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적오산성이 있어 적오산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 그곳엔 산성은 사라지고 바위에 작은 글씨로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참고 1)
북대전 나들목과 원자력연구소, 송강으로 갈라지는 사거리를 막 지나면
지방 2급 하천인 덕진천이 흐른다. 이곳이 고려시대에 덕진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테크노밸리 아파트가 한창 공사중인 고개-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나무들이 울창한 오솔길이었는데 지금은 6차로로 뻥 뚫린 도로가 나 있다 -를 넘어서면 그 아래 송강이 펼쳐진다. 갑천으로 흘러드는 많은 물길들이 이 곳에 많았다는데 아파트 들어서고 하면서 다 메워지고 흔적도 안 보인다. 송강 너머 묵마을로 유명한 구즉동의 오봉산 밑자락엔 구석기 유적지가 있단다.
갑천을 지나니 바로 신탄진이다. 초입의 3,4 공단 자리가 옛날에 하두 물난리가 많이 나서 주민들이 흙을 퍼다 마을 한 가운데 토산을 쌓아놓고 그곳으로 피신하곤 했다는데 공단이 들어서면서 다 헐리고 없어졌다. 신탄진은 한때 무가 맛있기로 유명했다는데 그 역시 지금은 과거지사가 되버리고 말았다. 한국타이어공장 옆으로는 금강 들어가는 소하천인 덕암천이 흐르고 있는데 수질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안 좋아보였다. 공장 옆인데 오죽하랴. 대덕구에서 현재 대덕환경 2010 프로젝트를 통해 하천을 정비해 주민들의 휴식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니 앞으로 기대가 된다. 드디어 금강이 보이는 풍한방적 옆길로 들어섰다. 금강위엔 1905년에 세워졌다는 금강철교가 보인다. 예전엔 그 아래 수영장이 있어서 여름이면 많이들 놀러오곤 했단다. 금강철교를 지나면 현도교가 보이고 이쯤에서 우회전해 라이프 새여울 아파트를 끼고 산 쪽으로 올라갔다. 현도교는 갑천변고속화도로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새여울이란 신탄의 우리말 이름이다. 새로 생긴 여울이란 의미의 신탄에 배가 닿는 나루가 생기면서 신탄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신탄진 지명의 유래는 한때 갑천이 범람하여 하도가 바뀌고 새로 여울이 생겼다해서 불리우던 것인데 철도가 개통 되면서 역명이 되고 오늘날까지 읍이나 동명으로 이어온다. 여울지형인 강변 백사장은 1980년12월 대청댐이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전, 청주와 같은 도시와 가까워서 주말이나 여름철의 휴양지(수영장)로 이용되어왔다.)
이 새여울 아파트 옆산은 계족산 자락의 끝으로 신흥선원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소나무숲과 산책로가 잘 닦인 산속으로 들어가 걷다보니 문득 눈 앞이 확 트이며 금강이 바로 앞에 내려다보인다.
안개가 아직 덜 걷혀서 시야가 많이 확보되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 아래로 금강에서 낚시질하는 강태공들과 멀리 대청호 보조댐에서 방류하는 강물의 하얀 포말, 그리고 맞은편의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산리는 진주 유씨의 집성촌으로 한때 제 2 현충원 후보지로 거론될 정도로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이곳에서 한참동안 조용히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보았다. 산 위에서 이런 강의 흐름을 접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게다가 이 곳은 대청댐 가는 길 바로 위에 위치해있음에도 그간 수시로 대청댐을 오갔던 분들도 이런 곳이 바로 머리 위에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고 하시니,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하냥 있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지체하면 계획했던 다른 곳을 못 가보기에 아쉬움을 접은 채 산을 내려와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산책로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보훈병원이 바로 앞에 있어서 거기 환자나 보호자들이 운동삼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차를 타고 미술창작마을을 지나 용호동 구석기 유적지로 갔다.
용호동은 용호천과 금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상수도 정수장 건설 도중에 발견한 유적지로 한남대 유물팀이 발굴을 맡아 마제석기 등 10만~1만년 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1800여점의 구석기시대 유물을 발굴했단다. 그 유물들은 한남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고, 우리는 유적지 보호를 위해 잔디가 입혀진 채 유적지 표시판만 뎅그러니 놓여있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유적지를 지나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두 그루의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길 양쪽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동네 안쪽에서 봤을 때 오른쪽이 할아버지 나무 왼쪽이 할머니 나무로 서낭당 구실을 하는 나무라고 한다. 나무 아래 돌탑이 쌓여져있고, 제를 지내기 위한 돌상도 번듯하게 놓여있는데 지금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정월 대보름이면 꼬박꼬박 제를 지내는 풍습이 사라져 서낭당으로서의 고유 목적을 상실한 상태여서 안타까웠다.
