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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독서회 9월 16일]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 미국, 프랑스
강사: 박 윤 배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첫 번째 변화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고 있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 호레이스 월폴은 자신의 시골별장을 다른 사람들처럼 정통 팔라디오 양식으로 짓지 않고 고딕양식으로 짓기로 결정하였다.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는 중국의 건축과 정원양식을 연구하여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에 중국식 탑을 세웠다. 물론 대다수의 건축가들은 여전히 르네상스건축을 고전 양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들조차도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해온 건축상의 관례와 전통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15세기 이래 고전 건축의 규칙들로 통용되어오던 것들이 놀랍게도 다소 퇴폐적인 시기의 로마 유적의 일부에서 취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는 영국의 많은 온천들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는데 ‘그리스 복고’의 형태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온천마을이었다.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건국 공로자이자 제 3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저택을 이러한 신고전주의(neo classical)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양식으로 설계되었다.
토머스 재퍼슨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1796~1806년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혁명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새로 태어난 아테네의 자유시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은 제정양식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양식의 부활은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장인으로부터 도제로 그 지식이 전승되는 보통의 직업이 아니었다.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하나의 과목이 되어버렸다. 아카데미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접근방식 자체를 암시하고 있다.
아카데미란 말은 플라톤이 그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고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따라서 과거에 화가들에게 직업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던 구식의 방법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이것은 왕 스스로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왕립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 보다 그 시대의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기꺼이 사려고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아카데미에서는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데 역점을 두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러한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에 화젯거리를 제공해주는 사회적 행사였으며, 미술가들에게 명성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이제 미술가들은 전시회에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술가들은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냈다. 과거에는 그림의 주제가 아주 당연히 정해져있는 것이라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갑자기 미술가들은 세익스피어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인 사겅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구세계에서 신성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의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1737~1815)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세익스피어 연구가 말론이 이 주제를 화가에게 제의하고 필요한 모든 시대적 고증 자료를 제공했다. 코플리는 찰스 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탄핵된 의원 다섯 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원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끌어낸 이 같은 일화는 그때까지 대규모 그림의 주제로 된 적이 없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위해 선택한 방법도 역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17세기 의사당의 실제모습과 당시 사람들의 의상에 관해 고증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자문을 구했으며 하원들의 초상화를 찾아다녔다.
코플리는 국왕과 국민대표 사이에 일어났던 이런 극화적인 대결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이 그림이 그려지진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그림과 똑같은 장면이 프랑스에서 재현되었다. 미라보(Mirabeau)는 국민 대표들을 몰아내려는 국왕을 거부함으로써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존 싱글톤 코플리 <1641년네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 1세> 1785년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였다. 그는 혁명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 였다.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그를 대의 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마라는 목욕탕에서 집무하는 버릇이 있었고 욕조에는 간단한 책상이 붙어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품위 있거나 웅장한 그림이 되기는 다소 어렵지만 다비드는 실제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영웅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를 실감나게 묘사하였고, 중점적인 효과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자크-루이 다비드 <암살당한 마라> 1793년, 캔버스에 유채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발코니의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에 가깝다.
프란시스코 고야 <발코니의 사람들> 1810~15년경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들을 얼핏보면 반 다이크나 레이놀즈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나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도 7세> 1814년경
고야는 수많은 에칭도 제작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 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들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에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 주제이든 역사적 주제이든 풍속적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물들의 환상적인 주제이다.
<거인>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집과 성들은 조그만 점으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마치 실물인 듯 또렷한 윤곽으로 그려진 이 무시무시한 유령을 상상할 수 있다. 괴물은 달빛이 비친 풍경 속에 불길한 몽마처럼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뚜렷한 결과였다. 이제는 미술가들이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거인> 1818년경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고 이러한 관학적 미술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아니면 순진한 기인으로만 단정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미술을 인정해주었고 그를 굶어 죽지않게 해 주었다.
