講院의 도량 '解憂의 대지'
'김용사에선 견공도 정좌하고 염불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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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해학적인 약사여래불은 장승 분위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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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사 가는 길은 우거진 숲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운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 물이 가슴 속까지 시원함을 준다. 누구든 한번쯤 걸어가 보면 운치나 분위기가 절과 참 잘 어울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 아래 주차장에서 사하촌을 지나면 호위하듯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선 아름드리 나무가 일주문을 지나 절 마당 바로 밑까지 늘어서서 절을 찾는 길손에게 인사를 한다.
이곳은 스님들도 가끔 명상을 하며 걷는 코스이기도 하다.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김용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 창건된 고찰로 한때 건물이 48채가 있었으며 전국 31본사의 하나로 4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수십명의 스님들로 항상 북적거리던 거찰이었다.
지금은 김천 직지사의 말사로 스님도 4명뿐이다.
인근 고찰인 봉암사와 대승사가 참선도량이라면 김용사는 포교도량, 강원(講院)도량이다. 스님들의 활동도 포교에 많은 땀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김용사의 근대 포교활동은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8년 본사 시절 김용사는 말사와 공동부담으로 중등과정의 교육을 목적으로 경내에 김용지방학림을 설립하고 10년간 운영했다. 이후 말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산 넘어 대승사, 절 부근 주민들과 함께 학교를 절 밖으로 옮기고 초등과정으로 바꾸었으며, 이 학교는 사찰측이 1940년 경북도에 기부채납하면서 공립 김용초등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지역민과 호흡을 함께 하며 생활 속의 불교를 전파하던 김용사는 현재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포교에 나서고 있다.
매월 초사흘과 열여드렛날 정기 법회를 갖는 것을 기본으로 문경시내인 점촌에서 불교대학을 개설, 시민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하고 있으며 모전사회복지관을 통해 힘든 이웃을 돌보는 데도 참여하고 있다.
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여름철마다 불교 캠프를 열고 있으며, 서울 등 전국 각지의 불자 수련회 등에도 기꺼이 장소를 내주는 등 포교도량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천4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김용사에는 몇차례의 큰 화재와 이곳에서 수행을 한 선사들의 영향으로 화려한 문화유산은 없는 편이다.
지방문화재 자료인 대웅전과 극락전, 설선당, 측간 등 10여개의 건물과 괘불, 약사여래입상 등이 전부다.
융성하던 시절 14개에 이르던 암자도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화장암, 양진암, 대성암, 금선대 등 4개의 암자만 남아 있다.
김용사가 강원도량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강원인 설선당 때문이다.
1997년 화재로 불에 탔다가 이듬해 복원된 설선당은 3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건물로 국내에서 규모가 큰 온돌방 가운데 하나다. 36평이 조금 넘는 크기인 설선당은 불이 나기 전 아궁이가 어린이들이 서서 들어갈 만큼 컸다고 하나, 복원하면서 아궁이는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성철·서옹·서암 스님 등 현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각들이 이곳 강원에서 설법을 하거나 참선을 했다.
김용사에서 또 하나 주목받는 것은 측간인 해우소이다.
김용사 해우소는 우리나라 사찰 화장실 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조선 중기의 측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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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달산 아래 아담하게 자리잡은 김용사 전경. 사방이 소나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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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찰 측간인 해우소. 너무 낡아서 보수의 손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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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각각 4명씩 '근심'을 풀도록 돼 있는 이 해우소는 정면 높이가 5.4m로 약간 겁이 날 정도로 화장실 바닥이 저 아래에 있다.
이외에도 신도들의 발길을 끄는 것은 절 뒤쪽 산기슭에 모셔 놓은 석조 약사여래입상이다.
대충대충 윤곽만 다듬은 듯한 여래입상은 못생겨서 친근감을 주지만 소원을 비는 신도들에게는 인기가 높은 부처님이다. 원래 절 북쪽 산속에 있던 것을 197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전설과 異蹟
운달조사가 개산한 김용사는 원래 이름이 운봉사였다.
옛날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지어 운봉사 아래 숨어 살면서 지극한 심정으로 불전에 참회와 속죄를 하던 중 용추의 용녀와 인연을 맺고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용'으로 용모와 지혜가 뛰어나고 아들이 태어난 뒤부터 가운도 크게 일어나 김씨를 김장자라 부르게 됐으며, 마을 이름도 김용리로 바뀌고 절 이름도 운봉사에서 김용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아기중의 전설도 꽤나 유명하다.
옛날 한 아기중이 김용사에 수도승들과 함께 지냈는데 하루는 주지가 상추를 씻어 오라고 해 냇가에서 상추를 씻고 있었다.
상추를 씻던 중 아기중의 눈앞에 갑자기 활활 타는 절의 모습이 나타났고 자세히 보니 산 너머 대승사였다.
아기중은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염불을 외면서 시냇물을 불길을 향해 퍼부었고 이때 상추도 함께 날아갔다.
불이 꺼진 뒤에 보니 상추는 몇잎 남지 않았고 부랴부랴 주지승에게 남은 상추를 갖고 갔지만 호되게 야단만 맞았다. 아기중은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매를 맞으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잠자리에서 옆의 스님이 묻자 자초지종을 밝혔고 다음날 새벽 절을 떠났다.
아기중의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전했고 사실여부를 놓고 서로 옥신각신하다 대승사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니 절은 불탔고, 어디선가 상추가 날아와 불을 껐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기중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기중은 이미 떠난 뒤였다.
최근에도 김용사에는 이적을 보이는 현상이 있다.
대웅전 오른쪽 뒤 금륜전 앞 뜰에는 수령 100여년 된 백일홍이 한 그루 있으며, 이 나무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백일홍 나무 아랫부분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1m 남짓이고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은 소나무는 30㎝ 가량으로 스님들 말로는 성철 스님이 입적한 뒤에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몇년 전에는 불심을 가진 개가 있어 한동안 화제가 됐다.
'김용이'라는 이름의 이 개는 사찰 경내의 풀을 식용으로 하는 '풀 먹는 개'로도 불리며, 대웅전에서 염불소리가 나면 밖에서 정좌하고 있다가 염불이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등 불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김용사 신도 권칠명씨(46)는 "주지 스님(중원 스님)이 절아래 행락객들이 시끄럽게 노는 것을 나무라다 실랑이가 벌어지자 절 안의 다른 스님이나 신도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으나 이 개가 달려가 수십명의 행락객을 모두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출처 :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