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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부
차례
등단 작품
등단 시 추천의 말
은행에서
수덕여관
불꽃놀이
24시 수퍼마켓
그 비는 그 곳에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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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추천의 말
박공수의 <은행에서> 외 4편은 이른바
소시민적 감수성의 형상화가 산뜻하다.
자본주의 시민사회가 내장하고 있을
법한 소시민의 페이소스를 너절하지 않은
修辭學수사학(레토릭)에 실어 언술코자 하
는 시적 메시지가 옹골차다.
가령 <은행에서>의 첨예화된 의식의
흐름, <수덕여관>.<그 비는 그 곳에 내려
야 한다>에 보이는 페이소스 극기의 아우
라(aura), <불꽃놀이>.<24시 수퍼마켓>의
캐피털리즘에의 풍자성 拮抗길항의식은 예
각적이면서 미감을 자아내는 매력이 있다.
추천관문 통과작들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을 터이다.
추천인 : 박곤걸 . 이수화 . 성기조
문예운동 2006년 여름호 통권 90호에서
은행에서
동전 하나가 떨어져
빛나는 대리석 바닥으로
돌진한다
툭
충돌의 극점에서
빅뱅이 시작되고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우주가 그려진다
모든 게 그 바람권으로
빨려들어 간다
우주를 닮는다
빅뱅의 혈통으로 팽창한다
이자란 놈은
더더욱 빼다 박았다
털썩
주저앉은 동전
주머니 속에서 굴려본다
이상하게도
주머니 속
내 우주가 수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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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속세와 불사의 중간쯤에
외롭게 서 있는 수덕여관
시간의 밑동은 간 곳 없고
빗장 걸어 입 다문 채 말이 없다
죽어도 못 잊겠지요만
사랑도 미움도 잊어버리자고
인연도 혈연도 모두 잊자고
꿈이었다고
꿈속의 꿈이었다고
기다림 접고 지우고 한 흔적
더께 같은 먼지로 다시 덮고
침묵으로 꾹꾹 속을 채워
스님들 오고가는 산길만 응시한다
박제된 너럭바위 친구 삼아
속세에도 불가에도
아무런
아무런 미련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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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어둑한 강변을
가르는 섬광
고고呱呱의 울음인가
마지막 절규인가
사랑하는 이
먼 데서라도 보라!
준비해 온 생명
단번에 불살라
한 송이 詩로 꽃을 피운다
아
나를 정지시키고 홀로 가는
저
미운
요절夭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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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 수퍼마켓
진열된 것들이 여자의 가슴처럼 도드라졌다.
낮엔 동네 꼬마들이
엄마 젖 대신 한참을 주무르다
한 두 마디 듣고서야 겨우 하나 고르고
땡볕의 나그네, 오아시스 만난 듯 들어와
어정쩡히 시간 끌다 가고
세파 속 휘젓다 돌아 온 기사들
울대에 낀 독을 씻어낸다, 늦도록 저녁 못 때운
그런 저런 아가씨들 그렁저렁 속 때울 때
저 건너 대형마트의 네온이 반짝인다
제일 이문 없다는 담배
그래도 그것 없인 장사가 안 된다며
담배 타는 날, 돈 빌려 담배를 쟁여 두고
삼거리 모퉁이에 24시간을 번갈아
낮엔 직녀가, 밤엔 견우가 턱을 괴니
저 24시 부부
가게 문 닫는 것 못 봤는데
칠월 칠석이 있기나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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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는 그 곳에 내려야 한다
비가 내린다.
사람이 한 방울의 물이 되고
물은 많은 사연의 지난 이야기를
방울방울 머금은 채
어두운 창문을 두드려댄다
황소등 같은 구부정한 소나무에
한 사내의 기억이 흐르고
점이 있어도 이쁜 능소화는
한 남자만을 그리워하던 추억 속에서
눈물 어린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바위에 홀로 내린 풀 한포기
그 곳에도 비는 내려 얼싸 쓰다듬고
나도 저기 내리고 싶다 생각할 즈음
비는 우산을 제치고
내 가슴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보라. 비 개인 하늘을
구름도 저마다 갈 곳이 달라
인연 따라 제 각각 흘러가지 않는가?
