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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조선시대의 경산 하양 자인
제1절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조직과 경산 하양 자인
제2절 사림의 정치 사회적 성장과 임란의병 ----------------184
1388년 위화도회군은 왕조의 교체를 예고한 것이자 권문세족(權門世族)의 몰락과 사대부정권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변화를 초래했다. 몽고간섭기이래 성장한 사대부 층은 고려의 전통적인 문벌귀족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향리가문에서 과업(科業)이나 군공(軍功)등 본인의 능력으로 기신(起身)한 신흥계급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보다 진보된 사상체계인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적(性理學的) 지식을 수용한 학자계급이었고, 가업으로 내려오는 토착적 경제기반을 가진 재지의 중소지주층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사대부들은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고려왕조의 테두리 속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려는 부류와 역성혁명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적 부류로 나누어져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의 건립에 참여한 사대부들은 개국공신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기득권을 보장받은 훈신(勳臣) 집단으로 성장했다. 반면 이에 반대한 사대부 층은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여 추진을 양성하며 사림(士林)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집단은 단순한 정치이념의 차이에 따른 것일 뿐 정치적 역학관계를 전제로 하여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 부국강병책을 지향하는 훈신집단은 조선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기는 했으나, 정치 경제개혁의 과정에서 그들의 권부(權富)를 축적하며 권귀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반해 전통적 왕도주의(王道主義)를 지향하는 사림집단은 성리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종소지주층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정치 경제 사회구조 확립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권귀를 추구하는 춘신들의 견제에 의해 그들의 중앙진출이 여의치 않음으로써 실현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림들의 중앙정계 진출노력과 세력화 경향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고, 이는 훈신들의 경계를 증폭시키게 되었다. 사림들의 그러한 동향은 그들이 지향하는 진정한 성리학적 개혁의 실현과 함께 정치참여층의 확대를 통한 소수 권력층에 의한 독점적 경향을 막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정국운영 방식의 확립이라는 다목적 포석이 주어진 것이었다.
부국강병을 앞세워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한 통치규범의 정비를 우선하는 훈신과 향촌사대부의 자율적 책임을 전제로 한 각종 공동체 조직의 자치적 운영으로 사-민 지배관계의 확립을 보장받으려는 사림의 입장 차이는 그들이 처한 현실적 이해와 관련된 것이었다. 훈신들의 주된 존재기반은 관직이었고, 그들은 이를 배경으로 한 과전법(科田法) 체제를 통해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며 기득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서해 연안지역의 활발한 간석지(干潟地)개발로 경제적 부를 확대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사림은 대개가 중소 재지지주층으로 그들의 기반은 향촌에 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향촌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 천방(川防: 洑)과 같은 수리수단의 보급으로 연작상경(連作常耕)이 가능한 새로운 농법을 구축함으로써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배증하는 한편 지방의 유력자들이 지방관의 자문역할을 담당하는 유향소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영남의 사림들이 여타 지역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현상을 주도한데 있었다. 그러나 훈신 사림의 그 같은 기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사대부정권의 지배체제 확립이라는 점에는 일단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성종(成宗)대에는 그들의 합작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등 제도적 정비의 마무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신들의 권력독점적 경향은 가속화되었고, 그들의 주축이된 관인들의 사적 이익 도모를 위한 재부(財富)축적에 직권을 남용하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관인들의 비리행위는 특히 군역(軍役)의 포납화(布納化)와 공물(貢物)의 방납화(防納化)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군역과 공납의무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역(役)을 대신하는 댓가로 지불하도록 용인된 포납과 방납은 중앙과 지방의 군사지휘관들이 사리(私利)를 위해 강제적으로 입역(立役)을 면해주면서 그 댓가를 요구하는 형세로 바뀌어 갔고, 방납청부인들이 공납의무자에게 요구하는 값이 청부인 자신의 차익의 몫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장해 주는 권세가에 상납할 것까지 계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재부획득에 관권이 남용되는 이 같은 추세에서 정치적으로는 외척(外戚)의 비중이 높아지는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왕조는 왕정(王政)을 지향하면서도 왕족의 정치개입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척족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따라서 왕실과의 혼인관계는 권력유지의 가장 확고한 장치가 되었고, 여기에 사익(私益)획득을 보장받으려는 관인들이 연계함으로써 이른바 훈척(勳戚)정권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림의 정치 사회적 성장은 정치사적으로 정치여론권의 형성이란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그 여론을 중앙정치에 반영시키는 구체적인 수단을 가지거나, 조직적인 사회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초기에는 그들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정치에 그들의 소견을 반영 시키는 길밖에 없었으며, 사회적인 기반의 구축 또한 상단한 기간 독자적인 수행은 어려웠다. 재야의 사림들의 公論형성이 국가적으로 공인되는 것은 인종代 성균관(成均館)이 公論所在로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등 삼사(三司)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한 뒤부터였다. 또한 사림들의 사회적 기반 구축이 본격화되는 것은 사림세력의 붕당(朋黨)결성을 통한 역학관계가 확립되는 선조대 이후에서나 가능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성종 초의 김종직(金宗直)등 영남사류의 등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그들이 일찍부터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한 결과였다. 그러나 사림의 지역성은 이 당시에는 지역간 내지는 학파간 차별을 전제로 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고, 서울과 지방의 모든 지식계층 사이에 공감대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영남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역사성이 부여되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림파라는 개념은 기득권층의 훈구파에 대응하는 것으로 당시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의 보편적 집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들 사림파의 기본입장은 수신(修身)을 통해 도심(道心) 양심(良心)을 함양한 뒤 치인(治人)할 때 비로소 공도(公道)가 실현될 수 있다는 성리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단순한 관료의 수신론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관인층 사이에 권력 지향적이고 비리가 만연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자체가 현실비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사림파의 훈척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연산군대부터 야기되는 사화(士禍)는 결과적으로 이러한 공도론에 입각한 사림의 비판과 도전으로 궁지에 몰린 훈신 척신의 기성집권층이 정치적으로 반격을 가한 행위였던 것이다.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의 4대 사화는 정치・사회 경제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의 보장을 위해 보수적 성향을 견지하려는 훈척세력과, 현실을 난국으로 규정하여 성리학적 제반 개혁을 추구하려는 사림세력의 정치적 대립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추진 성향은 중종대 기묘사림파의 지치(至治)운동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도학정치의 구현을 표방하며 추진된 기묘사림파의 개혁은 시대성을 부여받는 것이기는 했으나 극단적인 군자 소인론을 적용하여 정치 경제적 파탄을 야기한 훈척세력을 소인으로 규정하여 배척한 점은 그들의 패퇴와 정국경색을 자초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사화를 거치면서 훈척세력의 독점적 경향과 기형적이고 파행적 정국운영은 오히려 가중되었고, 그 결과 중종대 후반부터는 척신정치(戚臣政治)라는 극단적 권력독점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신정치는 훈구세력 집권 말기에 나타난 변형된 정치형태로서 집중된 권력을 바탕으로 사적 이익추구를 본령으로 하는 특징을 보이면서 다음시기의 사림정치(士林政治)로 이어지는 과도기로서의 역할을 한 정치형태라 할 수 있었다.