<태고적부터 계신 이>는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가운데 하나이다.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느님의 장엄한 환상이다. 이 하느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는 미켈란젤로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느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갔다.
윌리엄 블레이크 <태고적 부터 계신 이> 1794년
사실상 블레이크의 환상 속 형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rizen)'이라고 불렀다.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의 창조자도 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환상은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개불 처럼 보인다.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게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그는 정확한 묘사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꿈 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는 도움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영국의 두 풍경화가 J.M.W 터너(J.M.W. Tuner: 1775~1851)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터너는 그의 작품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종종 화제를 자아냈던 성공한 화가였다. 그 역시 레이놀즈아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년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는 단순함과 고요함, 그의 환상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함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의 세계가 아니라 동적의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그는 자기의 그림을 보다 눈에 띄고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림속에 모든 효과를 잔뜩 동원했다. 그의 걸작들은 웅대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눈보라 속의 증기선>에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시커먼 선체와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터너에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년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그리려고 했다. 컨스터블은 모든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하였고 그저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 뿐이었다. 그는 자연을 스케치하기 위해 야외로 나갔으며 화실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공들여 다듬었다. <건초 마차>는 단순한 전원풍경으로 건초마차가 개울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실제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끝없는 변혁
19세기
산업혁명은 장인 기술의 전통을 무너트려 기계생산이 수공업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작업장은 대공장으로 바뀌어나갔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건축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즉 견실한 기술의 결여는 ‘양식’과 ‘미’에 대한 이상한 집착과 함께 이 시기의 건축을 거의 말살시켰다. 수적으로는 이전 시대의 건물보다 훨씬 많았지만 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건물들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양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조지 시대까지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경험적인 방식이나 견본책들이 이 시기에 와서는 너무 단순하며 비예술적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당은 대개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고딕양식이 소위 ‘신앙의 시대’에 지배적인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에는 과장된 바로크 양식이 선호되었으며 성이나 관공서에는 위엄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적용되었다.
몇몇 19세기 건축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여 엉터리 고대 양식도 아니고 어설픈 창작도 아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들이 세운 건물은 그 도시의 얼굴이 되었고,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마치 자연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다.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인 배리는 건물의 전체 골격과 배치를 맡고, 정면과 내부장식은 고딕식 세부 장식 전문가인 퓨진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윤곽선은 런던의 안개 속에서 보면 상당히 위엄 있어 보이는 반면 가까이서 보이는 고딕 장식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주고 있다.
찰스 배리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오 퓨진 <런던의 국회의사당> 1835년
흔히 화가의 생애는 괴로움과 불안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가들에게도 소위 ‘좋은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화가의 일이 다른 직업들처럼 안정되어있어 늘 그려야 할 제단화나 초상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실 장식을 위한 그림과 별장을 꾸미기 위한 벽화를 필요로 했고 이러한 작업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화가는 후원자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렸고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껏 능력을 발휘하여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 그의 지위는 안정되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안정감은 19세기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다.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그러나 이렇듯 화가의 선택권이 확대될수록 화가 자신의 취향과 대중 취향 간의 간극은 점차 벌어져갔다. 보통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어떤 것을 살지 미리 염두 해 두고 다른 데서 이미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요구가 쉽게 충족되었다. 왜냐하면 화가에 따라 그림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긴 했지만 동시대의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일한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술가와 후원자 간에 종종 마찰이 빚어졌다. 후원자의 취향은 한쪽으로 고정되어있는 반면 미술가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활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후원자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 그들은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고 위신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부의 목소리만 따라 자신의 예술관에 어긋나는 제안을 일체 거부한다면 굶어 죽을 처지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어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산업혁명과 장인 기술의 쇠퇴, 전통성이 결여된 새로운 중산 계급의 등장, ‘예술’을 빙자한 값싸고 조잡한 상품 생산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일반 대중의 취향 수준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술가와 대중 사이의 불신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보기에 미술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작품에 대해 터무니 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고, 반면에 미술가들은 거만한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별개의 인종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벨벳이나 골덴 옷을 입었으며 챙 넓은 모자와 헐렁한 타이를 매고 다녔다. 그리고는 소위 고상한 관습들에 대해 경멸을 퍼부었다.