그래, 비는
아무데나 내리는 게 아니다
그 비는 그 곳에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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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해설 / 박공수 시인의 얼굴과 시의 세계
현실의 해학적 승화와 비장미의 카타르시스
관상가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성격이나 됨됨이를 파악하고, 수상학자는 미세하게 그려진 손바닥의 금을 보고 그 사람의 일생을 읽어내듯 시인은 언어와 글을 통해 그 작가의 세계를 읽어낸다. 감칠맛 나는 문학적 주제를 담아낸 글을 발견하면 시인도 관상가처럼 작가의 인상을 추론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파악한다. 시인과 독자의 속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렸다 하면 폭우요, 그쳤다 하면 폭염으로 무던히도 길었던 장마 속에서 박공수 시인의 시집 『대륙의 손잡이』를 만났다. 그 순간 여름의 지루함을 잊고 관상가와 수상학자가 되어 돋보기까지 들여대며 시전詩田의 시세계에 빠져들었다.
시인 박공수. 그는 현실의 밭에서 시를 경작하는 농부 같다. 삶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가 하면 소시민의 일상을 보석처럼 엮어내기도 하는 사실주의적 화가다. 그가 화가였다면 분명 밀레의 화풍이었을 것이다. 고흐나 고갱보다는 소시민적인 주제를 미적으로 승화한 인간주의적 화가였을 것이다. 글씨로 바유하면 김정희의 추사체보다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를 닮은 서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누구나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정감으로 써내려간 시들이기에 그의 소탈해 보이는 인상에 잘 어울린다. 그런 요인들이 사람의 얼굴에 오감(五感)을 곤두세우는 관상가처럼 내 시적 안테나를 문학의 기원에 대한 이론으로 기울게 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소박한 작품들이 Y Hirn과 E Grosse가 주창한 발생론적 기원설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적 기원설을 생각게 하는 작품도 많아 박공수 시인의 폭넓은 시작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시를 읽으면서 관상가나 수상학자의 일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가 내놓은 작품들이 개성이 있으면서도 다양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반박하면서 보다 폭넓고 현실적인 감각으로 시론을 전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서와 크기로 문학의 아름다움을 논했다. 플라톤이 정신세계의 이데아론을 제기하며 보이지 않는 진리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자연과 인체의 아름다움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폄하해버린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장미에서 비롯된 카타르시스를 가장 큰 아름다움으로 간주했다. 여기에 숭고미와 우아미, 골계미 등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점은 스승의 학설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청출어람의 실제를 보게 한다.
박공수 시인의 시는 현실에 바탕을 둔 시인으로서 현실적 휴머니니스트, 해학적 리얼리스트라는 전제로 읽어보면 그의 시세계는 더 확연히 들어난다.
* 생활 속에서 詩의 밭을 가꾸는 시인
1. 빼기만 하며 지나간 날들
문학은 일상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살다보면 일기처럼 기록을 위한 글도 필요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록하는 비망록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차원을 벗어나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비유와 상징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쓴 글은 다르다. 그것이 문학이요 시다. 그래서 문학도 현실에 바탕을 둔 글이며 현실의 이야기다. 그것이 발생론적 기원설이다.
그의 시세계 중 1부의 ‘빼기만 하며 살아온 날들’에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가 크다. 덧셈으로 살지 못하고 뺄셈으로 사는 인생을 지칭한 용어다. 남에게 도움보다는 오히려 피해만 주는 자기반성의 상징인 것이다.
- 전 략 -
내어 준 몸
다 나눠주고도 모자라
더하기 밖에 할 수 없는
十字로 서서 보혈
끝없이 더하시니
현란한 네온 속에서도
그 빛 더욱 선명하다
바람은 불어 사랑
땅 끝까지 배달할 제
님의 보혈 끌어올리는
뿌리 깊은 가호 밑으로
더할 것 없는 나
빼기만 하며 지나간다
-십자가1의 2,3연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그러나 십자가는 사형도구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형장의 도구를 종교적 상징물로 내세워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 자체가 역설이지만 여기에서 박공수 시인은 제도적 상징을 벗어나 개인적 상징으로 재구성한다. 즉 밤에 뻘건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는 아직도 보혈을 흘리며 사랑을 베푸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밑을 지나면서 플러스 기호의 십자가 “十”의 의미를 깨닫는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뺏기만 하며 산다는 자기반성이다. 이제 살아야 할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시점에서 인생을 되돌아보는 자기관조의 시라서 사뭇 엄숙한 얼굴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이어지는 주제가 분명하다.