용호동을 나와 국가하천 금강이란 표지판을 마주 보면서 용호교로 들어섰다. 아까 우리가 산 위에서 하얀 포말을 보았던 그 보조댐 위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 건너 저쪽은 충북 청원군이다. 표지판과 댐 입구 근처에 용바우(용바위)가 있는데 용머리 산날맹이 끝에 있어서 용바우라 했으며, 옛날 이곳에 진주 강씨가 정자를 세우고 놀았단다. 계족산을 기준으로 남송강북이란 말이 있는데, 남쪽엔 송씨 북쪽엔 강씨가 모여 산 것을 일러 표현한 것이다.
노산솔밭을 지나 예전에 복숭아밭이 펼쳐졌다는 들을 지나 문화재조사연구단 건물을 지나니 금강이 보인다. 차에서 내려 조용한 새벽의 금강을 한껏 눈과 마음에 담아봤다. 얼마 전 기네스북에 물수제비를 37번이나 뜬 사람이 있다더라면서 각자 돌을 들어 물수제비를 뜨기도 했다. (* 참고 2) 이 날 최고의 기록은 안여종 선생님이었는데, 갑천에서는 수제비 뜬 돌이 갑천 건너편으로 넘어가버릴 정도라고 한다. 힘도 좋으셔라.^^
<강 건너편 산의 바위 아래 무슨 기도를 드리는지 촛불이 너울대고 있다>
< 새벽을 가르며 강 위를 나는 비둘기들 >
<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의 모습 >
드디어 고대하던 새벽참 시간! 이번엔 안타깝게도 국수가 없어 앙꼬 빠진 찐빵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각자 준비해오신 떡과 빵과 삶은 달걀과 허브차로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참을 먹은 다음엔 조가비 가면을 만들어 누가 가장 유물과 흡사한가, 누가 가장 예쁘게 만들었나 경연대회를 펼쳤다. 신새벽에 예닐곱 사람들이 강가 자갈밭에 옹기종기 모여 손엔 조가비 하나랑 돌멩이 하나씩 들고 꽁꽁꽁꽁 구멍을 뚫는 모습은 가히 재미난 모습이었다. 사정 모르는 누가 보면 새벽부터 저 사람들 뭐 하는겨? 날궂이하남? 하며 희한해했을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하기 힘들다는 책이 상으로 걸린지라 거기에 목을 맨 일행들은 열심히 뚜드려서 작품을 완성했는데, 나중에 품평 결과 가장 비슷한 모습은 홍주영씨가, 가장 예쁜 모습은 정은영 간사님께 낙점이 찍혔다. 근데 다들 참 잘 만드셔서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노산솔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대청댐 하류에 위치한 옛 금강나루터로써 40 ~ 50년생의 송림과 금강 백사장이 어우러저 하절기에는 해수욕장을 방불케할 만큼 행락객이 몰리는 강변유원지로써 인근에 금호송어장과 식당촌이 밀집하여 있단다. 일행들 가운데 몇 분은 학창 시절 이곳으로 배를 타고 소풍을 오시기도 했단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신탄진과 이곳을 오가는 배가 다녔다고 한다. 그 배를 타고 노산솔밭에 가는 기분은 어땠을까? 제법 운치있고 재밌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아쉽게도 나루터의 흔적만 남아있다.
노산솔밭에 들러 새벽 안개에 고즈넉이 둘러싸인 소나무들을 감상하다 하산디마을로 향했다. 하산디(하산대(下山垈), 하산뒤, 하산리)는 덕고개 서쪽, 뒷산 동쪽, 돌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동(長洞)에 산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보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하산디 혹은 아래산디라 한다. 아까 들렀던 용호동 구석기 유적지를 다시 지나 안으로 쭉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용호천이 흐르는데 이 곳은 자연선 돌부침으로 제방을 해놓은 게 눈에 띈다.
그냥 흔히 보는 시멘트 제방이 아니라 더 좋아보이는데 돈이 제법 들었을 거란다. 이 제방을 쌓고 보를 만드느라 위쪽의 멋진 바위들이 물 속에 파묻히게 됐다고 한다. 2년 전쯤 안선생님 가족이 놀러와서 멋지다고 경탄을 했던 곳인데, 지금은 그 멋진 바위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인해 사라지는 자연이 어디 이뿐이랴!
< 물에 잠기고 윗부분만 간신히 남아있는 바위 >
차에서 내려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용호천을 따라올라가다보니 날개의 이슬이 마르길 기다리며 풀잎에 매달려있는 나비와 보랏빛 감도는 검은꽁지 잠자리도 보이고, 거미줄을 낭창하게 쳐서 아침먹이를 기다리는 거미도 보인다.
