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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름다운 바람을 만들어내는 선자장 조충익 |
조회수 |
2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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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속 |
박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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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
안홍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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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炫淑 Park Hyun Sook, Freelance Writer
한국의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와 접는 부채로 나뉘고, 방구부채가 더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조충익 씨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기능보유자로, 부채로 유명한 전주에서 서른 해 넘게 전통 방구부채의 맥을 이어온 한편으로, 100여 종의 창의적인 디자인을 개발해왔다.
“부채는 그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지요. 시원하기로 치면 에어컨이 훨씬 좋겠지만 번민 가득한 마음까지 식혀주는 것으로 우리 부채만한 것이 없어요. 어머니 무릎에 누워 낮잠 자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쳐 주시던 부채바람 같은 것을 우리가 간직해야 합니다.”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은 그 산줄기가 막고 이은 형국에 따라 지역적 특색이 만들어졌다. 그 중 전라도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이며 서해와 남해에 면해 있고 안온한 기후를 간직한 곳으로 예로부터 다방면의 예술이 발전했다. 흔히 ‘한국의 소리’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의 정서를 짙게 간직하고 있는 판소리가 이곳에서 발원했다. 지금도 전라도 어느 시골길을 가다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네에게 소리 한 자락 청하면 심청가 한 대목쯤은 거침없이 유장하게 뽑아져 나온다. 전라도에서는 따뜻한 기후지대에서 자라며 서늘한 기운을 간직한 대나무가 많아 다양한 죽공예품이 발전했다. 여름날, 이 죽공예품들은 진가를 발휘한다. 방문에 드리운 대발은 햇빛을 가려주고 바람을 한결 시원하게 해주며, 죽부인은 잠을 설치게 하는 더위를 쫓고, 대토시는 옷의 통기성을 좋게 한다.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는 도구인 부채 또한 대나무로 얼개를 짜고 견고한 한지를 덧붙여 만든다. 부채는 한자로 ‘선(扇)’이라고 쓰며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선자장(扇子匠)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북도 전주에 선자청을 두어 부채를 생산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여 ‘부채 하면 전주’라고 할 만큼 전주는 부채로 유명한데 조충익(63세)씨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기능보유자이다.
방구부채의 종류 한국의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와 접는 부채로 나뉜다. 방구부채란 대살에 비단이나 한지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부채로 ‘방구’란 둥글다는 뜻을 지녔다. 한자로는 단선(團扇), 또는 원선(圓扇)이라고 한다. 접는 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챗살에 한지를 붙여 만든 것인데 접선(摺扇) 또는 접첩선(摺疊扇)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부채는 그 기술이 빼어나 나라간의 선물로서 여러 나라에 보내졌으며 고려시대에 발명된 접는 부채는 중국이나 일본에 그 기술을 전하기도 했다. 접는 부채보다 역사가 오래된 방구부채는 부챗살의 모양과 부채바탕의 꾸밈에 따라 다양한데 바탕의 중앙에 태극모양을 그려 만든 태극선(太極扇), 부채의 전체 모양이 오동나뭇잎 모양인 오엽선(梧葉扇)과 파초의 잎처럼 생긴 파초선(芭蕉扇), 대오리를 가늘게 하여 총총하게 많이 놓은 세미선(細尾扇), 오색실로 수를 놓아 만든 수선(繡扇), 선면 전체가 동그란 원형이라 수레바퀴 모양인 윤선(輪扇), 황칠나무에서 나는 황칠을 선면에 칠해 황금색을 띠며 은은한 향이 좋은 황칠선(黃漆扇), 두 손으로 부쳐야 할 정도로 큰 대원선(大圓扇) 등으로 다양하다. 조충익 씨는 방구부채를 만드는 선자장이다. 