- 전 략 -
내가 그 가족을
철길 담벼락이 한 쪽 벽인
슬레이트집 방 한 칸으로 안내하니
어미는 쫄쫄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틀어보고
기름보일러도 깨워보고 창문도 열어보고
다락문도 채워 본 뒤, 천정의 거미줄에
한 동안 동공을 매단다
마침 지나가는 열차가 구들 밑으로
수만 마리의 두더지를 몰고 갈 때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밖으로 나왔다
딸애는 깨금질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벌써 소꿉을 줍고, 엄마 우리 여기서 살 꺼야?
어미는 대답대신 칭얼대지도 않는
등엣 것을 어르며 마당가만 서성인다.
-방 1의 2,3,연
‘방 1’에서 보는 휴머니즘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코끝을 아리게 하는 인간주의적인 사랑이 직업인으로서의 실상보다는 이중섭의 그림을 보는 애틋함이 묻어있다. 이 시에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시인의 한계가 나타나 있다. 어두운 사회, 암울한 현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등을 시인이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하고 같이 아파하는 것은 시인에게 주어진 의무감이다. 그래서 강한 목소리를 내는 참여시보다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생각하는 시로써 사회 현실을 고발하며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박공수 시인의 시적 특징은 이렇게 현실의 이야기를 시화(詩化)해 내는 데 있다. 뒤이어 나타난 ‘옥렬이’는 현실의 아픔을 더 극화하는 상승효과를 주며 ‘노래방’ 에서는 서민들의 일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요즈음 세상 어느 누가 노래방에서 그런 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문학의 카타르시스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깡통’은 짧은 시이면서도 옹골찬 힘이 있다.
내용 없는
내용.
형식 없는
형식.
나는 거리의 무명 악기.
발로 찬
그런
너는
나의 채.
-깡통 전문
자기 목소리가 강한 시다. 뺄셈으로 사는 인생이기에 거리의 무명악기로 구르는 신세일지라도 발로 걷어차는 사회로서 ‘너’는 오히려 내게 자극을 주어 깨치게 하는 매개이기에 내가 원하는 삶의 일부일 수도 있다고 항변한다. 시인은 그렇게 오기를 부리며 현실을 내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발생론적 기원설을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 작품에 이어 뒷부분에서는 심리학적 기원설을 생각케 하는 작품도 보인다. 그만큼 시적 사색이 깊고 詩作의 모티브가 다양하다. ‘눈’ ‘성에’ ‘전봇대’ ‘파도’ 등에는 애잔한 느낌이 살아있는데 그 중 주목할 작품이 ‘病 어르기’다.
- 전 략 -
너 오는 줄 알았으면
맛있는 걸 내밀었으리
내 앞에 두고도
못 본 게 병이었다
바람 쐬러 나오너라
답답하지 않느냐
나의 애완이 되어다오
더 맛있는 사료를 준비하마
-病 어르기 3,4,5,6연
잘 가게 이 친구 /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조지훈의 병에게 7연
조지훈님이 1968년 작고하기 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작품 ‘병에게’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시다. 나를 귀찮게 하는 병마까지 반겨 맞을 수 있는 여유, 그것은 본인이 오랜 병마에 시달렸거나 가족, 친지 중의 누군가가가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 봐야만 쓸 수 있는 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자주 만났던 병마를 반가운 친구 맞듯 애완물로 대하겠다는 각오는 인생을 달관한 여유에서 오는 자세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어 더 값진 삶을 살게 한다. 어찌 보면 인생의 가장 진실한 스승이 세월인 것이다.
2. 대륙의 손잡이
‘2080법칙’이 있다. 이탈리아 사회학자 파레토(Pareto)가 개미의 생태계를 연구하다가 찾아낸 법칙인데 개미뿐만 아니라 사람살이는 물론 문화의 모든 면에도 골고루 적용된다는 데 흥미를 끈다. 개미의 생태를 보면 열심히 일하는 녀석은 20%밖에 안 되고 나머지 80%는 빈둥분둥 놀고 먹는다는 것이 그 이론의 핵심이다. 그 이론의 심도를 높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20%만 따로 떼어 놓고 실험을 해봤더니 그들도 다시 20%와 80%로 갈라졌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사회의 구조는 그래야 원활하고 살 맛이 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 그 사회는 오히려 멋이 없는 무미건조한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 빈둥거리는 80% 속에 문화계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의 ‘2080’은 부정적 의미라는 데 문제가 있다. 카세트 테이프의 10여곡 중 한 두곡만 마음에 들어도 그 곡 때문에 테이프를 사는 것이 ‘2080’이론의 문화적 적용이다. 이를 시집에 적용하면 100편의 시 중에서 20편이 마음에 들면 만족한 시집이라는 얘기다.