길가 논밭에 옹기종기 심어진 콩, 옥수수, 벼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향긋한 풀내음이 심신을 가볍게 산란시킬 즈음 하산교에 다다른다.(그런데 사진엔 용호교라 쓰여진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기준으로 마을은 양지뜸과 음지뜸으로 나뉜다. 양지뜸은 하산디 마을 안에 있는 마을로 하산디 마을 중 동쪽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양지뜸(이)이라 하고, 음지뜸은 하산디 양지뜸 서쪽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남쪽으로 산 날맹이가 가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음지뜸이라 하였단다. 그래선지 양지뜸엔 신축가옥도 있고, 수십년 째 마을 이장을 지내신다는 분의 집도 보이고, 집도 여러 채 모여 있으며, 집의 상태가 양호한 반면 음지뜸엔 집이 몇 채 없는 데다 그나마 폐가가 많고 사람이 사는 집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 여기까지 대평리가 종점인 725번 시내버스가 들어오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완전 시골마을이었다.
< 아침 연기가 피어오르는 음지뜸 >
하산교 바로 옆 음지뜸 쪽엔 아주 잘 생긴 문인형의 돌상이 있는데, 몇 번의 물난리통에 자리를 두어 번 옮겨 지금의 장소에 놓이게 됐는데, 이 돌상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서울사람이 자꾸 와서 팔라고 한단다. 이 사람이 혹시나 파갈까봐 시멘트로 확실히 붙받아놓은 모양이었다. 바로 옆엔 돌탑이 있는데 이 돌탑도 원래 이 자리가 아니라 물에 휩쓸려 내려간 걸 급히 모아서 급조한 거라 다소 무성의하게 쌓여져있다. 이곳에선 매년 탑제를 지낸다고 한다.
< 돌상과 돌탑 뒤로 양지뜸이 보인다 >
이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일정을 마쳤다. 마을 사람 하나가 차를 몰고 나가다 기념촬영하는 우리들을 웬 일인가? 하고 빤히 쳐다보고 지나간다. 신탄진정수장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을 따라가니 금방 시내가 나온다. 산 하나 사이에 두고, 몇 십 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버린 듯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에 나온 남산은 서울 남산이 아니라 동네 앞산을 이르는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난 그걸 이제야 알았다!)
원촌교 바로 오른쪽으로 서원나루가 있어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내리고 했단다. 바로 앞에 숭현서원이 있어서 나루터 이름이 서원나루였나보다.
내가 사는 전민동의 유래에 대해 안여종 선생님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예전에 그곳에 ‘정민역’이라는 역참이 19세기 말까지 있었단다. 그래서 아마 '정민동'이었다가 역이 없어진 뒤로 일제시대때 이름이 전민동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신다는데 동사무소 앞에 있는 유래비엔 전혀 다른 말이 적혀있다.(* 참고 3)
장마기간이라 왠지 축축 처지는 느낌에, 집안에 안 좋은 일도 있고 하여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새벽답사를 하고 나니 기운이 팔팔 나는 듯 했다.
답사 끝나고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바로 광주로 가서 병원으로, 시내로, 고모댁으로
하루종일 광주를 종횡무진 갈고 다니다 집에 돌아온 늦은 저녁에도 말짱했으니 말이다.^^
하루를 고스란히 쓸 수 있도록 배려해준 남편에게 참 고마웠다.
* 참고 1 : 적오산
백제시대에 쌓은 안산산성과 적오산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성형식인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방어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지닌 산정을 가운데에 두고 지형을 자연 그대로 살려 성벽을 둘러치고 사방에 성문을 낸 것이 우리나라 테뫼식 산성의 특징이다. 안산산성과 적오산성은 둘레가 700여 미터가 넘는다. 성벽은 오랜 세월동안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래도 성벽의 일부는 잘 남아있어 당시 견고하게 쌓았던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안산성이 있는 성재봉(城在峰, 226m,)은 우산봉에서 북쪽으로 향해 계속 뻗어가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는 능선상에 야트막하게 솟아있는 야산이다. 성재봉을 지나면서 안산(案山)이 된다. 안산은 급격하게 마감하면서 건너편 산(우리 연구소 풍동 뒷산인 수양산과 이어짐)과 용담리 협곡을 만든다. 지금은 거칠메기고개를 관통하는 넓은 국도가 새로 나있지만 몇 년 전만해도 대평리 쪽에서 대전 오는 길은 제1안산교가 있는 1번국도(지금은 구도로)를 따라 이 협곡을 통과해야만 했다. 성재봉은 우산봉과 갑하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통하므로 급할 때 피하기 좋은 위치이고, 북쪽 대평리의 넓은 들이 한 눈에 보여 적을 관측하기 좋고, 또 ‘S’자 형으로 굽어진 용담리 협곡을 지키는 천혜의 길목이므로 이곳은 지리적으로 요충지였던 것이다. 안산산성은 그런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안산산성 앞으로 당진-상주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안산(案山)의 끝자락이 곧 잘려져 나가고 이 협곡에는 큰 다리가 놓일 것이다.
