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생태주의 경제학자 F.슈마허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은 글 모음집은, 스스로 책이 아니라 '거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독자가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 말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보리 출판사에는 종종 "이 책을 보고, 교육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아이들을 기르는 것도 다르게 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학부모의 전화나 편지가 오곤 했다. 이 책에 담긴 무엇이, 사람들을 되돌아 보게 하는 걸까?
우선,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참된 지식은 삶과 동떨어져 세밀하게 조작된 프로그램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학년별로 구분된 교실 안에 아이들을 가둬 놓고, 정해진 교과과정을 따라서 진도를 나가는 것이, 호기심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참된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바로 삶과 교육이 떨어져 있지 않으며 실제로 소용이 되는 대부분의 지식들이 자율적이고 자연스러운 배움을 통해 익히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규모가 작은 학교가 훨씬 인간적인 교육과, 자율에 바탕을 둔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도 알려준다. 작은 학교는 지역 공동체의 협력을 받아서 적은 재정으로도 활기있게 움직여 나간다. 거기에는 대량적인 억압도, 통제도, 주입도 존재하지 않는다. '큰' 학교가 잘 가르쳐준다는 신화는 이 책에 실린 여러 가지 사례들을 보면서 깨어질 수밖에 없다.
'자율'에 대한 강조도 여기 실린 글들의 공통점이다.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교육의 위험성, 교육부가 학교에 대해서 가지는 권력, 간부교사가 평교사에게 가지는 권력, 교사가 학생에게 가지는 권력 그 모든 권력의 정당성들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윤구병과 개토가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프로이센에서 시작된 국가독점교육은 전체주의 체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충분한 자유를 누리며, 자기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참된 교육의 시작인 것이다. 학교에서 애지중지 되는 각종 규율은 비판되고, 풍자된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로 시작되는 현병호의 글은 병영식 학교생활에 대한 가장 극적인 비판이다.
자연, 생태주의, 무한성장 비판 같은 주제도 모든 글에 깔려 있는 바탕이다. '라다크의 어제와 오늘' '녹색교육'같은 글은 특히 그 주제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글이다. 그렇지만 이 글들 뿐 아니라, 다른 글 모두에서도 은은히 그려지고 있는 새로운 교육의 모델은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지역 공동체에 자리를 잡고 긴밀히 연관되어 살아 있는 배움을 주는 작은 학교'라고 볼 수 있다.
편집된 글들의 은은한 어조와, 은근한 설득력은 읽는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작은'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책은 이때까지 '입시위주의 교육'을 비판해온 여러 다른 비판과는 많이 다르다. '창의성 교육' '21세기 국가경쟁력을 위한 교육'을 비롯해 무한성장과 측정될 수 있는 교육의 성과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조류들이 기존의 교육을 비판해 왔다. 그런 비판에는 무엇이 바람직한 삶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다만 어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교육방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왔을 뿐이다. 단적으로, 21세기 경쟁력을 높이려는 교육은, 이과 중심의 재정지원과 성적관리의 엄격화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작은 학교'를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율' '자치' '자연'이라는 가치가 모두 무시된다. (아마, 지금의 교육부와 '작은 학교'론자들이 갈리는 가장 큰 지점은 '무한성장'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새로운 방향의 문제제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거울' 그 이상을 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에서 드러나는 한계로, '학력구조'에 대한 대안의 부재, '전사회적으로 새로운 학습망의 건설'에 대한 프로그램 부재, 그리고 가장 크게는 '생태사회로 가는 과도기'의 세밀한 사회공학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우선, '학력구조에 대한 대안의 부재'를 살펴보자.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비판대상이 주로 대학 이전의 교육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종 '입시위주'라는 말로 대학의 존재가 중등 이하의 교육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지만, 그 이상의 언급이 없다. 따라서 책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할 수 있는 선택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학력'이 삶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성적'이 삶에 앞서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성적'을 아주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는가? 