그런 편견으로 박공수 시인의 시집에도 ‘2080’ 이론을 적용해 보았다. 그러나 분명 기우(杞憂)다. 전 편에 흐르는 인간애와 실생활에서 우러나는 시들은 모두 깊은 감동을 수반한 비장미와 해학이 숨어 있어 ‘2080’과는 무관하다. 한 편 한 편에 그의 애정과 땀이 서린 삶의 흔적이다.
韓여사가 TV로
베이징올림픽을 보며
부침개를 부친다
대륙처럼 넓은
프라이팬이 열을 받는다
작은 손잡일 요리조리
여인이 잡고
살푼 들어 뒤집자, 부침개
노릿노릿 익어가는 금메달
손잡이의 조종에 대륙이 들썩인다
손잡이처럼 튀어나온 한반도
그 임자가
잘 요리한 금메달
상 위에 올려지고
여인은 또 손잡이와 일체가 된다
- 대륙의 손잡이 전문
『대륙의 손잡이』는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여 처음에는 의미를 확대 해석했는데 시를 읽고 보면 여기에는 해학이 숨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아름다움으로 크기를 확대한 시의 표현이다. 프라이팬을 잡은 여인에게서 대륙을 들썩이는 금메달을 상상해내는 것은 시적 소재가 사소한 것일지라도 얼마든지 확대해석이 가능하다는 예를 보인다. 과장적 패러디, 만화적 풍자, 해학적 주제의식, 그것이 그가 일구는 시의 세계이자 삶이다.
- 전 략 -
분식점, 세 비싸다고 X
부동산, 아직 시기상조라고 X
미장원, 내부수리비 많이 들겠다며 X
고깃집, 광우병 땜에 한번 생각해 보자며 X
며칠 전 많은 목재가 쌓이더니
빛 한 점 새잖게 통나무처럼 바뀐 전면.
오아시스에 거품 넘치는 잔이
네온으로 도드라지고
블랙홀 같은 까만 간판엔
입술처럼 빨간 상호
酒's
그것은 O ?
그것은 있고 또 있어도 O O O ?
걱정 말라
유별나게 반짝인다
- 酒's 2,3,4연
酒's는 언어의 유희(遊戱)이 숨어있다. 굳이 영어로 쓰면 쥬스(juice)다. 다른 가게들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술집이 들어설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그러나 해학이라 하기엔 마음이 아프다. 사회의 병리현상이 너무 아쉬워 시인은 술집이라기보다는 주스집으로 바꿔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는 그의 작은 소망을 담아냈다. 해학의 골계미와 비장미를 결합한 박공수 시인의 남다른 시적 능력이 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독도’에서 보여 준 한일관계의 너그러운 자세와 경고는 평소 그의 일상 언어에 숨어 있는 유모어를 보는 느낌이다.
그렇게 역설적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시를 전개하면서 유모어를 담은 시로는 ‘장애인’이 대표적이다. 답답할 정도로 정직한 심성이 기어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홍어’ ‘촛불’ '돈‘ 등도 같은 계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3. 가을유서
3부 가을유서는 자연물을 소재로 한 특징이 있다. ‘나팔꽃’ ‘ 달’ ‘가을’ ‘단풍’ ‘은행나무’ ‘은행잎’ ‘낙엽’ ‘날개’ ‘바람’ ‘지구’ ‘입동’ ‘가을유서’ ‘고추를 널며’ 등 가을 분위기가 가득하다. 가을을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제재와 소재에서 가을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시를 쓰는 은유적 기법은 ‘나팔꽃’으로 잘 암시해 놓았다. 이 한 편만으로도 박공수 시인의 내면적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전 략 -
세상에 할 말 있어
나팔 높이 들었으나
메아리 없는 넓은 하늘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를 예쁘다 해도 산내들 편편한
아침 햇살에 견줄 수 없는
삼류도 못되는 초라함입니다
해서 제 고집을 지웁니다
몸을 접고 다시
대낮부터 고민에 빠집니다
- 나팔꽃 3,4,5연
세상에 할 말이 많지만 차마 다 하지 못하고 날개를 접는 겸손함이다. 그것이 박시인의 성품이다. 사소한 일에 큰소리치기보다는 조용히 시로 말하는 자기인식인 것이다. 더 나가서는 그렇게 살아온 날들, 그렇게 행동하며 시를 쓴 행위에 대하여 정당한 것이었는지 고민하는 소시민적 책임의식을 드러낸 시다. 나팔꽃과 박시인의 상관성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일찍 꽃잎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꽃의 성질이 곧 박시인의 성품과 닮은 점에서 기인한다. 시인은 그렇게 본능적으로 자기와 유사한 사물을 소재로 택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 증명하는 작품이 ‘이 가을에’다.