선택의 폭이 확장되고 후원자의 변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 외에도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 미술가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을 지녔다는 전제하에 개성표현의 완벽한 수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과거에는 기량이 뛰어나고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문 제작을 받아서 유명해진 미술가들이 그 시대의 지도적인 대가들이었다. 대개는 미술가들과 그들의 애호가들 사이에 서로 공유하는 통념 같은 것이 있었고 따라서 명작에 대한 기준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성공한 화가들(관전파 화가)과 죽은 뒤 진가를 인정받은 ‘이단자’들 사이의 구별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미술(Art)이라는 말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19세기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가장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19세기의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이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의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으며, 다비드처럼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그의 그림은 형태의 표현에 있어서 그의 탁월한 솜씨와 구도에 있어서의 엄격한 명료성을 모여준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년
앵그르의 반대자들이 모이는 구실점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였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혁명가 중 한 사람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었다. 들라크루아는 대상의 정확한 묘사와 그리스, 로마 시대 조상의 끝없는 묘사를 거부했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앵그르와 그 유파가 ‘장중한 양식’에 몰두하여 푸생과 라파엘로를 찬탄하고 있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베네치아 파와 루벤스에 주목함으로써 감식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아카데미가 화가들에게 요구하는 진부한 주제에 싫증이 나서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세계의 눈부신 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을 연구했다.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에서는 명확한 윤곽선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빛과 그림자 부분의 색조가 섬세하게 표현된 나체도 없고, 구성상의 배치와 절제는 물론 애국적이거나 교훈적인 주제도 없다. 다만 격양된 순간-아랍 기병대가 폭풍처럼 내달리고 앞발을 들고 일어서는-을 함께 하기를 바라며 그 역동적이고도 낭만적인 장면에서 느꼈던 기쁨을 전달하려고 했을 뿐이다.
외젠 들라크루아 <진격하는 아랍 기병대> 1832년
들라크루아가 진정으로 찬양한 미술가는 그와 동시대의 프랑스 풍경화가인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였다. 컨스터블처럼 코로도 가능한 진실하게 현실을 묘사하려는 결심에서 출발하였으나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진실은 조금 달랐다. 그는 세부묘사 보다는 모티브의 전반적인 형태와 색조에 주력했다.
그는 은회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주조색은 색채들을 완전히 흡수해 버리지는 않으나 색채들이 시각적인 진실에서 출발하지 않은 채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사실 그 역시 클로드나 터너처럼 고전이나 성경의 주제에서 따온 인물들을 주저없이 화면 속에 배치해 넣었는데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확고히 해준 것은 바로 이 같은 시적인 성향이었다.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티볼리에 있는 엑스테 별장의 정원> 1843년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고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Barbizon)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75)이다. 그는 풍경화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인물화로 까지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자 했다. 이전까지의 농부들은 브뢰헬의 그림에서 보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으며 줄거리도 없다. 추수가 한창인 넓은 들판의 세 명의 농부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밀레는 이들의 건장하고 튼튼한 체격과 신중한 움직임을 강조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하고도 견고하게 묘사했으며 이를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치는 들판과 대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농촌 아낙들은 아카데미 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보다 오히려 더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
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 1857년
이러한 운동에 명칭을 부여한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77)였다. 그는 1855년 파리의 낡은 한 건물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것을 ‘사실주의 G 쿠르베 전’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있어서의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오로지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에서 그는 그림 도구를 지고 시골길을 걷다가 친구와 후원자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관전파의 요란한 작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이 그림은 유치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아한 포즈도 유려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다. 또 화가가 자신을 셔츠 차림의 부랑아처럼 묘사한다는 발상 자체가 소위 점잖은 화가들과 그들의 추종자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기를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랬으며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은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1854년
순수함에 대한 관심과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관전파 미술에 대한 거부가 바르비종 화가들과 쿠르베를 ‘사실주의’로 이끈 반면에 영국 화가들이 경우는 전혀 다른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왜 미술이 이처럼 위험한 지경에 빠졌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들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장중한 양식과 라파엘로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술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라파엘로 훨씬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라파엘로에 이르러 미술이 불순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고 스스로를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라 불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i: 1828~82)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난 화가이다. 그가 따르고자 한 것은 중세 거장들의 정신이었지 단순히 그들의 그림을 모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로제티가 <수태고지>에서 갈망했던 것은 중세 거장들의 태도를 본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인사하는 장면을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나름의 새로운 표현 속에서 단순함과 순수함을 추구했으며 참신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하려고 애썼다.