윤원형(尹元衡)을 정점으로 한 척신정권은 명종대에도 불교세력(佛敎勢力)과 연대하는 한편 인적 기반과 함께 경제 군사적 기반을 확대하는 등 배타적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척신정권의 이 같은 권력집중 양상은 결과적으로 제부면에 걸쳐 적지않은 병폐를 유발하고 있었다. 그 실상은 뒤에 유성룡(柳成龍)이
“슬프다. 우리나라가 쇠약해 가는 조짐은 그렇게 된 유래가 있다. 명종조에 권신 윤원형 이양의 무리가 20여년동안 서로 이어 정권을 잡으니, 충성스럽고 어진이은 억눌리어 쓰이지 못하고, 기강은 무너져 어지럽고 탐오 혼탁한 것이 풍조를 이루어 이미 쇠미해 떨치지 못할 징조가 있었다. 을묘년(乙卯年, 명종10, 1555)의 왜구는 개나 쥐같은 좀도둑에 지나지 않았건만 원근이 모두 놀라고 벌벌 떨어 호남이 거의 보전되지 못할 뻔했다. 아마 적이 스스로 물러가지 않았다면 그 형세가 또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에도 군정이 예전 그대로 문란하여 백에 하나도 바로 잡은 것이 없었다.”
며 척신정권의 대두가 국가 쇠잔의 시작으로 평가한 것에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고 하겠다. 당시 남명(南冥) 조식(曹植)이 척신정권의 후견인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한 존재라며 극언하는 상소를 한 것도 그들 정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림 일반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척신정권의 대두에 따라 정계진출이 어렵게 된 사림들은 향촌에서 서원건립 운동과 학연을 매개로 한 학파형성 등을 통해 재지적 기반확충과 그들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 나갔다. 특히 사림의 활동이 두드러진 영남지역에는 서원건립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퇴계 이황과 남명조식을 종장으로 하는 학파가 형성되어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좌도와 진주를 정점으로 한 우도를 중심으로 성장한 지역성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그 문인들이 좌 우도를 넘나들며 사생관계나 사숙을 통해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뒤에 그들이 척신의 정치개입차단에 공조하게 되는 것은 그 같은 유대가 배경이 된 것이었다.
이 시기 경산 하양 자인지역 사림의 성장은 그 여건상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지만 일찍부터 이 지역들에 형성된 토성들을 중심으로 재지사족으로서의 토대를 구축하며 발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산의 토성은 김(金)・전(全)・백씨(白氏) 하양은 허(許)・현(玄)・제(諸)・유씨(柳氏) 자인은 박(朴)・한(韓)・정(鄭)・주씨(周氏) 등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산의 경우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속하였던 전백영(全伯英)의 가문이 향촌을 주도하는 세력을형성하였고, 중종조 전한(全翰) 전헌(全獻)이 급제하여 중앙관계에 진출함으로써 성장의 발판을 구축하고 있었다. 또한 전백영과 도의(道義)로 교유하던 박해(朴晐) 이거(李琚)의 일문도 향촌의 유력한 가문으로 합류했다. 특히 박해는 밀양인으로 관직이 대사헌까지 올랐으나 국사가 날로 비루해지는 것을 보고 경산 내매동에 은거했다. 밀양(密陽) 박씨(朴氏) 일문은 박울(朴蔚)을 비롯해 그 아들인 박계조(朴繼祖) 승조(承祖) 찬조(纘祖) 순조(順祖) 현조(顯祖) 형제를 생진(生進)으로 배출함으로써 경산에서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 외에도 경산에는 진석산(陳碩山) 진가유(陳嘉猷) 진관(陳瓘) 진정(陳珽)등과 장방도(蔣方道) 장자원(蔣自元) 등의 생진 및 관인을 배출한 진산(珍山) 진문(陳門)과 아산(牙山) 장문(蔣門)도 유력 사족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하양에는 여말선초 허조(許稠) 일문이 조정에진출하면서 명문으로 성장했다. 허조는 황희(黃喜)와 함께 세종조 정국을 주도하였고 그의 동생 허주(許倜)도 요직에 진출하여 훈구의 일원으로 확약했으나, 조의 아들인 허후(許詡)가 세조의 등극에 반대하여 거제(巨濟)로 귀양갔다 사사(賜死)당함으로써 몰락했다. 이를 계기로 허씨는 향촌에서 세력기반을 강화하며 사림파의 형성에 참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하양에는 윤자임(尹自任)과 황헌(黃憲) 등의 생진을 배출한 파평(坡平)윤씨(尹氏)와 장수 황씨도 유력 사족으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자인은 경주의 속현이긴 했으나 한 장군(韓將軍)놀이(女圓舞)가 전승되고 그를 제향한 사당이 지어진 점으로 미루어 자인(慈仁) 한씨(韓氏)들이 향촌을 주도하는 사림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말 중소군현의 토성들이 토로로서 외적을 격퇴한 공로를 배경으로 신분을 상승키킨 경향이 많았듯이 전설상의 한 장군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 편승한 토성 한씨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자인에 는 중종조 박근손(朴謹遜) 최운수(崔雲水) 등 생진을 배출한 미약 박씨와 곡강 최씨도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같이 경산 하양 자인의 재지사족들은 향촌에서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며 그들끼리 긴밀하게 연대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학통과 연계함으로써 퇴계학파의 일원을 형성하기도 했다. 