가을은
하늘 머금어
실한 몸으로 낙하하는데
이 몸은
구름 위를
실없이 걷는다
하나님
이 열매 한 알
제가 먹어서 되겠습니까
- 이 가을에 전문
가을과 나를 대비시켜 철저히 자기를 돌아보는 행위를 담았다. 열매 한 알이라도 노력의 대가(代價) 없이 먹어서 되겠느냐는 물음이다. ‘일하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라’는 기독교 정신의 발로다. 가을을 맞아 나름대로의 수확에 감사하면 그만인 것을 먹는 행위가 떳떳한지 자기를 살펴보는 조심성은 앞서 설명한 ‘나팔꽃’과 유사한 흐름의 주제의식이다. 다만 우리는 박공수 시인이 수확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현실에서 ‘시의 밭을 가꾸는 농부’로서 당연히 수확의 대상이 시여야 한다. 박공수 시인에게 가을은 시를 쓰지 못한 자기성찰의 기간이다. 그가 일반인이라면 남의 논밭에 익은 곡식을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농부의 만족보다는 시인의 아픔을 택했다. 시인이 그렇게 배고파하고 갈증을 느끼는 대상은 바로 시(詩)다. 그렇게 맞는 가을은 아무래도 내면적인 자기 성찰을 필요로 했으리라.
박공수 시인의 가을을 이해하기 위해 김현승님의 ‘가을의 기도’와 릴케의 ‘가을날’을 상기해 보자. 같은 가을이라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각연 1,2행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 릴케의 ‘가을날’ 1연 1행
3연으로 된 김현승님의 시 첫 1,2행은 모두 기도문이다. 그것도 아예 “가을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독자를 자극한다. 릴케의 ‘가을날’도 기도와 같은 고백적 문장으로 시작한다. 박공수 시인도 기도하는 자세다. 다만 김현승님과 릴케는 직접 서술하는 기도문인데 비해 그는 간접 서술로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나팔꽃에서 보인 시적 자아의 모습이다. 이어지는 ‘단풍’에는 그 빈곤의 원인을 밝혀 놓았다.
늘그막에 등단하여
초등생 기분으로 따라나선 문학기행.
세상이 온통 단풍 단풍 단풍.
마지막 타는 불이 나를
홍안으로 만들 때
문득
우리 벚꽃놀이 한 번 갑시다
알았어
우리도 단풍구경 한 번 가 봅시다
알았어 알았어 하다
놓쳐버린 세월을 허공에서 찾는다
이젠 가자고 하지도 않는 그녀.
처음 만난 것처럼 볼그레한
시월 단풍 두 장
책갈피 속에 넣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고학년이 된다
- 단풍 전문
국문학과에서 공부했지만 늦게 등단한 것이 박시인을 초조하게 했을까? 그래서 늦은 나이에 인생무상을 느끼며 진즉 시집 한권이라도 발표하지 못한 데서 오는 허전함이 있었을까? 시인이기에 문학기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었지만 단풍잎으로 다가온 추억은 가슴을 아프게 후벼댔다. 예전에 단풍구경이라도 한 번 가자는 아내의 요구를 한 번도 들어주지 못하고 놓쳐버린 세월은 허공에 가물거리기에 허무해진 현실이 시인으로서의 가을을 생각하게 한 것이리라. 결국 시인으로서 박공수는 시적 상관물을 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보고, 가족을 보고, 아내를 보며, 가버린 날의 결실을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생과 같은 기분에 젖은 아름다움이 현실에 의해 무참히 깨져버리는 순간 다시 고학년으로 환원되는 자신을 보며 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박공수 시인에게 이 가을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시집『대륙의 손잡이』를 상재하여 이 가을의 수확에 충분히 동참했기 때문이다.