얼마전만해도 북쪽에서 대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조치원에서 유성으로 이어지는 1번국도로 연결된 대평리 방향과 경부고속도로가 나있는 신탄진 방향이었다.
대전시 덕진동 에 자리잡고 있는 적오산 가는길은 유성에서 시발점을 잡아 유성, 송강, 신탄진 도로를
따라 충대 후문을 지나 신성동 자운대 앞을 지나 충렬사 삼거리를 지나 화암네거리에서 좌회전
신탄진방향으로 진행 하면 원자력 연구소 와 호남고속도로 북부 나들목의 사거리에서 원자력 연구소
방향으로 진입 하자마자 시멘트 포장 도로가 난 좌측으로 진입하면 적오산성 0.5km 이정표가 있는데
적오산 들머리이다.
적오산은 유성에서 신탄진 방향 으로 가다 화암 네거리에서 좌측에 솟아 있는산으로 주위 마을 사람들은 적오산 보다는 성태산으로 더 잘알려진 산으로 역사적으로는 산성으로 유명한 산으로 자운대와 원자력 연구소가 들어 서며서 일반인 들에게서 멀어진 산으로 자운대 직원들과 원자력 연구소 직원들의 휴식과 체력 달련코스로 각광을 받는 산이다.
적오산성 이정표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우측으로 가건물로 지어진집을 지나 오르면 좌측으로 공사장 인데 전원 주택을 짓는 모양이고 우측 임도로 진입하면 대전광역시 돌 표지석을 보니 좀 이상하다. 뒤편을 살펴보니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적오산성 이라 적혀 있어 아하 표지석이 잘못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 방향 으로 세워 놓아야 될 것 같다. 올라가면서 돌표지석을 보니 대전 광역시란 글만 보이니 이상할 수밖에 대전시 경계도 아니고 대전 광역시란 글만 덜렁 있으니 말이다. 유성구에서 바로 세워줬으면 한다.
표지석 옆으로 이정표 목이 있는데 이정표 는 훼손되어 없고 기둥만 덩그런히 있어 볼썽 스럽다. 오르쪽 으로 잘 정돈된 나무계단을 따라 오른다. 송전탑을 지나고 나무의자 가 있는곳을 지나 나무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오르니 습기가 많아서인지 모기가 극성을 부린다. 이런때는 쑥으로 피우는 모깃불이 제격인데 말이다. 나무의자와 평상이 마련된 참나무 밑에서 잠시 감상에 젖어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TJB 대전방송 기지국이 나온다 대전 북부와 충북 일부지역을 커버 하는 기지국이란다.
기지국에 서 바로 올라서면 폐초소가 자리잡고 있는 정상인데 넓직한 것이 성터임을 짐작케 한다. 정상에서는 계족산이 보이고 송강쪽 테크노 벨리 공사가 한참이고 우성이산이 바로 코 앞 이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북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원자력 연구소 건물들이 나뭇잎 사이로 가물 거린다. 흐미한 성벽을 따라 북쪽 방향 으로 진행 하니 나무 사이로 절벽인 것 같아 밑을 보니 돌로 정교하게 쌓아 놓은 산성 이다. 높이 3m 넓이 5m정도로 쌓여져 있는 적오 산성 몇백년을 저기 저 자리에 비 바람을 맞아가면서 굳굳하게 자리를 지킨 산성이 아름답게 보인다. 산성을 지나면 바로 공터에 운동시설도 마련 되어 있다. 북문 성터를 지나면 경사지 내리막 길 에서 갈림길이 나오는 데 우측 길은 원자력 연구소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좌측으로 안부에 내려서면 자운대로 향하는 길과 금병산 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있다. 성터를 죽 둘러 보는데 남쪽 방향 으로는 거의 무너져 두군데의 흔적만이 남아 있고 서문터 30m 떨어진 곳에 우물 있다 했는데 찾지를 못했다.
하산길은 남서 방향 으로 호남 고속도로 굴다리 통로로 이어지는 등로로 잡아 허물어 지고 흔적만이 남은 성벽을 내려서니
대전 광역시 에서 설치한 적오산성 안내 표지판이 있다.