뒤에 경산에 이황을 제향한 고산서원(孤山書院)과 자인에 이언적을 제향한 관란서원(觀瀾書院)이 각각 건립되는 점은 그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서사선(徐思選) 진섬(陳暹) 전극창(全克昌) 김응명(金應鳴)등이 퇴계와 남명사이를 왕래하며 활동한 정구(鄭逑)에게서 수학한 바가 있듯이 영남학파의 형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같은 기반과 연대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며, 좌도뿐만 아니라 우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 경제적 병폐의 유발 등 국가운영에 극단적 한계를 드러내며 지속되던 척신정권은 결국 명종말 문정대비의 사망을 신호로 사림의 집중 공세를 받아 급속하게 와해되고 말았다. 곧 명종 20년 4월 문정대비가 사망하자 사림계 언관들은 척신 윤원형을 집중 탄핵하고, 성균관 및 향촌의 유생들은 보우(普雨)를 참(斬)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잇달아 올리는 등 척신정권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던 것이다. 척신정권의 와해를 목표로 조야의 사림이 역할분담의 방식으로 전개한 이같은 연합공세는 11월 윤원형과 보우가 사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척신세력이 군소집단으로 전락하는 대신 사림세력이 정치적 우세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사림정치의 명분과 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사림들이 이 시기에 대해 간예(奸穢)를 잘라 버리고 국시(國是)가 변하게 되었다고 평가한 것은 이에 근거한 때문이었다.
정국을 주도한 사림세력에게 있어 가장 큰 정치적 과제는 척신정권에 의해 야기된 제반 적폐의 제거 보다도 그것을 유발한 권력의 독점적 경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명종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선조의 즉위를 적극 지지한 것도 부친을 일찍 여윈 그가 당시 모친의 상중에 있었는데다 미혼의 상태로 그를 배경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척신이 없다는데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비였던 인순대비 심씨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의 존재는 사림의 견해차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이등 기호사림파는 심의겸이 비록 척신이기는 하나 그가 명종말 이량을 중심으로 한 척신정권의 재등장을 차단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척결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정인홍(鄭仁弘) 유성룡(柳成龍) 등 영남사림파는 척신정치의 완전한 청산을 위해서는 심의겸도 예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는 한편, 이이 등이 척신과 연계하여 다시 권귀화를 획책하고 있다며 의심하기가지 했다. 결국 사림세력은 그같은 과거청산에 대한 입장차이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동인 서인으로 분열하여 붕당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는 당파성론에서 주장되는 것처럼 선천적인 당벌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朋黨論)과 주자(朱子)의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 즉 성리학적 붕당론을 적용한 정치형태였다. 구양수는 군자가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같이함으로써 붕을 삼고 소인이 소인끼리 이(利)를 같이하여 붕을 이루는 것으 자연의 이치라 규정하는 한편, 붕은 소인에게는 없고 군자에게만 있는 것으로 군자의 집단인 붕당을 장려할 때 국가의 발전도 도모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자도 붕당은 조신(朝臣)간의 상쟁에 그칠 뿐이지만 그것을 없애버린다면 나라마저 망하게 된다며 붕당망국론(朋黨亡國論)을 거부하는 한편 군주도 붕당에 참여토록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견해를 제시한 바가 있다.