전라북도 장수에서 나고 자란 그는 나이 스물아홉 살에 전주에서 태극선과 연을 맺으면서 방구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태극선 작도법을 정립하고 “남원 광한루 주변에서 춘향전을 민화로 그려 붙인 작은 병풍을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었지요. 그러다가 역시 관광기념품으로 팔리던 태극선이 눈에 들어왔어요. 전주 태극선은 단오 때 진상되었던 귀한 것인디 태극이 들쭉날쭉헌 거지요. 내 생각에 춘향이는 크나 적으나 춘향이가 되어야지 월매, 향단이가 돼서 쓰겄나 싶었어요. 그래서 태극선 작도법을 만들어서 모양 빤듯한 태극선을 맨들었습니다. 예전엔 눈짐작으로 그리던 터라 삼태극의 크기와 비율이 제각각이었는데 작도법으로 정확한 태극모양을 만드니 우선 내가 흡족허고 사람들도 알아보더구만요.” 판소리 한 자락처럼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는 조충익 씨는 하늘과 땅 사람을 나타내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양, 삼태극을 부채에 제대로 구현해 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삼태극은 천지인(天地人)을 하늘은 파란색, 땅은 노란색, 사람은 빨간색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비롯하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의 개막식이나 폐막식 때마다 한국 선수들이 관람객들에게 흔들며 행진하던 태극선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태극선을 만들면서 우리 전통부채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알게 되었어요. 사라져가는 자취를 좇아 옛날 부채를 재현했지요. 여느 무형문화재 선생들처럼 한 분 스승을 모신 게 아니라 어디 계신 어른이 무슨 부채를 잘 만드신다더라 허면 찾아가서 배웠지요. 오엽선, 파초선, 세미선, 대원선-. 하나하나 재현하다 보니 새로운 부채를 만들어볼 생각이 나더라고요. 부채바탕에 가는 대로 민화나, 화조, 물고기 같은 무늬를 정교하게 놓는 것도 시도해보니 새로운 부채가 만들어졌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부채도 만들어봤어요. 폭이 270㎝에 길이 420㎝지요. 그런가 하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채도 만들었는디 가로 2.5cm에 길이 5cm이고요. 또, 세계에서 가장 부채살이 많은 부채를 만들었는데 8천개 정도의 대살이 쓰였어요. 활짝 편 공작깃털을 대살로 표현했지요.”
전통의 계승과 창조 조충익 씨는 전주시(全州市) 완산구(完山區) 대성동(大聖洞) 죽전선자방(竹田扇子房)에서 옛 부채를 재현하기도 하고 새롭게 고안한 자기만의 부채에 골몰하며 지낸다. ‘대밭’이라는 그의 호를 딴 이 공간을 그는 “작업실도 아닌 것이 전시장도 아닌 것이 어수선허죠이? 윤선도 선생이 <오우가>에서 대를 ‘풀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고 말헌 것처럼 말이요?”하며 웃음 지었다. 165㎡(50평)쯤 되는 죽전선자방은 사방의 벽면에 그가 만든 다종다양한 부채가 액자에 고이 담겨 걸려 있고 곳곳에 부채를 만드는 재료들이 쌓여 있다. 그런가 하면 차곡차곡 쌓여있는 많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조선 문신 서거정(徐居正)의 시문을 모아놓은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중국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 한국화 도록, 한자사전, 국어사전, 철학서 등이 웬만한 헌책방을 방불케 한다. “부친께서 한학을 하셨지요. 당신 연세 마흔에 낳은 막둥이인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문을 가르쳐주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기초가 되는 <천자문>부터 가르치지 않고 도연명의 시부터 가르쳐주셨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선 담임선생님께 저를 1학년이 아닌 2학년부터 시작하게 해달라고 하셨지요. 돌이켜보면 늙은 아버지의 애틋함이 느껴져요. ‘가갸거겨’도 모르던 저를 2학년에 넣으셔서 어린 저는 곤혹스러웠는데 그마저 가난하여 5학년밖에 다니지 못했어요. 학교에서 배운 시간은 짧지만 글을 가까이 하셨던 아버님의 영향인지 책을 보면 답답하던 세상사도 길이 보이지요. 부채를 만들면서 밥벌이를 하는데 가슴 한 켠이 답답했어요. 종교사상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사>를 보면서 부채를 만들어 그저 생계를 이어온 일을 반성하게 되었지요. 사람이 만드는 물건에는 좋은 생각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인데 관성적으로 밥을 위해 만들어왔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철학자 안병욱 선생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책에서 ‘인생이란 창조적 자기표현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내 가슴을 두 방망이질 치게 만들었지요. 내가 매일매일 새로운 부채를 디자인해보고 지금껏 100여종의 새로운 디자인을 완성한 것은 다 그 때문이라오.”
