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혁 주 의 종 말 론
-안토니 후크마-
제1부 시작된 종말론
“종말론”이란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관습적으로 종말론이란 개인과 이 세상에 관해서 장차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개인에 관한 문제로 육체의 죽음, 영혼불멸성(중간상태-죽음과 부할 사이 동안의 상태)들이다. 세상에 관한 문제들에 관해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대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아울러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적 면도 포함되어야 성경적 종말론이다. 성경적 종말론은 앞으로 종종 부르게 될 “시작된 종말”과 “미래적 종말”의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제1부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보여주는 종말론을 개관하고, 역사의 목적과 역사가 진행하고 있는 목적을 취급하며, 역사의 중심점은 그리스도이며 역사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사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본질과 의미, 종말론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현재와 미래의 실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관계에 관해서 서술할 것이다.
제1장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종말론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몰트만은 “마지막 부분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적이며, 소망이며, 앞을 바라다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이란 그리스도의 신앙의 매개체이며 관건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모든 것이 놓여 있다. 종말론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특성이고 전체 교회를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죠지 래드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은 종말론적 소망이며 따라서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던 신관과도 일치하고 있다. …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낳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였다.
화란의 우트레흐트 교수는 “이스라엘 민족 외부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이스라엘적 현상”이라고 하였다. “종말론이란 백성들이 제사의식에서 하나님의 왕권의 실재성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오히려 가장 비참해진 상황 속에서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 길만이 삶의 기반인 것을 인식할 때, 동시에 이러한 신앙의 실재성이 백성의 삶 속에 비판적으로 와닿을 때, 그럼으로써 장차 다가올 대변혁이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킬 신의 간섭으로 간주 될 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굳게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굳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때, 바로 그때에 종말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역사 속의 이스라엘의 삶이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게 되는데, 첫째는, 신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새롭게 창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브라이젠 교수는 “신약과 구약의 참된 중심은 종말론적 전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제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살피기 위해서 몇 가지 전문적인 계시적 개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에 관한 것이다(창3:15). “어머니 약속”으로 인류와 뱀 사이에 놓여진 적대감은 뱀의 원수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친구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것이라는 예언 속에서 이미 장차 구속자가 나타나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의 계시는 앞을 향하고 있고, 앞으로 가리키고 있고, 결국 약속된 구속자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 3장 15절에는 ‘여인의 후손’, 창세기 22장 18절에는 ‘아브라함의 후손’, 창세기 49장 10절은 ‘유다의 지파’, 삼하7장 12~13절은 ‘다윗의 후손’으로 명시되어 있다.
왕정 정치제도를 수립한 후에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을 특별한 직분들로 인정하게 되었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위대한 선지자(신18:15), 영원한 제사장(시110:4), 위대한 왕(슥9:9)이어야만 했다.
장차 오실 구속자의 왕권에 관해서 다윗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예고했다(삼하7:12,13, 사9:7).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종종 있다.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사7:14)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여호와의 종,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사42:1~4, 49:5~7, 52:13~15, 53장 전체). 그리고 구속자에 대한 명칭이 사람의 아들로 나온다(단7:13~8). 신약에서 인자는 특별히 메시야와 동일시되고 있다. 구약의 신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형태로써 장차 자기 백성과 아울러 이방인까지도 구원하시려 미래에 나타나실 한 구속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벧전1:10~11).
둘째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구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시편과 예언서들에서는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신33:5, 시84:3, 시145:1, 사43:15), 또는 온 땅의 왕으로(시29:10, 47:2, 96:10, 97:1, 103:19, 145:11~13, 사6:5, 렘46:18) 묘사되고 있다.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특별히 다니엘서였다.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이 장래 어느 날엔가 세우실 한 왕국, 결코 파괴되지 아니할 왕국, 모든 세상 왕국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왕국, 영원히 견고하게 설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44~45). 미래의 왕국이 장차 오리라는 것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이 왕국을 사람의 아들(인자)로 묘사된 구속자의 오심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셋째 새 언약이다. 언약이란 구약계시의 중심점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주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임을 잊지 않았다(렘31:31~34).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히8:8~13, 고전11:25).
넷째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선지자들의 외침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남북 왕국 모두가 적국에 이러한 암울한 예언들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도 속속히 선포되었다. 즉, 포로의 생활에서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내용이었다(렘23:3, 사11:11). 이스라엘의 회복은 일종의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선지서들 가운데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들은 한결같이 윤리적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겔36:24~28, 사24~27장).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이스라엘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봉사에 재헌신하는 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죠지 래드 교수는 “종말론이란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태동되었다. 아마 선지자들이 가졌던 윤리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결과란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믿고, 정결케 된 남은 자라는 선지자들의 확신이었으리라.”
다섯째 성령의 부으심이다. 요엘서는 성령의 부으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욜2:28~29).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의 신자들이 큰 갈망을 가지고 바라다본 미래의 지평선 위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이었다(욜2:30~31). 신약의 구절들은(눅21:25, 마24:29) 이상에 언급된 징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요엘은 자기의 예언을 통하여 수 천 년 동안 제각기 독립적으로 발생할 사건들을 하나의 단일한 환상 속에서 함께 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을 예언적 전망이라고 한다.
여섯째 주의 날이다. 예언자들의 글에서 종종 발견되는 “주의 날”이란 문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오바댜는 에돔의 불운의 날을 주의 날의 도래라고 예언하고 있다(15~16). 주의 날이란 심판과 구속을 가져다줄 최후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사13:6~8, 17~22).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이란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날로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러한 잘못된 통념들을 산산조각 내었다(암5:18, 2:12,17). 스바냐도 주의 날을 분노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습1:14~15).
그러나 주의 날은 단지 심판과 재난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종종 그날은 구원도 가져온다고 성경은 말한다(욜2:32, 말4:2,5). “주의 날”은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과 분노의 날로,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
일곱째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구속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항상 땅이라는 어휘를 포함시키고 있다. 예언자들은 땅이 단지 인간이 자기들의 평범한 일들을 수행하는 하나의 무감각적인 작업장으로 생각지 아니했고, 오히려 땅을 신적 영광의 표현장으로 바라다 보았다. 헬라적 사고는 구속을 영적인 것, 비육체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구약의 사고는 비육체적, 비물질적, 순전한 ‘영적’구속을 소망하고 있다고 어느 곳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땅이란 인간존재를 위한, 신적으로 예정된 장이다. 땅도 하나님의 최종적 구속에 동참해야 한다.”
땅이 새롭게 될 때 함께 이루어질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광야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밭이 될 것이며(사32:15), 사막에서 꽃이 필 것이며(사35:1), 메마른 땅들에서 샘이 솟으며(35:7), 동물의 세계에 평화가 찾아들며(사11:6~8), 온 땅 위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하리라(사11:9).
종말론적 전망을 정리하여 보면, 인류의 초창기로부터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한 구속자가 오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종말론적 기대가 점점 풍만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대가 담고 있었던 많은 다양한 내용들이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성취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다양한 시간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다양한 개념들을 종합적으로 묶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약의 신자들이 앞에서 말한 일곱 가지의 종말론적 실재들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것을 바라보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예언적 전망”이라는 특수한 관점 아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계된 일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계된 일들과 함께 섞어서 미래를 내다 보았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메시야가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상은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가지 단계로 성취되어음을 살펴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두 단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분명치 않았던 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구약 신자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다.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혹은 머나먼 밀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을 기대하고 바라다 보았다.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을 뒤돌아 보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히11:10, 13, 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