이같이 선조조 이후 대두하는 붕당정치는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림세력이 구양수 주자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분열함으로써 나타난 정치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사림의 공론을 토대로 정국을 운영하는 사림정치의 본원으로 정치참여층의 확대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붕당간의 상호 공존과 경제를 근간으로 한 정연한 논리를 토대로 하여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구양수가 소인에게 붕이 없는 것이라 한 것이나 주자가 붕당내에 현부충사(賢否忠邪)를 변별하여 소인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은 붕당간의 조정을 전제로 붕당긍정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따라서 정인홍과 이이가 다같이 붕당을 옹호하면서도 군자 소인의 엄격한 분변을 지향해다 한다는 입장과 사류(士類)의 조제(調劑)와 보합(保合)이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견해를 달리한 것은 구 주 붕당론의 극단적 적용과 공존을 보장한 선별적 적용이라는 차이에서 빚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과거창산의 방법에 견해를 달리한 동 서인 사류의 대립의 근간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16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사정은 이같이 척신세력의 독점적 권력이 붕괴되고 정치참여층의 확대를 보장함과 동시에 공론에 입각한 정국운영을 근간으로 하는 사림정치가 확립되어 가는 과도기의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정국을 주도한 사림세력은 척신정치의 청산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여 견해를 달리하며 동인 서인의 붕당구조를 구축하여 분열한 상태에 있었다. 척신정권에 의해 야기된 각종 병폐를 제거하고 국가재조(國家再造)를 위한 개혁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과거청산 문제에 집착하게 된 것은 진정한 개혁완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이념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으로서는 개혁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자격의 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합의는 도출되지 못한 채 사림세력의 대립은 격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합의는 도출되지 못한 채 사림세력의 대립은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림정치의 본원을 지향하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통한 국가재조는 그만큼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임진왜란은 사림세력에게 있어 국난극복 의지와 능력의 시험부대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국난극복의 일차적 책임은 정국을 주도하는 그들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그들이 여기에서 실패할 경우 국가패망의 책임은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훈척정권을 비판했던 사림의 정치이념은 허구로 판명되는 것이었다. 왜란을 당하여 재조 재야의 사림들이 각지에서 활발하게 자발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국가보존의 투철한 의식의 발로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의 그 같은 위기의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림정치의 확립은 당시 시급하게 요구되었던 국가체제 정비를 도외시하고 대외정세의 파악에 소홀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자초하다시피 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사림들의 성공적인 의병활동을 통해 국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전후 사림정치의 효용성 여부를 포함한 정치구조의 재편 논의는 유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일본의 동향을 보자. 일본은 1467년부터 17년간 계속된 응인(應仁)의 난으로 인해 실정(室町:足利) 幕府의 통제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봉건적 영주의 성격을 지닌 수호대명(守護大名)이 제각기 분국(分局)을 근거로 독립하게 됨으로써 전국은 완전히 분열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분열 상태는 직전신장(織田信長)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약 1세기동안 ㄱ;ㅖ속되었는데, 그 동안 구세력은 몰각하고 새로운 실력자가 득세하게 되어 무력만이 문제해결의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에는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한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었고, 그에 편승하여 영주로 올라선 전국대명(戰國大名)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전국대명은 독자적인 법률을 만드는 한편 영내의 행정 군사 경제 전반을 장악했다. 영내의 국인(國人) 토호(土豪) 등은 대명(大名)의 가신이 되어 주종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의 토지도 일단 대명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분배됨으로써 전통적인 장원제(莊園制)도 청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전국대명 가운데 전국의 통일을 꾀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나 통일의 전제가 되는 천황이나 장군의 권위를 가장 잘 이용한 인물이 직전신장이었다. 그는 1568년 경도(京都)로 가 막부의 계위내분(繼位內紛)에 개입하여 자신에게 의지해온 장군의 동생 의소(義昭)를 승계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1573년 의소가 자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축출하여 족리막부(足利幕府)를 멸망시켜 버렸다. 이후 그는 천황 영지의 조세를 징수해 주는 등 천황가와 연계하여 통일의 기반을 구축해 갔다. 그러나 그가 1582년 모리씨(毛利氏)를 토벌하러 가기 위해 경도의 본능사(本能寺)에서 숙박하다 부장 명지광수(明智光秀)의 피습을 받아 사망함에 따라 통일의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직전신장의 유업을 계승하여 일본의 통일을 완수한 인물이 바로 풍신수길이었다.
그는 미천한 출신인 족경(足輕)의 아들이었으나, 전국시대의 특징인 실력경쟁과 사회계급의 변화를 틈타 출세하여 직전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직전의 사후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그는 3만 명의 인부를 주야로 동원하여 대판성(大阪城)을 쌓고 이곳을 통일사업 추진을 위한 본거지로 삼았고, 1587년 구주정벌(九州征伐)에 이어 1590년 덕천씨(德川氏)의 협력을 얻어 소전원(小田原)의 북조씨(北條氏)와 오우(奧羽)의 이달정종(伊達政宗)의 항복을 받는 것을 끝으로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풍신수길의 야망은 국내의 통일에 그치지 않았다. 만년에 일륜의 아들을 자처하기도 한 그는 중국대륙을 정복하여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인도까지 영유하여 대아시아 제국을 건설해 사해(四海)에 위명을 떨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의 대륙침략 계획은 그의 과대 망상적 야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고 국내의 사정도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우선 그에게는 전국시대의 전란이 마무리되어가는 상황에서 몰락한 대명 토호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해외에서 지행(知行: 封地 食邑)을 지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 판단했다. 또한 그는 대명 출신이 아니고 자수성가했기 때문에 강력하고도 믿을 만한 직할군이 없었으며, 대륙침략을 계기로 자신의 직할군을 확보하려 했다. 더구나 당시 대외무역의 이익을 알고 있던 가등(加藤) 구정(龜井) 등 서국(西國)의 대명들이 대외정복을 통해 이득을 확보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들의 이해에 부응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풍신수길은 통일사업 과정중인 1587년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 종의지(宗義智) 부자에게 대륙침공 계획을 설명하고 먼저 조선을 침공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데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대마도주는 그에게 우선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도록 교섭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대마도주는 가신인 귤강광(橘康廣)을 일본국왕의 사신으로 삼아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의 군내사정을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사신이나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풍신수길의 독촉이 계속되자 종의지는 하는 수 없이 선조 22년(1589)봄 자신이 직접 승(僧) 현소(玄蘇)와 가신 유천조신(柳川調信)등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통신사 파견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하다 보빙(報聘)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풍신수길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우세해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23년(1590)3월 첨사(僉使)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通信使),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전적(典籍)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종의지와 함께 일본으로 파견했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귀국한 것은 1년 뒤인 선조 24년 3월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곧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화가 있으리라 보고했고, 김성일은 그들이 침략할 정형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들의 상반된 견해는 흔히 동 서인 당쟁(黨爭)의 산물로 파악되고 있으나, 그것이 당파간의 이해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 또는 두 사람의 견해차를 야기한 배경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미 통신사 파견의 교섭과정에서 일본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고 대비에 착수했다. 곧 선조 22년 7월 왕은 비변사(備邊司)에 교지를 내려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병수사를 간택할 것, 요충의 읍에 호(壕)를 파고 축성(築城)을 서둘 것,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의 자격이 있는 자는 모두 대읍(大邑)의 수령으로 파견할 것 등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 뒤 24년 2월에는 출번(出番)의 제색군사(諸色軍士) 및 병조(兵曹)・군기시(軍器寺) 제조(提調)는 모두 전투용 무기인 철환(鐵丸)의 사용법을 익히도록 하거나 요해읍(要害邑)수령의 교체, 3도 감사의 처우개선을 통한 군령계통(軍令系統)의 쇄신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그리고 동년 7월에는 영남과 호남지방의 읍성수축(邑城修築)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일본이 해전에 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상륙해 육전을 벌인다 해도 조선측에 유리할 것도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특히 영남지방의 성들이 대상이 되었는데, 부산・동래・밀양・김해・다대포・창원・함안등의 도성을 증축하는 한편 종래에 성벽이 없던 대구・청도・성주・삼가・영천・경산・하양・안동・상주등의 읍성을 신축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경산 읍성의 경우 석축(石築)의 둘레가 1,200척(320m)이고 높이가 10척(3m)이며 성 위에는 여첩(女堞:담장)은 없고 사방에 문이 있으나 사문에는 문루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양에는 성지(城池)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임란 당시 허물어진뒤 복구되지 않은 것 같다.
