외부 참가 시인으로는 성기조(전 국제펜클럽 회장, 현 한국문인협회 명예이사장), 김년균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오세영(한국시인협회 회장) 등 문단의 직함을 지닌 시단의 원로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 외에도 박목월 시인의 아들인 박동규 교수, 정완영 시조시인 등 많은 이들이 참석했지만 역시 이기애, 최정희, 유희정, 심현옥, 박대진, 고수진, 박인식, 김석기 시인 등 시 아름다운 세상의 시인들과 지낸 시간이 더 즐거웠다. 첫날밤부터 어울려 성산리 한 횟집에서 한치회를 시켜놓고, “방 빼!”, “다른 방에 끼워 넣으면 안될까”라던 제주도의 고약한 인심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흥을 돋구었다. 그러고보니 이기애 시인과는 제주도가 두 번째 방문길이다.
좌로부터 유희정, 박대진, 심현옥, 최정희, 정연수, 이기애, 박인식
윤봉택 시인(우측)
사나운 제주 인심 속에서도 우리는 추억을 만들었다.
둘째날인 25일 새벽부터 서둘러 바다낚시를 하면서 성산일출봉을 한바퀴 돌았다.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가는 길에 승합차 뒷좌석 짐칸에 탔던 박대진, 고수진, 최정희 시인이이 갇혀 119 구조대를 불러야했던 일, 낚싯배를 빌려 일출봉을 끼고 바다로 내달려 난생 처음 잡아본 고기 두 마리, 멀미에 못 이겨 배 위에 누워 파도의 출렁임에 몸을 맡기던 일은 이번 여행에서 못 잊을 추억거리였다.
11시경, 잡은 고기로 회를 뜨기는 했지만 아침을 굶은 터라 점심을 제대로 먹기로 했다. 아침을 늦게 먹겠다고 주최측에 통보까지 해 둔 터였지만, 문학행사 지정 식당으로 갔다가 면박만 받았다. 식당 주인이 어찌나 야박하던지 우도대신 낚시를 택한 우리 일행 9명은 제주사람들의 쌀쌀한 인심만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가 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아무리 이해하며 보려고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인정이 없다'는데 우리 모두 동의하고 말았다. 한기팔 시인이 제주도 사람들은 배타적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제주도 사람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인심을 두고 울산의 정일근 시인은 제주도 4·3 사건이라는 역사가 지닌 휴유증이라고 보았으며, 한기팔 시인은 침략과 약탈의 수난을 겪어온 제주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제주도가 관광지가 되면서 뜨내기 관광객을 상대하는 장사꾼 기질이 사람들을 야박하게 만들었다고도 했다. 결국 침략과 수탈의 역사, 4·3사건이라는 근현대수난사, 현대의 관광산업이 제주 인심을 각박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과 동화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마음 아픈 일이다.
종종 제주를 소개하는 글에 삼려(三麗) 혹은 삼보(三寶)라고 하면서 '따뜻한 인심, 아름다운 자연, 특이한 산업구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 번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따뜻한 인심'은 확인되지 않는다. 강연에서 정일근 시인이 공개적으로 뼈아프게 지적하기도 했고, 함께 동행했던 많은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기도 하다. 네 번째 방문에서는 제주의 인심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나마 2박하며 머물렀던 콘도 <해돋는 마을>(성산읍 오조리)를 지키던 어린 소녀 오솔미(중 1)의 친절과 미소가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어 다행이다. 맘에 드는 제주도 문인을 만나면 주겠다고 태백에서부터 들고 갔던 『태백문학』15호는 결국 제주도 문인이 아니라 오솔미양과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 작가 김길호 선생(민단 직선위원)에게 돌아갔다. 윤봉택 시인이야 오는 10월에 열릴 태백문학행사에 방문하겠다고 했으니 그 때 전하기로 미루었다.
내가 쉴 방이 이러 저리 바뀌는 통에 오승철 허은호 시인이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손님이란 배짱으로 혼자서 침대방에서 편히 잠을 자는 동안 그들은 거실에서 잠을 설쳐야 했다. 이불과 베개가 없어 뒤척이는 고생만이 아니라 에어콘을 끌 수가 없어(리모콘은 내 방에 있었지만 그들은 몰랐다) 밤새도록 추위에 떨었다는 걸 아침에서야 알았다. 이틀 동안 이모저모 보살펴준 두 분이 고맙다. 편지는 못쓰더라도 책 한 권 발송해야지 하는 마음이다.
