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재는 터널공화국
첫 버스편으로 새벽같이 도착한 북이면 사거리(四街)엔 또 비다.
가라는 가랑비 인가 좀 더 머물러 있으라는 이슬비 일까.
잠시 기다리는 동안 인접 북하면 강선정(降仙亭)(백두대간 74번
글 참조)이 뇌리를 스쳐갔다.
호남정맥의 추억이다.
막걸리대장 김창고, 가축도 가족이라는 장학금 모두 잘 지낼까.
몸은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생각은 여전히 온통 산인가.
맞아도 될 만 해서 일과(걷기)를 시작했다.
갈재에 오르는 1번 국도를 버리고 원덕리 옛길을 택했다.
전답과 마을 사이를 통과할 뿐이지 버스까지 다니는 길이다.
9정맥 종주때 터득한 사실 중 하나가 지방버스의 운행시간이다.
학생의 등교시간에 맞춰 시골 마을들을 순회하듯 거쳐간다.
그러려면 길 또한 버스가 다닐 만큼 업그레이드 돼야 한다.
여기 원덕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원덕리에는 5.35m의 미륵석불(彌勒石佛)이 있다.
마을이 미륵당, 미륵댕이로 불리기도 했고 원덕은 미륵원(院)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원덕리와 미륵불에는 길건너편 산의 눈썹바위와 더불어
전설도 많다.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미륵석불
미륵불의 원덕사에서 철길 건너(무단) 1번 국도에 올라섰다.
이제부터는 이 길을 따라서 갈재를 넘기 위해서 였다.
지금의 내 몸과 부슬비까지 오락가락하며 시야를 막는 기상에서
갈재의 옛길을 찾아가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원덕리 마을을 관통한 것도 옛길에 대한 애착에서라기 보다 국도
보다 지름길이어서 였을 만큼 내 몸은 절박하다.
전남과 전북의 도계를 어렵게 넘었다.
장성군 북이면 신목란과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를 가르는 재,
276m(많이 깎아내 지금은 220m?)에 불과하다는 갈재에 참으로
힘들여서 올랐다.
아무 데나 주저앉기를 헤일 수 없이 반복했다.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수시로 내리는 비였다.
양도(전남과 전북) 산자락 마을 사람들은 노령산맥이 가로놓인
탓에 비가 잦다고 한다.
갈재 고개마루 / 장성쪽에서
갈대가 많아 갈재, 노령(蘆嶺)이란다.
예전에는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갈대로 보았던 듯
전국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재의 시련이 이만저만 아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남도인뿐 아니라 이 고개를 넘어야 했던 무수한
이들의 애환이 점철된 해발400m의 옛 고갯길은 찾기조차 어렵고
꼬불꼬불 1번 국도가 고개를 넘어간다.
호남선 철도의 터널과 호남고속국도 터널로 몸살을 앓았다.
복선화와 차선확장으로 터널들이 배가되더니 이즘은 국도까지도
터널화 하려나 보다.
그리고 용도 폐기된 터널 등등 터널공화국이다.
1천원의 힘, 1천원에 내장된 정
호남정맥 종주중에도 정읍권에 접어들었을 때 감회가 유달랐다.
고향땅이라 그랬을 것이다.
길을 걷는다고 해서 다를 게 있겠는가.
정읍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비록 아스팔트 위지만 밟는 촉감이
부드럽고 맡는 공기가 정겨운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는 날씨만 협조해 준다면 짧은 시간이나마 역전된
호남정맥과 길의 관계가 될 것이다.
정맥에서 맨날 내려다 보이기만 했던 그 길에서 정맥을 올려보며
새로운 메시지를 받게 될 것이니까.
정읍쪽 갈재 통일공원에서 비를 피할 겸해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
으나 조급하기는 고사하고 마냥 여유로웠다.
모든 환경이 처음이건만 낯설지도 않았다.
작게는 면(面)계를 넘었고 다음으로는 군(郡)이 바뀌었고 크게는
도(道)가 바뀐 것인데도 고향 고을에 들어서서 그러는 것이리라.
갈재 고개마루 통일공원 / 정읍쪽
맛깔스럽고 푸짐한 찬에 식욕이 돋아 탐욕스럽게 식사를 했는데
입천(입암면 천원리의 이니셜)식당 여주인은 가격표의 식대에서
1천원을 덜 받겠단다.
액면가 1천원의 힘(용도)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도 고맙고 흐뭇했을까.
그것은 천원에 내장된 정(情)의 위력이리라.
그리고 이 천원의 힘은 온 종일 계속해서 활력있게 일했다.
자주 쉬는 것은 여전해도 마음만은 상쾌하고 부유로웠다.
꼭 밟고 가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의 상교동과교(科橋)건너
허름은 해도 화기가 넘쳐나는 정자의 촌로들 또한 그랬다.
그들은 늙은 길손에게 농촌의 간식거리를 자꾸 주고 싶어했다.
해가 서산에 걸쳐 있는데도 일어서기를 주저한 것은 입천식당의
천원에 버금가는 정의 힘이었을 것이다.
넘은 고개 아래, 정읍 시가지 초입에 선 대형 표석 하나가 이 늙은
이를 근 60년 전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호남중.고등학교>다.
동족 상잔의 6. 25동란, 밀리고 밀기의 반복으로 소위 1.4후퇴때,
집시처럼 유랑(?)하다가 아무 학교에나 가서 학생증을 제시하고
책상 하나 차지하는 일을 반복하던 때였다.