조선에서 이같은 대비를 하고 있는 동안 풍신수길은 명고옥(名古屋)을 행영본부(行營本部)로 정해 군량 병선의 할당 등 여전히 침공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조 25년에는 육군 16대대와 본영 친위대를 합쳐 약30만명의 수륙 침략군 병력을 편성했다. 이 가운데 158,700명을 조선 침공군으로 삼아 1-9번대(番隊)로 편성하였고, 나머지 118,300명은일본에 잔류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 침공군으로 편성된 8번대(10,000명)와 9번대(11,500명)는 각각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에 머물도록 했기 때문에 실제 조선에 침공한 병력은 137,000명이었으며, 그중 최전선에 투입된 선봉부대는 1-3번대 52,500명이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이끄는 1번대 18,700명은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관군을 격파하고, 기장 양산 밀양 청도 경산을 거쳐 21일 대구성을 점령한 뒤, 인동 선산 상주를 거쳐 충주로 진격했다.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이끄는 2번대 22,800명은 4월 19일 부산포에 상륙해 언양 경주를 지나 영천 신령 군위 비안 용궁 문경을 거쳐 북상하다 29일 1번대와 충주에서 합류했다.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인솔한 3번대 11,000명은 4월 19일 죽도 부근에 상륙하여 김해를 점령하고 창녕도로 나가 부대를 이분해 동로군(東路軍)은 무계 성주도로, 서로군(西路軍)은 초계 거창 지례도로 북상했다. 금산에서 합류하여 영동 회덕 청주도를 따라 진격했다. 그 외 4-9번대도 속속 상륙하여 진격을 계속했다.
한편 조선의 관군은 일본의 그 같은 침공에 효율적인 대응을 거의 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패퇴를 거듭했다. 더구나 동남 제1의 요새인 조령(鳥嶺)이 무너지고 공주가 함락되어 왕경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선조는 4월 29일 일본군을 피해 서울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로 향했다. 그러자 이에 항의하는 백성들이 경복궁(景福宮)등 궁실과 관부에 불을 지르고 내고에 난입하여 금은재물을 약탈하는 한편 장예원(掌隸院)과 형조(刑曹)에 방화해 공사의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모두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왜적은 조선에 상륙한 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손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전란 초기 관군의 그 같은 패전은 왜적의 조총(鳥銃)에 대응할 화포(火砲) 등의 병기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지역간 동원체제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데도 적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 같은 동원체제의 혼선은 왜적에 대항하여 지역방어에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유발하고 있기도 했다. 당시 하양의 군민(軍民)들이 당한 비극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적이 경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하양 대장(代將)은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했는데, 병사가 하양은 원래 방어사(防禦使)의 소속이라는 이유로 되돌아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도록 지시했다. 하양의 군사들이 되돌아오는 도중 모량(牟陽)에서 마침 식사를 하고 있던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계원장(繼援將)인 우복룡(禹伏龍)이 이들이 왜적이 아닌가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했다. 우복룡은 대장이 사실대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도망치는 군사들이라며 점검을 가장하여 모조리 죽이도록 했다. 이로 인해 하양의 군사들이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고 송장은 들에 가득 쌓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복룡은 오히려 도적을 잡아 목 베었다고 방어사에게 보고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우복룡의 그같은 행위에 대해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공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 있는가고 반문하며 개탄해 마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하양의 군민들은 전쟁다운 전쟁 한번 치뤄보지도 못한 채 고을은 완전히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반면 우복룡은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었다. 뒤에 하양의 고아들과 과부들이 조정의 사신이 지나가는 행차를 만날 때마다 말 앞을 막아서서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당시 명망이 있다는 이류로 그 억울함을 알고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관군이 패퇴를 거듭하여 전세가 불리해지게 되자 각지에서 사족(士族)을 주축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같이 사족들이 앞장서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동안 향촌에서 지속적으로 사회・ 경제적 토대를 구축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재야사림의 의병활동은 독자적인 경우도 있었겠으나, 대부분 관군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전개되었음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관군은 비록 패퇴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궤멸된 것은 아니었고, 의병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것이다. 이 점은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경상우도에서 경상감사 김수(金晬)를 비록한 조대곤(曺大坤)・전현룡(田見龍)등이 의병장들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의병장들이 인솔한 부대의 구성원이 가동(家僮)・촌민(村民) 보다 포졸(捕卒)・산정(散丁)등 관군쪽 병사가 더 많았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난극복은 특정인 내지 특정 부류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 재조와 재야의 사림세력이 전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기적인 연대체제를 구축하여 총력전을 전개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곧 기존의 양반관료 지배체제 내지 사림의 향촌 지배체제가 근본적으로 붕괴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조 재야세력이 효율적으로 전란에 대응한 결과 의병들이 도처에서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이며, 수군(水軍)이 해상에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며,명의원군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경산 하양 자인지역의 의병활동을 보자. 이 지역 의병은 장몽기(張夢紀)가 곽재우(郭再祐) 최동보(崔東輔) 조성(曺珹) 등과 동시에 창의했다 하고, 정경세(鄭經世)가 ‘경산여두소읍 수선창의(慶山如斗小邑 首先倡義)’라 한바가 있듯이 여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리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대구 경주 등지가 적에 의해 장악되어 의병활동이여의치 않았던 것과는 달리 이지역은 적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으나 주둔하지 않아 의병의 모집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선 이 지역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창의한 의병장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등재한 임진 정유란에 창의한 의병장과 그 공훈은 다음에 열거한 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하였다.