끝없는 변혁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들라크루아에 의한 첫 번째 혁명의 물결과 쿠르베에 의한 두 번째 파동을 거쳐 세번째는 혁명의 물결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83)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하여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전통 미술의 모든 주장이 그릇된 생각에 근거 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전통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햇빛 아래서는 강렬한 명암의 대조가 나타난다. 화실 안의 인공적인 조건에서 보던 물체들을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보면 고대 조상에서 본뜬 석고상처럼 둥글거나 입체감 있게 보이지 않는다. 즉 햇빛을 받는 부분은 화실 안에서보다 옥외에서 훨씬 더 밝게 보이며 심지어 그림자도 반드시 회색이나 검은색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대상들에서 반사된 빛이 빛을 받지 않은 이러한 부분들의 색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옥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진 개별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발견들을 갑작스럽게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네의 초기 작품들 조차도 보수적인 미술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전통적인 부드러운 명암법을 포기하는 대신 거친 대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1863년 아카데미 파 화가들은 ’살롱(Salon)이라 불리는 관전에 마네의 작품을 입선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 후 소란이 일자 당국은 심사위원들이 낙선시킨 작품들을 모아 소위 ‘낙선전’이라 불리는 특별 전시회를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중들은 주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판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풋내기들을 비웃으러 전시에 왔다. 이 유명한 일화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계속된 논쟁의 첫 단계를 장식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네는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거부했던 색채 대가들의 위대한 전통, 즉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 파생되고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19세기 고야에까지 이르는 위대한 전통속에서 충실히 영감을 찾아냈었다.<발코니>는 옥외의 완벽한 밝음과 형태들을 집어삼키는 듯한 내부의 어두움 사이의 대조를 감행하게 자극한 것은 고야의 그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네는 60년전에 고야가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이 같은 탐사를 수행했다. 고야와 다르게 마네가 그림 여인들의 머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단단한 몸체들이 주는 인상을 자아내려 했고 명암 대조를 통해 그것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마네의 인물들의 머리는 평면적이다, 배경 속의 여인은 확실한 코도 없이 그려졌다.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지의 소치로 보였을 테지만, 사실은 야외의 환한 빛 속에서 보면 둥근 형태들은 때때로 단순히 칠해진 천들처럼 평면적으로 보인다. 마네가 탐색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효과였다. 그 결과는 다른 어떤 거장의 작품들 보다 훨씬 사실적이다. 그림 전체의 일반적인 인상은 평면적이지 않고 오히려 실제적인 깊이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효과를 주는 이유들 중 하나는 발코니 난간의 대담한 색상이다. 난간은 색의 조화라는 전통적인 법칙을 무시하고 구도를 가로지르는 밝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 결과 이 난간은 정면에 대담하게 돌출되어 보이며 그 때문에 이 정면은 물러나와는 것처럼 보인다.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 1868~9년
이 새로운 이론들은 외관, 즉 옥외의 자연 광선에서의 색의 취급뿐만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형태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롱샹의 경마>는 마네의 석판화(Lithographs: 돌 위에 직접 드로잉해서 찍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경마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는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만 해 줌으로써 빛과 속도와 운동감의 인상들을 포착하기를 원했다. 말들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스텐드에는 흥분한 관중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다. 그가 그린 말들 중 어느 것도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시각은 한 순간에 오직 한 장소에 초점이 맞추어질 뿐이다. 나머지 광경들은 모두 연결되지 않는 형태들의 혼합물로 남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보지는 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네의 경기장 석판화는 세부의 정경들을 하나하나 묘사한 것보다도 훨씬 더 진실한 것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목격했고 그 순간 보았던 사실을 보증할 수 있는 것만큼 기록한 것으로 그 장면의 부산함과 흥분의 순간을 전달하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 <롱샹의 경마> 1865년경
마네와 손을 잡고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협력한 화가들 중 한 명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였다. 그는 친구들을 종용해서 모두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 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옥외에서 작업하기에 좋은 스튜디오 용 작은 배 한 척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가의 풍경이 지니는 분위기와 효과를 탐색하는 작업이 가능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 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안이한 제작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예전의 대가들처럼 갈색조 바탕 위에 겹겹이 덧칠하는 것은 물론, 색채들을 혼합하고 어울리게 배치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 방식이었다.