119 구조 장면(먼저 나온 고수진, 미처 나오지 못한 최정희 시인을 유희정 시인이 돕고 있다)
25일 정오 무렵, 제주를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심산으로 따가운 햇살 아래 흐르는 땀을 주체못하면서도 전날 정일근 시인이 언급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성산읍 상달리 소재)을 찾았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김영갑 갤러리는 제주도의 돌로 단장한 정원에서부터 제주도의 정취가 물씬 풍겨졌다. 제주에는 작은 봉우리가 흔하게 눈에 띄는데 이를 오름이라고 부른다. 제주에는 368개의 오름이 있는데, 오름마다 분화구를 지녔다. 김영갑 갤러리에서는 아름답고도 신비한 오름의 사계를 한 눈에 만날 수 있었다. 갤러리 입장에 앞서 고수진 시인으로부터 김영갑 작가와 정원 조성에 얽힌 감동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루게릭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려 마흔 여덟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 투병생활 속에서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워가면서 제주의 향토색을 담은 갤러리를 만들어냈다. 택시를 대절해가면서까지 달려온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두모악갤러리, 여기서 느낀 감정은 시간을 두고 다음 기회에 따로 풀어낼 계획이다.
혼인지에서 제주민속촌까지
셋째날인 26일은 오후 5시10분 출발 비행기표가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제주 답사에 나섰다. 4·3학살터의 현장이자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해변인 광치기해안에 가장 먼저 들렀다. 그 다음으로는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섭지코지(신양리)에 들렀는데 이곳에서는 오오사카에서 온 제주도 출신의 김길호 선생과의 이야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일본 돗토리현에 있다는 은광이 유네스코 등재된 소식과 태백의 탄광문화유산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김선생은 섭지코지가 <올인>을 모르는 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서 10년 후를 걱정했다. 나는 드라마 <모래시계>가 만든 강릉의 정동진을 예로 들면서 드라마는 잊혀져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은 새로운 문화와 추억이 생겨나므로 걱정없다는 의견을 전했다. 김선생이 지닌 건강한 문화의식, 삶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마음에 와 닿았다.
좌로부터 김길호 김귀희 정연수
혼인지(婚姻址, 성산읍 온평리)에서는 제주의 시조신화를 들었다. 삼성혈에서 태어난 탐라의 시조 고을나(高乙那)·양을나(梁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온 함 속에서 나온 벽랑국 세 공주를 맞이하여 각각 배필을 삼아 이들과 혼례를 올렸다는 곳이다. 혼인지 연못에서는 3신인이 결혼식을 앞두고 목욕재계했다고 한다.
윤봉택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국제결혼이 처음 이뤄진 곳이 어딘지 아느냐며 퀴즈문제까지 냈다. 바로 혼인지라는 것이다. 한기팔 시인은 혼인지를 다녀간 날 합방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귀뜸을 해줬다. 그러면서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오늘 밤은 딴 데 가서 자지말고 꼭 집에 들어가서 주무세요”하고 충고까지 곁들였다. 전설, 징표, 풍속 그리고 현대적 농담까지 곁들어지면서 혼인지는 생기넘치는 제주의 문화유적지로 살아나고 있었다. 한기팔 시인은 관광회사가 운영하는 단체 여행객은 이 혼인지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우리나라 관광회사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대 관광객은 보는 관광이 아니라 문화와 이야기를 통해 유익한 삶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좌로부터 김년균 이기애 성기조 000 정연수
혼인지에서는 멀구슬나무를 사진에 담았다. 한기팔 시인이 제주도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멀구슬나무를 심는다고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만 읽던 <내나무>의 풍습을 제주도에서 또 만날 수 있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내나무'이야기를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어서 죽을 때 관을 만들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시집 갈 때 장롱이나 궤짝을 만든다는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오동나무 대신 멀구슬나무(일명 구주목, 제주말로는 모꼬실낭)를 심었던 것이다.