(화암네거리~적오산~금병산산행기보기)표지판을 뒤로 완만한 경사
지를 20여분 내려오면 우측으로 자운대가 보이고 우측으로 적오산 주말농장 식당이 있다, 식당 갈림길 도로에서 부터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도로따라 내려오면 호남고속도로 지하통로이다.
어두컴컴한 지하통로를 통과 하면 우측 으로 방현동 버스 정류장이 있고 좌측 으로는 적오산 주말농장(토종닭 토종 돼지 기러기)식당 입간판이 있는데 오래되어서 글자가 희미하다.
6차선 도로 건너편으로도 방현동 버스 정류장이 있고 양사싯골 식당(토종닭 묵 보리밥)입간판이 있다, 지하 통로는 유성에서 시발점을 잡아 충대 후문을 지나 자운대 앞을 통과 충렬사 삼거리를 통과 해서 화암사거리 가기 전에 좌우측 방현동 버스 정류장이 있는곳에서 좌측 으로 호남고속도로 지하통로 가 있는데 적오산 오르는 초입이다. 야트막한 적오산 전체적으로 둘러보는 시간은 1시간 이면 족한 산이다.
위 치 : 대전 광역시 유성구 덕진동 산 19-1
출발일자: 2003년 7월 10일 목요일 날씨,오전비 오후 흐림(무척더움) 차 량: 좌석버스(도로안내지도)
차량경유 : 유성에서 시발점을 잡아 유성, 송강, 신탄진 도로를 따라 충대 후문을 지나 신성동 자운대 앞을 지나 충렬사 삼거리를 지나 화암네거리에서 좌회전 신탄진방향으로 진행 하면 원자력 연구소 와 호남고속도로 북부 나들목의 사거리에서 원자력 연구소 방향으로 진입 하자 마자 시멘트 포장 도로가 난 좌측으로 진입하면 적오산성 0.5km 이정표가 있는데 적오산 들머리이다.
* 참고 2 :
기네스북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에 사는 엔지니어 저던 콜맨 맥기라는 사람이 블랑코 강에서 1992년에 38번이라는 놀라운 횟수를 기록했다. 맥기는 <물수재비의 비밀>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데, MIT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물체의 고속 회전 상태를 촬영하는 장치를 통해, 돌이 수면 위로 여러 번 튀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했다. 물수제비를 잘 뜨는 사람들은 수면과 거의 평행을 이루도록 돌을 던진다. 돌의 속도가 매우 빨라야 하고, 돌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맥기의 기록을 두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수제비의 실력자들이 모여서 경쟁을 하는 가운데 나온 기록이 진정한 최고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물수제비의 최고 달인이 누구인지 겨루는 대회가 미국 미시간 주의 매키낙 섬에서 매년 7월 4일에 열리고 있다. 그 대회 최고 기록은 1975년에 존 코라가 기록한 '24번 그리고 무한대'이다. 당시 매키낙 섬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코라가 던진 돌은 24번 수면 위를 튀고 나서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실 맥키낙은 물수제비 최고 기록에 도전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하기 힘들다. 변덕스런 날씨, 방향과 세기가 자주 바뀌는 바람, 배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주변 환경. 때문에 코라는 매키낙 섬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마치 잔디가 불규칙하게 나 있어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 센터코트와 비슷하다." 실제로 저던 맥기가 맥키낙 섬을 찾아 물수제비를 시도했을 때, 그의 기록은 17번에 머물렀다. 결국 물수제비를 뜨는 사람의 실력과 함께, 장소 조건도 중요한 셈이다.
* 참고 3 : 전민동의 유래
1. 전민동사무소에 올려진 자료 :
지역의 전답이 좋으며, 농사가 잘 되는 곳이므로 전민리(田民里)라 부르던 지역으로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현종 9년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에 속했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는 회덕군 구즉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후 대전군 구즉면 문지리였다.
1935년 11월 1일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 구즉면에 속하고 1984년 9월 1일 대전시 직할유성출장소 관할구역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직할시 유성구 전민동이었다가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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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화재 김반의 묘에 나온 자료 :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은 조선시대에 정민역(貞民驛)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이 일대에는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광산 김씨 가문의 묘역이 있다. 묘역에는 부인의 묘 2기와 큰아들 익렬(益烈), 셋째 아들 익겸(益兼), 손자 만준(萬埈)의 묘가 있으며, 두 개의 정려문(旌閭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동네에 세우던 문)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정민역(貞民驛)이 설치되어 있던 지역이다. 이 일대를 나라에서 사패지(賜牌地)로 하사받아 광산김씨(光山金氏)가문의 묘역이 되었다.