4. 바람을 배웅하며
시집 『대륙의 손잡이』를 대표할 수 있는 시. 아무리 쓸쓸해도 이 시를 읽고 나면 훈적지근한 여름바람도, 스산한 가을 바람도, 쌩쌩한 겨울 바람도 따뜻이 배웅할 수 있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것은 5부에 이어질 ‘맨 처음의 향기’를 맞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기에 더 깊은 의미로 가슴에 다가온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벽을 허무는 게 아니라
그 벽에 창을 내는 일이려니
우리, 벽을 허물지는 말고
예쁜 창을 내도록 해요
서로의 그리움이 통하다 보면
우리들 사랑도 싹 트겠지요
창으로 해서 벽은 더욱 신비해 지고
벽으로 하여 창은 더욱 빛이 나네
아름다운 창이 있어
당신의 벽도 존중합니다
흔들림 없는 벽이 있기에
당신의 창문을 애타게 바라봅니다
- 창문 전문
파괴는 건설이라 했다. 그랬다. 한때는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 국민소득을 높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낡은 것은 모두 파괴해버렸다. 개인주의의 편리성에 빠진 현대문명을 양산하여 소위 도시화의 물결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사회는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데 그 속에서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잃지 않고 사는 시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읊조린다.
벽과 창을 통해서 공존의 미학을 제시하고 더 예쁜 창을 내기 위해서 벽을 허무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목소리는 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비전(vision)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벽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 창을 없애버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제시하여 사전에 반론을 차단한 시상의 전개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삭막해진 이 사회를 교훈한다. 아름다운 사랑은 벽을 인정하고 그 속에 작은 창을 내어 원만하게 소통하는 일이라고 노래하며 새것만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병폐를 연가풍으로 꼬집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제하고 차분히 바람을 배웅하기 위해서 한 번 더 자기를 돌아보는 행위가 ‘장맛비’다. ‘치맛자락’ ‘그녀의 가슴’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정화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 자신을 몰입시켜버리는 기교, 그것은 고도의 에스프리(esprit)와 내밀한 은유로 전개한 기교다.
누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더럽혔는가
누가 그녀의 가슴을 파헤쳤는가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능욕이 있다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멍울이 있다
순한 大地가 밤새 흐느끼며
성에 차지 않는 샤워를 하는
그런 결벽증
안겨 준 자 누구인가
- 장맛비 전문
이 시를 통해 그는 바람을 배웅하려는 준비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 성찰인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무지개’에는 사단칠정의 입장에서 보면 담배 피우는 시인의 눈빛이 글렀다고 지음(知音)을 찾아가버린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4부는 아무래도 3부와 의도적으로 위치를 바꾼 느낌이다. 가을을 소재로 한 3부를 앞세우고 여름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들을 4부로 배치한 것은 가을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고 그 가을에 상응하는 바람을 배웅하기 위한 자기 내면을 정리하려는 의미로 보인다. 그 의미를 농쳐 살려낸 것이 ‘운무’다. ‘충주인심’에서 느낄 수 있는 훈훈한 인심도 ‘열쇠’에서 보인 사람들의 운명과 ‘우산’에서 보인 따뜻한 인연의 사람살이도 모두가 시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관조의 결과물이다.
진양조보다 느리게, 끝없이 조이고 풀고
벌판을 그렸다가, 숲을 찍었다가
양떼와 목동으로 변신하고
바위와 새떼도 되고, 강아지, 곰돌이도
하늘에서는 모두 신나게 납니다
아무래도 구름은 땅의 안무를 받는 것 같습니다
- 중략 -
그러던 구름, 웬 검은 옷자락
휘몰이장단의 검무를 추느라 하늘 번쩍
지동 치고, 땅이 어떤 안무를 했기에
밤새 이어지다 까만 하천이
집들을 삼켰다는 아침 뉴스로 출근할 때
구름은 어느 하얀 풍경을 만난 듯
살풀이춤으로 먼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 운무雲舞 1,3연
훌러가는 구름을 인생여정이라 하자. 인생살이는 진양조로 느리고 답답할 때도 있지만 휘몰이처럼 몰아붙일 때도 있고 살풀이춤으로 한을 달래야 할 때도 있다. 극적인 반전과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역전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판소리 가락으로 인생을 풀어 시를 쓴 것은 판소리에 조예가 깊은 소리꾼으로서의 능력이다. 그렇게 한바탕 판소리 한마당처럼 살다보면 어느 새 산을 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 행의 ‘살풀이춤으로 먼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는 자기 자신의 한풀이인 것이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라며 떼를 쓰기도 한다. 즉 ‘도배 아줌마’에서 세상에 도배할 것이 참 많다며 세상은 변화시켜야 할 대상임을 지적한다. 그래도 ‘처서’ 에서는 드디어 애증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접고 모든 것을 초월한 여유를 보인다.
