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서핑하다가 발견하고선, 너무나도 놀랬는데......
오늘은 글을 조금 남기고 갈게. 이승학, 조문형과 통화했더니, 조금은 기억하고 있어서.... 용기를 내었네.
내 이름은 김인주, 1962년 3월 1일에 이 반에 편입하였고, -
아마도 그 날이 새 학기 시작하는 날이었는데, 이전에는 4월 1일이 학년 시작하다가, 혁명 이후 학사일정이 조정되면서......
두 반이 하나로 합쳤던 것으로 기억, 나는 편입 - 정확하게는 신입생 -
누나 김삼순이 이미 재학하고 있었고, 이미 독학으로 1,2학년은 혼자서 이수한 셈으로 치고, 다니기 시작,
태어나긴 고산, 그렇지만 물애기때, 귀덕2리 교회로 이사하여, 나신비가 내 고향인 셈.
1964년 3월 30일까지 같이 공부했으니,
그 전날엔가 전교 대의원회(?)가 모였는데, 김병익이 전교회장으로 뽑혀서, 서로 난감해 하던 게 마지막 기억.
5학년을 회장으로 만들어서, 학교를 망하게 할 거냐고, 역정을 내시던 선생님도 계셨는데,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세어보면, 기껏 2년 1개월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 공부한 어느 학교, 어느 급우들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네.
남원읍 신례국교에서 2년 수업하고 졸업, 효돈중학교 졸업
서울에 가서 일년 준비하고 서울고등학교 (25회),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당시, 식물학과) 졸업
육군본부에서 연구관으로 중위 만기 전역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사 수업을 마치고 목사 임직(예장 통합)
서교동교회, 광장교회 부목사 사역
1990년에 독일로 가서 본 대학교, 에얼랑엔 대학교에서 종교개혁사 공부하다가 지쳐서 2002년 말에 귀국
2007년 4월 이후 봉성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음. 어도 혹은 도노미로 불리는 봉성은 국민학교 시절에도 자주 갔던 오름 아래
남쪽 기슭에 있는 마을, 제주대학교의 현평효 총장의 출신 마을이어서,
그 아들 현천욱 변호사의 고향이 되는 셈. 3살까지 살았다고 들었네. 그 이후에는 용담동, 제대 옛날 캠퍼스 근처였겠지.
50년전 떠난 이후, 김병익, 이충헌은 몇 번 보았는데, 그 외에는 기억에 없네. 둘 다 별세했으니....
김병익은 현천욱을 시쳇말로는 "넘사벽"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일고 동문들이 많이 김병익을 대단한 수재로 기억하더구만.
근래에 새로 연결되는 고교동문들 중에 의사들은 꽤 좋은 평가를 하고 있네. 아까운 사람이라고.
이충헌도 여러 차례 우연히 스치듯이 만났는데,
그리고 또 한 사람, 홍성은이라고 60년 봄학기에 한 학기 공부하고 목포로 떠난 친구인데,
당시 부반장이었다고 하던데 - 물론 반장은 김병익이었겠지, 추측이지만 - 결국엔 나랑 고등학교 동기가 되었어.
우리들 중에는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네.
더 궁금한 사람은 다음카페 "봉성교회"를 방문하여 살펴보게. 내 앨범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으니.
나도 카페 꾸미는 기술을 이제야 익히기 시작해서 아직 서투르지만....