전민동은 유성구의 동쪽에 위치해서 비교적 낮은 산악지대와 들에 자리한 지역이다. 전민동의 멀리 북쪽에는 해발 263m의 보덕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악지대는 그 모습이 푸른 구름지대같다. 여기서부터 수적을 남기듯 남쪽으로 흐르는 두 줄기의 산줄기는 동쪽은 전민동의 멀리에서 끊기고 물방울 같은 산을 점점 흘리며 흐르지만 서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줄기는 두툼한 위세이다. 전민동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 같다. 전민들에서 더러 발견되었다는 돌화살촉 돌도끼 등으로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지만 지형상 느낌이 그렇다. 역사적으로 전해오는 뚜렷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삼국시개에 전민동을 통하는 당시로서는 큰길은 있었던 것 같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기록에 더러 보이는 회덕에서 서원진 나루를 거쳐 공주로 통했다는 당시로서의 큰 길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길도 아니고 고려시대에 뚫린 길도 아니다. 이미 삼국시대에 아니 그 이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편의시설로 등장하는 역이 정민역이었다. 예부터 역이 자리한 마을은 대개가 서민층의 마을이었다. 정민역이 있었던 통칭 역벌로 부르던 전민동도 이에 비유되는 지역이었다. 적의 아들 김반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또한 그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허주공파의 요람지가 되면서 유학의 명문지로 부상되는 지역으로 변해갔다. 전밈동의 동쪽으로는 갑천을 건너 대덕구 신대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화암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문지동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용산동과 탑립동과 경계를 나눈다.
도덕산 : 전민동 지금은 산이 깎아졌지만 전터골 바른 쪽에 산이 있었는데 이 산을 도덕산이라도 불렀다. 한진종합연구소 안쪽으로 넓은 대지 오른쪽에 있었다. 옛날에는 숲이 상당히 우거졌던 나지막한 산이었다. 나라의 치안이 어지러울 때 정민역을 통해서 큰 길이 있었는데 여기를 지나는 행인들을 괴롭히고 도적질하는 무리들이 숨어살던 산이라 하여 도둑산이라고 부르던 산인데 변하여 도덕산이라고 부르던 산이었다.
다루고개 : 전민동 역벌마을에서 북쪽으로 탑림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다루고개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새여울장터로 가기 위해 고개를 넘어다니는 큰고개였다.
좌실고개 : 전민동 전민마을에서 서북쪽으로 화암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좌실고개라고 부른다. 전민동과 그 아래쪽에 사는 선비들이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으로 트인 길이 훤하게 보인다 하여 한양으로 좁혀지는 고개라 해서 좌실고개라고 불렀다 한다.
절터골 : 전민동 전민마을 서북쪽으로 한진종합연구소 끝쪽 골짜기를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낮은 골짜기이나 옛날에는 골짜기를 드나들기가 험한 골짜기였다.
삼밭골 : 전민동 전민마을 남동쪽으로 삼밭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었다. 전민등과 문지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골짜기이다. 옛날에는 인삼을 재배라는 인삼밭이 있다해서 삼밭골이라고 부르던 골짜기이다.
불무골 : 전민동 감남골마을과 접해있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불무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에 불무간이 있었다 해서 불무골이라고 불러오는 골짜기이다.
사리절골 : 전민동 사장터마을 서쪽으로 펼쳐진 들을 사리절골이라고 부른다. 호남고속도로 남쪽에 펼쳐진 들이다. 이 들을 사리절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옜날 역담 한쪽 절의 절답 즉 사답이 있었던 들이라 사리절골 또는 사니절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장내들 : 정민동 사장터마을 북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데 이들을 장내들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호남고속도로 북쪽에 연해 있는 들이다.
왕굴들 : 전민동 전민마을 동북쪽으로 탑립동을 북쪽으로 하고 펼쳐진 들을 왕굴들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사초과에 속하는 일년생 풀인 왕골이 무성했던 들이라 왕골들이라고 불렀다. 그 후 변하여 왕궁골 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정민들 : 전민동 사장터 마을 남쪽으로 펼쳐진 들을 정민들이라고 부른다.
정민말 : 정민동 역벌마을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정만말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변해서 전민이라고 부르지만 원마을 명칭은 정민이다. 처음 회덕현의 역은 이곳에 있었다. 당시는 이 부근을 모두 정민말이라고 불렀다. 그 뒤에 정민역은 지금의 역벌로 옮겨가고 산소동이라는 마을도 생겼다. 정민역이 있다 해서 정민말 정민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전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민말이라고도 부른다.