사랑했기에
미움이 크다
숨막히는 뜨거움도
막무가내한 포옹도
가끔은 물을 끼얹고
뒤돌아 봐야 한다
- 중 략 -
권력쯤
허리춤에 걸치고
먼 길을
바라보아야 할
때
- 처서處暑 1, 2, 4연
‘사랑했기에 미움이 크다’고 한 것은 독자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이기에 시를 뜻하기도 하고, 살아온 날들일 수도 있고, 어느 연인일 수도 있다. 시는 독자가 느낌대로 읽는 것이 묘미이기에 굳이 의미를 필자가 밝힐 필요는 없지만 어디 그 의미를 밝히기가 그렇게 만만한 것인가. 다만 모든 대상에 애증이 있었음을 인정하자.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배웅해야 할 바람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안고 있는 대상을 ‘가끔은 물을 끼얹고 뒤돌아 보자’는 냉철함과 ‘권력을 허리춤에 걸치고 먼 길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중용적 자세는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목소리다. 그런 경지에서 나온 시는 사단칠정을 능가하고 아름다운 본능을 발현한다.
모기 주둥이가 틀어진다는 처서는 여름인 듯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접점이다. 그런 시기적 특성을 살려 세상의 순리를 보는 혜안이 탁월하다.
5. 맨 처음의 향기
수학을 전공한 이종환님은 ‘소설처럼 긴 글은 감동이 느려 읽지 않는데, 시는 짧은 글 속에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 자주 읽는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수학자가 찾아 읽을 수 있는 시, 짧은 글 속에서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라면 일단 그 시는 문학의 틀을 넘어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박공수 시인의 시가 그렇다.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시, 어렵지 않게 자기의 생활에 접목하여 읽을 수 있는 시, 수학자라도 찾아 읽을 수 있는 시다. 그런데 다른 시집에서 찾을 수 없는 엉뚱한 특징이 있다. 즉 현실적 삶의 그림을 1, 2, 3, 4부까지 다양하게 그려낸 후 5부에서는 전혀 다른 서정적 세계를 그려 낸 점이다.
문학소녀와 같이 사물에서 느끼는 정감과 이미지를 유모어와 위트를 섞어 5부에 집약해 놓았다. 소재를 보면 ‘목련’ ‘개나리’ ‘봄’ ‘꽃’ 등 봄과 관련된 것들을 대상으로, 바람을 배웅한 이후의 잔잔한 세상을 노래한다. 결국 4부에서 배웅한 ‘바람’은 인생에서 고행의 마무리를 상징한다. 1부, 2부, 3부, 4부에서 현실적 시들이 유토피아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면 5부의 세계는 그 결과물로서 아름답게 열린 세상을 의미한다. 봄꽃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시련을 이겨낸 승리와 꿈 즉 4부까지 추구한 유토피아의 현현(顯現)이다. 박시인은 그것들을 위트와 유모어를 섞어 골계미 속에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현실에 충실한 독자일수록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시집의 제목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 단락의 배열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 춘하추동의 순환적 논리에 따르지만 그것을 거슬러 역순환적으로 시세계를 전개한다는 것은 여간한 구성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디자이너의 탁월한 구상이며 시적 이미지를 동양화나 서양화 또는 유화나 수묵화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의 소산이다.
‘심인尋人’에서 보인 표현의 기교는 ‘바람 때가 무지하게 낀 / 종소리를 들었습니다’에서 절정을 이룬다. 공감각적으로 처리한 종소리의 시각화, 그것은 추억으로 빠져들게 하고 ‘아직도 아련한 / 맨 처음의 / 향기’를 회상하게 한다. 5부의 도입이다.
사람 찾아 나서는 길에서 목련도 만나고 개나리도 만난다. 그것들은 모두가 찾는 시적 대상의 상관물이다.
가냘픈 몸매로
저토록 많은 골든 벨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을 보면
겨우내 꽁꽁 언
하많은 문제를 풀어내고
얻어낸 상(賞)이리.