졸업장을 다 던져 버릴 수 있는가? 이전부터 학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었지만 학력주의는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처럼 어떤 특정한 세계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능력을 평가하는 신호를 획득하려는 게임 자체를 잘못-주의가 아닌 것을 주의라고 표현했으므로-가리킨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 들어 있는 '학력에 대한 신화'를 없앤다고 해서 지금의 위계적인 교육구조가 붕괴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졸업장'을 따려고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과외를 그만두지 마라'는 97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은, 학력을 추구하는 행위가 구조화된 행위이며, 이 게임에서 안정적인 균형은 누구나 학력을 추구하는 전략쌍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사회적인 새로운 학습망 건설에 대한 언급'의 부재에 대해 살펴보자. 더 높은 소득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학교가 현실적으로 고등교육에 관련되는 많은 자원-돈, 장소, 사람,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면, 어떤 대안적인 학습망을 새로이 건설하지 않는 한, 대학을 '신념에 따라' 포기한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필자들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 대접받고 돈을 많이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간호사라는 직업과 청소부라는 직업을 보자. 간호사의 소득이 높은 이유가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기 때문인데, 이를 단순히 청소부보다 높다고 해서 깎아내리는 소득정책을 쓴다면, 공급은 더욱 더 적어져서 매우 심각한 인력 수급 불균형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시장에서 평등을 증진시키기 위한 대안은, 위계적인 임금구조를 개혁하는 것과 더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특히 가난한 사람들이-쉽게 기술과 지식을 익힐 수 있게 하는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은 학교'론은 이에 대한 대안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작은 학교'론은 꼭 모든 배움이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학교 운동 그 자체'만'으로는, 자연 속에 자리잡은 건물을 사서 실제로 작은 학교를 여러 곳에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생태사회로 가는 과도기'에 대한 사회공학의 부재는 어떤가? 이 책의 글들은 시종일관 '생태지향적'이다. 작은 것을 추구해야 하고, 효율보다는 인간성과 자연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사회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길은 보여주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많은 교육내용이 아직은 일러 보이며,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데이비드 오어의 녹색교육은 '녹색의 가치를 실현하고 삶으로 구현하기 위한' 여러 지식과 기술이 학교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막상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것을 배우고 철강산업에서 노동자가 되는 어떤 사람은 과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다.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 방법, 먹을 풀을 채집하는 방법, 색물감을 만드는 방법 같은 것을 한참 동안 배웠는데, 실제 자신을 먹여 살려줄 수 있는 공간에는 그런 지식이 쓸모 없다면 시간낭비가 아닌가? 또한 그런 지식이 학교에서 시험이나 출석으로 강제되고 어렸을 때 꼭 배워야 하는 지식인지도 의문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과정'에서 배운 내용이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결정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학에서 '녹색의 가치'를 시험까지 쳐가며 아무리 배웠다 할지라도, 당장 기업에 들어가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천은 무엇이 있을까? 실제로 녹색의 가치는 교과과정에 포함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삶의 여러 변화를 경험하게 하는 사회운동을 통해서 더욱 더 잘 전달될 수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고 감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못 거치게 하는데 자동차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자동차 없이 살아갈 것인가? 기껏해야 '자동차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식을 개혁해서 자동차를 그만 사도록 말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정말 눈에 띌 만큼 사라지려면 전반적인 산업지리를 개편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지 않기로 결심하거나' 또는 몇몇 사람이 땅을 사서 귀농하는 것으로 가능하지는 않다.