혼인지를 나와서는 제주민속촌(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으로 향했다. 민속촌에 도착할 쯤 표선리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모래사장은 조개껍질이 잘게 부서진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어 해수욕을 하고 나면 온 몸에 조개장식이 된다고 한다. 보통 백사장의 경우 모래가 잘 떨어지지만, 표선리 해수욕장에서는 목욕 후에도 조개껍질 가루가 좀체 씻겨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티켓다방으로도 유명한 표선지역은 퇴폐향락의 메카라는 불명예까지 얻고 있다. 방송에서 특집으로까지 다뤄져 전국에 널리 알려지고도 퇴폐적 티켓다방풍속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지난 3월 표선면에서 이틀간 숙박을 하면서도 자못 궁금했던 것이었다. 제주에 부임하는 관리를 위한 관기의 접대문화가 있어왔으며, 표선지역은 예로부터 남녀의 성풍속이 자유분방한 지역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그것이 표선의 오랜 전통이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멀구슬 나무
오전 11시30분 경, 도착한 제주민속촌에서는 정문에서부터 대장금과 이영애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우리가 민속촌에 온 것인지, 대장금 드라마 촬영지에 온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민속촌 곳곳이 이영애의 얼굴로 치장되었다. 제주민속촌과 이영애, 아무리 좋게 이해해주려고 해도 컨셉이 맞지 않는다. 민속촌의 한쪽 구석에 따로 이영애나 대장금 코너를 만들면 좋겠다. 제주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문화가 고작 현대의 방송드라마 한 편에 매몰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민속촌이 교육적이고 공익적 가치보다 상업적인 관광객 맞이에 몰두하는 것이 안타깝다.
게다가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버티고 선 돌하르방은 플라스틱 모조로 조잡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다. 대한민국 관광 1번지를 지향하는 제주민속촌의 품격마저 깎였다. 제주도 시내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 진짜 돌하르방이다. 하물며 작은 식당마저 진짜 돌하르방을 세워놓고 있는데, 민속촌에 모조품을 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아쉬움을 토로할 때 정문을 지키던 민속촌 직원이 변명을 한다는 것이 “저거, 진짜 돌로 만들려면 오백만원이나 들어요.”한다. 입장료까지 받으며 제주를 대표하는 민속촌이 정말 오백만원을 아끼기 위해 제주를 상징하는 돌하르방을 모조품으로 세웠을까?
옥의 티라고 탓하면서도 제주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제주민속촌을 꼭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두 번째 제주 방문에서도 민속촌을 둘러보았으면서도, 이번에 기쁘고도 새로운 마음으로 한 번 더 둘러볼 수 있었다. 박물관을 어찌 한 번 보고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정낭과 통시, 제주도의 집
민속촌에서는 윤봉택 시인이 해설을 맡았다. 큐레이터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는 윤시인의 해박함을 통해 제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첫 설명이 제주민속촌의 정문은 강릉 객사문(국보 제51호, 고려시대 건축물)을 본 떠 지었다는 소개였다. 강원도의 문화재 소개를 이곳에서 듣고나니 강원도민으로서 뿌듯함마저 느꼈다.
민속촌에서는 제주도의 여러 가옥 형태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제주도는 제주목(제주시), 대정현(대정읍), 정의현(성읍리)으로 3분되어 있었는데, 집의 형태도 세 지역이 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예전 제주초가집의 마당에는 습기나 먼지를 예방하기 위해 볏집이나 보릿집을 깔아놓았으며, 초가집 지붕은 성인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낮게 만들었다. 일부 제주의 집은 기둥을 세우면서 아래쪽 반은 제주돌로, 위쪽 반은 나무로 세웠다. 습기와 비바람에 나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혜인 셈이다. 제주도는 남쪽의 따뜻한 기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온돌이 없는 특징을 보인다.
흔히 제주도를 말할 때 삼다삼무의 고장이라고 한다. 돌, 바람, 여자가 많아서 삼다(三多)이며, 도둑, 거지, 대문이 없어 삼무(三無)라는 것이다. 그런데 윤시인은 대문이 없다는 것은 제주도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제주도에는 정낭이 있는데, 그것이 제주도집의 대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없다는 표시로 집 입구에 긴 나무를 걸쳐두는데, 이 나무가 제주의 '정낭'이다. 집의 입구 양쪽에 3개의 구멍이 난 돌기둥을 마주보고 세워놓은 다음 정낭을 걸칠 수 있게 해놓았다. 나무가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며, 나무 하나가 걸쳐져 있으면 가까이 외출했으므로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며, 두 개가 걸쳐져 있으면 조금 멀리 외출해 귀가 시간이 좀 걸린다는 뜻이며, 나무 세 개가 걸쳐 있을 땐 장기간 외출이라 오래 있다가 돌아오겠다는 신호이다.
정낭을 걸치는 까닭은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과 소를 많이 기르는 제주도에서 가축의 무단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소나 말은 자기 집을 잘 찾아가지만, 가는 도중에 물 냄새를 맡으면 남의 집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든다고 한다. 모든 집이 정낭이 있는 것은 아니며, 소나 말을 키우지 않는 동네에서는 정낭이 없는 집도 있다.
제주도의 집에는 정낭 외에도 대문같은 형식이 있다. 대문이 있는 집은 부잣집이며 제주도 방언으로 이문간(이문집 : 대문이 달린 집)이라고 불렀다.