순조(純祖) 33년(1833)에 간행된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선생의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과 화왕동고록(火旺同苦錄)을 참고하여 1914년에 간행된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또한 선조(先祖) 38년(1605)의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卷)과 조선 태조(太祖) 2년(1393)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문과급제 명단이 기록된 국조방목(國朝榜目)을 근거로 하였다. 이외 권응수(權應銖) 장군의 백운재충의공실기(白雲齎忠懿公室記), 유성룡(柳成龍)선생의 징비록(徵毖錄), 화성지(花城誌), 옥산삼강록(玉山三綱錄), 자인의병장 최문병(崔文炳)의 성재선생실기(省齋先生室記)를 근거로 했다.
특히 성재선생실기에는 자인 창의록(倡義錄), 청도동고록(淸道同苦錄), 영천복성시동고록(永川復成時同苦錄), 서악동고록(西岳同苦錄), 팔공산회맹록(八公山會盟錄)등이 실려 있어 확실한 참고가 되었다.
[경산]
○ 박응성(朴應成)- 本: 密陽 號: 梅軒, 무과(武科)로 등제(登第)하여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름. 난이 발발하자 아들들과 김면(金沔)군에 합류. 망월산성(望月山城)을 쌓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조정의 명을받고 성주(星主) 사원(沙原)에서 적과 싸우다 아들 근(瑾) 장(璋) 환(瓛)과 함께 순절(殉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병조참의(兵曹參議)에 훈증(勳贈)됨.
○ 박응량(朴應良) - 本: 密陽 號: 박해(朴晐)의 5세손이자 박응성(朴應成)의 종제(從弟)로 그를 따라 창의하여 공을 세움. 공으로 주부(主簿)에 제수됨. 선무원종공신에 책록
○ 장여란(蔣如蘭)- 本: 牙山 號: 復齋, 장자원의 5세손. 진사로 참봉에 음수, 權應銖 金沔과 협력해 軍功.
○ 진섬(陳暹) - 本: 珍山 號: 成齋. 진권의 손자. 한강의 문인. 권응수진에 합류해 영천전투에 참가했다 순절 ⟪龍蛇世講錄⟫에 등재
○ 진엽(陳瞱) - 本: 珍山 號: 樂齋. 진섬(陳暹)의 弟. 곽재우진에 합류하여 화왕산에서 항전 ⟪龍蛇世講錄⟫에 등재
○ 최응담(崔應淡) - 本: 흥해 號:晦堂 初名: 大期 문무겸통. 권응수와 영천전투에 참가. 전공으로 訓鍊副正에 特除
○ 정변함(鄭變咸) - 本: 草溪 號: 上川. 동생 변호(變頀) 변문(變文)과 함께 창의하여 金城山城 望月山城 및 성주 沙原전투에 참가 火旺山城에서 항전. 삼형제 모두 ⟪龍蛇世講錄⟫에 등재
○ 승적(承笛) - 本: 海南 武科로 蛇島鎭僉使 역임. 화왕산성전투 참가. ⟪龍蛇世講錄⟫에 등재
○ 이간(李榦) - 本:永川 號: 乖菴. 영천전투참가. 李叔樑의 문인
○ 남중옥(南仲鈺) -⟪龍蛇世講錄⟫에 등재
○ 전락(全洛) - 本: 玉山 ⟪龍蛇世講錄⟫에 등재
[하양]
○ 허대윤(許大胤) - 本: 河陽 號: 損齋 허조(許稠)의 후손. 분순위수문장(奮順尉守門將) 제수 宣武原從3等 功臣에 책록
○ 허경윤(許景胤) - 本: 河陽 號: 지재(篪齋) 허대윤(許大胤)의 弟 전공으로 적순부위수문장(迪順副尉守門將)에 特除, 宣武原從3等 功臣에 책록
○ 허응길(許應吉) - 현풍현감(玄風縣監)으로 곽재우진에 합류해 화왕산성전투 참가 ⟪龍蛇世講錄⟫에 등재
○ 신해(申海) - 本:平山 申崇謙후손. 전공으로 仁同府使에 除受. 宣武原從2等 功臣에 책록
○ 김거(金鐻)- 本: 김해 號:鶴圃 도사에 음수. 공산 및 화왕산 전투참가. 현릉참봉에 제수. 宣武原從3等 功臣에 책록 ⟪龍蛇世講錄⟫에 등재
○ 황경림(黃慶霖) - 本: 長水 號:勉窩 申海와 함께 영천전투에 참가하고 곽재우진에서 화왕산성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양보하고 은거. 純祖 20년 東湖祠에 제향. ⟪龍蛇世講錄⟫에 등재
○ 박능정(朴能精) - 本: 울산 訓練院 僉正. 울산 西生鎭戰鬪에서 순절
○ 박붕(朴鵬) - 號: 觀鶴庵. 能精의 子 文行으로 訓導에 제수, 河陽守城將으로 戰功
○ 정인광(鄭仁光)- 공산전투에 참가.