이 글의 여러 필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또한 '노동분업'-특히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분업의-폐지를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이 임금이 높고 대우를 많이 받는 것은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건축가가 직접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바르고, 목재를 쌓아올린다면 설계를 할 시간은 더욱 적어지고 그만큼 설계사는 적어진 것이다. 그러면, 건축가의 임금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놓아두고 다른 작업을 하도록 사회적으로 강제 받는다면, 자율성이나 효율성 모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효율성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생태주의자들이 빈곤한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서독, 영국, 프랑스 녹색당도 소득분배의 평등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빈곤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의 질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서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자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조립을 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가능하지만, 조립공이 과학기술자의 일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조립공 노동시장에서 공급이 더 많아져 결과적으로 조립공의 임금만 떨어질 것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은, 조그마한 탈산업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지금 당장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결합시키는 것은 파트타임 노동을 광범위하게 늘여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서도 효율성은 떨어뜨리는 괴상한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물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분야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조 활동이나 시민단체 활동에서 많이 발견되는 일의 기획/자료의 조달, 글의 생산/글의 선전과 같은 중요/단순 노동의 분업은 폐지될 수 있고, 폐지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당장 모든 산업의 범위에 광범위하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모든 사람에게 함께 강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에 관한 협소한 관점을 관철시키고 있다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하루종일 만화를 그리고자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도자기를 만들면서 농사를 짓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가 전자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별 어려움 없이 후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와 차별은 단순히 사람들이 '정신노동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배제당하거나 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의 교섭지위가 매우 열악하기 때문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업을 폐지시키는 일은 근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추상적인 외침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분업의 폐지의 초점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에만 놓이는 이유도 알 수가 없다. 핀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핀의 머리를 두드리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담금질만 하고, 어떤 사람은 철강공장에서 핀의 재료를 운반해 오는 일을 한다면, 여전히 이것은 일의 전체를 경험하고 있지 못하고, 일은 소외된 노동으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핀을 만드는 모든 공정을 다 하는 것이 옳은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이 할 수 없는 까닭은, 실제로 어떤 정도까지 분업을 통합할 것이며, 어떤 정도까지 남겨둘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오덕은 학교에서 '일, 놀이, 배움'이 함께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이 예로 든 '청소'조차 과연 어떻게 놀이와 배움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청소는 어쨌든 강제로 하는 것이다. 교사가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 교육적인 말을 하고, 프로그램을 짠다고 해도 청소 자체에서 커다란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깨달음이 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기가 선택해서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을 하면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자유롭게 결합되는 것인데, 이오덕처럼 학교교육만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의 선택이나 자율성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이 책에서 강조되는 '독립하는 삶', '자립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종종 생태지향적인 자연공동체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자연 공동체에서 필요한 '기술'과 지식, 감수성을 마치 모든 '독립'과 '자립'의 요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싶다.
결론적으로, 작은 학교 운동은 사람들에게 "그 길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길을 가지 않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불이익을 어떻게 극복할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좀 더 전면적인 사회공학을 가지고 한 발 더 실천을 내딛는 것을 뜻한다.
학력의 위계구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능력평가에 관한 새로운 제도를 제시하며 학력을 철폐해야 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서는, 학교로 국한되지 않는 전면적인 사회 학습망을 건설해야 한다. 전통학교의 교육독점을 부수고 교육의 자율성을 온전히 보장하며 학교로 집중되는 교육자금과 연구자금을 사회화하려면, 누진적인 교육보조제도-마치 프랑스의 의료보험처럼-로 학습자들이 직접 교육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녹색의 가치와 녹색의 기술의 전파 또한 학교의 통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통로를 통해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자발적인 움직임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동시에 추구되어야 할 것은, 근시안적인 시간 할인율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의제를 왜곡하는 지금의 정치구조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델로 바꾸어서 생태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사회적인 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국가와 세계 수준에서 약속되고 시행되는 합의와 정책만이-산업사회에서 생태사회로 가는-전환의 비용을 줄임으로써 실제로 전환을 현실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녹색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책임있는 사회개혁을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인접한 곳에 몇몇 학교를 세우고, 중등교육 과정에서 설립자가 목표로 하는 몇가지 가치를 실현하는 교육을 해보는 것을 넘어서려면, 작은 학교 운동은 좀 더 전사회적인 운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속가능성, 평등, 자율, 자유,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운동이며, '평범한' 사람들을 여전히 현실에 묶어 놓고 있는 모든 제도와 구조를 혁파하는 운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