제주 똥돼지는 유명하다. 제주도의 집에는 통시가 있는데, 통시의 변소에 앉아서 옛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변소와 돗통(돼지막)을 통시라고 불렀다. 민속촌에는 옛 화장실을 재현하면서 그 옆에는 진짜 살아있는 제주 똥돼지를 놓아기르고 있었다. 변을 보는 곳은 지면에서 두 세 단 높이 긴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통시의 바닥은 마당보다 낮아 오수가 흘러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윤봉택 시인은 옛날에 통시에서 볼일을 보던 사내아이들이 밑에서 '똥'을 먹으러 나온 돼지들에게 불알을 따먹히는 비극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통시에는 돼지를 쫓으려는 긴 막대가 늘 있었다고 한다.
2007년 3월 방문때 찍은 사진
제주도여, 들라키라
제주도는 강화도 다음의 최고 유배지였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제주도에 살았으며, 그들이 정착해 제주주민이 되기도 했다. 유배의 역사를 지닌 제주도, 그 덕분에 제주도는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고, 최고의 문인과 학자들이 다녀가면서 흔적을 남긴 땅이 되었다. 제주도는 유배에 온 이들을 받들 줄 알았으며, 이들에게서 선비정신을 배우기도 했다.
스페인산 포도주를 마신 기록이 하멜표류기에 등장한다. 그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양주를 제일 처음 마신 사람은 이원진 제주목사라는 얘기도 흥미롭다.
제주도에는 해녀(海女)가 많다. 그런데 이 해녀라는 용어는 일본식 표기여서 잠녀(潛女) 혹은 잠부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단다. 제주말로는 좀녀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고쳐 부르려니 잠녀가 잡녀와 발음이 비슷해 어감이 이상하다.
제주민속촌 내에 있는 민속식당에서 조껍데기술을 반주로 하여 점심을 먹었다. 건배 제의에 나선 한기팔 시인은 “들라키라”하고 소리쳤고, 우리들도 덩달아 “들라키라”를 외쳤다. 우리들은 모두 '들자꾸나', '들라카니', '마시자' 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열심히)뛰자”, “(정열적으로)뛰놀아라”라는 의미란다. 정말 제주도는 딴 세상이다.
들라키라 소리치던 식당, 좌로부터 성기조 한기팔 이기애 정연수 오세영 시인
평화박물관
오후에 나선 마지막 답사 코스는 일본군이 만든 군사동굴인 평화박물관이다. 오후 2시 40분, 평화박물관에 도착하니 이영근 관장이 입구에 나와서 일일이 반겨준다. 영상실에서 이관장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건립배경을 설명했다. 가마오름에 마련된 일본군의 군사동굴에서 노역한 아버지의 아픈 기억이 담긴 현장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2002년 사재를 털어 지하 군사시설이 있는 장소를 매입해 2004년 박물관을 개관한 그의 집념에서 삶의 진지함을 보았다. 한림공원의 송봉규, 두모악 갤러리의 김영갑, 평화박물관의 이영근은 제주에서 만난 위대한 인물들이다.
일본이 제주도에 각종 군사시설을 갖춘 까닭이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중국의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위해서였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미국측의 반격에 대비해서였다. 제주도에는 예로부터 많은 전쟁의 비극적인 역사를 안고 있지만 근현대사에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4·3사건이 있었고, 6·25한국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지로서 전쟁을 지원하는 전쟁지원기지였다. 내 아버지 역시 제주도에 죽창을 들고 기초훈련을 마친 뒤 전선에 투입되었던 적이 있다. 그 전쟁에서 공산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그 후 전쟁터에서 부상까지 당했다. 그러한 기록을 찾지 못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그 유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북한과 공산당을 미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낳은 상처를 확인하곤 한다.