모네 주변의 젊은 풍경화가들은 살롱 전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들은 1874년 어느 사진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 전시회에는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이 달린 마네의 그림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아침 안개를 통해 드러나는 항구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비평가들 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우습다고 생각하여 그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이라고 조롱 섞인 어투로 부르기 시작했다.
비평가들을 그렇게 격분시킨 것은 단순히 그림의 기법만이 아니라 이 화가들이 선택했던 소재들에도 있었다. 과거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받아들여지는 자연의 한 부분을 재현하게 되어 있었다. 로마 유적의 폐허를 한 폭의 그림같이 만든 사람은 클로드 로랭이었고, 네덜란드 풍차를 소재화한 사람은 얀 반 호이엔이었다. 영국의 컨스터블과 터너는 그들 각자의 방법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소재들을 발견해 나갔다. 터너의 그림은 처리 방법과 주제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모네는 터너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 머물면서 이 작품들을 보았는데, 이 작품들은 모네에게 회화의 주제보다는 빛과 증기의 효과가 가지는 마술적인 힘이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파리의 철도역 그림은 비평가들에게 아주 불성실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에는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인상이 담겨있다. 모네는 철도역이라는 공간을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로 여기고 흥미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김 위로 유리 지붕을 통해 흘러드는 빛의 효과와 그러한 혼란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기관차와 객차의 모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클로드 모네 <파리의 생라자르 역> 1877년
인상주의자 그룹의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원리들을 풍경화에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의 장면 어디에나 적용시켰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는 야외 무도회 장면을 그렸다. 그는 즐거운 군중들의 행위를 찾았으며 축제의 화려함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다른데 있었다. 그는 밝은 색채의 즐거운 혼합물을 보여주고 술렁이는 인파에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이 그림은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스케치 같아 보인다. 화면 전경에 있는 인물들의 머리부분들만이 꽤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편이지만 그것도 매우 대담하고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그려져 있다. 만약 그가 각 세부까지 세세히 다 그렸다면 그의 그림은 진부하고 생동감 없게 보였을 것이다.
15세기 화가들이 처음으로 자연을 반영하는 방법을 발견하였을 때도 그와 비슷한 충돌이 일어났다. 또 자연주의와 원근법의 승리가 형상들을 다소 엄하고 딱딱하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형태들을 의도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수법인 스푸마토 기법을 고안했다. 인상주의자들은 레오나르도가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어두운 그늘이 옥외의 밝은 광선 아래서는 발생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을 탈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전의 어떤 시대의 화가들보다도 더욱 더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리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인상주의 운동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한 화가는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였다. 그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는데 사람들은 형태도 알 수 없는 작은 점과 같은 사람의 모습에 화를 냈다.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이러한 혼란스러운 제자리를 색점들이 갑자기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데, 이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겼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인상주의 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
카미유 피사로 <이탈리아 거리, 아침, 햇빛> 1897년
이제 미술가들은 그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리는가에 있어 오직 자지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인상주의 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돌이켜 볼 때 이러한 관점들은 너무나 금방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네와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은 운좋게도 승리의 결실을 즐기며 전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들을 비웃던 비평가들은 결과적으로 큰 오류를 범했음이 증명되었고,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위신을 잃게 되었다.