역벌 : 전민동 전민마을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역벌이라고 부르고 더라는 역말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회덕현이 역으로 율봉도의 역이 있으므로 역평, 역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효종때 지금의 전민마을에서 정민역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정민역이 있었으므로. 역병, 역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산소동 : 전민동에 있는 관산김씨 허주공파의 산소아래 산소동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여기 산소에는 사계 감장생의 막내아들 김반이 이곳에 정착하여 대를 내리는 후손들의 묘가 있는 산소인데 그 산소따라 이곳에 정착한 후손들이 이룩한 마을이다. 감남골 : 전민동 불모골골짜리 곁으로 자리한 마을을 감남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감나무가 많은 골짜기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처음에는 감나무골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사장터 : 전민동 역벌마을 동북쪽으로 다루고개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사장터라고 부른다. 옛 기록을 보면 마을앞에 넓은 모랫들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정민역의 사장이 있었던 곳인데 즉 황을 쏘는 연습장이 있었던 곳이다. 사장이 있었던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사장터라고 부른다.
동부주거지 : 전민동의 동사무소인 전민동동사무소 앞에 있는 삼성푸른 아파트와 그 부근의 주거지를 동부주거지라고 부른다.
전말 : 전민동 지금의 전민동동사무소가 자리한 곳 부근을 전말 또는 전촌이라고 불렀다.전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 전말, 전촌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아랫말 : 전민동 전말 아래쪽으로 아랫말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아래쪽 마을이 있으므로 아랫말이라고 부른던 마을이다.
청류동 : 전민동 역벌마을 북쪽으로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청류동이라고 불렀다. 수양버들이 늘어서서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운치를 자아내던 마을이었다.
정민나루터 : 전민동 사장터마을 동쪽으로 나루터가 있었는데 정민나루터 또는 정민도선장 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전민동, 문지동 사람들이 옛날에는 동쪽으로 지금의 대덕구 신대동쪽으로 건너다니던 나루터였다. 정민역쪽에서 동쪽으로 갑천을 건너다니는 나루터임으로 정민나루터. 정민도선장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뒤에는 정민 나루터라고 부르던 나루터였다. 지금은 없어졌다.
역벌의 장승제 : 전민동 역벌마을에서는 매년 음력으로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장승제를 지냈다. 제장은 마을뒤로 다루고개를 이어지는 마을입구에 서 있는 장승앞이었다. 마을앞에는 나무로 깍아 세운 목장승이 동쪽과 서쪽으로 조금씩 떨어져 서있었다. 장승제를 지낼 떄는 마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동쪽에 장승에서 먼저 지내고 마을과 조금 가까운 서쪽의 장승에서 두번째로 지내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은 지상대장군의 장승이고 서쪽의 장승은 지하여장군의 장승이라 했다.
청유동의 산신제 : 전민동 청유동 마을에서는 매년 10월 초순에 산신 하강일에 신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마을위게 있는 산 정상에 큰 소나무아래에서 자냈다. 소나무아래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이 1970년대까지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이 지역의 매년 마을에서 크게 지내던 부락제였으나 1970년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부터 지내지 않는다.
산소공상여놀이 : 전민동 산소골에는 전통적으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민속놀이로 상여놀이가 있다. 상소놀이의 상여놀이는 죽은 자의 시신이 묘지로 가기 전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태어나면서부터의 큰 꿈을 저승에 가서 얻으라고 기원하는 놀이로 일곱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이다.
정민역지 : 전민동 역벌에는 옛날 조선시대에 율봉도에 속한 역말인 정민역이 있었던 정민역의 역터가 있다. 정민역은 처음에 산소솔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효종때 역벌로 옮겨 조선시대 말기까지 있었던 역터이다. 회덕읍지에 따르면 정민역은 회덕현의 역말로서 대마 1필과 장마 4필, 복마 3필, 그리고 역리 31명이 있다 하였다.
김반묘와 신도비 : 유성구 전민동 산 18-1에 김반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조선시대 현종 2년(1661)에 세웠으며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5m이고 비신의 높이는 221m이다. 비문의 찬지는 좌의정 김상헌이고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다. 김반은 선조 13년(1580)년생으로 자는 사일이고 호는 허주, 본관은 광산이다. 김장생의 막내아들이며 김집의 동생이다. 송익필의 문인이다.
김익겸충열정문과 연산서씨열녀정려 : 유성구 전민동에 김익겸의 충열정문과 그의 어머니의 연선서씨의 열녀정문이 있다. 김익겸은 관해군 6년(1614)출생으로 자는 여남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김장생의 손자이고 김반의 아들이다. 김반은 안동김씨에게서 김익열을 얻었고 연산서씨에게서 4형제를 얻었는데 김익히, 김익겸, 김익후, 김익경 등이다.
