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미움을 받은 한명회의 회한
1994.01.01 압구정 마을 역사 제4회 글 / 임 시 현
이 자연마을의 독자적인 역사가 있을 수 없고 또 전설로 기록된 것도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마을은
압구정이라는 유적지가 있었고, 이 정자를 그림에 담은 정선이 있었기에 이 마을의 옛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마을에 비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압구정을 세우고 이용했던
한명회의 생애가 많이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압구정의 변천사가 곧 이 마을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1468년9월,13년간 왕위에 있던 세조왕조가 망할 때까지 고관들의 싸움은 반복되고 정권다툼이 극에
달하였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왕세자로 있다가 왕이 되었으나 조선 왕조 8대왕 예종은 1년간
재위하다가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세조의 손자 성종을 왕으로 모셨다. 조선왕조 9대왕 성종의 나이는
13세였지만 성숙하고 영특하여. 조정은 복잡한 일이 생겼다. 성종의 생부는 세조의 첫째 아들로 세자
때에 이미 죽은 도원군이고 왕위를 물려받은 계보는 도원군의 동생인 예종이다.
그래서 성종은 아버지가 두 분인 셈이고, 임금의 생부로서 도원군은 전에 왕세자에 까지 봉하였으니
응당 왕으로 추종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문제는 복잡하게 뒤엉켜갔다. 까다롭게 예종의 계통을
이었으니 생부를 추존하는 것은 부당하다느니. 형제를 모두 왕으로 정하여 종묘에 모시라 느니 하며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도원군은 덕종대왕이 라는 임금도 해보지 않은 임금의 위패가 종묘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말해 군 혹을 하나 더 붙인 셈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반대한 한명회등 원로들은 성종으로 부터 크게 미움을 받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성종은
어머니가 둘. 할머니까지 있어 세과부에 어린 아들 하나다 궁중에서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세상물정 모르고 자라난 성종은 나이가 들면서부터 제일 먼저 여성에 눈을 떳다. 인생의 봄에 눈을 뜬
그는 꽃 사이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후궁이 많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꽃에 만취된 나비처럼 아무 꽃이나 가리지 않고 앉았다. 성종이 어리기 때문에 6년간을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신숙주. 한명회와 같이 섭정을 해왔다. 성종6년6월, 한명회가 신숙주와 같이 압구정에 와서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을 때 두모개에서 배 한 척이 압구정을 향해 오고 있었다.
신숙주가 이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명회는 이미 이를 알고서 김시습이 폭 천 정사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5세 때 신동으로 알려져 세종대왕까지 그의 인품을 인정했고.
청년 때에는 단종이 죽자 승려가 되어 수락사로 들어가 세상을 비관하고 아이들로부터 미친 중이라고
놀림을 받으면“이놈들아 글을 다시 배워라.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세상이 미친 것이다”하며 방랑했다.
폭천정사는 광주에 있는 김시습의 농장을 갈 때는 꼭 압구정을 거쳐 가기 때문에 한명회는 늘
보아왔던 모습이다.
성종이 20세가 될 무렵 누군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였다. “대비는 이제 물러가오. 암탉이 홰를 치고
울면 못쓰오. 젊은 임금에게 정권을 넘기시오” 대비는 그날로 손자에게 정권을 넘겨주려 했으나 이때는
세조의 신임을 받던 신숙주. 홍윤성이 모두 죽고 오직 한명회 한사람만 남았다. 대비는 한명회를 불러
정권을 넘기려고 의논 했으나 늙은 한명회는 한사코 만류했다. “만일 대비께서 정치를 어린 임금에게
넘기시면 동방의 창생을 버리시는 것이오. 신은 상시로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도 마시지 못하오.
정말 넘기시면 술을 먹어도 안심이 안 됩니다.” 그러나 대비는 듣지 않고 오히려 한명회를 불순한
수작을 한 것이라고 책하며 정권을 완전히 임금의 손에 넘겼다. 사간원에서는 “한명회는 일국의 원로로서
대비에게 불경한 소리를 하였소.”하고 약삭빠른 유자광은 “한명회는 너무 외람된 말을 했소. 처결하오.”
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린 성종왕은 “과인이 어찌 조부왕이 공신을 죄줄 수 있소”하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때 한명회는 또 성종에게 미움을 받는다. 한명회는 이미 심신이 늙었고. 모든 권한도 어린 왕에게
넘어가서 왕으로부터 사사건건 미움을 받으니 제행무상이 실감났다. 수 일전에 궁녀로 들어온 윤기무의
딸은 근래에 보기 드문 미인으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방종한 젊은 임금의 불장난은 또
시작되었다 윤씨는 임금보다 나이가 위였는데 곧 아이를 갖고 즉시 숙의가 되었다. 한명회의 딸인 중전
공혜왕후가 죽자 윤씨는 아들을 낳아 많은 후궁들을 물리치고 명나라의 계비고명 승인을 얻어 중전이
되었다. 후궁에 만취된 왕은 나이가 들수록 아무 여자나 가리지 않고 호색적 경향은 더 짙어갔다.
원래 성품이 좋지 않은 중전은 아름답다는 자만심과 왕자를 생산했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마음을 오래잡고
있기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후궁을 질투한 중전은 어느 날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 그 소문은
궁안에 파다했다. 끝내는 왕이 정찬손, 한명회, 윤필상 등을 불러놓고 중전은 여전히 교만하고 질투가
심해 궁중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폐서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윤필상을 선두로 모든 중신들이
찬성하였다. 그러나 정찬손, 한명회 두 사람만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한명회는
또 성종왕의 미움을 받고. 중전으로 실덕한 윤씨는 폐비가 되어 집으로 쫒겨나 성종11년에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 윤비가 생산한 왕자가 바로 연산군이다.
한명회는 성종이 나이가 어려 한때 섭정을 했으며. 조부 세조의 공신이요. 선왕의 부원군이요. 금상의
부원군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권력을 이용해서 치부하는데 뇌물 짐이 문전에 끊일 날이 없고. 계집이
행랑에 가득 찼으며. 왕의 깊은 뜻에 그가 사사건건 반대하자 왕은 한명회가 몹시 미웠다.
성종이 정사에 직접 참여하면서도 마지막 노재상인 한명회가 몹시 미웠지만 함부로 다룰 수 없어
한명회에게 이제 나이도 많으니 노후를 편히 쉬라며 압구정과 마을 산을 하사하고 오랜 공로를
치사하는 압구정시를 지어 같이 하사 했다 이렇게 조선왕조에서는 공신들에게 국유지를 마음대로
구두로 하사하는 예가 자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