1. 4 후퇴시절, 동족상잔의 와중에도 5개월간 내게 면학의 기회를
주었던 고마운 학교
나는 서울에서 여기 정읍까지 밀려 왔다.
전세(戰勢) 따라 북상하기 까지 5개월 동안 나는 바로 이 학교의
교문을 드나들었다.
이 기간에 나를 각별히 살펴준 이웃 하나가 있었다.
단지, 옆 자리에 앉은 피난민이라는 이유 이상으로 그는 심성이
착했다고 기억된다.
그가 내게 준 도움이 물량으로 볼 땐 미미하다 하겠으나 정만은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입천식당 여주인의 액면가 1천원의 의미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착한 벗을 잃고 말았다.
내가 걷기는 커녕 일어서지도 못해 유폐되듯 교외 산자락의 조그
마한 사찰 한 구석에 눕혀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to be, or not to be(이 꼴로 살아갈 것인가, 말 건가)를
절규하던 땐데 벗을 챙길 경황이 있었겠는가.
결국 내 안 깊숙이 자리잡은 회한이 되고 말았다.
나는 남겨진 옛길을 위해 애곡(哀哭)한다
정읍 시가지를 통과할 때 <송우암수명유허비>를 확인한 후 1번
국도상의 팔인회맹유적선돌(八人會盟遺跡) 지나 북면으로 갔다.
역시 국도 따라 새로 선 <영조생모숙빈최씨만남의광장> 표석을
본 후 태인에 들어섰다.
우암은 1689년 숙종 15년에 정읍, 수명유허비가 선 곳에서 사약
받고 세상을 뜬다.
팔인이 동심서사(同心誓死) 회맹한 때는 1592년 선조 25년이다.
이즈음에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지만 영조의 생모인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에게 최초로 찾아온 행운이 태인의 대각교와 관련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모두 옛 1번국도상이며 옛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동지지 보다 훨씬 이전의 옛길이다.
정읍시가지 ~ 북면간 1번 국도상(북면 승부리)의 팔인회맹유적
선돌(위)과 설명비(아래)
이조 21대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가 천애의 거지소녀였을 때 태인
대각교 앞에서(표석 옆) 최초의 행운을 만난다.
그런데 삼남대로 옛길 걷는 이들이 이 길을 외면하고 과교 이후
연지동 ~ 제2산단 ~ 북면 한교리 ~ 태인면 태서리 ~ 피향정을
고집하는 듯 하다.
이 길은 대동지지의 길이라 할 수 없고 길의 속성에도 어긋난다.
대동여지도, 대동지지를 이처럼 왜곡해서 이를 옛길 걷는 정석
이요 바른 자세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단호히 이단이 될 것이다.
극히 제한적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옛길의 복원과 보존 주장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앞에서 열거했듯이 그 시기 이전에도 엣길은 무수했으며 교통과
통신수단, 기록과 보존등 저작술이 원시적이던 때임을 감안하면
누락과 오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편견과 반상 차별이 길에 까지 미쳤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길은 사람에게 무엇이며 길의 역사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길에 무슨 문화가 있다는 것인가.
오늘날의 길에는 종류와 등급, 통행의 허용과 금지와 제한 등이
다양하고 생멸(生滅) 또한 일정한 룰에 의해 진행되지만 예전의
길은 연(輦)과 승교(乘轎), 유배함거와 우마차 길 외에는 사람이
다니면 곧 길이 되었다.
그리고 늘 지름길, 샛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조우(遭遇)를 피하려고 우회도 하지만 그건 예외다.
한양을 목표로 한 지방의 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길의 길이가 길 수록 더욱 끊임 없이 지름길을 찾았을 것이다.
압축하면 모든 길은 사람을 위해 생멸한다.
문헌상의 대로와 옛길들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770년 이후 1세기 어간에 만들어진 이 문서들중 특정한 자료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문명의 양광이 제대로 쬐일 수 없었던 열악한 환경에서 부실하게
작성된 자료들을 절대무오의 성서처럼 모셔서는 안되잖은가.
하나님의 축자적 계시물이라는 기독교 성서에도 이미 오래 전에
유오설이 등장한 터에.
나는 길을 걸으며 수시로 입장을 바꿔본다.
내가 옛사람이었다면 그 때 어느 길을 택했을 것인까.
옛분이 오늘 걷고 있다면 그는 어느 쪽을 택하려 할까.
합리적이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미 멸실된 길 찾겠다고 논둑밭둑 헤맬 의사 추호도 없다.
옛길 밟겠다고 공단이나 아파트 단지 뒤적이지도 않는다.
잘 보존되어 있는 옛길 걷는 것이 좋다는 어느 분의 옛길 예찬과
달리 나는 남아있는 옛길을 애곡한다.
왜냐 하면 쓸모가 없어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예외가 있지만)
다른 옛길 지역이 각광 받아 개발되고 생활이 업그레이드 되고
부자도 될 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저주받은 느낌인데 예찬
하고 보존 운운하는 것은 그 지역민들의 분기만 탱천하게 하는
짓이 아니겠는가.
나는 덕통역이 있었다는 영남대로 덕통마을(경북 상주 함창읍)
갑술생 현태환옹(翁)의 분노어린 푸념을 잊지 못할 것이다.
대를 이어 붙박이인 이 영감을 분통터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옛길" 운운하지만 점촌이 지호지간이고 바로
옆으로는 활주로 같은 도로가 지나가는데도 버스 한 대 들어올 수
없고 날로 더욱 버림받아가는 곳이라던,,,,
그래도 보존을 주장하고 싶겠는가.
이런 옛길 걷는 것이 좋다고 쾌재 부르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