[자인(慈仁)]
○ 김우용(金遇鎔)- 本:慶州 號:松亭 弟 遇鍊, 姪 應光 등 兄弟叔姪을 데리고 곽재우와 함께 火旺山戰鬪 참가. 뒤에 문학으로 童蒙敎官에 제수 ⟪龍蛇世講錄⟫에 등재
○ 김우련(金遇鍊)- 本:慶州 號:松齋 遇鎔의 弟 遇鍊, 곽재우진에서 機務를 맡아 참모로 활약. 柳成龍 鄭經世와 道義之交 ⟪龍蛇世講錄⟫에 등재
○ 최문병(崔文炳) - 本:永川 號:省齋 淸道. 軍威. 河陽. 永川.慶州.公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움. 戰功으로 監牧官 제수. 嘉善大夫 漢城右尹에 勳贈. 숙종 38년 忠賢祠에 祭享
○ 이광후(李光後) - 本: 星州 號: 梅軒 곽재우진에서 활약. 復縣運動을 주도한 공으로 南川書院에 제향
○ 이창후(李昌後) - 本: 星州 號: 竹軒 光後의 제. 형과 함께 곽재우진에서 활약. 復縣運動을 주도한 공으로 南川書院에 제향
○ 김응광(金應光) - 本: 경주 遇鎔의 姪 기개가 뛰어나 숙부보다 많은 전공을 세움. 화왕산성에서 義士들과 死守 서약
○ 이춘암(李春馣) - 本: 경주 號: 松軒 李齊賢의 후손. 최문병과 함께 창의. 정유재란에 제 춘함과 함께 곽재우진에서 화왕산성 전투참가 ⟪龍蛇世講錄⟫에 등재
○ 이춘함(李春함)- 本: 경주 號:죽헌 春馣의 弟, 최문병과 창의 화왕산성 전투 참가 柳成龍과 교유. 刑曹判書에 勳贈 ⟪龍蛇世講錄⟫에 등재
○ 전극창(全克昌) - 本:천안 號: 죽계, 19세의 나이로 창의하여 곽재우진에서 두각을 나타냄. 김응명과 함께 정구(鄭逑)의 문인이 됨. 이윤우(李潤雨) 등과도 道義之交. ⟪龍蛇世講錄⟫에 등재
○ 최동립(崔東立) - 本: 永川 號:樂 향촌에 은거하다 최문병과 함께 참전 문과로 병조좌랑에 제수 宣武原從2等 功臣에 책록
○ 김태현(金台鉉) - 本: 金海 號: 樂峰 金克一 오세손 곽재우진에서 전공을 세워 禦侮將軍에 勳官
○ 최계종(崔繼宗)- 本: 永川 號: 鶴崖, 화왕산성 전투 참가. 전공으로 長連縣監에 제수
○ 김응룡(金應龍)- 本:상산 釜山僉使 忠贊衛. 崔文炳의 휘하로서 영천, 경주, 울산 전투에서 공을 세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龍蛇世講錄⟫에 등재
○ 안천민(安天民) - 本: 忠州 號: 覺甫, 영천성 탈환에 공을 세움. 곽재우 의병진에 참여. 火旺山城전투 참가. 刑曹佐郞에 勳贈 ⟪龍蛇世講錄⟫에 등재
○ 박몽룡(朴夢龍) - 本: 咸陽 號: 竹溪 동생 竹圃 夢亮, 淸潭 夢鯉와 함께 창의하여 최문병과 耳嶺戰鬪에서 공을 세웠고, 화왕산성전투에 참가했으나 夢亮은 순절, 夢亮은⟪龍蛇世講錄⟫에 등재
○ 최희지(崔熙止)- 本: 永川 화왕산성전투 참가, ⟪龍蛇世講錄⟫에 등재
○ 최경지(崔敬止)- 本: 永川 號:二友堂, 崔熙止의 弟 ⟪龍蛇世講錄⟫에 등재
○ 박춘(朴春) - 本: 함양 號: 嶺崗, 화왕산성전투 참가. 判中樞 勳贈⟪龍蛇世講錄⟫에 등재
○ 이파준(李葩俊) - 화왕산성전투 참가⟪龍蛇世講錄⟫에 등재
○ 이기업(李起業) - 本:경주 號: 묵헌 화왕산성전투 참가.⟪龍蛇世講錄⟫에 등재
○ 이억수(李億壽) - 화왕산성전투 참가.⟪龍蛇世講錄⟫에 등재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산 하양 자인의 의병장의 활동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 당시 창의한 의병장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 세거(世居)하며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관인 또는 사족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여타 지역에서도 다를 바 없겠으나 이는 당시 조야 사림들의 유교의 실천적 충의에 입각한 국가의식을 반영한 것이면서도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향촌민과의 일정한 교감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특히 전란 초기 치명적 타격을 입은 하양에서도 팔의사(八義士)를 주축으로 의병이 결성된 사실은 그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의 물적 기반을 활용한 예는 현재로서 찾아보기 어려우나 당시 대구의병장으로 공산에서 창의한 최동보(崔東輔)의 준비상황을 통해 그 일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사방으로 흩어지더라도... 병기를 만들어 준비해서 적의 선봉을 만나면 토적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그러자고 했다. 곧바로 집종 복수(福守)에게 명하여 각집에서 쓰는 쇠그릇과 집안에 모아둔 무쇳덩이 2백근을 모으고, 또 대장장이 화석에게 명하여 긴창과 큰칼 3백여 자루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집안에 간직한 곡식 5백섬을 내고 각 집에 모아둔 곡식 8백여 섬을 보아 굳게 간직해 두었다.
