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내다보는 어린이의 마음

한 인간에게 있어 유년기의 상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동안 움츠리고 있다 그의 예술적 창작물 속에 투영되곤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되는지 찰스 키핑(Charles Keeping)의 ??창 너머??를 통해 살펴볼까요? 우선 표지만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색 바탕에 점으로 늘어선 무늬가 있는 것은 커튼입니다. 그 커튼 위로 흉물스럽게 맞은편 건물들의 키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소년은 바로 그 커튼 뒤에 숨은 채 간신히 얼굴을 보여줍니다. 싸늘하도록 푸른 그림자는 소년의 놀란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고, 가늘고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소년의 머리카락과 아래 속눈썹은 날카롭게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년은 단단히 겁을 먹은 것 같군요. 무엇인가 소년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는지, 소년의 입술은 ‘헤’ 벌어져 있고 시선은 단단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소년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년이 내다보고 있는 외부의 세상과 소년이 현재 위치한 내부 세상을 분리하는 창문의 격자형 틀이 볼록하게 보입니다. 이처럼 표지만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예민한 독자들은 파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자의 감정을 옥죄는 표지 그림 하나만으로도 이미 찰스 키핑은 독자의 감정을 지배하는 전능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소년의 눈에 비친 사건을 아직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일종의 작가적 자존심도 함께 느껴집니다.

이야기의 첫 부분은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제3의 시선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소년을 관찰하고 있는 유령 같은 존재이겠지요. 아니면 소년의 분신(도플 갱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하루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인지 햇살이 차분하게 커튼 안쪽으로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턱을 창틀에 기댄 키 작은 소년의 등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옆 면, 땅거미가 내려앉은 건지, 검은 건물들의 그림자가 성큼 소년에게 다가와 멈춰서있습니다. 소년을 보호해주는 힘이 교회의 십자가에서 비롯하는지 소년의 이마에는 십자가상이 맺혀있습니다. 어둠 속 고양이의 수정체처럼 확장된 소년의 눈은 그러나 뿌리 부분만 살짝 보일 뿐입니다. 제이콥의 어머니는 아래층에, 누나는 학교에 있고, 제이콥이 지금 내려다보는 아랫길은 제이콥에게는 세상의 전부라고, 목소리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년의 이름은 제이콥이고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거나 동네에서만 서성거리는 병약하거나, 심약한 아이라는 정보를 알려주고 싶었던 작가 찰스 키핑의 심사였나 봅니다. 소년의 사는 동네에는 맛있는 과자 굽는 냄새를 풍기는 알프네 과자 가게가 있고, 사람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올리는 교회가 있고, 저 멀리로는 아직도 말이 끄는 짐마차가 몇 대 있는 양조장이 있습니다. 평범한 유럽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인 풍경을 갖춘 거리이지요. 거리는 보는 시각에 따라 활기찰 수도 있지만, 소년이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은 칙칙하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소년의 내면은 황폐함으로 그득한지도 모릅니다. 아직 채 어른이 되지도 않은 소년의 눈에 밝고 활기차야 당연할 세상, 친근한 이웃 거리의 풍경이 어째서 을씨년스럽기만 할까요? 소년의 도플 갱어는 바로 작가 자신이기에 그런 것 아닐까요?

유난히 몸집도 작고 병약했던 찰스 키핑, 이런 유약한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의 부모님은 그가 바깥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찰스 키핑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얼마지 않아 할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러니 소년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고독, 고립, 적막, 상실 등의 어두움 감정은 그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의식 밑 깊은 우물 속에서 숨어있다 가끔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그 거리에는 사람들이 ‘쭈그렁탱이’라 놀려대는 삐쩍 골은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노파가 있는데 노파는 개를 산책시키며 소년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리를 청소하는 위레트씨도 지금 막 소년의 창문 아래로 손수레를 끌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양조장의 짐마차를 끄는 말들의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지만, 짐마차는 보이지 않고, 성 난 말들의 울음소리만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비둘기떼가 느닷없이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이제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1인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비둘기들이 왜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지?” 소년의 독백으로 시작된 사건의 암시로 말미암아 바짝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성이 난 말들, 양조장에서 뛰쳐나온 고삐 풀린 말들이 무섭게 거리를 질주했습니다. 양조장 사람들이 뒤따랐습니다. “마부다”, “양조장 사람들이야!”,“위레트 씨도!” 창 안에 있던 소년은 혼비백산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덩달아 가뿐 숨을 몰아쉬며 큰 소리를 질렀을 것만 같습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거칠어지다 사위어갑니다. “쭈그렁탱이도 나왔어” 그러면서 소년은 남루한 노파의 안절부절 못하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일까?” 소년은 궁금해졌습니다. 소년의 궁금증은 걱정으로 탈바꿈합니다. ‘마부가 말을 붙잡아야 할 턴데.’ 그런데 소년은 그만 쭈그렁탱이 노파의 굽은 팔에 축 쳐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개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위레트 씨도 양조장 사람들도 쭈그렁탱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소년은 애써 잊어버리려 합니다. 소년은 곧 학교에서 집으로 올 누나를 떠올렸지만, 소년의 손은 서리 낀 유리창 위에 한 점 그림을 그립니다. 웃고 있는 개를 가슴에 품고 있는 웃고 있는 사람, 아마 그 사람은 쭈그렁탱이 노파가 아닌 소년인 듯 합니다.

사건의 긴박감과 주인공 소년 제이콥의 감정 변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찰스 키핑은 다양한 색감으로 정서적 표현을 대리하고 있습니다. 개를 잃은 쭈그렁탱이 노파의 모습은 핏빛 배경으로, 이 모습을 목도하였지만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은 창백한 파란색 배경으로, 은총이 가득한 거룩한 교회의 모습은 황금색 배경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색체만으로도 독자는 정서적 감정 이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석판화에도 능했던 찰스 키핑은 이 작품을 위해 석판화 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책장에는 커튼이 완전히 드리워져 있고 소년의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간 소년, 아니 작가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잔혹 취미인가요?’ 제가 묻고 싶었던 이 질문은 이미 많은 그림책 비평가들이 작가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적나라한 묘사, 과도한 우울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꼭 아름답고 즐거운 세상의 양지만을 보여줄 이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음울하고 쓸쓸한 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그것은 이제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라면 스스로 생각할 힘이 있는 아이에게는 보여주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