김익열묘 : 유성구 전민동에 김익열의 묘가 있다. 조선시대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문 이고 호는 창주, 본관은 관산, 김장생의 손자이다. 선조 36년(1603)에 김반의 아들로 지금의 전민동에서 출생하였다. 7세때 모친을 여의고 조부인 사계슬하에서 글을 읽었으며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부정자 검열을 거쳐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올라 독전어사가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55년에는 대사성, 대사헌이 되고 대제학이 올랐다.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효종이 크게 나라 일을 진작시킬 무렵에 갑자기 병에 걸렸으며, 그 해 12월에 죽었다. 효종 7년(1665)47세때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묘가 유성구 전민동이 있다.
김진규묘 묘비 : 유성구 전민동에 숙종떄의 명신 김진규묘가 있다. 묘비의 글은 영의정경 대제학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뒤에 영조때 영의정에 오르는 둘째아들 김양택이 썼다. 비문에 아들이 글씨를 쓰면서 피눈물울 흐리며 삼가 쓴다라는 구절은 너무나 효심이 깃뜬 글귀이다. 묘비는 순조 13년(1813) 세워졌으며 전체높이는 189m, 비신의 높이는 142m 이다.
전민동유래비 : 전민동동사무소 앞에 유래비가 서 있다. 그 동안 전민동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개발의 물결에 고장을 떠나면서 애향심을 옾이면서 세운 비이다. 유래비는 1990년 12월10일에 세워졌다. 전민동, 문지동, 원촌동 동민일동이 세운 비로 되어 있다.
김만기 : 병자호란때 강화동에서 순사한 김익겸의 아들이다. 자는 영숙이고 호는 서석. 본관은 광산이다. 인조 11년(1633)생으로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사할때 이고에 피난했던 어머니 윤씨부인은 아들 하나와 잉태한 아이가 있었다.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점거하자 가까스로 섬을 빠져 나올때 다섯 살짜리 아이는 김만기였고 뒤에 출산한 유복자는 그의 동생 김만중이다. 어려서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숙부 김익의에게서 수학하고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효종 3년(1652)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 정언, 교리 등을 역임했다. 서인에 속했다. 현종 12년(1671)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영돈령부사에 승진 광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김만중 : 우리나라 소설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만중도 유성구 전민동 과 인연하다. 그는 김익겸의 유복자로 인조 15년(1637)에 태어났다. 자는 중숙이고 호는 서포, 본관인 광산이다. 현종 6년(1665)에 정시문관에 장원, 정언. 지평, 수찬. 교리등을 거쳐 1671년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와 삼남의 진성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 협납 등을 역임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674년 인선왕후가 죽어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숙종 5년(1679) 예조참의 1683년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니 조지겸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귀양갈때 외에는 노모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구운몽]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집필한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698년 관직이 복구되었다. 사호는 문효이다. 저서에 구운몽외에 사씨남정기, 서포만필,서포집 그외도 있다.
첫댓글역시!!! 누가 말그미님을 새벽답사에 끌여들였는지.. 정말 잘한일이다.. ㅋㅋㅋ //잠깐동안 사진이랑 멘트들을 휘리릭.. 오늘 대구 내려갔다가 주말에 우포다녀오고, 일요일에서나 좀 여유있게 호흡을 길게 하면서 꼼꼼히 읽어볼께요!! //그러다보면 저도 기운내서 후기 올릴 맘이 생기겠죠 ^^
첫댓글 역시!!! 누가 말그미님을 새벽답사에 끌여들였는지.. 정말 잘한일이다.. ㅋㅋㅋ //잠깐동안 사진이랑 멘트들을 휘리릭.. 오늘 대구 내려갔다가 주말에 우포다녀오고, 일요일에서나 좀 여유있게 호흡을 길게 하면서 꼼꼼히 읽어볼께요!! //그러다보면 저도 기운내서 후기 올릴 맘이 생기겠죠 ^^
정~말 ! 자알 읽었어요. 산내들에서 다녀왔던 용호동 이었음에도 또 한번 다녀오는듯 합니다. 새벽답사팀이 보증하는 기자수첩다우시네요.^^
후기중에 풍안방적이라고 나오는 부분은 풍한방적이고요. 노산리에는 고성오씨가 아니고 유씨들의 집성촌이라고 합니다. 이번 답사 후기도 대단해요....
몇 군데 자신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지적해주셨네요. 바로 고칠게요. 검색해보니 진주 유씨네요. 홍주영씨는 오늘부터 엄청 바쁘시겠네요. 미술관 도슨트에 대구에 우포에, 우와~~ 잘 다녀오세요.^^ 곰마눌님 칭찬해주셔서 캄샤합니다. 근데 뉘신지???
말그미 덕에 그날이 새롭네요. 새벽 안개 헤치며 다녀온 길 .......... 그길을 다시 가고 싶어지네요.
끝내줍니다^^ 다시 가고 싶네요.
말그미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