- 중 략 -
'희망 어린이 집'이란
샛노란 차에서 내린
우리의 또롱또롱한 희망들도
여간 어려워 보이잖는 신호대를
무사히들 연거퍼 통과한다.
이제 보니 그들 머리 위에도
골든 벨 하나씩 씌워져 있다
길가의 개나리가
저와 비슷하다고
제일 먼저 손을 흔든다
- 개나리 전문
개나리를 보고 ‘하많은 문제를 풀어내고 얻어낸 상(賞)’이라 했다. 그리고 희망을 안고 가는 꼬마를 보고 개나리들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노래하면서 개나리와 꼬마를 동일시한다. 즉 4부에서 바람을 배웅한 결과물로서 골든 벨과 희망이 이루어진 유토피아인 것이다. 시집 『대륙의 손잡이』가 1,2,3,4부를 통해 찾고자 하는 세계가 바로 5부인 것이다.
가시내
연둣빛
비릿하더니
어느새 초경이 비치네
필경
험산의 귀두가
가실까지 아리 하겠다
- 봄2 전문
고도의 은유에 의한 해학이다. 초봄은 연둣빛으로 비릿하다. 그러나 핏빛 진달래 가 피어나면 봄의 산천도 초경하는 가시네의 얼굴처럼 붉게 성숙해져 우뚝 솟은 봉우리들의 아랫도리가 근질거리겠다는 추상적 이미지가 봄의 특징을 수채화와 유화로 그려냈다. 아무래도 연둣빛 산과 초경이 비친 진달래 핀 모습은 수채화다. 거기에 험산 봉우리는 유화다. 작은 한 폭의 그림에 수채화와 유화를 혼합하여 그릴 수 있는 화가의 경지다.
* 시적 모티브로 나타난 현실의 꿈
이 시집의 총체적 모티브로서 독자에게 나타내 보이는 얼굴은 ‘마누라’다. 희한한 세상살이의 희한한 삶일지라도 꿈을 간직하고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내가 왜 시를 쓰는가의 자문자답이며 도자의 궁금증을 대신한다.
옜다 하고
돈 줘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글쎄
오늘도 어김없이
변변한 저녁상이 나온다
희한하다
-마누라 전문
열심히 살아도 마누라에게 변변히 생활비를 건넬 수 없는 현실이 희한하고 그래도 밥 얻어먹고 사는 현실이 희한하다. 얼른 보기엔 해학이요 골계미라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비장함이 이 시집의 주조다. 그래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는 시인으로서의 의욕을 보이는 것이 ‘한직골 가는 길’이다.
뭔가 결정 났어야할 나이에
인생을 갈아타듯 환승을 하고
나는 우보로 한직골을 가네
절벽 틈새에 잡힌 나무처럼
헛발 디뎌선 안 되는 몸이지만
한직골 시방은 가야만 하네
사람 아래나 사람 위에
사람 없단 말 헛말이듯
한직골 가는 길 천지사방
길 위에도 길, 길 밑에도 길
흙탕길 자갈길 꽃길도
공중에도 이리저리 길은 있고
벌레들 기어드는 땅속길도 있네
누군가는 가기 싫어 안 가는 길
누군가는 가고파도 못 가는 길을
나는 가네 고향에 가듯.
내게는 한직골 가는 길보다
더 높은 길은 없네
더 낮은 길도 없어야 하네
* 한직골-경기도 의왕시 청계 저수지 입구에 도깨비 도로, 이희승 생가, 정인섭 동요비 등이 있는 마을로 내 소속 문학회 모임을 갖는 고두방 식당도 있음.
- 한직골 가는 길 전문
한직골 가는 길은 아직도 고행이다. 그러나 즐거운 고행이다. 좋아서 선택한 길이며 꼭 가야만 하는 길이다. 누구는 싫어서 안 가고 누구는 가고파도 못 가는 길. 그 길이 가장 귀한 길임을 갈파하고 고향 가듯 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도 무언가 결판이 났어야 할 나이에 들어섰다는 고백을 전제하며.
그 결판을 이제 단행했다. 시집 『대륙의 손잡이』를 상재(上梓)한 것이다. 이 시집은 박공수 시인의 여정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맨 처음의 향기’이자 영원한 금자탑이기에 첫시집의 상재를 축하한다. 바라기는 꾸준한 자기연찬으로 『대륙의 손잡이』를 능가하는 제2, 제3의 결판을 단행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2009년 8월 하순
우면산 천수재에서 샘물 강 기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