둘째, 이들의 의병활동은 고립분산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유력한 의병장과 연대하여 조정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의 사림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훨씬 전 국가에 변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수시로 만나 동고동락을 약속한 바가 있어 의병장들의 유기적 연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1588년 권춘란(權春蘭)・ 김우옹(金宇顒)・ 조호익(曺好益) ・장현광(張顯光)・ 최동보(崔東輔)등 영남의 좌우도 사림들은 불골사(佛骨寺)에 모여 변란이 발생하면 동고하기로 맹세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사림들이 개별적으로 창의했다 할지라도 합세하여 먼저 지역 의병군을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인의병의 경우 최문병이 의병장으로 추대되는 창의군이 조직될 때 박춘(朴春) ・김우용(金遇鎔) ・김우련(金遇鍊)・ 이춘암(李春馣)・ 이춘함・ 박몽량(朴夢亮)・ 김응광(金應光)・ 안천민(安天民)・ 이파준(李葩俊)・ 전극창(全克昌) ・이억수(李億壽)등 제장들이 모두 의사(義士)로서 휘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경산의 최응담(崔應淡)과 하양의 신해(申海), 자인의 최문병(崔文炳)과 청도의 박경전(朴慶傳)이 대체로 지역적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들끼리 의견이 상통하고 연락도 잘되어 요해지(要害地)를 굳게 지켰으므로 적들이 감히 경솔하게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지역간 의병의 유기적인 결속을 강화하고 있기도 했다. 나아가 그들은 다시 권응수(權應銖)・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등의 의병군과 합류하여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최응담(崔應淡) ・신해(申海)가 연합하여 권응수(權應銖)진에 합류하면서 최동보(崔東輔)에게 함께 와서 힘을 합쳐 만전의 계책을 도모할 것을 권유한 편지를 보낸 예는 사림의 지역간 협력체제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 이들의 활동범위는 일단 박붕(朴鵬)과 같이 지역의 수성(守城)을 담당한다든가 남천(南川) 금성산성(金城山城) 또는 고산(孤山) 망월산성(望月山城)전투와 같이 지역방어 전투에 주력하였다. 기록에 산견되는 일련의 이 지역 전투상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최문병(崔文炳)_ 적의 잔병 수백 명이 청도로부터 침입하여 자인지방을 노략질하자 병졸을 거느리고 동창(東倉)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권응수 의병장과 합세하여 하양의 적들을 대구에서 무찔렀다. 수백명의 적이 자인 경내(境內)에 돌입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와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영천에서 자인으로 환군해 하양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섬멸했다. ⟪省齋實紀⟫
○ 최응담(崔應淡) - 동지들과 의병 수백을 모아 경산 대장(代將)이 되어 성현에서 적 30급을 베고 말 10필을 노획했으며, 금곡(金谷: 南川)에서 적을 무찌른 뒤 자인에서 달려온 적을 좇아 연화봉(蓮華峰) 아래에서 수십급을 베었다. (晦堂遺墟碑)
○ 최동보(崔東輔) – 적들이 하양과 경산 중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반야(班野: 반야월(半夜月))에 진군하여 왜적 50급을 베었다. 경산 임당에 적병 수백이 고을 창고곡식을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몽기와 함께 이들을 공격해 섬멸하여 긴창 27자루, 총 32자루, 말12필을 노획했다. ⟪憂樂齋實記⟫
○ 윤동호(尹東豪) - 대구에서 자인의 용산에 이르는 지역에서 적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慶山邑誌⟫
○ 정변함(鄭變咸). 변호(變頀). 변문(變文) 형제 – 남천 금성산성 및 고산 망월산성에서 적과 교전했다. ⟪慶山邑誌⟫
이같이 초기 의병이 지역방어에 성공하자 이들은 영천 및 경주의 수복전과 공산 성주전투에 참여하여 활동범위를 확대 확대했다. 이는 경주 영천 신령 의흥 안동으로 연결되는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타격을 가하려는 전략상의 이유와 함께 지역방어의 예방적 성격도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정유재란 당시에는 국지전의 양상으로 인해 이들 의병은 창녕 화왕산성에 집결하여 항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일단 수적으로 보아 경주의 속현으로 있던 자인지역 출신의 의병장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는 점이다. 또한 화왕산전투에서 참가하여 동고(同苦)한 인물의 명부인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에 등재된 인물도 경산 8명, 하양3명에 비해 15명으로 월등하게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당시 경주가 적에 의해 함락된 충격에 의한 자극이 원인으로 작용한 면도 있겠으나 사족의 활동이 그만큼 경산 하양에 비해 활발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들의 의병활동이 뒤에 복현운동을 전개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경산 하양 자인지역 사림의 의병활동은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로 두드러진 것은 아니지만 인근 지역 의병장들과 합세하여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반격의 기회를 확보하도록 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결국 사림정치가 확립되어가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보함과 동시에 지역적 연대를 지속적으로 강화한 산물이었으며, 왜란 이후 그들의 동향이 정국에 차지하는 비중도 그만큼 커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란 이후 사림의 공론에 입각한 정국운영의 방식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영남사림의 공론이 정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성공적인 의병활동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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