작업 과정 한국인은 예로부터 부채를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부채에서 여덟 가지 덕을 본다 하여 부채를 팔덕선(八德扇), 또는 팔용선(八用扇)이라 부르며 아꼈다. 그 여덟 가지 덕이란 바람을 일으키고, 파리와 모기를 쫓고, 덮개로 쓰며, 햇빛을 가리고,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고, 들에서 깔고 앉는 깔판으로 쓰며, 청소할 때는 쓰레받기로 쓰고, 물건을 머리에 일 때는 똬리 대신 쓴다는 것이다. 굿을 하는 무당이나 춤을 추는 무희, 소리꾼에게 부채는 흥을 돋우고 멋을 자아내는 중요한 소품이다. 또한 부채의 선면에 시, 서, 화를 그려 가까이 두고 즐겼다. “내가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만드는 과정은 암 것도 아녀요. 만드는 방법대로 손기술을 익히면 되는 것이지요. 재료가 다 준비되었다고 치면 태극선 하나 만드는데 쉬운 것은 반나절이면 되고 선면에 대나무로 정교하게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2개월도 더 걸렸어요. 태극선은 11가지 과정을 거쳐요. 양지에서 자란 2년생 왕대를 부채살 크기의 길이로 자릅니다. 그것을 1.5cm 너비로 쪼개고 다시 포를 뜨지요. 1mm 두께에 1.5cm의 너비로 대나무를 얇게 떠내서 1mm 굵기로 살을 쪼개는 거지요. 그 1mm 대를 일정한 굵기의 둥근 살로 만들고 부채크기의 백지 위에 부채살을 놓아요. 그 다음 얇은 한지에 삼태극 무늬를 붙입니다. 부채살이 놓인 한지에 태극무늬를 붙인 한지를 붙이는 ‘도배’를 합니다. 풀이 잘 붙게 하기 위해 담요를 바닥에 깔고 살 붙인 부채를 올린 다음 위에서 다시 담요를 올려놓고 발로 밟아 견고성을 높이는 데 이것이 ‘답선(踏扇)’입니다. 가위로 태극선 모양을 살려 오려내고 가장자리를 종이로 감싸 선을 두른 다음 손잡이를 끼우고 장식 못을 박으면 끝이지요.” 조충익 씨는 자신이 만든 부채의 선면을 여백으로 두고 덕망 있는 서예가, 한국화가를 찾아가 시, 서, 화를 청했다. 처음에는 곁을 주지 않던 이들이 부채에 대한 그의 열정을 알아보면서 조충익 씨의 부채는 새롭게 태어났다. 전주의 저명한 향토사학자 고 조병희(趙炳喜) 선생은 그에게 두 번 글을 주었는데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아끼던 작품을 그에게 유품으로 남겼다. 한국화가 송계일(宋桂一) 선생은 한여름 더위를 무릅쓰고 일산에서 전주로 그를 찾아와 비지땀을 흘리며 부채에 수묵담채화를 그려주었다. “여러 선생님들의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그윽한 인품이 담긴 부채는 제게 언제나 감동을 주지요. 부채가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해 2003년부터 해마다 단오를 즈음해서 전주단오부채전을 열고 있어요. 부채는 그저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니지요. 시원하기로 치면 에어컨이 훨씬 좋겠지만 번민 가득한 마음까지 식혀주는 것은 우리 부채만한 것이 없어요. 어머니 무릎에 누워 낮잠 자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부쳐주시던 부채바람 같은 것을 우리가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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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공예상품개발 프로젝트
- 패션디자이너 김영석-선자장 조충익
한국적 라이프스타일 구현을 위해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 전통공예 기술을 모티프로 한 콘텐츠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무형유산 활용을 위한 문화재청의 장기 프로젝트로서 시작점을 다지는 올해는 현대 지식인이 무형유산을 생각하는 방식과 관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필요한 물건을 솜씨 좋은 장인의 손을 빌려 자연의 재료로 만들어 사용해왔던 옛 조상들의 생활양식이 현대 사회에서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19세기 우리 선조들이 즐겨 사용했던 일상의 물건들, 소반과 목기, 반닫이와 머릿장, 사방탁자, 명주치마와 모시적삼. 우리의 의식주 모든 것이 100년의 시간을 기꺼이 우리와 함께하며 지금 우리 일상에 자리한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좌식에서 입식으로 편리하게 변화해온 21세기 한국인의 일상 속에서 자리했을 우리 물건을 상상해본다.
