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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선 굵은 ‘하드 보일드’ 장동휘 |
눈짓 한 번 주먹 한 방으로 영화계를 평정한 사나이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
1960~70년대는 액션 영화 전성시대였다. 수많은 전쟁과 피가 튀는 격투, 사내들 사이의 배신 복수 의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박노식의 ‘용팔이 시리즈’는 전국에 전라도 사투리를 유행시켰고, ‘미국에서 날아온 태권스타’ 한용철은 ‘외다리 시리즈’로 동네 꼬마들을 달뜨게 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로 한국 액션 영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든 오승욱 감독이 이소룡과 할리우드 웨스턴이 우리 스크린을 정복하기 전, 짧지만 뜨거웠던 한국 액션 영화 전성기를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첫 순서는 ‘팔도 사나이’의 김두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분대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1세대 액션 스타 장동휘다. 눈썹을 조금 움직이거나 눈매를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시대와 사회의 어둠을 표현했던 매력적인 악당, ‘절대적 큰형’ 장동휘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
옛날 옛적 종로의 밤거리.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거리 한복판에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서 있다. 하얀 목장갑을 낀 사내는 꽁꽁 얼어붙은 종로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다. “나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용팔인디, 서울 종로에서 제일 센 놈이 뉘기여! 얼릉 나와서 나랑 한번 붙어보자고!” 행인들은 사내의 위세에 눌려 힐끔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도망치고, 술집 창문 사이로 사내를 훔쳐보던 술꾼들은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치자, 얼른 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건방진 사내의 도발에 못마땅해 하던 종로의 깡패 똘마니 두엇이 덤볐다가 쌍코피를 흘리며 도망친 뒤라 나서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불어 사내의 저고리 옷깃이 날리고, 그가 서울 종로 거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돌아서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다. 사내는 말없이 검은 가죽장갑 낀 손을 단단히 여미고 주먹을 쥔다.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쉴 새 없이 지껄이던 용팔이는 상대가 지금까지 맞붙었던 여느 똘마니와는 격이 다른 무시무시한 기세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문다. 마주 선 두 사내 사이로 바람이 분다. 꼼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내. 고함을 지르며 용팔이가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에게 달려든다.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거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번개같이 주먹을 뻗는가 싶었는데, 큰소리 치던 용팔이는 단 한 방에 종로 거리에 큰 대자로 나뒹군다. 그는 자신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 믿기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덤벼들지만 검은 가죽장갑을 낀 사내의 주먹에 또 나가떨어진다. 임자를 만난 것이다. 용팔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검은 장갑의 사내에게 넙죽 큰절을 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자 검은 장갑의 사내는 미소를 짓고, 용팔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다. “좋은 동생이 생겼구나.” 영화 ‘팔도 사나이’(김효천 감독, 1969)의 한 장면. 검은 가죽장갑의 사내는 영화 속에서 김두한을 연기한 장동휘이고, 전라도에서 올라왔다는 용팔이란 사내가 박노식이다.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 어린 시절, 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동네 극장 드나든 경력을 과시하면서 하는 말이 액션 영화 최고의 주먹이 누구냐는 것이었는데, 이때 항상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 장동휘와 박노식이었다. 물론 이대엽을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바로 무시당하곤 했다. 누가 더 센지를 놓고 다투다가 ‘팔도 사나이’에서 장동휘, 박노식의 종로 거리 대결 장면을 기억해낸 아이들은 장동휘의 주먹이 더 센 것으로 합의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박노식을 더 좋아했고, 박노식이 한국 영화 최고의 주먹이라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았으며, 장동휘는 너무 폼만 잡아서 별로라 생각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나는 어린 시절 장동휘와 영화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 초반,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의 사무실에서 한국 액션 영화에 대한 잡담을 나누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한국 액션 영화배우 중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기자들은 본 영화가 없으니 입을 다물었고, 어려서부터 한국 영화를 무지막지하게 섭렵한 40대 여자 편집장과 내가, 영화광들이 서로의 혈액형을 탐색하는 그들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소설 ‘살인자들의 섬’으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범죄 소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 편에는 이런 상황이 나온다. 탐정인 켄지가 사건의 핵심을 알고 있는 자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반신불수에 투박한 심성을 지닌 정보 제보자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정보 제보자가 말끝마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다가, 켄지에게 남자 배우 중 최고는 누구냐고 묻는다. 켄지가 대답을 않자, 정보 제보자는 “랭커스터. 절대적으로”라고 한다. 켄지 역시 “절대적으로 미첨”이라 답한다. ‘절대적으로’라는 말은 오직 그 하나만을 최고로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 이외에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두 사내는 상대방의 배우 취향에 경의를 표하고 서로 친해진다. 나는 ‘절대적으로’ 두말할 나위 없이 박노식이었는데, 여자 편집장은 ‘절대적으로’ 장동휘라는 것이다. 의외였다. 최무룡을 지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폼만 잡는 배우 장동휘에게 여자가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여자 편집장은 그를 좋아하는 이유로 “다른 남자 배우들과 달리 그의 연기에서는 허무주의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는 점을 들었다. 장동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다니, 여자라서 남자들이 못 보는 면을 보는 건가 싶었고, 그 후 영상자료원에서 장동휘 주연의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나와 장동휘 영화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