앞마당에는 태극기가 수 십장이 한 줄로 서서 휘날리고 있었다. 평화박물관에서 만난 태극기가 지나치게 민족 중심적으로 비춰졌다. 동굴을 돌아보면서 일본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지만 그럴수록 전쟁이 없는 평화가 더 간절했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해선 잊지 말아야겠지만 이제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박물관이나 비극현장이라는 장소라면 모를까, 평화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일 바에야 뭐가 달라야한다. 분노와 상처의 기억을 넘어선 용서와 화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생의 미래지향적 의미를 담는 것이 평화박물관에 걸맞지 않을까? 침략, 전쟁의 비극적 역사를 넘어선 평화의 시대를 만드는 것이 평화박물관의 설립 의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와 일장기를 사이사이에 달아둔다면 어떨까? 일본인 관람객도 늘고 있다는데, 세계의 공동 번영을 이루는 진정한 평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제가 빚어낸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더 큰 힘이란 우리와 세계가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영근 관장(우측)
제주도는 대한민국 속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우리는 제주도에 갈 때 농담 삼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곤 한다. 비행기 타고 물을 건너가는 여행이니 다들 그쯤으로 받아들였다. 한 때 제주도는 탐라국(耽羅國)으로 불렸고, 제주도와 왕래가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으니 실제 외국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제주도는 대한민국 속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들은 탐라국의 역사나 제주의 신화들을 모른다. 중세의 제주 유배지의 문화라든가 근대의 제주 4·3 사건을 모르다. 어디 그 뿐이랴. 2005년 '평화의 섬'으로 선포된 제주도, 특별자치도로 행정이 이뤄지는 제주도를 잘 모른다. 또 제주도에다 왜 해군기지라는 군사기지를 만드는 계획이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우리는 제주도를 한반도 바깥 관광지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제주는 한국의 대표적 신혼여행지이자 수학 여행지였다. 효도관광지로도 인기였고, 회갑잔치 대신 떠나는 가족단위 여행지나 겨울 골프 여행지로도 손꼽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주도 갈 바에야 동남아를 찾아가자는 말이 더 흔했다. 동남아여행경비가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제주도 여행경비가 비싸게 느껴진 것이다. 정말 제주도는 이국적 정취를 위해 외국여행을 나갈 때 여행비용으로 저울질해보는 지역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동안 우리는 단편적인 제주의 모습만 보느라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제주의 문화를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제주도를 세 번 방문한 끝에 어렴풋이 느낀 것은 제주는 우리의 삶이며, 문화라는 것이다.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바깥이며 끝자리가 아니라 가장 안쪽에 있다는 것이다. 내게 제주의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준 이는 혼을 다해 삶을 살아온 김영갑, 송봉규, 이영근이었다. 두 번째 제주 방문에서 찾은 송봉규의 개척정신이 빛나는 한림공원(제주시 한림읍)과 세 번째 제주 방문에서 찾은 김영갑의 갤러리와 이영근이 만들어낸 평화박물관을 통해 제주도의 정체성을 만날 수 있었다. 어디 그들뿐이랴 제주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한기팔, 윤봉택, 김순이 시인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제주에는 태백에서 탄광시를 쓰던 광부 출신 이청리 시인이 살고 있었지만, 단체생활의 시간에 쫓겨 연락을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에서 멀어져 가던 것이 아쉽던 제주, 이번 여행을 통해 제주의 참 모습을 확인하면서 안심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제주가 지닌 문화가 살아있었고, 역동적인 역사 현장을 통해 제주는 영원한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제주의 문화적 자원과 자연경관은 세계의 관광객을 맞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제주도, 결코 2박3일 여행으로 알 수 있는 작은 섬이 아니다. 고랑몰라! 탐라국에서 제주도까지의 유구한 역사가 있고, 외국어에 가까운 제주의 방언까지 있다. '고랑몰라'(말해서는 모른다), 제주를 찾아가서 그 문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볼 일이다.
첫댓글 부지런한 정연수 시인, 너무도 충실한 내용을 대하며 '칼'보다 '필'이 무섭다는 것을 한번 더 실감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문화 지킴이가 되시기를......,
문화, 정말 세월이 지날수록 소중한 말 같아요. 지역문학의 연구자들은 늘 말하기를, 지역문학 발전은 지역문화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우리의 문학도 문화를 향해 나아가야겠지요. 선생님의 애정에 늘 감사...
안녕하세요 그새 이런 장문의 글을 쓰셨네요 이 시대의 지킴이 뿐만 아니라 영원한 태백의 지킴이로 남으시길 바랍니다- 하루를 더 함께 못한 시간이 아쉽습니다
전 늘 늦잠을 잤습니다. 일요일에도 늦잠 자고 일어나니, 선생님은 일찍 출발하셨더군요.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우리의 시간 속에는 또 좋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재미있는 이야기 언제 사진까지 찍으셨네, 아들사랑님 때문에 더 제주여행이 거웠습니다. 태백이 아닌 제주도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낭도라님 덕분에 제주도 여행이 편안했습니다.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덕보는 사람도 있지요. 평생 덕 좀 보며 삽시다.
샘물 퍼내 듯 제주의 긴요한 문화을 시원하게 빼내셨군요 전 그냥 눈요기로 이박삼일 다했습니다만 부끄럽군요 잘 보았습니다
그 날 김영갑 갤러리 설명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책 한 권 안 읽고도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