이러한 의문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과학·인문·디자인계의 저명인사와 우리나라의 전통의 맥을 잇고 계신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함께 만나 한국인의 일상 속의 고민을 함께하고 쓸모있는 물건을 만들었다. 공예상품개발 프로젝트에서는 무형문화재와 저명인사의 작업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각 작품에 녹아들어 있는 참여 작가가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 갖고 싶은 물건, 전통문화의 일상성 회복을 위한 생각을 소개한다.
부채이야기 패션 디자이너 김영석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조충익 보유자

* 김영석 패션 디자이너 ‘전통한복 김영석’의 대표로 몸담고 있으면서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리더들의 한복을 디자인했다. 1999년 서울 삼청동에서 ‘전통한복 김영석’을 오픈한 이래 의재미술관 패션쇼(2004), 프레타포르테 한복 패션쇼(파리, 2005), G20 기념 패션쇼(2010), ‘Collaboration with Swarovski Elements’전시회(2011) 등 다양한 패션쇼와 전시에 참여했다. 또한 경남 울산에서 개최된 ‘2013 한복페스티벌’예술감독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복과 대중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 조충익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0호 선자장 기능보유자 다른 장인들에 비하면 늦은 때인 서른살이 다 될 무렵 부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통 부채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의미에 주목한 그는 부채 만드는 기술과 역사의 연구에 매진했고, 그 탁월한 솜씨와 예술성으로 88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선물용 태극선을 만들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공예품 경진대회 최우수상, 특선(1986,1990), 전국공예품대전 특선(2000) 등을 수상하였고, 국제회의 산업전(BEXCO, 2002), 일본 가나자와 작품전(2006)
<김영석 패션 디자이너 인터뷰>
Q. 한국문화의 특성 혹은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한국문화의 하나의 문제점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0.1퍼센트만 되어도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동물을 예를 들면 다양한 종이 살고 있는데, 종의 특성을 무시하고 계속 한 조건만 충족시키면 계속 멸종되면 한 종만 살아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분화시키지 않고 단절시키는 현상이 일어났다.
Q. 한복에도 유행이 있죠? A. 물론이다. 유행을 만들지 않으면 디자이너라고 할 수 없다. 서양의 복식을 봐도 유행은 전혀 없던 옷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예전의 스타일을 나름대로 응용해서 변화해 온 것.
Q. 선생님께서 한복의 기본적인 디자인 요소로 갖고 있는 것은?? A. 선. 평면패턴의 특성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색이다. 그러나 천연염색은 종류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Q. 자택이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물씬 풍기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김영석에게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는? A. 집은 '어머니'와 같다. 처음에는 새것이고, 나를 편안하게 품어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비가 새고, 삐거덕거리기도 한다. “어머니가 늙으시는거죠” 그러면 내가 기름칠하고, 방수작업을 하고, 주름을 펴주고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부모/자식 관계와 같이 분리될 수 없이 상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집이다.
Q.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것의 의미는? A. 오래된 가구가 있다. 여기에 주인이 페인트를 칠했을 때, 원형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유물적인 가치는 없어졌다. 그런데,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것이 "역사"이다. 예전에는 좋은 물건을 사서 모셔두고 있었다. 가구가 아니라 그림처럼. 그런데 지금은 원형은 존재하지만 우리 집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고자 한다.
Q. 전통문화가 일상성을 되찾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영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이 있어야 할까요? A. 예전의 대가족 사회에서 전통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었다. 세대간 교류를 체험할 수 있는 대가족으로의 회귀를 통해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핵가족과 시골(지역)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온/오프라인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한 문화공동체의 조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전통도 진화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문화가 다양하지만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어요. 우성인자가 살아남는 법이거든요. 살아남는다는 것은 진화를 잘 한다는 거에요.”

부채 이야기 한지, 대나무, 대추나무/ 290x430/ 패션디자이너 김영석/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조충익 보유자
글/사진 : 김보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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