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도와준 두 저력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인상주의자들의 승리가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휴대용 카메라와 스냅사진의 발전은 인상주의자들의 회화가 등장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 했다. 카메라는 우연한 광경과 예기치 않은 각도가 가지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사진술의 발달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더 심도있는 탐색과 실험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기계장치가 더 훌륭하고 값싸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야심적으로 찾아 나가도록 협력해준 조력자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였다. 18세기 일본 미술가들은 동양 미술의 전통적인 소재를 포기하고 채색 목판화를 위한 주제로서 하층민의 생활 장면들을 선택했다. 일본의 감식가들은 이런 값싼 작품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일본이 교역을 할 때 이러한 판화들은 물건을 싸는 포장지나 빈 곳을 메우는 종이로 자주 사용되었고 상점에서 아주 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마네 주변의 화가들은 그 판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것들을 열심히 수집한 최초의 부류였다.
이 판화들 속에서 그들은 프랑스 화가들이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던 아카데미한 규칙과 상투적인 수법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는 전통을 찾아내었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지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호쿠사이는 우물의 발판 뒤로 언뜻보이는 후지산의 정경을 재현했고, 우타미로는 판화 가장자리나 대나무 발로 인해 잘려나간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과감하게 무시한 점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충격을 주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였지만 그 그룹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앵그르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다. 초상화에서 드가는 가장 이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가 옥외 장면보다도 발레 장면을 주제로 선택하기 좋아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발레 연습 장면을 지켜보면서 드가는 매우 다양한 자세와 여러각도에서 인간의 신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드가의 그림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그는 소녀들의 분위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인상주의자들이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그녀들을 관찰할 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형체에 나타나는 빛과 그늘의 상호작용과 운동감이나 공간감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새로운 운동의 주된 이념들은 회화 영역에서만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으나 조각도 곧 모더니즘((modernism)의 찬반에 대해 열렬한 논쟁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고전기 조각과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으므로 그와 전통 미술 간의 근본적인 충돌이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
로댕은 저명한 미술가로 이름을 날렸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그의 작품은 비평가들에게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 화가들처럼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다. 그들처럼 로댕도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오귀스트 로댕 <신의 손> 1898년
전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를 접촉하였고 이상주의라는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복음을 가장 영향력있게 행사한 사람은 바로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 1834~1903)였다. 휘슬러는 1863년 <낙선전>에 마네와 함께 출품했다. 또한 그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는 드가와 로댕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주된 관심사는 빛과 색채의 효과에 있다기 보다는 미묘한 색면의 구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고 그것을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작품에 <회색과 검정색의 구성>이라는 특이한 제목을 붙였다. 그는 문학적인 관심이나 감상적인 어떤 단서도 제시하기를 꺼려했다. 이 그림에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단순한 형태들 사이의 조심스런 균형이다. 그리고 부인의 머리와 드레스로부터 벽과 배경에까지 배열된 회색과 검정색의 가라앉은 색조는 이 그림이 대중적인 공감을 얻도록 한 체념적인 쓸쓸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 1871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 1849~50년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출발점은 밀레나 쿠르베와 비슷했지만 그들의 정직한 노력은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순수해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너무나 자기 모순적이어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한다는 동시대 프랑스 화가들의 의도가 다음 세대에 훨씬 더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년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며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독일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riedrich: 1774~1840)가 있었다. 그의 풍경화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의 황량한 산의 모습은 그 발상에 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실레지아 산악 풍경> 1815~20년경
첫댓글 이달 부터 12월까지
강의록 속의 그림들은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회원님들 늦어서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